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Ⅰ. 들어가는 말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성육할 필요가 있었는가? 1097년,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그가 쓴 신학 책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⓵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⓶ 용서는 변상을 요구한다. 변상 없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죄가 하나님께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불순종한 값은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
⓷ 그러나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진 빚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 는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한 빚을 갚을 수 있다.
⓸ 그래서 예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그는 무한한 존재이며, 그의 죽 음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 제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있다.
이 년 전쯤, 마커스 J.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이 지은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이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안셀무스의 논리는 나무랄 데 없으나, 이런 십자가 이해가,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으로 만들 때 뜻했던 것이 아니다. 대속 제물은 바울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보는 것은 틀린 역사이며, 해로운 인간론이며, 불량한 신학이다. 그것이 틀린 이유는 그것이 바울 당시에는 없었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거꾸로 바울에게 투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읽으며 많이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이번 과제를 통해 안셀무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Ⅱ. 안셀무스
1. 이성과 신앙에 관한 일반적인 고찰
만약 확실성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그곳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중세기에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존재했다. 바로 신앙이 그러했다. 중세기의 사람들은 '신앙'이 바로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신앙이 곧 확실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에 모든 것을 바쳤고 또한 신앙에만 의존하고 살았다. 그러나 신앙의 절대성도 세월이 흐르면서 도전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서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신앙의 절대성 혹은 확실성에 대한 재신임이 필요로 하였다. 신앙에 대한 재신임을 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 바로 '이성'이었다.
안셀무스의 '이성과 신앙'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간략하게나마 철학(이성)과 신학(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일반적인 조명을 해보고자 한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문제는 중세기 전반에 걸쳐서 논의되어진 중세철학 최고의 논쟁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이성'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능력이며 학문이나 문화 전반을 성립하고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인간이외의 다른 것들은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서, 오직 인간만이 지니는 특수한 능력이다. 따라서 이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대부분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거론되어진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신앙'은 자연적 이성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들과 관련된 진리(계시)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과 더불어서 인간에게 허락되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이성은 철학으로 그리고 신앙은 신학으로 대변되어진다. 신학은 신앙의 내용인 계시 진리를 비판적으로 해명하면서 인간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하여 답을 제시 하고자 한다. 철학도 인간 이성에 의하여 실재와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나 이유 등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공통의 과제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또한 이성에 의해서 그 문제를 해명 하고자 하며, 신앙은 인간 이성이 신앙의 고유한 지식인 신비(계시)를, 즉 철학적인 탐구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비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인간 이성의 절대적인 능력을 신봉하면서 자신(인간)들 스스로와 변화하지 않는 세계의 궁극적 근거의 의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말하자면 이성이 신학적인, 즉 신앙적인 것에 대해서 해명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의 크리스도교 철학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말하자면 신앙적인 것들이 이성에 의해서 해명되어질 수 있다는 확신이다. 물론 중세의 대다수의 사상가들은 특히 안셀무스와 더불어서 스콜라 철학자들은 유한한 인간 이성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왔었고, 그 해결책으로 신앙과 철학 사이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신앙은 그 대상이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해될 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그 탐구의 정점에서 신앙이 제시하는 내용이 없이는 자신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콜라철학의 완성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이 각각 고유한 방법과 원리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한 서로가 자율성에 의한 조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이 신학에 세 가지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➀ 철학은 신앙이 전제하고 있거나 기초로 삼고 있는 진리들을 증명하는데 유익하며,
➁ 자연적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취한 비유와 실례들로써 신앙이 전제하고 있거나 기초로 삼고 있는 진리들을 조명하는데 유익하며,
