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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신약신학 중간고사 준비>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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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 대한 정의

 

신학이란, 우리가 믿는바(신앙)를 합리적 이성을 통해 이해를 시도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이성적 반성이 신학이다!

 

신학의 장점과 한계성이 있다. 신앙을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신학이 없는 신앙은 미신이 되는 것이고 신앙이 없는 신학은 영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신학과 신앙은 상호 비판적, 견제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신앙과 신학은 각각 위치가 다른 것이다. 학문적 반성이 없는 신앙으로 나가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무속신앙으로 바뀐다.

 

신학(데오로기아) 은 하나님()을 말하는 단어 데오스와 말씀을 뜻하는  단어 로기아가 합하여 생겨난 것

 

신약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준 것이다. 신약성서신학이란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을 오늘 우리들이 가진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은 신약성서 27권 문헌 속에 들어 있다. 2천 년 전 지중해 권에서 생겨난 신앙은 지금 우리와 괴리감과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약성서 방법론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증언하는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케리그마, 혹은 복음이라고 부른다.

 

 

1. 신약성서신학을 서술하는 4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신약성서신학은 조직적, 체계적 이해(차선)와 구체적, 역동적 이해(우선)를 동시에 추구한다.

 

신약성서신학은 신약성서의 정경성과 계시성에 부응해야한다. - 신약성경 27권 안에 하나님의 뜻이 권위 있게 계시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신약성경의 정경확정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4세기 말~5세기 초에 최종 확정되었다.

 

신약성서신학은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와 연결해서 읽고 이해한다. - 구약성서 안에는 예수가 예언(약속)의 형태로 존재하고 신약성서 안에는 예수가 인격의 형태로, 말씀과 사람의 형태로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 구약을 읽어야 한다, )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킨 사람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구약과 신학을 예언과 실현의 입장에서 보았다. 신약성서신학을 제대로 하려면 구약을 읽어야 한다. 구약과의 연결성 속에서만 예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서는 기원후 1-2세기에 헬라와 로마세계에서 살았던 초대교회의 믿음의 증언이다.

헬라는 문화, 언어적으로 지배, 로마는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지배했다.

신약성서는 이 영향을 깊이 받았다. 초대교회 역시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지만 헬라어를 사용하고 헬라문화에 젖은 헬라주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헬라어로 신약성서를 기록했다. 언어란 문화의 총체적 열매이다. 헬라문화와 사상, 로마의 정치 경제 사상이 기독교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신약성서신학의 토대인 나사렛 예수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과 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설명하라.

 

나사렛 예수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 나사렛 예수, 즉 역사적 예수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시도들이 난황을 겪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기록이 역사적이고 생애적인 차원보다는 그들의 믿음, 즉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서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선포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를 단순한 한 인간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신앙의 대상으로 소개한다. 복음서가 부활 이후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에 그 이전의 자료들도 당연히 부활 신앙의 시각으로 채색되었고, 이는 해석된 예수이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와 그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나사렛 예수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기에 신약성서신학은 나사렛 예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믿음의 고백은 역사적 사건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예수는 유대교 방식대로 제자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암송하게 했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로 인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해 낼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예수에 관한 전승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부활 이전의 제자공동체와 부활 이후의 교회공동체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예수로부터 배운 제자들이 그것을 기억해서 교회의 전하고, 이를 통해 사도의 가르침이 생겨난 만큼 나사렛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은 계속 되어야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서 예수에 대해듣고 기록한 사람들이 신약성서 제자들이라면, 그들보다 더 정확하게 나사렛 예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증언이 부활절 이후신앙에 따라 채색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신앙이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서 문헌들, 특히 공관복음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3. 세례 요한은 어떤 점에서 나사렛 예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가?

1) 세례 요한은 헤롯 치하에서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1:5-25).

 

2) 세례 요한의 옷과 음식, 활동 장소 등은 구약성서와 연관하여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광야에서 활동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애굽에서 광야로의 첫 번째 탈출로써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두 번째 탈출이 일어나면 다시 광야로 되돌아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3)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1:4).

 

4)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1:9-11병행) 예수는 세례요한의 회개 운동에 동의하고 동참했다. 그리고 내용을

 

5) 세례자 요한의 선포

첫째, 요한은 심판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선포한다.

둘째,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다.

셋째, 요한은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철저히 부정한다.

넷째, 요한은 심판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회개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의 표식으로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다섯째, 요한은 자신보다 나중에 오지만 훨씬 더 강한, 그래서 영으로 불세례를 베푸실 분을 예고한다.

 

6) 예수는 회개의 표식인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 예수는 요한의 종말론적인 회개 운동에 동참하고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이어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임박한 오심은 세례요한과 예수의 설교에서 공통점이다. 그러나 무얼 하러 오시느냐는 정반대의 개념이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신다고 하였다.

 

세례요한의 심판의 메시지가 예수에게서는 구원의 메시지로 바뀐다. 그 구원의 수레바퀴를 거절하는 자에게만 심판이 오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실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면 심판에 이르는 것이다. 심판은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뿌리침으로써 인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다.

 

헤롯 치하에서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활동하며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같이 절제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세례 요한의 옷과 음식, 활동 장소 등은 구약성서와 연관하여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광야에서 활동했다. 세례 요한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주된 활동은 세례, 특별히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다.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이는 요한의 묵시적인 선포, 곧 오고 있는 분과 그의 심판에 대한 예고와 관련 있다. 곧 그의 세례는 종말을 준비하는 것이다.

 

요한은 임박한 미래의 구원을 선포하였지만, 그는 주 오심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사람이지, 심판자나 구원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 속에서 공적 활동을 시작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별히 마가복음 1장은 예수가 회개의 표식인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공생애의 포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음서에서 나사렛 예수의 가장 명백한 역사성은(세례 요한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의 오심을 선포했다. 즉 세례요한은 심판을 위해 하나님이 오신다고, 예수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명백한 역사성이고, 이보다 더 명백한 역사성은, 예수는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복음서에서 찾아보는 나사렛 예수의 명백한 역사성 이야기는 하나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는 로마에 의해 처형당했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의 명백한 역사성 이야기의 하나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부활절 이후에는 선포된 복음(1:1)의 내용이 되었다.

(1:1)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부활절 이후에는 선포된 복음(1:1)의 내용이 되었다.

(1:1)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초대교회는 복음을 선포했다. -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바울서신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별로 말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비교적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도 하나님 나라에 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는 주로 공관복음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 초대교회의 최초문헌은 바울서신이다. 바울은 기원후 49/50~64년 사이에 적어도 7개 서신(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들을 기록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εαγγέλιον을 선포했다. 바울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 부활해서 지금도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2) 바울은 자신이 박해했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초대교회로부터 복음을 물려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안디옥교회로부터 바울은 전해 받았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도 예루살렘의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유대인교회로부터 복음을 물려받았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예수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을 가장 많이 기억하며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수집해서 전해주었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수와 공생애를 함께했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써 이전엔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초대교회 메시지의 초점은 점차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기독론)에게로 옮겨갔다.

 

2) 하나님 나라 선포의 전승사적 배경 - 나사렛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메시지는 예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예수 이전의 오랜 전승사적 흐름 속에 있다.

 

  (1) 구약성서의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 유대교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왕 되심의 이해가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

 

하나님의 통치는 구약성서에 뿌리를 둔다.

