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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5세기에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영국의 수도사인 펠라기우스가 죄와 구원에 관해 논쟁하다 - '신학논쟁'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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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E. 올슨 지음, 박동식 옮김/ 새물결플러스 -

 

 

 

2018년, M.Div. 과정을 밟는 당시에 이은재 교수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으며 작성했던 글이다. 

 

 

. 들어가는 말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하신 목적으로 온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락은 고통과 고난을 이 세계에 불러들였다. 수많은 어려움들을 통과하면서, 기독교의 죄 개념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곤 했다, 마치 유대교의 죄 개념이 계약과 율법과 구별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동안 많은 고민을 가지게 했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 그리고 은총과 자유 사이의 조화는 논쟁의 여지없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서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강력하면서 동시에 가장 이의를 제기 받는 부분이다. 그것이 가장 독자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타락, 은총, 선택의 자유와 같은 거대한 이론들을 종합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었고, 더욱이 그가 그것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보다 앞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진실로 그 자신의 심오한 설명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상이 강력했던 것은 모두가 인정하듯이, 마니교들에 대항하여서는 의지의 자유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하여서는 은총에 대하여 강조하게 된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1) 어린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이미 300년 이상이나 존속해온 마을이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Patricius)는 중간계급에 속했고 그 마을의 로마 행정기관 관원이며, 신앙과 도덕에서는 이방인이었으나 마침내 죽음 직전 370년에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 모니카는 모범적인 기독교 여성으로서 아들에 대하여 열렬한 소망과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모니카는 기독교 역사 안에서 가장 깊은 지성과 영성, 경건성과 깊은 애정, 그리고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랑을 소요한 여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어렸을 때부터 신앙인으로 기르기 위해 기도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등교육을 타가스테에서 받았고, 12세가 되자 그의 부모는 수사학 공부를 시켜 출세의 길을 열어주려고, 남쪽으로 약 32떨어진 이교문화의 중심지인 마다우라(Madaura)에 유학을 보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다우라에서 고대시인과 웅변가들에 대한 광범한 지식을 쌓아갔다. 그는 마다우라에 16살까지 머물렀다.

 

2) 카르타고의 생활

 

카르타고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호화롭고 방탕한 도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곳에서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버렸다. 오래지 않아 동거 여인을 얻어 아들을 낳아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런 불안정한 시기에 키케로(Marcus T. Cicero)가 쓴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접하였다. 호르텐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헛된 욕망을 버리고 그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내 마음을 아주 바꾸어 내 기도를 나의 주님 당신께 향하도록 하였고,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욕구를 주었습니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 책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을 성서로 돌리게 되었다. "아무리 잘 씌어진 책이라도 당신의 이름이 없는 이상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성서로 눈을 돌렸지만 기록된 문체가 키케로의 명문에 미치지 못하며 소박하고 유치하게만 보여 마니주의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자신이 마니주의에 빠지게 된 동기에 대해서 그는 첫째, 그 당시 성서의 내적 의미를 통찰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의 신앙이었고, 둘째, 지적교만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신앙과 지식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었다.

 

3)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니주의

 

성서는 그에게 지적 호기심을 주지 못했지만 마니교의 자연철학적 특징이 매력을 주어 9년 동안이나(373-384) 마니교(Manichaeism)에 귀의하였다. 마니주의는 빛과 어두움의 원리를 주장하는 조르아스터교의 이원론과 고대 바벨론으로부터 유래한 영지주의적 우주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기독교적 구원 개념이 아닌 영지주의적인 구원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마니교에 의하면 두 개의 실체가 이세상의 기원을 이루는데 하나는 빛이요 하나는 어두움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빛은 영광스러운 존재로서 신 자신이다. 빛의 실체는 어두움의 실체 바로 위에 경계하고 있으며, 빛의 아래 면은 어두움과 접하고 있으며, 빛은 선하고 어두움은 악하다. 이렇게 그는 신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원칙하에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이 두 실체의 투쟁에서 현상계의 부조화와 혼란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인간은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혼합체인 땅위에서 살도록 되었으며 죄를 짓도록 운명되어졌다. 그리고 사람은 그 자체가 소우주이며 몸은 악에서 오고 영혼은 선에게서 온 오묘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신에게서 온 선한 영혼은 자체로서는 악을 행할 수 없으나 악마에게서 온 육체적인 육정에 이끌려 죄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은 영지를 가질 때 인간의 육체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니교의 구원은 감금되어 있는 빛 즉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신과 대립되는 존재이며, 모든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마니주의의 영향으로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물질을 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영적 실체로서의 하나님의 개념과 악의 기원에 관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황시절