➂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을 거스르는 공격들이 부당하거나 거짓임을 밝혀내는데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성은 더 이상 신앙에 종속되는 역할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고 아울러 최고의 능력으로 평가되었다. 근대로 넘어와서는 이성과 신앙은 완전히 결별을 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이성과 신앙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간주해 버리며, 그리고 대다수의 합리주의자들은 신앙적인 것의 부적절함과 이성의 자족성을 주장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경험 가능한 세상으로 한정하고 형이상학과 신앙의 영역은 인간이성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에 와서는 실용적인 면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고, 따라서 신앙적인 면은 비현실적이라는 미명하에 철학 전반에서 거의 거론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2. 중세초기의 이성과 신앙의 문제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안셀무스가 활동했던 시기인 11세기경에 비추어서 생각하자면,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신(神)증명(혹은 神논증)'이란 새로운 방법론과 더불어서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선 사람들의 생각 속에 신앙적인 것에 대한 권위나 확신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신앙적인 것에 대한 의심, 말하자면 신증명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소위 독실한 신앙인들 스스로에게는 그러한 신앙적인 요소에 대한 이성적인 해명이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것에 대한 해명은 단지 신앙적인 삶의 세계, 즉 신앙적인 삶을 영위하고자하는 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질문은 정신적 이성적인 세계에서도 말하자면 비신앙인의 세계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기의 이성(ratio)은 '神에 대한 논증이나 증명'이 행해지기 전에는 항상 신앙의 뒷전에서 신앙을 보조하는 부차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물론 이것이 '신에 대한 논증이나 증명'이 행해진 이후부터는 이성이 신앙보다 더 우위를 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1세기 이전의 중세 정신적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성서나 교회의 독단에 근거하는 신앙의 권위였다. 말하자면 이성의 주체성이 사실상 전혀 인정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신앙의 부차적인 요소로서, 신앙적인 것을 보조하는, 일종의 수단 또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11세기경까지의 일반적인 정신사적인 흐름이 서서히 반전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말하자면 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있었다. 즉 교회의 권위나 독단에 의거하지 않고, 오직 이성만에 (sola ratione) 의해서 신앙에 대해서 사유하고, 아울러 그 신앙적인 것을 확고히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교회의 권위와 신앙적인 것이 학문의 대상, 즉 인간 이성에 의해서 파악 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되는 대단히 중요한 점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분명히 인간이성이 신을 사유하고 서술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인간이성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11세기에 와서 성 켄터버리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특히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인간이성에 의해서 학문의 최고대상인 신의 인식 최고의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접근코자하는 새로운 학문적인 방법론인 '신증명' 내지는 '신논증'이다. 이러한 신증명이라는 것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성이 당시의 철학과 신학에서 최고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을 뜻하며, 아울러 인간은 신증명을 통해서 창조주인 신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으로부터 해방이며, 이성의 재발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해방은 철학과 신학을 학문으로서 보다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극단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신을 증명(논증)하는데 에 있어서는 '오직 인간의 건강한 이성 외에는 아무 것도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성 안셀무스의 신논증방법의 출발점이다. 안셀무스는 오직 이성만을 (sola ratione) 최고의 진리인 神인식의 출발점으로 상정하고서, 만일 인간이 단지 평균의 (보통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최소한 그의 이성에 의해서 그리고 이성의 인도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
안셀무스의 '신증명(신논증)'은 11세기 이래로 대단히 활발하게 논의된다. 즉 신앙적인 요소들을 신앙 자체에 의존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이성적으로, 즉 이성에 의해서 이해하려고 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켄터버리의 대주교로서 안셀무스는 신앙적인 대상의 정점인 신(神)존재를 이성적 논리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증명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스콜라철학에서의 주된 관심인 합리성에 대한 추구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신학은 단지 신적 초월적인 계시에만 근거하지 않고, 초월적인 신앙적인 것에 대해서 이성적인 근거와 추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앙에 의해서 확고히 정립되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순수하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방법론적으로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것이 결국 안셀무스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구호인 '믿기 위해서 안다(intelligo ut credam)'를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명제를 주장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이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명제의 목적은 앎(이성)이며, 아울러 신에 대한 인식이다. 말하자면 믿음(신앙)과 이성이 서로 전제되지 않고서는 서로의 인식과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듯이, 신앙은 그 대상이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해될 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그 탐구의 정점에서 신앙이 제시하는 내용이 없이는 자신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당시 사회에 있어서의 '신증명(신논증)'의 필연성에 의해서 이성이 재발견되었으나, 이성이 결코 신증명을 위한 부차적인 기능만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의미, 즉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신이 증명 또는 논증될 수 있다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이성이 지금까지의 신앙의 부차적인 기능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위치, 즉 이성의 주체성의 회복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당시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한다.
