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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요한문헌에 나타난 교회론

by tat tvam asi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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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글

 

개신교신학의 가장 큰 맹점이, '교회론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감리교신학대학에도 교회론에 관한 별도의 커리큘럼(curriculum)이 따로 없다.

 

본의 아니게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 교육을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가톨릭신학대학의 커리큘럼에는 교회론에 의한 교회 교육이 가장 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여러 가지 신학적 차이에 의한 것이겠으나, 크게 짚어 보자면 '가톨릭은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고, '개신교의 구원은 교회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은 교회론 교육이 매우 강화되어 있는 데 반해, 개신교는 기독론교육은 강화되어 있지만 교회론에 대한 강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 중에는 교인 성도수를 늘이며 교회의 몸 불리기에 마음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며, 교회 성도들도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교회 갈아타기를 하기가 일쑤다. 이것은 교회론의 부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에도 나타난 교회론, 사도신경에도 포함된 교회론을 살펴볼 때, '교회론 부재(不在)'라는 개신교의 맹점은 속히 회복해야 할 문제라고 사료(思料)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복음의 선포는 없었다. 즉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 거기서 자라나는 열매가 교회인 것이다. 복음과 교회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가 열리듯, 좋은 복음이 떨어지면 좋은 교회가 생길 것이 아니겠는가!!!

 

1960년대 이후 급성장하던 한국교회가 이천 년대에 와서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심각한 위기는 성장이 멈추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 그 평판이 나쁘다는 것이 더 뼈아프게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 윤리실천운동‘2017년 한국교회신뢰도조사를 살펴보면 전반적 신뢰도에 있어 (그렇다 20.2%, 그렇지 않다 51.2%) 부정적인 의견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2천 년대에 와서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여 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했다는 질적인 측면에서 생겨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신뢰하는 종교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도, 가톨릭 32.9%, 불교 22.1%, 기독교 18.9% 순으로 기독교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신뢰도 제고를 위한 개선점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함 28.3%, 남에 대한 배려 부족 26.8%, 배타성 23.2%를 지적하여 한국교회의 그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노출하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개신교 교회가 공신력을 잃어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정재영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의 신앙이 삶과 일치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한국 교회가 사회에서 기대하는 올바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동안 한국개신교는 사회와 소통하려고 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며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 결과로 한국 개신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하여 책임 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교세 확장과 교회당 건축이라는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 년에 삼천 교회가 문을 닫을 정도로 개교회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극소수의 큰 교회로 교인들이 몰리고 절대 다수의 작은 교회는 존폐를 걱정하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재영교수는 양극화 현상으로 작은 교회들이 고사 상태로 내몰리고 공동체성을 상실한 대형교회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지금,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 공교회성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은 교회 정신이 몇몇 교회의 작은 몸부림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계에서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확대재생산해야 한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계에서 규모와 상관없이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새로운 대안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교회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을 몸으로 느끼면서 목회자의 돕는 배필이자 이제는 신학생으로 어떻게 건강한 교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주님 앞에 간절한 머무름이 있었다.

 

한국교회를 위기라고 평가한다. 아니, 한국교회까지 갈 것 없이 바로 내가 섬기고 있는 사당중앙교회가 위기임이 분명하다. 무엇이, 왜 위기일까?

 

본 과제를 통해 요한의 교회론을 고찰해 가면서,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 아니 바로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 몸 되는 글

 

1. 교회(敎會)란 무엇인가?

 

교회라는 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게르만어에서 통용되는 말(영어 church, 독일어 Kirche, 스웨덴어 Kyrka)은 비잔틴 희랍어형인 'kyrike'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주님께 속하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면 '주님께 속하는 집' 혹은 '주님(κρος)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헬라어 'κκλησία'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단어는 '불려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거나 '백성들의 집회'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모임'이라는 단어는 모이는 과정과 모이는 단체를 동시에 의미한다. 지금 현대 시대에서도 '교회'라는 단어는 실제적으로 함께 모이는 일의 뜻으로 사용된다.

 

에클레시아('κκλησία')'교회'라는 뜻뿐만 아니라 '모임'(집회, 회중), '공동체'(단체, 본당)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의미들은 상호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서로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한다. '집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κκλησία)란 단순히 정적(靜的)인 제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집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란 단순히 정적(靜的)인 제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임의 끊임없는 반복에 의하여 존재하는 단체임을 나타낸다. 구체적인 모임의 끊임없는 반복에 의하여 존재하는 단체임을 나타낸다.