 

  (2) 유대교에서의 하나님 나라 처참한 사건들을 거듭 겪으면서 묵시사상이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침(기원전 3세기부터 왕성하게 활동한 묵시문학운동의 하나님 나라와 맥을 같이함)

 

유대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에 서서히 생성되어짐

 

초기 유대교(구약성서 시대가 끝나고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살았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묵시사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단절의 종말론! 단절의 종말론이란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미래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 하나님은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완벽히 무너뜨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세우실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유대교의 묵시문학이 말하는 미래(오는 세대)에 해당한다. 이것이 신약성경 안에 강하게 살아있다. (요한계시록 단절의 종말론, 묵시사상의 대표적) 이 흐름의 마지막 끝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히 지금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봄으로써 묵시사상을 넘어 그 이전 예언자들의 사상(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함)과 연결된다. 예수는 묵시사상의 단절의 종말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예언자적 사상을 통해 수정한다. 참고:신약성서 이후가 후기 유대교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복음 : 기독론적인 복음(1:1)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내용으로 하는 복음 : 종말론적인 복음(1:15)

사도바울은 100% 기독론적인 복음(AD 30년대의 복음)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전승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이한 점이 있다

 

 

4.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은 무엇인가?(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독특성)

 

예수의 선포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이다 임박하게 도래하고 있는 미래(1:15)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선포했다.

 

예수는 마지막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구원의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한,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고대 유대인(플루셔의 말)

 

하나님 나라

. 예수의 기적 행위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드러낸다.(7:22) 예수의 병자 치유는 하나님 나라 현재성을 드러내는 표징적 행위다!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는 당시 유대교에서 죄인으로 내쳐진 사람들과 교제했다.

 

. 예수가 귀신을 추방하는 행위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다.

 

예수의 기적 행위들, 죄인들과의 교제, 치유사역 등이 이를 증거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관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활동 속에서 현재다. 객관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이지만 예수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현재적인 것으로 선포했다. 유대인들이 전승사적으로, 예수가 오기 이전 특히 묵시문학가(사상가)들이 미래적인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하나님 통치가, 예수는 자기 안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이루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는 항상 자신의 인격 안에서 현재성을 이야기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보편적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묵시 문학적인 단절의 종말사상과 유사하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에 속한다.

예수는 생명과 기쁨, 영광 등과 같은 상징적인 개념들로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시도록 인간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을 앞당기려고 행동했던 종말론적 열광주의자들(첼롯(열심), 열광적 군사주의자들),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예수는 그런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시기를 인간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다. ‘그날’(종말론적 심판의 날)그 시간에 대해서는 사람과 천사, 아들까지도 알지 못하며 오직 아버지만 알고 있다.

 

 

5.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가르쳤는가?(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방식) 언행(言行)으로! 말로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임!!!

 

나사렛 예수는 매우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 그는 1.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랍비로, 이를 위하여 다른 무엇이 아닌 오직 자신의 인격적 권위에 근거하셨다. 또한 2.예수는 비유(ex13장의 천국의 비유..., 14:44)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에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3.짧은 격언과 지혜의 말씀, 수수께끼 같은 말씀 등을 통해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질적이고 참여 가능한 가르침을 제공하셨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언어적 방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4.예수는 행동(죄의 용서와 치유 사역, 귀신을 쫓아냄, 자연기적 행위 등) 5.죄인들과 함께 나누는 식사 교제, 6.열두 제자들을 모으는 표징행위(예수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음으로써, 12지파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하나님의 정말작인 구원 사역이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음을 표징적으로 보여줌) 등의 다양한 행동으로 사람들과 함께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은 누구인가?>

 

(1) 아버지 하나님 예수는 친밀한 가정적 용어인 아바(Abba)’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부른다. 예수의 아바라는 하나님 호칭은 그와 하나님의 관계를 드러내는 핵심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용서와 은혜를 베푸시며 모든 삶을 배려하시는 아버지로 체험한다.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이런 하나님이 아버지로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2)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무조건적, 무제한적, 선재적(미리) 사랑)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하늘나라인가! 무조건적, 무제한적(횟수와 대상을 무제한적으로 사랑하고 용서), 선재적으로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그 죄인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이런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도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가 포인트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용서를 받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웃에게 어떤 용서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가 미래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국을 여기서 경험하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내 아버지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용서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이웃과 함께 나누면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 묵시문학의 종말론인 단절의 종말론과 다른 것이다.

 

유대교 묵시문학의 단절의 종말론이란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이 나라는 절대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단절의 종말론(구약의 묵시사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 사상(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예언)과 연결시키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천국의 삶이라 하고 지금 여기서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내세에 천국을 가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에게 동일한 사랑과 용서를 요구하신다.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예: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잃어버린 양의 비유(15:4-7) 잃은 양은 율법에서 타락한, 경건하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이다.

.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15:11-32)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이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 비유의 포인트이다. - 아버지의

무조건적, 무제한적, 선재적 사랑) 큰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적, 권선징악의 아버지였다.

. 세리장 삭개오와 교제(19:1-10)

 

 

<하나님 나라와 율법>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율법에 따른 유대인들의 용서와 사랑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율법의 관계 규명은 중요하다. 예수는 율법의 준수와 구원의 약속을 결부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율법의 실천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와 무제한적인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점이 유대교와 예수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다.

 

(1) 예수는 율법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예수는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후대의 해석인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율법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안식일 계명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면서도 인간 사랑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는 율법의 계명들이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적절할 때에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예수는 율법에 근거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행동은 율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 율법은 요한까지(16:16)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세례요한은 새 시대 인물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 시대의 인물이다.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과거 구원사적 시대로의 율법과 예언자들은 끝이 났고 그 후로부터는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시대, 곧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침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취한다. 여기서 침노하는 사람들이란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인 행동으로 마중하는 사람들이다.

 

(3) 율법과 예수의 가르침

 

행동원리로서 율법과 하나님 나라 비교는 산상설교에 있는 6가지 대조하는 말씀에서 드러난다. (5:21-48) 1.살인, 2.간음, 3.이혼, 4.맹세, 5.복수, 6.원수사랑 예수는 모든 사고를 뛰어넘는, 철저하고 무제한적인 인간 사랑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인정해 주어야 함을 말한다. 율법에 대한 모든 해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이라는 기준에 의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사랑은 그 법이 구약성서의 율법이라 해도 상관없이 그 법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뜻(무조건적이 용서와 사랑)에 따라 산다.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무제한적인 용서를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ex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비유(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백성의 상을 보여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하나님 나라의 긍정적인 백성의 상을 보여줌)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가?

 

(1) 믿음

예수는 하나님 나라로 초대 받은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는데, 특히 치유사건에서 드러난다. 치유사건에서 예수가 믿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 길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9:14-29(간질병 아이를 치유하는 사건), 17:19-20(간질병 아이 치유+겨자씨 비유)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믿음이 주어진다.

 

(2) 회개

요한의 선포의 주제가 회개라면, 예수의 선포는 구원에 있다.

요한에게서 회개는 심판의 미래를 피할 수 있는 소극적인 것이라면,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 그것도 죄인들을 무조건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회개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침노라는 길은 믿음회개. 하나님이 조건 없이 제공하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심판이다. 요한에게서 심판의 공포는 인간을 회개로 몰아간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심판은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다. 예수에게서 심판은 조건적이다. 달란트비유, 지혜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 등은 조건적 심판을 말한다.

 

********(3) 나를 따르라

예수는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요청한다. 8:21-22, 9:59-60

(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8:21-22따르라는 예수의 요청에서 중요한 사실은, 지금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이 지금까지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던 모든 삶을 단호히 버리고 따르기를 요청한다. 인간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효의 부르심이 충돌할 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선이다.