3. 성 안셀무스에 있어서의 이성과 신앙(ratio fidei)의 문제
안셀무스의 '포괄적-신학적인 프로그램'의 목적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통찰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점은 안셀무스가 비록 호교론적인 관점과 의도를 은연중에 지니고 있음이 사실이지만은, 그의 주된 목적은 분명히 호교론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셀무스는 그의 대작(大作)인 {모노로기온}에서 "증명방식에는 전혀 신앙적인 서적의 권위에 의존함이 없이, 개별적인 연구에 의해서 결론을 이끌려고 하며, 분명한 서술양식과 공통적으로 이해 가능한 논증들과 명확한 설명과 이성적인 사유의 필연성을 짧고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서 진리의 명백성을 드러낸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그가 모든 것을 신앙 스스로에 의해서 또는 신앙 스스로에 의거해서 해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통찰에 근거해서 신앙의 진리들과 그 밖의 것들을 해명하고자 했다는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앙의 권위의 가치는 우선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는 전제되어져 있으며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받아들여진 신앙을 가능한 최대한도로, 이성의 도움과 더불어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증명하려고 했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무신론자란 진실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이다. 그리고 무신론자도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분명히 그가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한 것을 그의 생각 속에 잘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단지, 분명히 그가 이해한 것을, 이성적인 정신에 의해서는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판단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는 덜 이성적이라는 것이며, 이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의 무신론자는 분명 '우둔한 자(stultus)'라는 개념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라틴어의 'stultus'란 '잘못 행하다, 우매하다'라는 기본 뜻을 가진 'stolere'라는 동사원형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stultus'는 올바른 질서나 타당성과는 반대의 뜻으로서, 잘못된 방식과 양식으로 행하는 자로 표현되어진다. 이러한 것은 결국 그가 비록 논리적인 확신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는 인정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의 인식에서 올바른 판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가 올바른 질서와 타당성에 의한 존재론적인 전제 아래에 있지가 않기 때문에 인정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틴어의 'insipiens(이교도, 무신론자)'는 'nabal'이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이다. 이 말의 의미 또한 올바른 질서나 타당한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이 내린 질서나 타당한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서에서도 이 말은 항상 비신앙적이고 나쁜 행위와의 연관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 'nabal'이라는 말이 도덕적인 가치판단에서의 불신앙이나 나쁜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이성적이고 무의미하고 바보스러운 태도로 인해서 신이 내린 질서로부터 비이성적이고 무의미하며 또한 우둔함에 의해서 우매함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올바름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성에 위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도, 이러한 올바름에 벗어나 있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그의 우매함 내지는 우둔함이다. 안셀무스는 '우둔한 자'를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머무르고 있는 절대적인 지식을 올바로 인식 내지는 깨닫지 못한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무지함은 이성의 결핍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올바른 인식에 대한 열정 내지는 준비성의 결여, 이성의 불충분한 사유에 의해서 생긴다.
안셀무스는 무신론자들이 진리나 신에 대한 인식에로 나아가는 과정을 '신앙적 이성 내지는 이성을 구하는 신앙'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중심문제는 무신론자 내지는 인간 모두에게 있어서 자기인식이다. 말하자면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진리나 신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가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들은 그의 우둔함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우둔함은 불충분한 이성적 사유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우둔한 자는 자신 스스로 이미 지니고 있는 사물이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모순은 다른 어떤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고 자체에서 기인한다. 안셀무스는 그의 '신앙적 이성 내지는 이성을 구하는 신앙'이라는 프로그램 전체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우둔함'을 일깨우고자 하며, 아울러 그러한 우둔함을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교도에 대한 방어'라는 표현은 인간의 건강한 이성적 정신에 의해서 형성되는 그의 철학적 신학적인 (진리)이론의 기반을 이룬다. 안셀무스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지 않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들을 이성을 통해서 서로 조화시키고자 한다. 말하자면 신앙이 제시하고 있는 바를 이성이 독립적이며 자발적으로, 즉 신앙적인 권위의 도움 없이도 정립하고자하며 아울러 이성에 의해서 신앙을 정립시킴으로서 이성과 신앙의 일치를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결코 신앙과 이성 사이에 실제적인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이성이 신앙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신앙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끝이자 완성이라 보았다. 왜냐하면 신앙이 인간이성의 사유대상인 한에는, 결코 신앙은 이성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 자신 안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신앙적인 내용들은 일반적으로 인간 이성에 의해서 아직 해명되지 않은 문제들이다. 