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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의식의 확장, 신적 자아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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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드프리 레이 킹 자음, 이상범 ⸳ 배민경 옮김 / 정신세계사 - 

 

Chapter 2 사하라 사막

세인트 저메인이 저자인 고드프리 레이 킹에게 투영된 의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2장이 시작된다.

투영된 의식(Projected Conciousness)은 우리의 두뇌 중심에 위치한 제3의 눈,

즉 송과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투영된 의식을 통해 다차원적 파동의 세계로 자신의 의식을 나눈 상태에서

여러 차원적 현실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자신 안에 내재한 신성에 대한 확연한 깨달음과 동시에,

의식의 다차원적 확장을 경험할 만큼

자신의 에너지 통로들이 정화되고 강화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세인트 저메인은 자신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고드프리의 미간에 대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고드프리의 정수리에 가져다 댔다. 저자 고드프리는 마치 강력한 전류가 자신의 온몸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세인트 저메인은 저자에게 댔던 손을 떼고 말했다.

"네가 어떤 것을 경험하고 있든 너는 항상 자신의 심신을 완전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언제나 너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음을 명심해라. 내가 가르쳤던 법칙들이 너를 지구상의 모든 힘과 사물을 초월한 의식적 마스터리의 상태로 이끌어준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하고 명심하거라.

이러한 투영된 의식의 상태에서, 너는 완전히 의식적이게 되고 매 순간 네 능력을 초월한 완전한 자기완성(mastery)을 이루게 돼. 이 안내와 그 활용은 트랜스 또는 최면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트랜스 또는 최면 상태 둘 다 개인의 의식적인 의지가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나' 가장 위험하고도 처참한 일이 될 거란다.

트랜스 또는 최면 상태에서는 의식적인 자기완성이나 권능을 찾아볼수 없어. 이런 기법을 허용하는 자에게는 이것들이 그의 영혼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되지. 의식적 통제, 자기완성, 지상의 물질 및 힘들의 사용은 항상 너의 내적 지시하에, 즉 신적 자아의 지시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몸과 마음이 지닌 모든 외적 능력이 내적 안내에 완벽하게 협력하고 복종해야 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완성을 이룰 수 없어. 상승 마스터라고 알려진 이들은 '절대, 절대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특권인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단다.

만약 상승 마스터가 한 학생의 의식을 일시적으로 확장해 주기로 선택한다면 그 학생은 투영의 경험을 할 수도 있어. 그러면 그는 동시에 두 곳 혹은 그 이상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지. 이런 상태에서 의식이 확장된 학생의 정신적 능력은 매 순간 '완전히' 자신이 지닌 자유의지의 통제와 지휘하에 있게 되지. , 그는 자신의 몸이 어디 있든 상관 없이, 상승 마스터가 가르침을 위해 그 학생의 의식을 이끌기로 선택한 장소에서 완전히 의식이 깨어 있게 되고, 스스로 선택하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활동하게 된단다.

상승 마스터가 일시적으로 학생의 의식을 높여주는 이유는 그 자신의 '의식적인' 노력과 의지로써 그와 같은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투영된 의식은 학생의 몸과 마음 모두에서 원자 구조의 진동 속도를 높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일은 상승 마스터의 '광휘(radiation)'에 의해 이루어진다. , 이것은 상승 마스터가 그 학생의 경험을 위해 설정해 둔 주음(keynote)까지 진동수를 높이는 빛의 활동이기도 해. 높은 진동수에 있는 사람은 그가 다음 옥타브, 즉 인간보다 위에 있는 영역까지 확장되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자신의 시각, 청각 능력을 일상생활에서와 똑같이 사용하지.

이러한 감각의 사용은 우리가 매 순간 깨어 있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과 같단다. 왜냐하면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을 정확히 같은 순간에 인식하게 되거든. 우리 의식의 확장과 수축은 전적으로 개인의 욕망에 달려 있고, 언제나 학생의 자유의지와 '의식적인' 지시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정원에 있는 어떤 나무 하나를 의식할 수도 있고, 정원 전체를 의식할 수도 있단다. 인간은 그두 가지를 볼 때 똑같은 시각 능력을 사용하며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그 능력을 사용하지. 만약 그가 정원 전체를 보고 싶어한다면 그는 자기가 욕망했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시야를 확장할 거야. 더 큰 확장은 여전히 그 안에 더 작은 것을 포함하고 있단다. 그러니 너는 동시에 '두 곳 모두''완전히' 인식 및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감각 능력들을 반드시 의식해야 해. 이것은 실제로 의식의 진동수와 관련된 역장(force-field)이 확장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란다.