 

아우구스티누스가 3-4년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 자기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수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의 별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에 빠져서 기독교 신앙과 더욱 더 멀어져 갔다. 그가 29살 되었을 때 많은 철학서적을 읽고 그 철학자들의 이론과 마니교들의 우화를 비교하는 가운데 마니교의 지식이 자신이 배운 철학적 이론이나 관찰과 일치하지 않으며 우화적이기에 지식의 근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교만하고 방종하였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차츰 회의를 느끼면서 마니교를 떠나기로 생각했다.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에서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서 모니카 몰래 로마로 갔다. 그런데 로마에서 심한 질병을 앓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에서 아카데미파의 회의론(Skepticism)에 빠지게 되었다. 그 동기는 마니주의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아카데미파라고 부르는 철학자들이 더 현명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에서 얼마 후 밀라노에 수사학 교사로 가게 되었고, 그 도시의 감독인 암브로스(Ambrose)를 만나 그의 설교의 내용(확실한 구원의 교리)에 감동하게 되었다. 암브로스의 문자주의를 탈피하는 성서의 은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성서의 영적인 차원의 눈을 뜨게 함과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합법적 근거를 발견케 하였다. 그로 인해 점차 카톨릭 교리인 성서와 교회의 권위로 돌아오게 되었다.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자신의 삶의 변화를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로 고백한다. 그러나 여전히 육욕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에 관해 씨름하고 있었다. 마니교의 주장은 인간 자신이 죄를 지을 때에 그들 자신이 악을 행한다기 보다 물질적인 악에 의해 침해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의 주체는 인간 자신이기에 죄악의 원인이 물질적 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5)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과의 만남 속에서 철학적 체계에 만족은 얻었지만, 도덕적 삶에 있어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도덕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서(사도 바울)를 연구하게 되었다. 특히 로마서(7:24)는 그에게 도덕적 삶의 회복에 대한 확실한 제공을 주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원하는 것은 도덕적 삶의 확실성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도덕적으로 견고히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육의 번민 가운데 암브로스의 신앙의 아버지 심플리키아누스(Simplicianus)를 찾아가 그에게서 빅토리아누스(Victori-nus)의 회심 사건을 들었다. 그 사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에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386년 여름 밀라노의 정원에서 죄에 대한 통회하면서 울고 있을 때,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 소리가 있었다. "들고 읽으라, 들고 일으라"라는 것이었다. 그는 소리를 듣고, 성서를 펴서 첫눈에 들어오는 것을 읽었다. 그 구절은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3-14)는 말씀이었다. 그는 구절을 읽은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게 된다.

 

. 자유의지와 은총

 

1. 펠라기우스

 

1) 자유의지

 