하지만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이러한 것들이 결코 인간이성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앙적인 내용들은 이성에 의해서 실행되고 완전히 파악 가능한 인식대상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의식에 있으나, 단지 인간정신 스스로에 의해서 아직 인식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인간정신 자체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러운 질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에 있어서 이러한 신앙적인 내용에 대한 탐구는 인간이성의 자기 스스로의 의식에 대한 이해인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을 해명한다는 것은 인간정신이 자기인식에로의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인간은 항상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며, 아울러 신앙진리에 대한 무지는 인간의 불충분한 이성적 사유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올바른 이성에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건강하고 올바른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무신자들은 잘못되고 건강하지 못한 이성을 추구하며, 동시에 인간정신의 우매하고 바보스러움으로 대변되는 잘못되고 건강하지 못한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과 이성의 차이는 단지 인간정신의 불충분한 사유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이 참되고 올바른 이성을 추구하는 한은, 그는 신앙적인 내용들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반성하는 신앙인이며, 아울러 그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그 자신의 근원인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무의식의 어두움에 머물고 있으며, 그가 자기인식으로서의 신앙이나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은, 그 스스로 올바른 이성을 스스로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방법론적인 견해의 극단성은 플라톤적인 주관주의 상기론적인 의미에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안셀무스는 정신적 인식의 양자의 근본경향을 또한 잘 드러내고 있는데,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인식과 어떤 다른 것에 의한 인식인데, 이것은 플라톤의 대화편인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의 대화에서 특히 잘 나타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의 존재의 인식에 도달함이 없이는 다른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대상들의 인식에 의해서 자기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인식과 인식대상간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정신의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인식대상들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대상들은 단지 인간정신의 형식 안에서만 인식이 가능하며, 이것은 결국 모든 인식은 인간정신의 고유한 인식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인식은 안셀무스에 있어서는 신앙과 이성의 통일 내지는 일치를 이루는 단초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간정신이 신앙에 대해서 사유하는 한은, 결코 인간정신의 외부에 있는 인식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정신은 신앙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사유하고 또한 명상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은 결국 안셀무스가 신앙과 이성이라는 개념들이 갖는 모순적인 성격을 극단적인 이성주의적 합리주의적 사고에 의거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며, 아울러 안셀무스가 그의 프로그램인 '신앙적인 이성 또는 이성을 구하는 신앙'에서 해결코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해결책은 분명히 이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그가 결코 신앙적인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이성을 신앙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셀무스는 신앙이나 이성은 결국 인간의 사유의 영역에서 머물고 있고, 인간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인간정신의 영역에서는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으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진리로서의 신앙을 올바른 이성의 행위, 즉 자기인식의 도달에 의해서 파악하고자 하며 또한 파악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의 사상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하겠다.
Ⅲ. 아벨라르
1. 보편논쟁의 기원과 발생
보편과 개체의 우선성에 대한 문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상반된 견해 안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3세기경 포르피리오스가 <범주론 입문>(Isagoge)에서 “유(類)와 종(種)은 실재하는가?”와 같은 일련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철학적 중요성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로마 최후의 철인 보에티우스가 주목할 만한 답변들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이후 철학이 쇠퇴하면서 해결되지 못한 채 중세에 전해졌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12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이다. 소위 ‘보편논쟁’을 직접적으로 촉발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변화된 상황이었다. 초기의 주요 교회들이 서구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유일하게 로마교회가 전체 교회의 머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시대적 맥락에서 “로마로 상징되는 보편교회와 구체적인 개별교회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교회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밖에도 삼위일체론, 원죄론, 구원론 등의 다양한 주제가 보편논쟁을 더욱 중요한 쟁점으로 만들었다.
초기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 대부분의 학자가 보편이 개체에 앞서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플라톤적 ‘보편실재론’을 옹호했다. 이에 따르면 ‘동물’ 같은 유(類) 개념이나 ‘인간’ 같은 종(種) 개념은 정신 밖에 자립하는 하나의 실재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에 맞서 논리학자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1120?) 등은 오히려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보편이란 단지 “음성의 떨림” 또는 인간 이성이 만들어낸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견해는 ‘유명론’(唯名論)이라고 불렸다. 두 진영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을 해결한 이가 아벨라르(Abaelardus, 1079~1142)였다.