이 의식의 확장 또는 의식의 투영 속에서 네 시각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시신경의 진동수를 높임으로써 이루어져. 이 모든 과정은 사람이 망원경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단다.

일상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특정 영역 혹은 특정 역장에서만 능력을 발휘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 이에 대한 증거로, 인간은 물리적으로 방 안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집 안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외적 활동의 모든 지각 능력에는 이처럼 조절이 가능한 융통성이 있단다. 따라서 이것들은 전적으로 개인의 '열망''의지'에 따라 현미경 혹은 망원경처럼 사용될 수도 있는 거야.

자신의 육체가 있는 방에서 나는 소리를 의식할 수 있다면 정확히 이와 같은 식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세 개 방에서 나는 소리를 인지할 수도 있어. 그리고 이런 능력을 더욱 확장해가면 인간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곳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단다. 이렇게 하려면 인간은 더 먼 영역까지 자신의 능력이 닿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진동수를 높여야 해.

네가 이 위대한 내면의 하나님이 하시는 활동을 깊이 숙고할 때, 너는 외적인 감각이 얼마나 '완벽하고 쉽게' 내면과 합쳐지는지를 보게 될 것이고, 그 두 가지가 '하나되는' 것을 보게 될 거야.

이런 의식의 활동은 시각, 청각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감각에도 적용될 수 있단다. 이러한 의식의 고양 과정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조화로워. 마치 라디오를 원하는 주파수에 맞춰 조율하는 것과 같지. 라디오 주파수와 시각, 청각은 똑같은 활동의 일부란다. 소리는 색깔을 가지고 있고 색깔에도 소리의 파동이 들어갈 수 있지. 인간의 마음이 충분히 고요하다면 그는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도 색을 듣거나 소리를 볼 수 있어.

특정 옥타브 혹은 영역에서는 눈의 신경으로 진동을 인식할 수 있게 돼. 우리가 시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 결과란다. 다른 것들은 귀의 신경으로 인식할 수 있고, 우리가 청각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그 결과야. 보통 사람들의 눈은 이 특정 옥타브 안에서 진동하는 물체만을 봐. 왜냐 하면 그들은 적외선보다 낮은 파장 혹은 자외선보다 높은 파장은 볼 수 없기 때문이야. 두뇌와 눈의 원자 구조는 상승 마스터의 광휘를 통해 보통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상위 차원에 있는 다음 옥타브까지 확장될 정도로 빠르게 진동할 수 있단다.

이 같은 활동은 마스터들의 광휘에 의해 또는 개인의 내적 자아, 신적 자아에 의해 몇 옥타브 더 확장될 수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이런 경험알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혹은 어떻게 생겨난 경험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초월적 의식의 순간을 경험했거나 상위 차원의 영감을 받은 경우, 비록 자신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심상을 일으키는 말이나 느낌(suggestion)을 건네면 그 의도된 생각과 이미지들이 불현듯 타인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떠오르게 되지. 하지만 투영된 의식이나 비전(vision)은 다른 인간의 마음 속 심상으로 인해 만들어진 정신적 이미지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이것은 거울로 태양을 반사해서 벽에 빛을 비추는 활동과도 같아.

어떤 장소를 생각하는 것과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심상도 투영된 의식과는 다르단다. 투영은 마치 네 육체가 어떤 경험을 겪을 때처럼 '생생하고, 살아 있으며, 실제적'이야. 그것이 네 내면에 있는 신적 자아의 활동이기 때문이야. 이 신적 자아와 상승 마스터는 '하나'이자 하나님(The Supreme)이셔."

인간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감각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권능을 현현하기 위해서는

상위 법칙들의 적용이 필요하다.