 

'공동체'라는 말은, 에클레시아(κκλησία)란 항상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 모이는 단체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κκλησία)란 결코 아무런 상호 관계 없이 고립되는 종교 단체가 아니라, 상호 봉사를 통하여 결합된 하나의 포괄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임을 밝혀 준다. 일반적으로 위의 세 가지 말은, 특히 '공동체''교회', 서로 그대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집회'는 구체적인 시간성을, '공동체'는 장소적인 영속성을, '교회'는 초장소적인 기구성(機構性)을 강조한다. 따라서 에클레시아(κκλησία)를 번역할 때, 경우에 따라 '교회', '모임', '공동체', 이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쓸 수 있다.

 

 

2. 요한 교회론의 배경(背景)과 요한 교회론의 의의(意義)

 

요한복음에 나타난 교회론에 대한 이슈(issue)는 크게 세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요한복음에 교회론 개념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 다음으로는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 특징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특징이 요한복음이 생성되고 읽힌 요한 공동체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레이몬드에 따르면 요한복음과 요한 1, 2서에는 '교회'(κκλησία)란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요한 3서에 세 번 등장하지만, 그 중 두 번(9, 10)은 요한서신의 저자가 비판하는 교회 지도자 디오드레베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공관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요한복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역시 요한 신학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의 교회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요한 교회론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은 요한 공동체가 외부인(세상, 유대인,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보인 현저한 적대관계에서 비롯된다.

 

이전의 교회론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종말론적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기독론적 복음)를 전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요한의 교회론에 의거해 볼 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이 교회론을 독립된 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요한복음에서 교회론을 추출해 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교회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다.

 

'교회'라는 말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정형화된 형태로만 이해된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그런 용어를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교회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무리와 연관된 공동체적 본질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교회론을 논할 수 있다. 요한 공동체는 교회론에 사랑, 섬김, 격려가 함께 수반되어야 할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레이몬드 E. 브라운의 주장에 따르자면, 초기 요한 공동체는 저기독론(Relatively low christology) 에 해당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예수 믿는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요한 공동체에 보다 고등수준인 기독론(고기독론)이 나타나게 되고, 이를 많은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 간주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요한 공동체 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원론으로 가득 찬 영지주의자들과도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성령에 따라 말한다고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과도 분쟁이 발생되었다. 그들은 성령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교회를 분열시켰다.

 

이렇게 요한 공동체는 1세기말 이방인과 다른 기독교 공동체(베드로, 세례 요한, 유대 등등)와의 교류 속에 자신의 신학을 전개한다. 그러면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가? 요한 공동체는 요한복음서를 통해 사도적 공동체에게 갱신(更新)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것 같다.

 

요한 공동체는 1세기 당시 많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무리라는 개념에서 멀어지는 것을, 또 그와의 개인적 친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경계했다. 이 공동체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적, 주류 공동체와 동반자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는 예수와 친밀한 관계, 그의 뜻을 깨닫는 것에는 진정한 우위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요한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교제를 통해 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회복된 생명 속에서 교회 갱신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 공동체가 우려했던 바는 교회가 예수와의 결합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기구화, 보수화 된다는 데에 있었다. 1세기 말의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주교, 장로, 집사 등이 직제의 서열로 존재하는 양상을 띤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결국 말라 불에 살라져 버리게 된다. 더 나아가 신자와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의 관계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교회의 구성 요소 중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요한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어떤 직책이나 교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신도(信徒) 각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있다고 말한다(요일 2:20, 27). 그러므로 요한 교회론에 있어서 교회 안에는 직제에 따른 신앙 등급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약 구별이 있다면 신자 각자와 예수와 얼마나 친밀한지에 따라 구별될 것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을 입음'(1:1~18), '사랑 안에 거하라'(요일 4:18), '서로 사랑하라'(13:34)는 계명과 함께 공동체 결속을 다져나갔다. 여기서 요한은, 공동체 결속은 보혜사 성령(16:1~24)을 통해 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3. 요한 교회론의 특징

 

요한의 교회론을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없다. 모든 교회론적인 이미지가 일관성 있고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를 예로 들면, 이 두 이미지 모두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으로서, 요한복음에서는 목자와 포도나무가 각각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공관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이미지가 나오지만(18:12~14; 15:3~7; 12:1~11 병행구절), 요한복음에서처럼 예수의 메시야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구약과 공관 복음서에서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참 이스라엘이고, 참 교회로 나타난다. 요한에 따르면 교회를 형성하는 주 구성원은 신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이고 신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목자의 양으로서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요한뿐 만 아니라 바울의 몸 교회론(고전 12:12~27)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성의 정도에 있어서 바울은 요한만큼 철저하지 못하다. 요한의 이미지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이 교회인데 반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몸의 지체와 함께 교회를 형성한다.