2. 아벨라르 생애
기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벨라르는 15살 무렵부터 로스켈리누스 등 유명한 논리학 교사를 찾아다니며 유명론을 포함한 논리학을 탐구했다. 자신감에 찬 그는 지방에서 개인학교를 열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마침내 아벨라르는 파리에도 진출하여 개인학교를 열었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자,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학교의 ‘샹포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 ?~1122) 밑에 학생 신분으로 등록했다. 아벨라르는 기욤이 제시한 보편실재론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한 뒤 공적인 논쟁을 벌여 스승에게 승리했다. 이 승리에 만족하지 못한 아벨라르는 당시에 유명한 교사들과 계속 논쟁을 벌였다. 그는 이와 동시에 논리학 주해 집필과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다른 교사들이 아벨라르가 제시한 이론을 공격하면, 아벨라르는 새롭게 발전된 이론으로 응수했다. 결국 아벨라르는 모든 논쟁에서 승리했으며, 젊은 나이에 ‘최고의 논리학자’라는 명성과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아벨라르는 보편논쟁의 상반된 입장에 대한 해결책으로 ‘온건실재론’을 제시했다. 아벨라르에 따르면 보편적인 용어는 의미를 가진 말이고 일차적으로 개념을 표시한다. 이 보편 개념은 현실적인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수많은 개체 속에 있다. 이 본질을 우리 지성이 파악함으로써 보편 개념이 생긴다. 아벨라르는 보편 개념은 오직 정신 속에 존재하지만 개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을 지시한다고 주장해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을 아우르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는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유사했다. 당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명제론>만 서방세계에 알려져 있었는데, 아벨라르는 오로지 논리적 사유를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로써 보편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가 제시한 ‘온건실재론’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고, 14세기 윌리엄 오컴이 변형된 유명론을 내놓을 때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논리학 분야를 평정한 아벨라르는 당시에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인정받던 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랑의 안셀무스에게서 신학을 배웠지만 스승의 교육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 스승은 개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교부들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벨라르는 논리학 지식을 신학에 응용함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신학 분야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스승으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주저인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에서 신학적인 쟁점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성경과 교부들의 다양한 견해 중 상반된 주장들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대비된 권위들 중 어떤 것이 더욱 타당한 근거를 지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해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런 뛰어난 업적에도 아벨라르는 오랫동안 중세철학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이유가 그의 자서전 <내 불행의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벨라르는 신학 공부를 마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신학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금세 학생들이 몰려들어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때 그는 노트르담대성당 참사위원 풀베르투스(Fulbertus)의 청에 따라 그의 조카딸 엘로이즈(Heloise)의 개인교사 역할도 맡았다. 그런데 그는 스무 살가량 어린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임신시키고 말았다. 결국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자신의 고향 브르타뉴로 데려가 아들을 낳게 한 뒤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의 배신에 진노한 풀베르투스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를 거세해버렸다. 그때부터 아벨라르의 개인적인 명성은 철학이나 신학 작품보다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에 더 집중되었다.
아벨라르는 12세기 최고의 교사로 많은 학생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지도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를 비롯한 많은 적대자가 있었다. 그들은 아벨라르가 논리학에서 배운 방법론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비롯한 모든 신앙의 감독관 노릇을 한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비판자들은 그의 방법론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그렇다와 아니다>에서 사용한 방법은 중세 대학 설립 이후에도 정규 토론과 자유 토론 등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 집필에 사용한 학문 탐구 방법도 이것이다.