 

이 상위 법칙들의 적용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들을 설명한 세인트 저메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원한 젊음은 인간의 몸에 깃든 신적 불꽃이란다. 이 불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에게 내려주신 선물이야. 젊음과 심신의 아름다움은 부조화를 자신의 의식에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만큼 강한 사람들만이 '영원히' 간직할 수 있어. 이런 이들만이 완전성을 표현하고 유지할 수 있단다. 평화, 사랑, 빛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 안에 머물지 않으면 아무리 물리적인 노력을 해도 외적 자아가 지닌 젊음과 아름다움의 표현을 유지할 수 없어. 평화, 사랑, 빛은 모든 개인의 신성 자아인 신적 불꽃 안에 영원히 존재해. 어떤 부조화든 간에 외적 자아가 상념과 감정을 통해 떠오르게 한 것은 육체에 '즉각적인' 흔적을 남겨.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은 모든 인간에게 생명의 신적 불꽃 속에서 스스로 창조되는 것이며(Self-Created) 영원히 자존한단다.

젊음, 아름다움, 완전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을 통해 그 자신의 창조 속으로 계속 주어지는 사랑의 속성이란다. 각 인간의 내면에는 계속해서 확장되어가는 완전한 창조의 활동을 유지하고 증가시키기 위한 힘과 도구가 있어.

이러한 완전성을 성취하는 힘은 세상에 태어난 한 명 한 명의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 자아의 에너지야. 이 에너지는 너의 몸, 마음, 세계에서 삶의 매 순간 언제나 활동하고 있단다. 이 강력한 에너지가 인간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는 순간은 없어.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항상 흐르고 있지. 너는 의식적으로 통제된 상념과 감정을 통한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라 이에너지에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어.

상념은 이 우주에서 창조의 진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다.

그리고 너는 진동을 통해 영원히 흐르는 이 에너지에 특정한 속성을 부여할 수 있어.

이렇게 너는 네 삶과 세상에 나타나길 소망하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어.

무한하고 지적인, 이 빛나는 에너지는 너의 신경계를 통해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이것이 바로 육신의 혈관 속에서 흐르는 영원한 생명이자 활력이란다.

이 에너지는 네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자신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아버지, 즉 하나님의 생명 원리가 내려주신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는 활동이야.

모든 것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진정한 지성은 오로지 하나님 원리에서만,

즉 생명의 불꽃에서만 나오는 것이며

이러한 지성은 단순한 지적 활동을 넘어선 것이란다.

진정한 지성은 지혜 또는 신적 지식이며 이러한 지성은 그릇된 생각을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지.

모든 그릇된 생각은 외적인 세계에서 받은 상념들에서 온 것이고,

외적 자아가 만들어낸 지적인 틀에서 나오는 거란다.

만약 개인이 자신의 상념이 각각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지혜의 눈으로 분별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무엇이 자신의 내재한 신적 불꽃에서 나온 상념인지,

그리고 무엇이 다른 사람들의 지성과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감각적 증거에 영향을 받은 상념들인지 구분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이 세계 속에서

모든 부조화스러운 활동과 상황들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자기 자신의 내재한 신적 불꽃에서 나오는 빛은 곧 완전성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오감을 통해 생겨난 모든 상념과 감정이 이 기준에 맞는 것인지 인간은 반드시 숙고하고 시험해 봐야 한단다. 인간이 스스로 완전성의 근원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의 생각과 감정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수 없어. 완전성은 오로지 신적 불꽃 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야.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적 빛과 교감하고 그 빛에 대해 명상해봐야 하는 이유야. 순수한 생명의 정수는 육신에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주고, 그것들을 유지해줄 뿐만 아니라, 신적 자아와 외적 자아(개인적 자아) 사이의 '완전한 균형'을 유지해준단다. 사실 이 순수한 생명 에너지는 외적 자아가 자신의 신성한 근원, 즉 신적 자아와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야. 지성적 능력 또는 마음의 외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 의식의 결함, 부조화,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편재하는 생명의 한 존재와는 외떨어진 창조물이라고 생각할 때를 제외하면, 이 두 가지는 실은 하나란다. 만약 감각 의식이 스스로를 하나님, 즉 완전성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면 정말로 그런 상황이 나타나게 된단다. 감각 의식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그 세계에 나타나기 때문이야.