 

요한 교회론의 또 다른 특징은,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개인적 관계를 교회 형성에 중요한 축으로 본다는 것이다.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와 신자는 '상호 앎의 관계''목소리를 인식하는 관계'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묘사한다. 양으로서의 신자가 목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목자도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목소리를 인식하며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여기서 이들의 관계는 '알다'(γινώσκω)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아주 친밀한 관계이다. 이 앎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친밀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개인적 연합에 대한 강조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가지도 포도나무와의 생명적 접촉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도 그리스도와의 계속적, 개인적, 생명적 관계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성을 유지할 수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신자 개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요한의 교회론적 이미지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한다. 여기서 바울의 몸 교회상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의 관심은 신자 상호간의 관계, 즉 수평적 관계를 다룬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요한 교회론 이미지는 그 수직적 관계에 집중되어 있어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의 수평적, 공동체적 개념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요한 교회론의 이미지가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관계를 더 강조되어 있다고 해서 수평적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4. 요한 교회론의 해석 방법

 

이러한 요한 교회론의 특징이,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한국교회의 아픔을 온몸으로 오롯이 품고 있는 우리가 요한 교회론은 살피면서 교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레이몬드에 따르면, 예수와 그를 믿는 공동체의 이야기가 담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좋을까?

 

보편적으로 사회에서 원하는 교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단지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서 함께 집단을 이룬 자들의 집단적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 아니라, 이 사회 안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 아래 세워진 공동체이다. 교회는 시민사회 안에 모범적 공동체를 이루어감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책임 있게 완성해나가야 한다. 또 교회가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사회구성원을 배출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교회 차원에서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여야 한다."

 

이런 시각을 보편적으로 가진 이들에게 요한의 교회론을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하는가?

 

이저(W. Iser)의 의견에 따라,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수동적인 주체로 간주되던 독자의 역할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를 도입해 보고자 한다. , 독자반응비평의 문학 양식을 도입하여, 독자의 역할을 부정하는 형식주의(formalism)를 잠시 벗어나 보자는 것이다.

 

이저(W. Iser)에 따르면, (요한문헌을 읽는) 독자가 주도적으로 해석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요한 교회론에 대한) 의미는 발생하지 않거나, 제한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나 텍스트가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문헌을 읽는) 독자의 수용 과정이라는 것이다. 해석은 독자의 경험과 감정 및 그의 준거(準據)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문헌을 읽는 독자는 독서의 과정에서 요한 교회론의 의미까지를 창출하기에 저자의 지위로까지 격상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런 독자반응 중심의 비평은 공시적(synchronic)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역사적 성격보다 현재 눈앞의 본문에 반응하는 독자의 해석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제자는 역사비평적 차원을 고려할 필요를 재고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본문은 구체적인 저자와 독자, 또 그 문서를 산출하는 정황(情況)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비평 접근을 통시적(diachronic) 접근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인 성격을 고려하는 전통적 성서해석에서 독자는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역사비평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오늘날 본문이 형성되기 이전의 전승과 편집의 문제에 집중하므로, 독자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비평은 지식사회학적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독자가 매우 중요하다. 성서 기자는 단독으로 저작활동을 펼친 것이 아니라, 독자를 염두에 둔 채 그들과의 상호작용 가운데 문서를 기록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제자는 요한의 교회론과 함께 21세기에 있는 현실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약성서는 처음 교회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자의 처한 현실에서부터 교회론이 출발하였다. 마찬가지로 현실교회에 있어서의 교회론은 역사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하겠다.

 

한스 큉, 구티에레스, 이반 일리치가 이해한 교회론을 중심으로, 현실교회 안에서 요한 교회론을 재조명(再照明)하는 과정을 밟아보려 한다.