 

하나님의 요청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에 주인이 잔치를 베풀고 초대했을 때 모든 사람이 핑계를 대고 주인의 잔치 자리에 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 어떤 이유나 핑계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 어떤 인간적 알리바이가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로의 부름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율법과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 종교적으로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해도 버릴 각오를 해야 한l. 예수의 따르라는 부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부름이다. 예수 자신이 부모형제를 떠나 오직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나라만을 위해 살았듯이, 부름 받은 제자들도 그렇게 오로지 하나님 나라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

 

(4) 가난 아담 이래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총체적 개념이 가난이다.

예수는 그와 더불어 이루어진 세상에 대해, 11:5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저주를 한다. 마태복음 산상 설교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우는 사람, 배고픈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한다. 예수는 지금의 세상 질서에서 가장 못나고 불쌍하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약속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지금까지 인간 사회가 지켜온 모든 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를 선언한다. 예수의 약속은 선포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나 우는 사람, 배고픈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웃는 곳이다. 그들은 절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한 자들이다.

 

. 가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와 맥을 같이한다. 왕국시대로부터 가난은 특별한 주제로 부각되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라고 선언했다. 이사야서나 시편의 여러 곳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궁핍한 처지를 변화시켜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가난은 비천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삶의 현상이다. 예수는 죄인들과 세리들, 소외된 자들과 종교적으로 무시 받는 이들과 식탁교제를 했고, 사회에서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사랑했으며, 병자들이나 마귀들린 자들을 치유했다.

 

. 예수는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다. 제자들에게도 가난을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맘몬이냐 하나님이냐 선택의 결단을 요구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가진 그 어떤 소유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가난이고, 또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표지다. 가난을 조경철교수님은 다름으로 해석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가치관 , 삶의 모습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예수는 이것의 총체적 개념을 가난으로 묶었다. 이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현실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바로 부자요, 정치(로마와 빌라도) 종교(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경제 권력 있는 자요, 힘 있는 자일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세상 권력은 양립할 수 없다.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다름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예수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다,

 

(5) 사랑

.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항동을 백성에게 요구하신다.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요청은, 인간의 종교와 역사, 관습과 이성, 도덕의 마지막 한계를 무너뜨리는 요청이다.

 

(6) 용서

. 무제한적인 용서의 근거는 하나님 나라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에 한계가 없듯이, 그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 서로 간의 용서에도 한계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용서가 체험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현존한다.

 

(7) ‘먼저(오직) 그 나라를 위하여6:33

먼저는 우선순위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의 이상한 칭찬은 도덕적 메시지를 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다급하고 위협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 이를 극복하려고 취한 단호한 행동에 있다. 청지기가 처한 위기 상황은 임박한 심판이다. 심판을 벗어나기 위해 청지기는 단호한 행동을 한 것이다. 예수는 그 행동을 지혜롭다고 칭찬하셨다.

 

<나사렛 예수는 누구였는가?>

 

부활절 이전에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나버린 인간 나사렛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연 누구이기에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라고 이야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휩쓸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고, 상대방이 누구이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을 가르치는 예수, 그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하나님의 미래를 심판이 아니라 구원으로 선언했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보여 주기 위해 죄인과 세리를 무조건 용서하여 사귐을 갖고, 여라 가지 질병을 치유하며 기적을 행하고, 부자에게 저주를,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했다. 또한 자신이 선포한 메지시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예수는 자기를 누구라고 여겼으며, 자신의 사명을 무엇이라고 여겼을까? 부활절 이후의 초대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주님, 세상의 구원자&심판자로 믿었고 또 선포했다.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불렀다. 이것은 모두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부활절 이전의 과거형물음이다. 복음서는 신앙고백이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참고: 복음서는 신앙고백서이다. 나사렛 예수를 연구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복음서라는 문헌이 역사적인 인간 예수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 신앙고백 속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역사적인 데이터를 찾아내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 신앙고백 속에서 역사적 기록을 찾아내야 한다. 불트만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케제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예수 당시의 시대에, 예수 스스로 자신을 누구라고 이해하고 활동했는가!!!

 

(1) 예수에 대한 칭호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로서 의식하고 활동했다.

 

그리스도(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해방자 예수) 예수의 해방 사역을 말하는 것, 즉 예수가 무엇을 했느냐에 관계된 신앙고백

 

(‘자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 주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냐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

 

하나님의 아들(예수의 신적, 예수에 대한 존재론적 고백),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에서 부활예수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예수님은 누구냐?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최초의 성서구절은 롬 1:3-4이다.

(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 1)혈통에서 나셨고
(1: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의 신적 본질을 고백하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선재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바울서신들과 요한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하나님과의 유일무이한 독특한 관계 속에 있다는 의식 속에서 행동했으며, 이러한 예수의 자기 이해는 부활절 이후 제자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명시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인 근거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그 예수의 부활로부터 출발해서 과거 자기들이 같이 다녔던 역사적 예수의 언행에 대한 회상과 부활 시각으로 보니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시각이 바뀐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몰랐다가예수의 언행을 회상하며 부활하신 예수에게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는 역사적 예수의 입에서 나온 칭호는 아니지만 이런 신앙고백적 부름에는 역사적 예수의 언행에 근거가 있는 칭호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는 자기를 누그라고 생각했는가? 예수는 명확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지만(주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런 표현은 극존칭이다. 예수가 그런 칭호를 자신에게 붙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극존칭에 합당한 언행이 있었다.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의 시각으로 보니까, 그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런 고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런 신앙고백적 부름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리스도(메시아)

 

나사렛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불렀다는 증거는 신약성서 어디에도 없다. 제자들을 대표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면(16:16), 이는 부활절 이후 제자들의 대표적인 고백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리라고 기대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다. 자연 이 이스라엘의 해방자는 로마에게는 정치적인 반역자가 된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처형할 때 그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였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정치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자요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메시아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예수는 그러한 자기 이해와 사명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며, 그에 대한 종교적 , 정치적 오해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 인자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입에서만 나온 말이고, 부활절 이후에는 그 칭호가 사라졌다.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게 붙일 수 있는 가장 긑접한 호칭이 인자가 아닐까? 예수는 인자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입에서 나온 유일한 호칭이 바로 인자이다. 인자는 복음서 외에도 행 7:56, 1:13-14 등에만 나온다. 예수와 관련 있는 호칭 가운데 인자는 가장 자주 사용된다. 인자 호칭은 복음서에만 무려 82번이나 나오며, 그 중에서 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의 입에서 나온다. 그런데 예수는 어디에서도 자신을 인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는 않는다. 3인칭 단수로 자신을 표현한다.

예수가 그렇게 자주 사용한 것과는 달리 부활절 이후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는 인자라고 고백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기이하다.

인자 칭호의 근원은 다니엘 7장이다.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인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인자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다니엘의 환상에 따르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곧 하나님이 인자 같은 이에게 영원한 나라의 권세를 주지만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을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다다니엘이 말하는 성도들은 이스라엘이다. ‘인자 같은 이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인 이스라엘은 다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는다.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인물이다.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며,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거나 포괄하는 것은 유대적인 사상 깊은 차원이다. 그러므로 안저 예수는 하나님의 종말적인 백성을 대표하는 메시아의 대리적 기능을 갖는다.

 

예수는 인자 칭호를 사용해 자신의 사명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다.

둘째, 특히 수난 예고에서 죄인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음의 길을 가게 될 인자를 말한다.

셋째,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인자를 말한다.