3. 아벨라르두스의 보편자 의미
아벨라르에게서 보편자란 무엇보다도 의미를 지닌 말 혹은 의미 (signification)다. 아벨라르는 보편자가 이름(nom)에 상응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보편자가 사물(choses)의 측면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signes)의 측면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보편자는 오직 ‘의미된 사물에 대하여 기호가 갖는 관계 속에’(dans le rapport du signe à chose signifiée)서만 실재하는 사물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보편자가 사물 안에(in re) 있는 것이 아니라 말 안에(in voce) 있다고 보았다.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말(vox)의 근본적인 특성은 ‘의미하기’ (significare) 내지는 ‘보여주기’(monstrare)인 반면에, 말과 관련된 개체적 사물의 특징은 ‘의미되기’(significari)이다. 달리 말해서, 말은 의미하는 것(signifier)이고 개체적 사물은 말을 통해서 의미되는 것(être signifié)인 셈이다. 달리 말해, 보편자가 ‘의미’(signification) 라면, 개별자는 ‘의미된 것’(le signifié)인 셈이다. 후에 아벨라르는 vox의 의미를 물리적인 특성 속에만 한정시키고, 그 대신에 말의 의미적인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sermo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말의 의미하기와 개체적 사물의 의미되기라는 구별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의미작용은 주체의 특정한 인식 행위와 관계되는데, 바로 이러한 인식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지성은 사물들을 이해한다. 의미하는 것(signifier)은 무엇보다도 문제되고 있는 개체적 사물을 보여주는 것 혹은 제시하는 것(montrer)이다. 따라서 말을 통한 의미작용은 언제나 그것이 보여주 고자 하는 사물, 즉 의미되는 것과 관계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통해서 사물을 제시하는 것은 주체의 특정한 행위를, 즉 주체의 인식 행위와 관계하게 된다. 왜냐하면 말을 통해서 사물을 제시하는 가운데 주체는 사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말이 지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의미되는 ‘사물’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되는 ‘사고’인 것이다. 여기서 후자, 즉 이해되는 ‘사고’는 바로 이념적인 항을 뜻한다. 이처럼, 말을 통해서 주체는 의미되는 사물과 관계하며, 특정한 인식 행위를 통해서 이 사물을 이해하는데,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금 이해되는 것 혹은 이념적인 것(이념적인 항)이라는 짝을 갖게 된다. 인식 행위에 의해 이해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념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우리가 묻고자 하는 신의 의미는 바로 이 이념적인 것에 상응한다.
빈 지성이 아니라 ‘건강한 지성’(intellectus sanus), 즉 건강한 인식 행위(un acte de connaissance)를 야기한다. 이러한 건강한 인식 행위 속에서 인식하는 주체는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무작정 아무 것이나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건강한 지성은 특정한 규범을,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보편적인 이름을 사물에 부과할 수 있는 ‘공통 원인’을 따라야만 하는데, 이러한 공통 원인은 실재적 사물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돌이다’(homo est lapis)라는 문장은 문법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옳은 문장이다. 반면에 ‘인간 을 돌 을 이다’(homo est lapidem)라는 문장은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돌이다’라는 문법적으로 옳은 문장은 논리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틀린 문장이다. 왜냐하면 술어로 사용된 ‘돌’이라 는 단어가 문장의 주어인 ‘인간’의 본성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저 문장은 ‘돌’이라는 낱말의 의미와 주어인 ‘인간’이라는 낱말이 갖는 의미 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 문장에서 술어가 올바르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사용된 술어가 문장의 주어에게 올바르게 연결되어야만 한다. 즉 올바른 술어의 사용은 아벨라르가 ‘상태’ 혹은 ‘유사성’이라고 칭한 특정한 규범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아벨라르에 의하면, 문법학자는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를 구분하는 반면에, 논리학자는 보편자와 개별자를 구분한다. 일반 명사나 보편자는 복수의 주어들을 위한 술어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고유 명사나 개별자는 단수의 주어를 위한 술어로만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을 ‘저 사람은 아벨라르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더 깊게 생각해보자. 이 문장은 논리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 문장이 관계하는 실제적 인물이 누구인지 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 문장은 이 개별적 인물(아벨라르)을 그 인물의 단수적인 특성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장에서 사용된 ‘아벨라르’라는 술어는 복수적인 술어가 아니라 단수적인 술어, 즉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 사람은 아벨라르이다’라는 문장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정보, 즉 ‘저 사람’이라는 단수 주어가 단수 술어인 ‘아벨라르’로 제시되는 방식(단수적 특성)과 이 문장과 관계하는 실제적 인물인 아벨라르에 관련된 사실, 즉 그가 단수적인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아벨라르는 개체적이며 단일한데, 저 문장 속에서도 아벨라르는 개체적이며 단일한 것으로 서술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아벨라르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은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아벨라르는 개체적이며 단일한 반면에, ‘인간’이라는 술어는 하나의 보편자, 즉 일반 명사이기 때문이다. 