 

 

5. 영성과 만남

 

요한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이다. 요한의 교회론은 성령론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교회' (κκλησία)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교회'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를 만난 처음부터 공동체 핵심으로 부름 받았다. 전체적으로 요한복음은 강하게 개인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수많은 어록들은 개인들과 예수 사이의 관계에 중심을 둔다. 이러한 관계 속에 영적인 경험이 나타난다.

 

구티에레스는 이 영적인 경험을 통해 신학이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신학과 신앙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신학적 사고의 견고함과 힘은 정확하게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영적인 경험에 의존한다. 성령에 따라서 사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 그 어떤 성찰도 그리스도 신학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신학은 영성의 신학이다.

 

구티에레스는 예수와의 관계, 성령 안에서의 삶, 아버지께로의 여행, 이러한 것들을 영성의 차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의 영성이란, 신앙 경험의 심연 자체 안에서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영성을 설명하기 위해 샘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가 말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다"(7:38). 물의 형상으로 표현된 생명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온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다"(4:14). 이 본문 가운데서 '생수'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베푸는 성령의 은사를 언급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자신의 샘물을 마시는 것은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의 영적인’(spritual)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갖는 것은 성령의 시대에 그리고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6. 구체적인 만남의 영성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에 대하여 가졌던 경험을 '보다', '듣다', '만지다' 같은 동사로 사용하면서, 직접적인 경험을 제시한다. 주님과의 만남은 무엇보다도 믿는 '우리'와 만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운 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고..." (15:16). 이 만남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이며, 우리에게 위임된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를 보고 듣고 만진 경험은 '지금 여기' 즉 현재를 중요시 여기게 한다. 현재 속에서 만난 예수님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된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라."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를 만난 일과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는 것을 전했다(20:17~18). 바로 이 경험 속에 생명에 대한 증거가 있으며, 이 증거 속에서 다시 인간의 형제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주 예수와의 만남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또한 예수를 따르는 것은 개인적이 아닌 공동체의 모험이다. 하나님의 백성 여행은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의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만남은 공동체의 만남에 의해 시작된다. "우리들은 메시야를 발견했다."

 

예수와의 만남은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남에 있어서의 헤게모니(Hegemonie)는 예수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그에게 열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그의 만찬을 나누어 주신다. 모든 영성의 역사는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나타난다. 구티에레스는 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영속적인 생명의 샘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렇게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면서 교회가 세워진다.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다. 흩어졌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을 굳건하게 다졌다.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새로운 공동체(교회)가 나타났다.

 

 

7.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교회

 

새 자유

 

예수와의 만남으로 초대 교회는 구원과 해방을 체험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 자유는 결코 환상이 아니다. 이 자유는 오히려 현실이다.

 

그렇다면 누가 자유로운 사람인가? 이 질문은 당시의 신앙공동체에 속한 인간뿐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도 제기하는 물음이다.

 

본질적으로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내면에서, 즉 자신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은 독립적이거나 탁월하지 못하며, 항상 이 세계의 사물과 쾌락, 부와 세력에 속박되어 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그가 지금까지 형성해온 자아에 사로잡혀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8-24)

인간은 행해야만 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악을 추구한다. 인간은 ''속에서 '영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육에 따라' 살고 있다. 그는 무상한 것, 사라질 것, 세상적인 것, 오직 인간적인 것만을 추구한다. 그는 세계와 세계의 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다. 그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세계와 자기 자신을 지향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던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며 이웃을 위해 살려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31-36)

 

오직 하나님만이 '죄의 종''죄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새 인간,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참된 새 자유에 이르는 길을 약속하셨고, 열어주셨으며, 창조하셨다.

 

성서는 오직 자신을 내맡길 때에만, 즉 인간에게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를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때에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거짓 자유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 할 때 주어진다. 물론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한 상태가 그 어떠한 죄의 유혹도 배제하는 무죄한 상태는 아니다. 인간은 예나 전이나 죄지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6:19) 그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살며, 보이는 무상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멸망하지 않는 것에 의지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이로써 자유란 이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의무를 의미한다. 새 자유는 새 '섬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김', '서로 섬김' 등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자유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염려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서움'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선사(膳賜)된다.

