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믿음
눅 1:13
오늘은 2024년 12월 1일이며,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12월은 복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있어, 참 기쁜 달입니다.
12월은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먼저 세례요한의 출생과 그의 부모에게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오랜 세월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자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 눅 1:7 /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제사장인 사가랴가 어느 날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 우편에 섰습니다. 놀란 사가랴에게 천사는 말합니다.
❚ 눅 1:13 /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가브리엘 천사가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사가랴는 아들을 달라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간구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사가랴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 눅 1:18 /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그런데 사가랴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받고도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집니까?" 라고 의심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가랴는 아들을 낳기까지 말 못하는 벙어리로 있게 됩니다.
❚ 눅 1:20 /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이 일 후 6개월 지난 다음, 엘리사벳의 친척인 어린 마리아가 그녀의 집을 방문합니다.
❚ 눅 1:39-40 /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그런데 마리아가 문안 인사를 하는 순간부터 엘리사벳의 성탄은 시작됩니다. 그때 갑자기 자신의 뱃속에서 아이가 뛰기 시작합니다. 엘리사벳은 바로 이어서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입에서 마리아를 축복하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 눅 1:41-43 /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이것이 이천 년 전의 엘리사벳이라는 한 여인이 맞은 첫 성탄의 모습입니다. 엘리사벳은 두렵고 염려로 가득 차서 자신에게 찾아온 어린 마리아의 심령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상 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당황하며 힘들어 하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이루어 가는 일임을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성령에 감동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로 부릅니다.
❚ 눅 1:41-43 /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이후에 사가랴와 엘리사벳 가정은 천사가 알려준 대로 임신하고 때가 되니 아들을 낳게 됩니다.
❚ 눅 1:57-58 /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누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 아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크신 긍휼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기 때문이라고 누가는 이야기합니다.
❚ 눅 1:6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그리고 아들을 낳은 지 8일이 되어 아이가 할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가족과 친족들이 모여서, 아이의 이름을 그 부친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 주니어' 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 눅 1:59 /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런데 이때 모친인 엘리사벳이 불쑥 앞에 나서더니 "아닙니다. '요한'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 눅 1:60 /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사람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요한이라고요... 그런 이름은 우리 가문에서는 쓰지 않았는데요..."
❚ 눅 1:61 /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러나 엘리사벳은 단호하게 "아닙니다. 요한이라 할 것입니다"라고 다시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엘리사벳이 아들의 이름을 짓는 일에 있어서 친족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엘리사벳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나이가 늙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 엘리사벳은 "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은 가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주장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할 때 주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래서 가문의 사람들은 최종 결정권을 부친 사가랴에게 넘깁니다.
❚ 눅 1:62 /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동안 입이 봉해졌던 사가랴는 칠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적게 됩니다.
❚ 눅 1: 63 /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그리고 요한이라 이름을 적는 그 순간, 말하지 못하던 사가랴의 입이 열렸습니다.
사가랴가 입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입을 열어 한 말이 무엇입니까?
❚ 눅 1:64 /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가랴는 벙어리로 있는 동안, 엘리사벳이 임신하는 모습과 또한 아기의 탄생을 목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동안, 사가랴는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가랴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 자신만의 원칙들을 고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이 옳은지, 어떤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가랴가 천사와 대화하고 난 이후 벙어리로 지내는 기간동안에, 사가랴의 수많은 생각들과 그에 따른 삶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안 된다"는 말을 먼저 입으로 내뱉기보다,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사가랴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입이 열리자마자 일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가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님께 찬양을 드렸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구원의 뿔 되심을 찬양합니다.
❚ 눅 1:67-68 /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무엇을 먼저 찬양했지요?
"돌보사" 라는 말은 '돌아 보사'라는 의미로 '나를 찾아 오셨다' 의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이스라엘 안에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의 계절, 소망도 기대감도 다 무너진 주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시며, 나의 말을 들어주시고, 나의 아픔과 고통 위에 예수님의 손길을 올려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속량하여 주심"을 찬양합니다. 즉 노예 상태에 있는 '나'를 해방시켜 주셨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속량의 사전적 의미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대속한 행위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죄에 대한 대속 제물로만 이해하여 왔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보는 방식은 매우 익숙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 비기독교인들은 십자가가 뜻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는 죄에 대한 희생제물이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
예수는 죄에 대한 변상(payment)이다.