 

예언자(선지자)와 랍비

이사야 61:1, 이사야 52:7절 등에 언급한,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하나님의 영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자하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스도,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부활절 이후 부활하신 주님께 붙여진 칭호

 

 

(2) 예수의 행동과 말씀 속에 드러난 자기이해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선포하는 말씀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면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의 선포와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라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등장과 함께 현재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하나님의 통치를 구약성서 예언의 성취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선할 수 있었다. (1:15)

그러나 구약성서 예언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그의 가르침을 율법에 의지하지 않았고, 자신의 말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자기이해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세례요한을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서 새 시대를 열어갈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새 시대는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 자신 안에서 열린다고 했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개의 비유(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 중에서, 잃은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비유 속에 나오는 아버지의 행위는 죄인을 용서하는 예수의 행동과 일치한다. 예수는 자신의 치유행위나 마귀추방행위 속에서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그 표현으로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교제를 나눴다. 예수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실재가 드러나고 있다고 의식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수난과 죽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 예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해서 부활절 이후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받는 그런 존재로 변화가 될 수 있을까를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세한 것을 조사할 자료가 없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복음서 마저도 신앙고백으로 채색된 예수를 말하기 때문에 신앙고백으로 채색된 것을 벗겨내고 인간적으로 산 예수를 찾아내는 작업은 지난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그 지난하게 어려운 작업 속에서나마 복음서를 분석하면서 우리가 찾아낸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인간 예수의 모습 2가지는 예수가 죽었다(역사적 사실)는 것이다. 예수가 왜 죽었을까? 왜 그렇게 극심한 처형, 고통스러운 십자가죽음을 죽은 것일까?

 

신학적 이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예수가 죽은 신학적 이유는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해석한 것이다.

 

부활을 경험하기 전에 역사적 답변 : 역사적 차원에서 예수는 왜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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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가 비참하게 죽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가 되어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다스리심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세 천국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이 좋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서도 가능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서 다스리시는 시간, 다스리시는 공간 모든 차원의 삶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인데, 그 원칙과 기준은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이다. 이 말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사회 정치적인 약자이다. 세리, 창녀, 이방인, 사마리아 여인, 어린아이, 억압 받는 자,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자 들이다.

 

이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싫어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구별되는 자라고 여기는 자이다.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이 있다는 자들이다. (세리와 바리세인의 기도) 결국 예수를 왜 죽였나? 뭔가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대접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긴 자들이 예수를 죽였다.

 

나사렛 예수의 수난과 죽음

 

(1) 예수는 의도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길은 간다. 그의 수난과 죽음은 그가 원하지 않았던 비극적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로서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스라엘과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그에게 부과하신 대속의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부활절 이후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의 자기 이해와 행동에 근거해 예수의 죽음을 이해했다. (고전 15:3b- 5, 4:25)

 

고전 15:3b- 5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또한 열두 제자에게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는 자신이 세례 요한이나 이스라엘 선지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한다.

예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자로서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리해 수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기이해 속에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었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도 이사야의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52:13-53:12)에 의거해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차원에서 말한다.

성만찬을 제정하는 말씀에서도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

공생애 마지막 무렵, 예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11:1-11)

 

(2)예수가 걸은 죽음의 길

예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을 만난다. 예수는 당시 유대고의 거의 모든 그룹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과도 충돌한다.

 

바리새인들의 정결경건에 맞서 정함과 부정함의 구분을 부정한다. 바리새인의 안식일 규정을 거부하고 안식일 계명의 의미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지킨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세리와 창녀들과 교제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는다.

 

열심당(첼롯당)원들에게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못마땅하다. 첼롯당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하나님의 통치를 앞당기려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포)는 그들에게 못마땅하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를 정치적 소요사태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 정화였다.

 

1.제사장들의 돈줄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물 장사나 환전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예수는 사두개인의 적이 되었고 부자에 대한 저주로 제사장들을 불편하게 했다.

 

2.성전 파괴를 말하는 예수의 말은, 성전이 구원의 중심지이고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고 성전에서 동물 희생 제사를 통해 용서 받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인 유대교 구원론의 핵심인 성전의 파괴를 말한 것이다. 성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동물희생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을 예수는 부정한 것이다. 오히려 예수가 말한 구원은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원한다고 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답게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유지하는 삶이요, 그것이 구원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구원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다!

 

바울은 구원을 라는 말로 표현했다. 구원은 죽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차원이 아니다. 구원이란 관계를 맺는 삶이다. 구원이란 관계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의 자녀가 되는 관계! 하나님은 나를 다시려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나는 그에게 순종하면서 사랑하며 실천하는 삶의 관계가 구원이다!!! 구원을 너무 철학적 종교적 내세적으로 생각하면서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깨뜨린 것이 죄이다. 이것이 심화된 것이 멸망이요 죽음인 것이다. 구원이란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일상 삶 속에서 윤활유처럼 잘 돌아가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구원에서 삶의 차원을 제거해 버린 채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회복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구원에서 삶의 차원을 제거하고 제사측면만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그런 성전 신학을 허물어야 했던 것이다. 거짓된 평화와 거짓된 안전을 예수는 허물어야 했던 것이다.

 

빌라도는 로마의 권력을 갖고 이스라엘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게 하면 어떤 것도 다 감당하는 민족이기에 빌라도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다. 빌라도는 성전 제사를 적극 후원해서 이스라엘을 순한 양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정화를 하자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죽게 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는 정치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여러 차례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들었지만 막상 예수가 체포되고 처형되자 모두 도망간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걸었던 메시아 기대가 좌절되었다고 여기고 절망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이로써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예수의 언행과 수난, 죽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를 성인 정도로만 여기고 안타깝게 여겼다.

 

반면에 예수의 유대교 적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신명기 21:22-23에 의거해 하나님의 저주가 예수에게 정당하게 실현된 일이었다. 로마인들에게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반역자가 받아야 할 당연한 결과였다.

 

역사의 예수 단계는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제자들과 유대교적들, 로마인들 모든 사람에게 끝나버린 것처럼 보였던 예수 사건은, 예수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남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과 전혀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게 된다.

 

<교회 역사의 시작 신약성서신학의 출발>

 

처음교회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바울 이전에 형성한 교회

초대교회 처음교회+바울의 교회 등 더 나중의 교회들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교회

 

예수의 부활예루살렘 처음교회가 형성 - 이 교회 안에서 나사렛 예수 사건은 새로운 차원과 의미에서 하나님 사건으로 되살아남. 기독교의 첫 번째 신학이 형성됨

 

곧바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들로 나뉨

 

스데반을 중심으로 헬라어를 사용했던 이들은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안디옥에 흩어져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 안디옥에서는 그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6. 처음교회의 신학이 형성된 동인은 무엇인가?

 

1)부활예수의 현현 체험과 부활 신앙은 처음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차원에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시발점이자 기독교 탄생의 촉발이 되었다.

예수의 빈 무덤의 발견

제자들에게 나타난 부활 예수의 현현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믿고 고백하게 되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구약성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그들의 고백은 2)구약성서와 유대교의 부활 기대의 틀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3)예수가 생전에 했던 말씀과 행동을 기억여 그것을 현현체험과 구약성경에 입각하여 새롭게 이해하고, 이를 신약성서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였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다락방 사건의 4)영 체험을 통해 제자들은 구약성경의 종말론적 희망이 성취되었음을 알았고, 이는 처음교회의 신학을 형성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7. 처음교회는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으며, 그 공동체적 삶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처음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예수의 현현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으며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기억하고,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신학적 언어와 틀 속에서 반성하면서 그들의 신앙고백을 형성했다. 그들은 간단한 문장이나 표현을 통해 신앙을 말하거나 성만찬이나 세례교육, 찬양과 기도 등으로 고백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53b~5절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확증했으며, 교회 전체가 규칙적으로 성만찬을 나눔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갱신하였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난 곳이며, 그의 재림이 일어날 곳, 즉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핵심 장소로 여겨졌다. 예루살렘 처음교회의 형성과 확장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열두제자의 모임과 믿음의 공동체라는 자기이해, 그리고 선교에 대한 사명, 타 지역의 교회 설립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은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 믿음으로 그들은 가르치고, 성만찬과 세례를 행하며, 선교하였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선포) - 초대교회의 신학 : 기독교 최초의 케리그마, 기독교 최초의 신앙고백

 

1. 고린도전서 153b-5

τι Χριστς πέθανεν

πρ τν μαρτιν μν

καττς γραφάς

καὶ ὅτι τάφη

καὶ ὅτι γήγερται

τῇ ἡμέρττρίτ

καττς γραφάς,

καὶ ὅτι φθη Κηφ

ετα τος δώδεκα·

(고전 15:3)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죽음, 장사, 부활, 현현 4단어가 바울 이전에 형성된 복음 예수의 부활은 빈 무덤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증인들의 현현 체험으로 확증된다.