 

영의 교회

 

그렇다면 자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자유는 쟁취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유의 근원과 근거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은혜의 자유 속에 있다. 자유는 복음의 부르심에 의해 도래한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5:13). 이것은 동시에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일어난다. 성령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서 그의 자유를 일깨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영은 믿는 자에게 죄와 율법,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2-11)

 

우리는 성령에 의존할 때 자유를 선사받는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다. 인간은 세상에 사로잡힌 육이다.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세계와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한다. 이 하나님의 영(성령)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에게 영원과 생명, 그리고 미래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다시 회복된 자녀 관계, 즉 죄와 율법,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다. 그러나 개인에게 성령이 선사되는 것은 공동체, 즉 교회에 선사된 성령을 전제한다. 교회에 성령이 선사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에 있어서 성령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8. 보혜사 성령과 그의 역할

 

한스 큉에 따르면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언자들의 기대가 그들의 현실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초대 교회에 있어 성령 강림은 종말의 사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종말의 때에는 모든 인간에게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요엘 2:28). 신약과 구약에서 말하는 영(πνευμα)은 하나님의 영, 성령이다.

 

예수께서는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보혜사' (Παράκλητος)를 보낸다고 약속하셨다(14:26). 원래 Παράκλητος는 법적인 '변호'라는 뜻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이다. 하지만 요한은 이 보혜사를 '위로자' (Comforter), '상담자' (Counseler) 등등 여러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보혜사' 성령의 역할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신다. 또한 그는 제자들에게 '장차 임할 일들'을 선포하신다 (14:16f; 14:26, 15:26, 16:13, 16:14)...

 

성령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위임해 주었던 것이 완성되었을 때(요한 17:4), 교회를 지속적으로 성화시키기 위해 성령 강림절날 성령이 보내졌다. 성령은 생명의 영, 영생이 용솟음치는 샘물이다(요한 4:14, 7:38). 성령은 교회를 진리로 인도하시며(요한 16:13) 공동체와 섬김의 행위 속에서 하나로 만드시고, 상이한 계급적, 카리스마적 은사를 통해 섭리하시고, 자신의 결실을 구별하신다. 성령은 복음의 힘을 통해 교회를 젊어지게 만들고, 개혁하며, 신랑과의 완전한 합일로 인도하신다. 성령과 신부는 주 예수께 말한다. 오라! (계시 22:17) 교회는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통일에 의해 하나 된 백성'으로서 나타난다. 요한은 세계가 새롭게 창조될 때 이 거룩한 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또한 그 예비한 것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와 같았다고 말한다(21:1).

 

성령은 인간과 세계의 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영이다. 성령은 마술적이며 초자연적인 유동체나 애니미즘(animatisch) 마술적 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오히려 인격적인 관계와 은사(Charisma)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이다. 즉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만, 결코 인간의 마음대로 조작될 수 없는 힘, 생명을 창출하는 힘이다. 성령은 은혜의 힘으로서 인간의 내면, 아니 전 인간을 지배하며 그의 내면에 현존하고, 인간의 영에 역사하는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던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8:9), 예수 그리스도의 영(1:19), 아들의 영(4:6), 주의 영(고후 3:18) 등으로 불려진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높임 받는 주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힘으로 성령을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 또는 '성령'이라는 표현과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실재를 지칭하는 용어들로 사용된다.

 

영은 높임을 받은 주의 지상적 현재이다. 그리스도는 영 속에서 그의 교회의 주가 되신다. 부활하신 분이 영 안에서 공동체와 개인들에게 행동하신다. 그의 부활의 능력은 엑스터시와 기적의 능력 이상이다. 부활의 능력은 새 창조를 불러일으킨다.

 

성령은 인간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즉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통찰력을 선사한다. 성령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믿는 자로서 살아가도록 만든다. 성령은 '믿음의 영'이다. 성령은 인간 자신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과 힘이며 권능이다.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령은 인간 자신의 영, 즉 인간의 자아와 구분된다. 성령은 인간의 영과 혼합되거나 교환될 수 없는, 모든 죄에서 자유한 거룩한 영이다. 성령은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서 존재하며,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개인적인 영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동시에 인간을 지배하는 영이기 때문에 인간 즉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는 인간 의 가장 내적인 자아가 된다. 성령은 신앙을 창출하는 힘인 동시에 믿는 자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규범이다.

 

성령은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도한다. 성령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지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을 통일시킨다. 믿는 자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결합됨으로써 영적인 실존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부활하신 분 속에서 역사하셨던 영을 통해 믿는 자에게 지금(현재에) 영생을 선사하신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자의 부활 속에서 즉음은 근본적으로 극복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부여하는 동일한 영을 통해 우리에게 미래적인 영생을 또한 선사하신다.