이런 십자가 이해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값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십자가 이해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강력하게 옹호합니다.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에 대해 마음이 불편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피의 제물'을 요구했으며 예수가 그 제물이었다는 개념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의미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십자가 이해는 천 년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1097년에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가 쓴 신학 책에 이것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제목 자체가 그 책의 목적을 말해줍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성육할 필요가 있었는가?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2. 용서는 변상을 요구한다. 변상 없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죄가 하나님께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불순종한 값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3. 그러나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진 빚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한 빚을 갚을 수 있다.
4. 그래서 예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그는 무한한 존재이며, 그의 죽음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 제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다.
안셀무스 이후로 십자가에 대한 이런 이해가 '보통 기독교'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보통 기독교'란 말은 경멸하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대부분의 보통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난 천 년 동안과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심지어 안셀무스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생각해 왔습니다.
문제는 안셀무스의 논증이 아닙니다. 그 논리는 나무랄 데 없습니다. 문제는 안셀무스의 만족설이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논리는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에게 빼앗긴 기독교인 군주들과 하나님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군인들은 마땅히 전쟁터에 나가 마땅히 목숨을 바쳐햐 한다는 논리였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런 십자가 이해가,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으로 만들 때 뜻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속 제물은 바울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보는 것은 틀린 역사이며, 해로운 인간론입니다.
속죄라는 말에는 훨씬 폭넓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보았던 속죄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속죄의 폭넓은 의미를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많은 일반적인 기독교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속죄라는 용어도 구원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속죄는 화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속죄는 분열이나 불화, 소외된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런 불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입니까? 어떻게 화해할 것입니까? 이것이 속죄의 문제입니다.
속죄가 지닌 폭넓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그 말을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즉 속죄(atonement)는 다시 '하나됨'(at-one-ment)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의 십자가는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합니까?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됨을 가져옵니까?
위의 본문인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길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죽음과 부활, 곧 옛 정체성과 생활방식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정체성과 생활방식으로 부활하는 변화의 길을 뜻합니다.
이런 이해는 참여를 통한 하나됨(at-one-ment)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여하는 속죄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때문에 우리는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여하는 속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내면적인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언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것은 바울이 내면적인 십자가 처형, 내적인 죽음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예전의 바울은 죽었으며, 새로운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아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생명으로 가는 수단인데, 바울은 그이 편지들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100번도 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의 동의어로서 사용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15번 이상 사용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정체성과 생활방식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변화는'정체성의 이식''(identity transplant)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의 옛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체성의 이식'을 흔히 '성령의 이식'(Spirit transplant)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 곧 옛 우리의 자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닏.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이식된 것입니다. (마커스 J.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의 <첫 번째 바울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방되었습니다.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 찬양합니다.
그리하여 사가랴는 예수님이 "구원의 뿔"이라 찬양합니다.
❚ 눅 1:69 /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가 말한 "구원의 뿔"이란 자신의 아들 세례 요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구원의 뿔 이라고 했을까요?
뿔은 자기를 보호하고 다른 짐승을 공격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래서 뿔은 권위와 힘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 눅 1:71 /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사탄이 휘두르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죄와 죽음의 뿔까지 다 꺾어버리셨다고 찬양합니다.
2. 예수님이 돋는 해가 되신다고 찬양합니다.
❚ 눅 1:76-77 /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요한을 품에 안고 말합니다. 이는 사가랴가 자기 아들 요한을 자랑하고자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가랴는 요한을 품에 안고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입니다.
❚ 눅 1:78-79 /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사가랴는 예수님이 "돋는 해"가 되신다고 찬양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돋는 해가 떠 오르면 어두웠던 땅은 빛으로 덮이게 됩니다. 이처럼 돋는 해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 마음에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이 순식간에 물러가게 됩니다. 돋는 해가 떠오르면 더 이상 어둠은 머물 곳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들어오면 반드시 어둠이 물러갑니다.
오늘 사가랴의 찬양과 같이, 저와 여러분도 성탄의 계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오늘 대림절 첫째 주일을 맞이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뿔 되시며, 돋는 해가 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한 주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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