펠라기우스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에 있어서 근본적인 주체는 인간의 의지력과 신적 행위의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가지는 세 가지 기능 중 의욕과 행동은 인간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가 실재로 선한 일을 하거나 선한 말을 하거나 선한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한 일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의욕하며,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는 말이다. 또한 반대로 인간이 악한 일을 의욕하며 행하는 것도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이 이론을 조금 수정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한 일 혹은 악한 일을 행하거나 말하며 생각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가능성을 주셨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가능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선한 일의 원인이나 악한 일의 원인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한다. 한편 펠라기우스는 그의 자유의지론 1편에서 말하기를 "우리 안에는 양쪽을 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넣어 주셨다. 그것은 이를테면 다산적 뿌리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심은 사람이 결정하는 대로 덕성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 휘날릴 수도 있고, 죄악의 무성한 가시덤불이 우거지게 만들 수도 있다"라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이론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 즉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선택의 자유는 바로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가 그 중심인 것이다. 그의 견해에서 자유는 도덕적인 존재자인 인간이 모든 발전의 단계에서 가지는 특징적인 특권이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선과 악 모두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이러한 상반되는 선택 능력이 없다면,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유의 상실과 함께 도덕적 가치도 잃게 된다. 인간은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이 그의 손안에 있기까지는 자유로운, 자기 결정적인 도덕적 주체가 아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르게 그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단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만 주시는 것이지 그 결정은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는 다만 자유의지로 말미암아서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인간 가능성의 요청은 그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인해 원칙적으로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명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우리가 소유한 자유의지는 죄를 짓거나 그리고 죄를 짓지 않거나 막론하고 손상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2) 은총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과 자유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이 곧 은총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돕는 것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이지 의지와 행동 자체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타고난 가능성을 돕는다고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은총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또는 우리의 본성이 어느 정도까지 은총의 도움을 받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그가 한 주장에 대해서 약간 수정하여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 쉽게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는데 단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에 있어서 은총은 절대적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은총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나 없어도 되는 것이고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의지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교훈과 계시를 주시며, 우리에게 미래를 지적해서 현재에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마귀의 올무를 폭로해 주시며, 하늘 은총의 형언할 수 없는 각양 선물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밝히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는 위의 사상은 결국 인간의지에 선을 택하도록 어떤 특별한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는 데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순전히 외적인 도움에만 은총을 한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혼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특수한 내적인 행위를 위한 여지가 없고 또한 거룩하게 되도록 미리 예정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을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은 다음 3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부여해 주신 자유의지 자체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고 영원한 벌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이성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것이 악한 습관으로 말미암아 애매해졌으므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의미한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첫째 가능성을 '본래적 은총' 또는 '창조의 은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은총'은 플리니(Plinaval)에 의하면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이론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고 지성을 소유한다는 사실까지도 은총과 혼돈시킨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창조의 은총과 더불어 '계시의 은총' 혹은 '가르침의 은총'을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펠라기우스는 '용서의 은총'을 주장했는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게하며, 자신이 행한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펠라기우스는 은총이 이방인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치며 그는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자유의지를 이용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나, 그 자유를 악용하였으므로 당연히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공로에 따라 은총을 받는다고 까지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여 그 공로로 주의 은총을 받으며 계명을 지키므로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3:24과 에베소서 2:8을 인용하면서 은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펠라기우스의 은총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성적 의지와 함께 원초적으로 부여된 힘으로 인해 죄 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 계시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구원에 적합한 것이다.

 

하르낙(A. Harnack)에 의하면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너무 인간 본성에 대해 낙관론을 주장했으며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을 비관적으로 보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펠라기우스는 인간 한편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전통으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 상태에서는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마도 펠라기우스는 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은 구원이 인간 스스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과 율법을 은총이라고 강조하다보니 너무 형식주의에 지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아우구스티누스

 

1) 자유의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에 관한 사상은 두 단계를 거치고 있다. 첫 단계의 사상은 펠라기우스 이단이 나타나기 전의 사상으로 그가 388-395년에 저술한 "자유의지에 관하여(De libero arbitrio)" 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자유의지론은 악을 실체로 보는 마니교의 작품을 반박하기 위해 세 권으로 쓰여 졌다. 따라서 자유의지론의 사실상 주체는 악의 본질과 기원이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이성적 피조물의 자유의지 안에 있는 것이므로 자유의지론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그의 자유의지에 관한 저서는 플라톤적인 무기를 폭넓게 사용하여 마니교를 논박하면서 또한 펠라기우스주의에도 측면 공격을 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에 관한 두 번째 사상은 펠라기우스의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자유의지에 대한 사상은 체계를 이룬다. 펠라기우스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은총은 돕는 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은총은 절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적 의미에 있어서만 필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하기 이전의 그의 생애 초기에 있어서 마니교의 주장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후에 자기 자신의 개종을 회고하여 볼 때마다, 그는 점점 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으로서 개종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과의 어떠한 적극적 협동도 불가능하며 신앙의 촉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존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제 그러한 의지의 변화는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 이전의 자유의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타락한 결과로 생긴 부산물로서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아담이 향유하던 자유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의 은총 없이 죄를 피할 수 없고, 게다가 한층 특별한 은총 없이는 선을 성취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박탈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말은 때때로 이런 것을 암시한 듯하나 그의 정상적인 교리는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우리는 재생(Regeneratio)하지 못하고 그 자유를 쓰는 유일한 용도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고,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고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은총이란 자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의 회복을 위해서 치료하는 것이다.