보편자로서의 인간은 개별자로서의 아벨라르를 보여주거나 제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보편적 술어도 하나의 특정한 개별자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어떠한 보편자도 하나의 특정한 개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이라는 술어를 개별자인 아벨라르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개별자들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도 역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보편적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이 단어는 정확하게 누군가를 의미하거나 지시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 ‘인간’은 아벨라르만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만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기에, 즉 어떠한 특수한 개별자도 정확하게 지시하지 않기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모든 인간 개별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 ‘인간’이 라는 단어만 갖고서는 도대체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혹시 보편자는 건강한 지성을 야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빈 지성만을, 즉 실재적 사물에 근거하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은 빈 사고만을 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보편자가 만들어내는 지성(intellectus)은 그 안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견해’(opinione cassa) 혹은 빈 지성이 아닐까? 아벨라르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보편자는 빈 지성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의미한다’(vera significant). 물론 이러한 지성이 사물들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지성은 ‘참되게 존재하는 사물들’(res vere existentes)과 관계하는 참된 지성이다. 요컨대,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보편자는 개별자들을 위한, 엘로이즈를 위한, 아벨라르를 위한 참된 이름인 것이다. ‘인간’은 감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개별자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엘로이즈나 아벨라르를 참되게 의미할 수 있는 참된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편자가 참되게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아벨라르에 의하면, 비록 개별자들이 서로 간에 공통적인 어떠한 보편자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편적인 이름이나 개념을 위한 근거로 기능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사성’ 혹은 ‘상태’이다. 즉 보편자의 근거는 바로 개별자들이 서로 간에 닮았고, 그렇기에 그것들은 동일한 상태 속에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공통된 보편자, 즉 인간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로 간에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동일한 상태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편자인 일반 명사를 다양한 개별자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공통 원인이 바로 이러한 유사성 혹은 상태인 것이다. 결국, 보편자가 빈 지성이 아닐 수 있는 것은, 무의미가 아닐 수 있는 것은, 개별자들을 참되게 의미하는 참된 이름, 개별자들을 위한 참된 이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유사성 혹은 상태 덕분인 것이다.
아벨라르가 지적하고 있는 이러한 유사성 혹은 상태를 로비기 (Sofia Vanni Rovighi)는 개별적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la manière d’être)과는 구분되는 개별적 사물들이 ‘알려지는 방식’(la manière d’être connu) 혹은 ‘이념적 존재’(l’être idéal)라 칭한다. 이념적 존재란 개별적 사물들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제시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편자의 원인인 이념적 존재는 오직 사유되는 것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유사성이나 상태로 서의 이념적 존재는 개별적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유되는 방식, 즉 우리에게 알려지는 방식인 것이다. 보편자는 빈 지성이, 빈 말이 아니다. 보편자는 무의미가 아니다. 물론, 보편자는 개별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편자는 개별자들이 우리의 정신에게 알려지는 방식이자, 개별자들에게 참된 이름을 부여 해 줄 수 있게 해주는 공통 이유이다. 요컨대, 보편자는 개별적 사물들을 참되게 의미한다.
Ⅳ. 책 내용 요약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와 파리의 피에르 아벨라르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중세 신학자들 중 두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 철학자들이었다.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정통적이고 합리적인 접근법을 보여준다. 안셀무스에게 이성은 신앙을 도와주는 도구다. 그의 모토 중 하나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였다.
신학에서 안셀무스의 합리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있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보다 큰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자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더 큰 존재가 하나님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보다 더 큰 분이라면, 그는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상정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기모순의 죄를 범한다고 안셀무스는 주장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반드시 그의 존재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했던 자보다 더 큰 존재, 즉 그 개념과 유사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에 대한 정의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의 주장은 그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접근법을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함께 시작한 다음 신앙에 이성을 더하려 한다.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가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그를 합리주의자로 만들었다.
안셀무스의 저술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 형식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um)과 논리적 삼단논법의 <모노로기온>(Monologium)이다. 또한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안셀무스는 이성을 사용해 속죄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교리를 설명하려고 했다.