 

<처음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바울 이전의 신학 2가지 - 고전 15:3b-5 기독교 최초의 케리그마, 성만찬

고전 15:3b-5 기독교 최초의 케리그마

 

***기독교의 예수의 죽음을 해석 (1)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대속적 죽음이다! (2)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해석- 예수의 부활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의 신학이요, 안디옥교회의 신학이요, 이것을 전해 받은 바울의 신학이 된다.

 

2. 성만찬고린도전서 1123b 25 (성만찬 신학)

 

(고전 11:23)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전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부활예수의 현현 체험 이후 처음교회가 예수의 말씀을 기념하면서 실시한 대표적인 제의는 성만찬이다. 바울은 그 이전의 처음교회에서 형성된 성만찬을 고린도교회에 전하면서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을 행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부활 예수의 현현을 체험함으로써 예수의 그러한 행동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처음교회의 성만찬은 예수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나눴던 마지막 식사를 부활절 이후의 신학적 시각으로 다시 재현한 성례였다. 예수는 그의 속죄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으며, 제자들에게 이 언약공동체에 참여하게 했다. 부활 예수와 식사교제를 나누는 것은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만찬을 통해, 종말론적 메시아의 식사에 참여하는 예식을 행했다.

 

초대교회에는 두 개의 성만찬 전승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태, 마가version이고 또 다른 version은 누가, 고린도전서 version이다. 그만큼 성만찬 전승은 신빙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성만찬 전승은 예수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가 체포되기 바로 직전, 예수와 제자들이 나눈 만찬 , 마지막 식사에서 유래된 이 성만찬 전승은 처음교회에서 예전적 형식으로 제정하였고 성만찬의 신학은 예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바울이 받아 전한 것이다. 공관복음에는 성만찬 전승이 요한복음에는 세족식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3.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칭호들

 

(1) 그리스도 바울 이전의 신앙고백(고전15:3b)에서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안디옥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부활 예수의 현현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를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한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를 주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총제적으로 집약되었다고 믿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 어떠한 이름으로도 일어날 스 없다.(4:12)

 

 

(2)주님 성만찬 전승에 따르면, 처음 제자들은 예배 때에 부활 예수에게 마라나타를 기도했다. (고전 16:22)

 

마라나타 기도(고전 16:22)와 빌립보 송가 (2:6-11)에서 보듯이, 부활예수를 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으로 존경심을 담아 부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이는 신앙고백이다.

 

(3)하나님의 아들

 

4. 속죄와 칭의 신학

 

1)로마서 425

 

(4: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παρεδόθη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게 되셨느니라γέρθη 모두 신적 수동태로, 그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한다.

 

2) 로마서 325절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는 화목제물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며, 십자가에서 피 흘린 예수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속죄제물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드려 영원히 유효한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λαστήριον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고린도후서 521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를 우리 조인들을 대신해 속죄제물로 삼으셔서,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죄인을 대신하신 대속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빌립보서 26-11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처음교회의 삶과 선교>

 

1)예루살렘 처음교회의 형성과 확장

 

  (1)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처음교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난 곳이며, 그의 재림이 일어날 곳으로 여겨졌다.

 

  (2) 초대교회의 자기 정체 의식

  ①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냈다

  ②세상과 우리는 다르다

  ③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부르셨다.

κκλησία τοΘεοῦ(처음교회가 자기들 스스로 부른 명칭, 자신들의 identity)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취해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공동체

(3)이런 예루살렘 처음교회의 자기이해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확증되었고, 그로부터 선교를 해야 한다는 사명과 의지를 확인했다. 초대교회가 말하는 선교는 삶의 선교이다.

(4)사도행전6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가 두 공동체로 분열한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예루살렘 히브리어공동체헬라어를 사용하는 안디옥 헬라어공동체(스데반 그룹은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유대인들로서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성전과 율법에 비판적인 스데반의 선교는 당시 예루살렘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유대교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안디옥, 사마리아, 다마스쿠스 당으로 흩어져 별도로 교회를 세움으로써 처음교회가 확장된다.

 

<처음교회의 공동체적인 삶> 2:42-47

 

처음교회는 모이는 공동체로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공동체였다. 사도들을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했다. (3:1-10)

 

또한 처음교회는 세례교육을 행했다. 3:26-2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출생이나 신분의 차별 등 당시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당연하게 여겼던 차별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일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여졌다.

 

<처음교회의 선교>

 

부활예수의 현현 경험은 곧 선교에로의 부름이었다. 부활예수는 그의 현현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선교를 명령한다. 부활 예수의 현현은 12사도들에게뿐 아니라 500여 형제들, 주의 동생 야고보, 모든 사도에게도 일어났다. 모든 사도에는 바나바와 같은 이들이 포함되고 여성들오 포함될 것이다.

 

부활 예수의 현현을 경험한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선교를 했다. 그러나 헬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은 선교의 지평을 확대시켰다.

스데반은 유대교의 성전과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고발했으며(하나님은 인간이 지으신 성전 안에 계시지 않으며, 동물 피로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또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 못된다. 그런 내용 때문에 고발당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 앞에서 행한 설교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부활 승천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스데반 스룹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지만 스데반 스룹은 보편적 시각을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한다. 이들의 선교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종말 사건의 실현이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영역으로 확대되어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지한다. 사도행전 151-21이 말하는 이방인 선교 문제를 다룬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도 베드로는 선교를 지지한다. 헬라주의자들을 두둔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헤롯 아그립바의 박해를 불러왔으며,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떠난 후, 주의 동생 야고보의 지도를 받게 된다. 예루살렘을 떠난 베드로는 아마도 이방인교회의 도움으로 선교 여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교회와 바울에 의해 생긴 이방인 선교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는다. 스데반의 순교로 야기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웠다. 안디옥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기원 후 40년 대 초에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기원 후 304월 예수의 십자기 사건이 있은 지 2년쯤 지났을 때 바울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다가 (9:1-3)부활 예수의 현현을 체험했다. 사도행전 1125절에 따르면 바나바가 다소에 머물고 있는 바울을 찾아가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안디옥 신학이 바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할례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고 바울에게도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갈라디아서 21-10절과 사도행전 151-29절은 동일한 하나의 사건, 곧 기원 후 48년 무렵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회의에 대해 말한다. 예루살렘교회 기동들인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 세베대의 아들 요한 등은 바울,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들에게는 할례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할례를 받게해야하고 제의적 율법도 지키게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유다주의자들이 여전히 있었다. 유다주의자들은 사도회의 이후에도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인 선교를 하는 바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바울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들 - 참고!!!

 

1) 자료들

 

  (1)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 13개 중에서, 바울이 직접 기록한 일곱 개(바울의 주요 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 바울의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기록한 6(2바울서신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2) 사도행전 바울이 쓴 책이 아니라, 바울에 관하여 쓴 책! 사도행전의 2/3가 바울에 대해 쓴 것, 간접적인 자료!