 

2) 은총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반박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은총은 절대적 필연성이었다. 펠라기우스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이해했던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행동, 특히 인간이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도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간이 그 선행에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인간 자유의지로써는 악에 대한 유혹을 극복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은총이라는 단어는 어떤 때에는 성령, 비로 그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성령의 내재이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료로 얻는 선물(Donum), 즉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나타낸 효과를 뜻한다. 이 선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애덕 즉 사랑이다. 이 애덕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다. 이 그리스도의 은총은 이것이 없으면 갓난아이나 어른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떠한 공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데, 이것을 또한 은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두 가지로 구별했다.

 

첫째가 선행은총(Gratia praeveniens)이다. 이 선행 은총은 하나님께서 선행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슨 선을 생각하거나 열망하거나 혹은 의욕하도록 우리 영혼 속에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즉 모든 움직임 안에 있어서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원하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지는 하나님이 준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원함으로써 넉넉히 행할 수 있게 만드는 의지력을 하나님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것이 우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원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다. 이 선행 은총은 인간이 선을 행하거나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원초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은총으로 인해 인간이 계명이나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

 

둘째 협동하는 은총(Gratia cooperans)이다.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 의지가 분발하게 되면 협동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지를 도와주시고 협동하신다. 협동은총이라는 것은 신앙이라는 행위를 인간 측에서 보거나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우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또한 믿음이란 은총에 의해서 항상 자라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일정한 성장과정이 있다. 회개, 재생, 죄의 용서, 의인, 성화 등 이러한 과정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이 성장에 있어서 사람의 주체적인 결단이 없이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주체적인 결단도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안 된다. 이 협동하는 은총은 인간을 도와주는 효율적인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은총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였다 하더라도 이 은총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을 의화시키는 은총이라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타락한 인간을 의화시킴으로써 정의와 선에 대한 애착적 자유을 회복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은 인간의 공로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은총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이다. 즉 선행은총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가치가 있는 것이든, 가치가 없는 것이든)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실행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 즉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서로 마찰 없이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의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은총이 자유의지를 파괴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 논쟁의 결과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을 부르시고, 그 부르시는 목적은 구원하기 위함이며, 또한 은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은 죄 많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절대적이며,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가운데서, 은총의 두 가지 면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인간의 본성과 의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타락한 인간을 갱신하는 "갱신의 요체"로서의 은총이요. 둘째는 구원이 은총으로부터 시작해서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주체로서의 은총이다.

 

결국 은총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과 의지를 변화시키는 변화의 주체자요, 따라서 타락한 인간을 근본적으로 갱신케 하는 갱신의 요체이다. 또한 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시작하고 이루는 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물질문명과 고도의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이 더욱 더 타락해져만 가고, 하나님께 교만해져만 가는 오늘 이 시대에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초자연적인 신적 은총은 역시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변화의 주체자로 서 있으며, 타락한 인간을 갱신케 하는 "갱신의 요체"인 것이다.

 

418년에 펠라기우스 논쟁을 첫 번째로 종결 짓는 카르타고 종교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즉 아담이 사멸적으로 창되었다는 견해와 유아들이 스스로 아담의 원죄의 어느 것도 대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러므로 그들의 세례는 죄사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하였고, 오히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가 전달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총회에서 펠라기우스설은 동방과 서방에서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펠라기우스의 입장은 당시 서방 교회가 박해시대의 전투적 신앙 및 순교정신에서 해이되어지고 도덕적으로 문란해지며, “값싼 은혜에만 매달리는 풍조를 보인데 대한 일종의 신학적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의 교리에 정면 위배된다. 신약성경의 구원, 속죄론 및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지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의 입장은 네스토리우스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에 다소 둔화된 형태로나마 교회내의 사상계 한 경향을 대표해 왔다.