아벨라르는 기독교의 주된 신학적 신념들이 중명을 넘어서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진리라는 표시이고, 그 신념들은 무한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흔적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것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벨라르는 신학의 전통적인 대답을 정하고 그 대답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와 아니오>라는 책에서 그는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를 살펴보면서 “예”와 “아니오”라고 말흘 수 있다고 했다. 신학 연구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교리도 최종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며 신학을 가르침에 있어 더 개방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을 세우려고 애썼다. 이로 인해 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위시해서 전통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아벨라르는 유명론(nominalism)이라 불리는 철학의 첫 번째 지지자겸 해설자로 간주된다. 유명론은 실재론(realism)과 대결 구도에 있다. 실재론은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의미를 지닌다. 안셀무스는 분명히 실재론자였다. 유명론자의 입장에서, 아벨라르는 보편자를 그저 용어나 개념으로만 생각했다. 안셀무스 같은 실재론자는 유명론을 유해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유명론이 우주적 질서와 그것을 추적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명론은 하나님이 어떤 ‘신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도 어떤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론자에 따르면, 이는 하나님이 제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순전한 의지이자 힘이며 어떤 제한이나 체계 없이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다. 아벨라르 같은 유명론자는, 하나님의 그런 모습이 하나님이 신실하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따리서 이 두 대립자들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 차이점은, 보편자와 연관된 실재론 대 유명론 사이의 차이점일 수 있다. 유명론에 대한 논쟁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 때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루터는 유명론자였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유명론을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이는 유명론이 교회와 성만찬에 관한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와 아벨라르의 속죄 교리는 서로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순종적으로 죽음으로써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한 공로를 쌓았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속죄를 도덕적 모범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종종 속죄에 대한 주관적 이론이라고 불린다. 종교개혁 때 장 칼뱅은 안셀무스의 만족설(satisfaction theory)을 선택하여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사용했다. 칼뱅이 만든 이론은 형벌 대속 교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성부의 명예를 위해 지불했던 값은, 그리스도가 신적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통당했던 형벌로 변경되었다. 가톨릭 교리는 공식적으로 안셀무스의 교리와 비슷한 것을 지키고 있다.
안셀무스와 아벨라르의 결합을 열린-정신의 전통주의(open-minded traditionalism)라고 부른다. 이는 형상에 대한 플라톤적 이상주의(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플라톤이 고안한 보편자들)가 없는 온건한 실재론이다. 이는 속죄에 대한 객관적-주관적 견해며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본보기로서 작용한다.
Ⅴ. 나가는 말
<첫 번째 바울의 복음>에서 마커스 보그가 주장한 것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로마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것은 예수가 주님이지, 예수를 처형한 권력이 결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이것은 로마의 제국신학과 대결하며 그것을 맞받아치는 것으로서 예수가 주님이지, 카이사르가 주님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길을 계시하셨다. 여기서 그것은 개인적인 변화의 길에 대한 은유로서 작용한다. 즉 그것은 내적인 죽음과 부활, 곧 옛 정체성과 생활 방식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정체성과 생활방식으로 부활하는 변화의 길을 뜻한다. 이런 이해는 참여를 통한 하나됨(at-one-ment through participation)을 강조한다. 즉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참여하는 속죄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여하는 속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철저한 내면적인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언어이다. 즉 바울은 내면적인 십자가 처형, 내적인 죽음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예전의 바울은 죽었으며, 새로운 바울이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의 변화는 ‘정체성의 이식’(identity transplant)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대체된 것이다. 마치 심장이식 수술을 받으면 예 심장이 새로운 심장으로 대체된ㄴ 것처럼, 바울의 경우 그의 영, 곧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대체되었다. 바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적인 정체성이 되었다. 성령이 이식된 것이다.
롬 12:1에서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죽는다는 이미지로서, 자신의인생을 하나님께 선물로 바치는 제물로 내놓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변화와 새로움이다.
롬 12:2을 통해 이런 변화와 새로움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제물’로 죽는다는 것 자체가 대신(substitution)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상적인 언어와 성경에서도 그렇다. 일상적인 언어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을 대신해서’(in that person’s place) 죽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서(for that person’s place) 죽었다는 뜻이다. 즉 불타는 집에서 부모가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다. 군인이 수류탄 위에 몸을 던지는 것은 동지들의 묵숨을 구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 부모와 군인이 그 아이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해서(instead of) 죽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대체물’( substitute)이라는 뜻으로 대신해서 죽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희생제물’이라는 라틴어 어원(sacrum facere, 즉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이 시사하는 것처럼, 그 말은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어떤 것은 감사의 제물, 또 어떤 것은 간청의 제물, 어떤 제물들은 화해의 제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갈라지고 깨어진 것을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화해의 수단으로서의 제물 역시 하나님께 선물을 바치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식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물이 하나됨의 수단이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신성한 식사를 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속신학은 급진적인 바울의 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의 성격과 열정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낸다. ......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죽은 목적은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됨으로써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새로운 삶이다.“......
성 켄터버리 안셀무스의 '이성과 신앙(ratio et fides)', 김영철 참고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아벨라르두스’ 박승찬 참고
신은 참되게 의미하는? - 아벨라르와 보편자 논쟁, 장의준, 신학과 세계 85, 감리교신학대학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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