 

  (3) 바울에 관하여 쓴 문헌 클레멘트전서(바울의 순교언급)

 

2) 교회의 박해자 바울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팔레스타인 유대인보다 개방적), 가말리엘의 제자(가말리엘 밑에서 율법에 대한 투철한 해석을 훈련 받음, 진보적인 율법 해석)

 

  (1) 베냐민 지파 출신

  (2) 길리기아 다소 출신

  (3) 로마 시민권자 디아스포라 헬라인 훌륭한 헬라어 구사, 아람어와 히브리어도 잘 구사함! 헬라철학(세상지식)도 능통함. 유대교 신학인 율법 지식도 엄청남.

  (4) 정통한 유대교육과 헬라교육을 동시에 받음

  (5) 바리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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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들 두 번째 내용

 

2)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신은 바울이 쓴 서신의 전체가 아니다. 전해지는 중간에 아주 없어져 버린 서신들도 있다. 지금의 바울 서신들이 전부가 아니다. 바울서신 도자기를 만드는 것인데, 그 일부가 분실되어 비어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은 미완결된 신학이다. 분실되어진 다른 서신들이 있다.

 

3)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다.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고 전도자, 선교사이다. 바울은 11초라도 아낀 전도자다! 그가 서신을 쓴 목적도 신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쓴 서신은 없다.

 

바울서신은 논리성 있고 일관성 있는 서신이 아니다. 바울의 서신은 상황서신이다. 따라서 바울서신을 이해할 때에는 어떤 상황에 있는 저자가 어떤 상황에 있는 독자에게 썼느냐가 중요하다.

 

바울서신은 일관된 논리성을 가진 주제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해당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그때그때의 답을 주기 위해 급하게 써내려간 상황서신이다. 바울서신의 성격을 잘 파악해야 바울신학을 이애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오해를 하게 된다.

 

바울의 신학 퍼즐 중에 안 맞는 것이 율법이다. 로마서 712(7: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7:14에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이 아주 영적인 것이라고 극찬을 했다. 그러다가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은 몽학선생과 같은 것이고 로마서 104절에서는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끝나버린 것이라고 했다(유효기간이 끝났다고 했다). 바울의 신학 퍼즐 중에 안 맞는 것이 율법이다. 로마서 712(7: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7:14에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이 아주 영적인 것이라고 극찬을 했다. 그러다가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은 몽학선생과 같은 것이고 로마서 104절에서는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끝나버린 것이라고 했다(유효기간이 끝났다고 했다).

 

바울신학의 원천, 뿌리, 출발점도 학자들 간에 의견차이가 있다.

 

바울신학은 처음부터 확정된 것이 아니었고 선교의 현장에서 그 신학이 변화, 발전했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바울이 제일 먼저 쓴 서신이 데살로니가전서인데, 율법이라는 말이 거의 없다.

 

바울이 쓴 비교적 초기서신인 고린도전서에도 율법이라는 말이 없다. 바울의 선교활동 후기에 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율법이 집중적으로 주제화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예를 들며 학자 중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를 집필할 당시만 해도 바울에게 율법에 관한 신학적 이해가 없었다가 선교를 하면서 이방인과의 문제가 대두되며 그 때부터 바울이 율법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이 율법에 대한 견해가 처음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선교 여정 내내 발전되다가 어떤 상황에서 율법이라는 주제가 신학적으로 부각되면서 바울이 이야기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 새 관점 학파(제임스 던, E. P. Sanderson, 원조는 알버트 슈바이처)

 

하지만 바울이 다마스쿠스 사건 전에 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는가? 바로 율법 때문이다. 율법(신 21:23)에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의거하여 저주 받아 죽은 예수는 율법에 의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났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고 믿는 기독교인들을 바울은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율법 신앙에 투철한 바울이 율법에 의해 저주 받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살아났다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기독교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마스쿠스 전부터 율법은 바울의 핵심주제요, 다마스쿠스 사건 자체가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변화되는 핵심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그 때는 율법이 형성되지 않았다가 나중에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쓸 때 율법신학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을 조경철교수님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바울신학의 뿌리, 근원, 출발점이 어디인가?

 

옛 관점 학파 율법신학은, 바울의 율법이해는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나 다마스쿠스 사건 때나 이미 바울의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였다. 다만 이 핵심주제는 다마스쿠스 사건에서 확정되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이방인 선교의 여정 속에서 표현할 기회가 되어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종교개혁적 바울신학, 루터, 웨슬리의 바울신학

 

바울신학의 뿌리 근원 출발점이 어디냐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옛관점학파에 따르면 바울신학의 뿌리 근원은 다마스쿠스 체험 사건에서 결정되었다.다마스쿠스 사건이야말로 바울신학의 출발점이고 뿌리이고 근원이다.

 

 

바울의 신학의 기본 핵심은 다마스쿠스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시대와 상황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마스쿠스 사건 간증은 사도행전에 3번 나온다. 바울서신[는 다마스쿠스 사건에 대한 간증이 없다.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간증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간증을 어리석다고 함. 신앙적 사건은 나와 하나님만의 1:1사건이다. 둘만의 사건인 것이다. 이것을 객관화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9, 22, 26장에 나온 것은 제3자가 바울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3) 바울신학의 뿌리 바울의 다마스쿠스 체험

 

바울의 모든 핵심의 뿌리이다!!!

(1) 고린도전서
 
(고전 9:1)
 
91고린도전서 9장은 사도의 자유혹은
사도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이 당당하게 사용했던 권리를 포기한 것이
오히려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보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나도 사도입니다!”의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다. 나도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이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고린도전서 158-11사도를 말함,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도 보았다!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부활 예수의 현현을 경험한 사람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도적인 권위의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동시에 복음(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사명도 부여받았다.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3) 고린도후서 46이 구절은 창세기 13절의 빛의 창조와 연관된다. 사도권을 이야기 함, 다마스쿠스 사건 후, 박해자에서 사도로 자신의 삶이 변했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자신의 삶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고후 4:6) 3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4) 갈라디아서 115-16자신의 복음이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로 받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변증하고, 그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이 바울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함.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고는 그 어떤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서도 바울과 같은 원수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는 없다.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아니고, 바울 자신의 인간적인 결단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바울에게 보여 주시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바로 이 계시의 사건, 부르심의 사건이 다마스쿠스 사건이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사건에서 이사야의 사명이 자신에게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고, 이방사람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을 통해 성취될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사건에서 자기 사명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대의 예언자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8. 바울의 다마스쿠스 체험은 그의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바울의 다마스쿠스 사건은 33~34년 사이

 

다마스쿠스 사건은 바울 신학의 근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바울의 율법이해, 칭의 신학, 기독론, 종말론과 같은 핵심 주제들이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마스쿠스 체험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새롭게 알았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의 처형된 예수가 아닌, 하나님이 다시 살린 예수를 보게 된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고, 부활을 목격한 증인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이러한 새로운 인식과 통찰은 바울의 전반적인 사상에 핵심으로 나타났다.

 

바울은 사도로서 평생 선포했던 죄인의 칭의를 다마스쿠스에서 스스로 경험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맞서 하나님의 은혜,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외쳤다. 바울의 칭의신학은 근본적으로 다마스쿠스 사건에서 출발한다.

 

바울신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밑바탕은, 하나님과 부활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바울의 확신이다. 이 사건을 통해 사도의 직분과 선포해야 할 복음(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받게 된 것이다.

 

⸙☕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

바울은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이 세 가지 칭호를 즐겨쓴다.