불완전성에 관한 생각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생각이 자신의 주의와 마음을 사로잡게 내버려두면 그에 상응하는 상황이 자신의 몸과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해. 이렇게 하여 사람은 스스로를 그 자신의 근원과 외떨어진 독립체라고 느끼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생명과 지성, 그리고 힘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한단다.

생명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거야. 그 무엇도 진정으로 생명을 파괴할 수는 없단다. 정신적, 물질적 세계 속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형태가 해체되거나 일시적으로 무너질 수는 있지만 개인의 의식은 영원해.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창조물 속의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이, 아시는 이, 행하시는 이'로 인정할 때, 개인의 의식은 모든 현상계의 모든 물질들을 통제할 수 있어.

나는 네게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은 오직 하나, 즉 하나님이라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단다. 외적 자아의 외적 활동 안에서 인간이 이 진실을 하루 두세 번이 아닌 모든 순간마다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외적 자아가 무엇을 하든 상관 없이 이를 유지한다면, 누구나 그 자신이 지닌 인간전 한계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와 권능을 표현할 수 있을 거야.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것이 어려운 일처럼 느껴질 테지. 그들은 삶의 매 순간 모든 상념과 생동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물질,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에너지를 써왔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이 하나님과 외떨어진 존재라는 믿음 속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한 대로 되려면 마음의 외적 활동 속에 감춰진 이러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또 자유의지를 통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지도가 필요한데, 이것은 개인적 자아를 통해 이 생명의 완전한 힘을 발산하기 위해서이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지도하며, 그것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완전성으로 향하는 길이란다. 이것이 곧 자기완성의 길이자 '모든' 자연적 힘의 의식적인 통제, 즉 지구상의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을 얻는 길이지. 내가 네게 준 가르침을 계속 실천한다면 네 의식 안에 뿌리내린 모든 거짓된 믿음들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단다. 이것이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지느냐는 네가 너의 신적 자아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얼마나 끈질기게, 얼마나 깊이 느끼고 연결되느냐에 달렸어.

아뎁트(Adept/대사)가 되는 과정에서, 혹은 마스터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모든 힘에 대한 의식적 통제 능력과 물질을 능숙히 다루는 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야.

첫째는 자기 자신의 내재한 신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상황에서 완벽한 감정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며,

셋째는 권력과 지배 욕구의 남용에 대한 '모든' 유혹을 넘어서는 것이지.

통치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식적인 의지의 명령으로써

모든 감정의 파도를 고요하게 잠재워야 해.

통치권을 얻은 아뎁트에게는 이것이 무조건적으로 요구된단다.

이는 자기 내면의 부조화를 '억누르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황에 있든 감정을 고요히 하고

조화롭게 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는 것은 특히 서구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는 그들 대부분의 기질이 예민하고, 감정적이며, 충동적이기 때문이야. 이러한 특질은 엄청난 힘을 가진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단다. 이 에너지로 뭔가 건설적인 성취를 이루려면 이것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하며, 의식적인 지휘를 통해서만 방출되어야 해. 인간은 자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낭비되는지를 점검하고,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절대 영구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단다.

이러한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학생이 자기완성과 성취의 길에서 확언의 사용이 필요 없어지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지 종종 묻기도 하지. 인간이 진심으로 확언을 사용할 때는 그가 어떤 확언을 했느냐에 상관없이 그 확언을 진실로서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단다. 확언의 사용은 그가 자신의 느낌 속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그 진실에 외적 마음의 주의를 계속해서 집중시키기 때문이야. 여기서 느낌이란, 그가 확언한 진실이 방출되어 나타난 신적 에너지란다.

확언의 지속적인 사용은 그가 확언한 것에 대한 진실을 깊이 깨닫게 해. 따라서 확언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것을 확언으로 의식하지 않게 되지. 확언, 만트라, 기도문을 외는 이유는 그가 어떤 것의 현현을 열망하기 때문이야. 올바른 열망은 기도의 가장 깊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단다. 따라서 사람은 확언의 사용을 통해 자신의 외적 자아를 그 확언의 진실을 현현시키는 느낌을 만들어내지. 현현이라는 것은 이러한 깊은 수용에서 나오는 거야. 입에서 나온 말과 집중이 즉각적인 활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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