 

 

. 책 내용 요약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엔 자유의지를 믿었다. 그는 죄가 자유의지라는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잘못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의지의 자유를 부인하고, 은혜와 본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선을 행하도록 하는 모든 인간의 충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고, 누가 그 은혜를 받는지 결정하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하나님의 자율적 결정이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 전에 결정했기에, 어떤 사람은 은혜를 통해 구원 받도록 택자로 예정되어 있다. 자의성은 아담의 원죄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되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원죄에 관여한다. 타락 후에 아담과 모든 인간은 죄 짓지 않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오직 성령만이 죄 짓지 않는 것이 가능한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며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없게 만드는 타락이라는 선천적인 조건을 부인했다.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가 직면했던 같은 유혹, 즉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직면한다. 대부분의 또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치명적인 불순종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들 주변에 있는 나쁜 영향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죄는 단순히 사회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불순종의 습관이다. 원죄는 부모, 친구, 이웃에게서 옮은 사회적 병이다. 그것은 생물학과 전혀 관계가 없고 영적인 운명과도 관계가 없다. 죄 짓는 것을 선택한 자는, 자신 주변에 있는 죄인들을 모방하는 일을 선택한 것뿐이다. 따라서 그런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며 유죄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우리는 달리 행할 수 있었다.

 

펠라기우스가 죄, 자유의지, 구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저술이 <자연에 관하여>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에 은혜에 관하여>라는 신학 논문으로 펠라기우스에 대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죄, 용서, 화해 등과 같은 율법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춘 서구 기독교 사상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서방 그리스도인은 아기들이 아담의 죄로 인해 정죄 받는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으로 태어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 받은 아기들은 죽으면 천국에 가고 세례 받지 않은 아기들은 림보(limbo)-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가사상태-라고 부르는 곳으로 간다고 주장했다.

 

한편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이 비록 타락하고 죄 많은 상태에 있을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선의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충분한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기다리시며 그다음 구원의 은혜로 응답하신다. 펠라기우스와 반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반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실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선의를 볼 때, 그는 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으로써 응답해 주신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선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성서적 확증을 무시한다. 하나님을 향한 선의 첫 실행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펠라기우스주의를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적절한 중간 지대라 할 수 있는가? 529년에 있었던 제2차 오랑주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강한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비난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는 기독교역사에서 이단으로 간주된다.

 

이후, 개신교 개혁주의로부터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이 나왔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선의를 행사하도록 충분한 선행적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다. 사라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 확신, 계시, 그리고 가능하게하심(선재적 은혜)에 응답하기 위한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자유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앞서가서우리를 위한 무대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사람은 자랑할 수 없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만 돌아가야 한다. 사람은 은혜와 협력하여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변혁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신앙과 회개를 통해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구원에 있어서의 신적 주도권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을 향한 선의의 실천을 시작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선행적 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는 복음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 그의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일부 측면보다 낫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인간의 도덕적 능력 교리는 성서가 죄, 은혜, 예수 그리스도, 속죄, 그리고 다른 많은 것에 관해 말하는 내용과 모순된다. 펠라기우스가 그의 교리로 복음을 훼손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결과를 야기했다. 만일 펠라기우스가 옳다면, 십자가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은 십자가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모든 이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 나가는 말

 

누가복음 151-7절에 등장하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아서 험한 들과 산으로 나선 적극적인 목자의 모습으로, 이에 반하여 양은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을 구원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능동성은 매우 강력하고도 압도적이고, 이와 대조적으로 양으로 비유된 인생들은 무척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따라서 구원과 상관하여 인생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할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다가 이번 과제를 하면서 이 문제가 교회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으로도 제시되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홀로 하시는 것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사상(예컨대 칼빈의 예정론 사상), 펠라기우스 사상(은총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동일 평면에 나란히 놓는, 부적절한 형태의 신인협동설), 적절한 형태의 신인협동설(존 웨슬리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고 동역해야 한다는 사상) 등 교회사에 길이 남는 사상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확신을 다시 갖게 되었다.

인간의 믿음이나 선행이 은총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믿음과 선행은 선행적인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에 따라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이룰 구원이란 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것과 구원에 합당한 삶을 순종으로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거저 주신 바 된 구원을 받았으니, 그 구원을 살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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