 

바울신학의 출발이고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이해(기독론)이다. 바울의 기독론 형성의 세 가지 요소 1. 다마스쿠스에서의 특별한 그리스도 체험 2. 처음교회에서 형성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고백 전승들 3. 구약성서에 대한 바울의 깊은 지식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구원을 이루셨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바울이 가르쳐준 하나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기독론적 신론). -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만나신다는 점에서 유대교와 구분된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시다가 사람이 되셨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선재적인 그리스도 이해(선재적인 기독론)는 바울 이전부터 있었다. 바울 자신도 그런 이해에 동의했다.

고린도전서 8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선재적 기독론의 반대적 기독론이 양자기독론이다. 양자기독론은 선재적 기독론을 부정하고, 십자가의 구원사적 의미를 부정한다. 이단정죄를 받았다. 학문적 신앙적 성서주석적으로 조경철교수님은 양자설을 부정하심

  (2) 바울은 다마스쿠스 앞에서 만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일한 본질의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동일한 창조의 주체자로 고백할 수 있었다.

  (3)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함께 있던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

  (4) 의에 대한 율법의 요청이 그리스도의 영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예수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 죄를 위한 흠 없는 속죄 제물로 정하셨고, 예수의 육신 안에서 죄를 판결하셨다.

  (5)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송가의 첫 부분(2:6-7)도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말한다. 빌립보 송가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실천한 모범적인 순종을 통해 구원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권세를 포기하고 낮아져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예수는 대리적인 희생 죽음을 통해 세상의 구원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창조능력 가운데 예수를 부활시키고 온 세상이 경배할 주님으로 높이셨다.

 

빌립보서 26-11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3)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1) 예수의 부활은 부활의 증인 500명이 입증할 수 있는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바울은 예수는 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했으며, 믿음의 사람들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생명력이 드러났고, 이 생명력은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2) 바울서신에는 신약성서의 다른 어느 문헌보다 십자가와 관련된 표현이 매우 광범위하다. 바울에게는 예수의 죽음 자체뿐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

 

(21: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4) 높여지신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

 

  (1) 예수는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1:3-4)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4:25)

 

  (2)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는 교회를 다스리는 주님이다. 교회는 자신을 희생하여 죄인들을 죄와 율법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킨 주님께 늘 순종하며, 다가오는 심판날까지 주님과 동행한다. 주님이 영으로써 그들과 함께 계시고 믿는 사람들은 성만찬을 행하면서 마라나타를 기도하며 예수의 재림(παρουσία)를 간구한다. 재림 때에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며, 빛의 모양으로 변화된다. 이어서 그들은 종말론적인 통치에 참여하며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주로 확대된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높여진 후, 하나님께 적대적인 세력들을 굴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하게 세우고 있다.

 

  (3)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서 우주의 주님으로 높여지신 그리스도가 종말에 다시 오실 것이다. 주의 재림(παρουσία)주의 에 일어난 것이고 주의 날은 밤의 도독처럼 올 것이다.

 

  (4) 이방인 선교가 완성된 이후에 시온으로부터 오는 그리스도가 온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고,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한 구원의 공동체를 완성할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보내심으로 이사야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처럼, 구원자 그리스도가 시온으로부터 재림하실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최후 심판 날에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심판이 하나님의 보복행위도 아니다. 심판은 주의 날에 모든 악의 세력들에 맞서서 구원과 행복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사건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차례대로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고전 15: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9. 바울의 신학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며, 그 죽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기독론의 중심이다. 이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닌, 부활의 증거이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승리한 사건이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적인 희생이라 표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십자가를 예수에 대한 진정한 고백의 장이라고 말하며, 예수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의 길을 이야기한다. 예수의 죽음은 모든 구원 경험을 앞서는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일회적인 은혜 행위의 표현(로마서 8:32)이자, 예수의 보편적 의미를 가지는 구원론적 사건(고린도후서 5:14)이고, 죄의 권세의 극복(고린도후서 5:21)이다.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의 핵심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다!

*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의 변화와 율법이해의 변화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스도 이해의 변화는 율법이해의 변화로 이어진다.

 

10.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1) 원래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의롭고 선한 율법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범죄자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 죽음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라고 고소한다. 율법은 죄를 인식할 수 있고 고발할 수 있는 힘이지만 ,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3:10-22, 7:7-25) 율법의 고발하고 죽이는 역할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믿음을 통해 종식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다.

 

율법은 생명을 창조하지 못하고 생명을 유지&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생명을 위해 주어진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자기 본질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피조성을 긍정하고 창조주를 인정할 때에만 진정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피조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치명적인 죄다.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의 피조성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이 본래 의도와는 달리 도리어 인간을 창조주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율법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율법을 뒤바꿔 버리는 것은 죄의 작용이다. 인격적인 존재로서 초인적인 힘을 가진 죄는 인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해서 율법의 본래 기능이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작용하게 한다. 율법의 본래 의도와 역할이 뒤바뀐 것은 죄에 붙잡힌 인간 때문이다.

 

생명을 위해 주어진 율법은 죄에 의해, 죄에 붙잡힌 인간에 의해 본래 위도와는 다르게 이용됨이로써 죄와 죽음의 울법이 되어 인간에게 죽음의 열매를 따도록 강여한다. 하나님이 울법에게 생명의 기증을 부여했으나, 그 율법이 죄에 의해 죽음의 도구로 번질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에게 주어졌던 생명의 기능을 폐지되고 이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지막이며, 그런즉 생명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2) 죄를 들춰내고 고발하는 방식으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섬긴다. 시내산으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거룩한 계인 율법은 죄인은 반드시 죽음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고발함으로써 그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3) 죄가 율법을 수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행사하는 치명적인 저주의 지배를 예수가 죄인을 대신해 받음으로써 끝내버렸다. 3:1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신21:22-23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율법의 저주를 받음으로써 죄인들을 대리해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 승천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지막이 되었다. (10:4)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νμος(תּוֹרָה) 1)모세율법, 2)모세오경 3)구약성경 전체, 4)구전전승,

 

 

5)원리, 원칙, 규정, 규약 - 바을은 1,2,3,5,의 의미로 쓴 것임!

 

 

11.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라. 바울의 독창적 신학

 

바울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제정하시고(하나님의 복음) 사도를 세워 복음을 선포하게(나의 복음) 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의 내용(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4가지의 방식을 통해 독창적으로 전개한다. 바로

 

1) 구원의 복음-화해의 말씀고후 5:19인간들 사이가 아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라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 오직 바울 서신뿐이다.

 

2) 구원의 복음-십자가의 말씀고전 1:17,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다마스쿠스에서 깨우친 핵심이며 바울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틀이다.

 

3) 구원의 복음-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1:16-17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하지 않고 믿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

 

4) 구원의 복음-칭의복음(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1:16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바울의 칭의론 : 구약성서에서 의(디카이오쉬네p214)는 사람들 사이나 혹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나 창조 세계 사이에 있는 아름답고 질서 있는 관계를 말한다.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에 의해 보장된다. 히브리어로 의는 체다카, 모든 관계가 정상인 것이 샬롬이다.

 

칭의론에서 바울의 독특한 복음이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간은 의롭다함을 얻는다.(2:16, 1:16-17, 3:21-26) 하나님은 그를 떠난 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의와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죄인들은 의와 영광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과 관계가 깨진 죄인이 되었다. 칭의는 이 잃어버린 의와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바울은 이 같은 칭의론의 핵심을 깨우쳤고, 이후 그의 선교 여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했다.

 

<바울의 믿음 이해>

 

신약성서에서 믿음(피스티스)225, 믿음(피스튜에인)225이라는 용어를 바울보다 더 중요하게 사용한 사람은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믿음의 모델로 제시한다.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보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적인 공적이 안이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붙들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은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은 사람 안에서 믿음이 생겨났고, 믿음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믿음은 오는것이고(3:23, 25), 사도의 선포를 들음으로써 생겨난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서, 인간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믿음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 안에 창조하는 은혜의 산물이다.

 

바울은 믿음의 순종을 말한다. ‘믿음의라는 속격은 동격을 의미한다. 믿음은 순종이다. 믿는 사람들은 인내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수 있다, 희망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희망은 궁극적인 구원, 종말에 얻을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바란다.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성령으로 살며 열매를 맺는다. 믿음은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는 삶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섬기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12. 바울의 구원론과 종말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미-아직 아님의 도식에 대하여 설명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옛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옛 시대와 새 시대를 동시에 살아간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6:11), 여전히 죄의 현재적 위협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룩된 대속으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얻었으나, 아직도 여전히 죄의 현재적인 위협 속에 있기에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이미-아직 아님의 긴장 상태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옛 세력들의 종말론적 투쟁의 시간을 보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전사로서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이는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종말적인 열광주의와, 현재의 위협에 절망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자 그리스도인을 향한 초청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는 아직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

 

<바울의 종말이해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

 

1)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시대 이해를 다마스쿠스 체험에서 깨우쳤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힘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생명의 힘으로 관철되었다.

 

2) 옛 시대와 새 시대를 동시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1)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더불어 이미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2) 그러나 옛 시대는 아직도 철저하게 현재적이며 또한 위협적이다. 옛 것은 지났고(고후5:17)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죄의 현재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믿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위협적인 현재의 악한 시대를 살아간다. 바울은 이미 구원의 완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종말적인 열광주의에도 반대하고, 현재의 위협에 직면해 절망과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경고한다.

 

3) 임박한 재림 기대

 (1)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묵시문학적인 표현방식을 빌어 그의 생전에 예수의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2)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은 주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으며, 또 이를 위해 기도했다.

 (3) 바울은 자기 생전에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재림 이전에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한다. 그러나 주의 재림 이전에 자신이 죽든 살아있든, 중요한 핵심은 항상 주와 함께 있음이다!!!

 

 

<바울의 성례이해>

 

성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적으로 임하는 예전이라는 의미

 

바울에게 세례와 성만찬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적으로 임하는 성례전이다.

 

1) 세례 <형식적 - 교회 가입 의식, 내용적 주인 교체 의식>

 (1) 처음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세례를 행했다. 처음교회에서처럼 바울에게도 세례는 죄 용서와 성령 받음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바울은 롬6장에서 세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 세례 받은 사람의 주인이 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교체된다. 바울은 세례를 주인의 교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예식이라고 하였다. 내면적 확신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 세례는 일생에 한 번 받는다.

 

) 세례는 교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고전 6:11, 6)

) 3:26-28 바울이 안디옥에서 배운 세례 전승

세례를 받은 교회 모든 구성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의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

) 고전 12:12-13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함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된다.

) 성령과 세례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세례는 신앙고백과 결합되기 때문에 믿음의 순정을 통해서도 성령을 받지만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2) 성만찬

  (1) 그리스도인이 일생에 단 한 차례 받는 세례는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생일이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성만찬을 반복해서 행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은혜의 사태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다른 지체들과 교제한다. - 1. 성만찬은 나와 주님의 관계를 확인&심화시키는 것 2.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형제 자매의식을 확인시키는 것(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형제자매를 위해 죽으셨다.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종교 사회 인종 성별 모든 것을 뛰어넘어 누구도 구분하지 않는다. 세례와 성만찬이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열매가, 고전 12, 3, 3장에 나오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이 하나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3

 

  (2) 바울 이전의 처음교회는 성만찬을 하면서 예수가 최후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전한 말씀을 기억했다. 이 전승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전했다. 고전 11:23b-25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3) 바울이 성만찬에 관해 말하는 두 곳(고전10:16-17, 11:23-25)을 비교해 보면 사용하는 단어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10장에서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전하는 성만찬 전승을, 11장에서는 누가와 함께 알고 있는 성만찬 전승을 전한다.

 

  (4) 고린도전서 10, 11장에서 바울이 전하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은 떡과 포도주를 예수의 몸과 피와 동일시한다. 예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 안에는 예수가 살고 있다. 그의 삶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이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예수의 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다.

떡과 잔의 말씀에 나를 기념하라는 부분은 성만찬에서 예수의 인격과 속죄의 죽음이 항상 현재적이라는 뜻이다. ‘기념’(아남네시스)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항상 현재화하는 것이다. 구원의 주인공인 예수가 성만찬에 현재적으로 임해 자신의 몸과 피와 동일시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눠줌으로써 그의 사건은 거듭 현재적으로 되살아난다. 성만찬에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사건은 항상 현재의 사건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 사건에 현재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성만찬에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이 선포된다. 기념은 현재화하는 선포다

 

  (5) 성만찬은 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 성만찬의 떡과 피 속에 임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교제를 나누게 할 뿐 아니라 그들 상호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한다.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래서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며 세속적인 식사처럼 성만찬을 거행하는 사람을 주님은 심판할 것이라고 함

 

 

<바울의 교회이해>

 

1) 예루살렘 처음교회처럼 바울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에클레시아 떼우)라고 한다.

 

바울의 교회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다.

 복음의 열매가 떨어진 곳에 반드시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복음의 선포는 없었다. 즉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 거기서 자라는 열매가 교회이다. 복음과 교회, 교회와 복음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좋은 복음이 떨어지면 좋은 교회가 생긴다. 바울의 서신은 교회에 보내진 것이다. 딤전후, 딛은 목회서신인데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에게 보낸 것이다. 교회가 아닌 곳에 보낸 서신이 없다.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 복음은 없다. 그런데 개신교에는 교회론이 맹점이다.

 

교회란 에클레시아, 유대인은 회당 쉬나고게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특정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적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선택하여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 특정한 사명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의 회집-‘하나님의 교회는 복음 선포사명을 맡기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말론적인 구원 공동체다. 교회는 복음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선발대인 셈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의 교회 개념은 아직까지 1. local church이다. 2. 그리스도 몸 교회론은 제2바울 서신에만 나온다. &엡 두 곳에만 나온다. 고전 12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말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체들이 모여서 이루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특성을 말하기 위해 몸을 이야기한 것이다.

 

2) 신약성서에 오직 바울과 그의 제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몸’(투 소마 투 트리스두)252라고 한다. 이것이 처음교회에는 전혀 새로운 교회이해였다. 고전 12:12-31이라는 표상의 기원은 성만찬 전승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공동체는 모든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 하나가 된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를 연결시키는 상징을 제공하는 영역은 성만찬이라고 할 수 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태어난 교회가 영으로 충만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 교회 내적으로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의 연합이다. 이들은 다양한 은사들과 능력으로 함께 몸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외적으로는 예수의 모범과 계명에 따라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바울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섬기는 데 여자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13. 바울의 신학과 윤리의 관계를 설명하라.

 

바울서신들에서 신학적인 주제와 윤리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신학은 윤리로 나아가고, 윤리는 신학의 바탕 위에 서 있다. 바울서신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먼저는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과 그 후 그에 따른 구체적인 윤리교훈을 전개한다. 바울 신학이해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바울의 구원론, 기독론, 성례전, 교회론, 성령이해와 종말이해는 이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학적 주제들에 따른 윤리교훈들도 그리스도 위에 서 있다.

 

구원론-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근거한 삶의 실천 요구

기독론-다른 이웃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15;7

성례전-교회안의 모든 사람들의 서로를 향한 책임과 배려

교회론-일상생활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드림/12;2

성령이해-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종말이해-구원의 기쁨과 부활의 희망에 근거한 종말이해와 윤리교훈/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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