 

성령은 미래의 힘이다.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하심은 미래에, 즉 구원 받은 부활의 몸 속에서 완성된다.

 

 

9. 성령의 건축물로서의 교회

 

교회는 교회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영의 도구와 증거가 되었다. 교회는 성전, 즉 하나님에 의해 채워지고 지배되는 건축물, 성령의 건축물이다.

 

개체 공동체가 성령의 건축물이다. 교회가 성령의 건축물이라는 것은 인간들,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이 그 안에 거주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힘과 권능은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전 실존을 사로잡고 관통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영 안에서, 또한 주님이 공동체 안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에게 현존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계에 현존하시는 특별한 장소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석조 성전에 거하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분명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에 거주하신다. 교회는 석조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 자신이 새로운 영적 성전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성전을 형제들의 화합 속에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무가 뒤따른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분열을 통해 공동체의 통일을 깨뜨리는 자는 성령을 내쫓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요, 성령을 내쫓는 것은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며, 성전을 파괴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짓이다. 교회가 성령의 건축물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을 향하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동시에 신령한 집을 짓게 된다. 교회는 초석이신 그리스도 위에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졌다. 이 집은 영에 의해 실존하고 모든 지체에 이르기까지 영에 의해 채워지고 생명을 얻는 신령하고 영적인 성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과 힘에서 나오는 영에 의해 채워지고, 생명을 얻으며, 유지되고, 인도된다. 교회의 근원과 존재, 지속됨은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영에 기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를 성령의 피조물이라 부를 수 있다.

 

성령은 교회에 선행(先行)한다.

성령은 교회에 부가되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을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회가 성령 없이도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성령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교회를 창조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교회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새롭게 믿는 자들 가운데서 교회를 창조하신다. 성령이 활동하심으로써 교회가 생기는 것이며,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는 기독교적 실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기독교적 실존이 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되지 않는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여서 교회를 구성하는 믿는 자들이 지신들을 부른 것이 아니다. 그들을 신앙으로 부른 것은 결코 그들 자신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신앙과 믿는 자의 공동체, 즉 교회로 부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이로한 일을 행하신다. 초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도 성령에 속해 있다.

 

성령은 자신이 역사하고자 하는 곳에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단지 교회 직무 담당자에게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그가 원하시는 곳에서, 즉 하나님의 전 백성 안에서 활동하신다.

 

성령의 힘은 모든 벽, 심지어는 교회의 모든 벽마저도 뚫고 나간다. 물론 성령은 교회 내에 자신의 처소와 성전을 갖는다. 성령은 교회를 채우고 지배한다. 교회 내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수여되는 한, 성령이 특벌한 방식으로 교회 내에 존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교회 내에 안주하고 계시는 곳만은 아니다.

 

신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성령을 '교회의 영'이라고 부르는 곳은 없다. 성령은 교회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다. 성령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와 권능이며 힘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교회에 행동하며, 교회에 자신을 증언하고, 교회에 임재하시며, 교회를 세우고 지탱하신다. 지배 받는다는 것은 결코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영으로 남으신다. 따라서 성령은 항상 자유로운 영으로 존재하신다.

 

한스 큉에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구성체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적인 구성체가 아니라, 하나님 영이다. 인간 구성체와 하나님 사이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 현실의 교회는 인간적인 교회이기에, 죄가 존재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 (communio sanctorum)인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 (communio peccatorum)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죄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 거룩한 영으로 존재하시며, 인간들과 다르게 죄와 과실, 죽음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 해방된 자들로 이해된다.

 

비록 교회가 불순종과 잘못된 길로 갔을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은 교회를 버리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참회하는 가운데 "성령이여 오소서!"(veni Sancte Spritus)라고 외칠 뿐 아니라, 우리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실하심 속에서 "성령이여, 우리와 함께 거하소서"라고 외쳐야 한다.

 

성령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 임하신다. 그 공동체는 세례를 통해 공동체에 속하게 된 개개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구체적이며 개인적이다. 따라서 교회의 카리스마적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0. 카리스마와 교회

 

많은 사람들은 카리스마(은사)를 비범하고 불가사의한 능력이나 이적으로 본다. 하지만 진정한 카리스마는 비범한 능력이나 이적이 아니라, 봉사가 일어나는 곳에 존재한다.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책임적인 봉사가 바로 카리스마의 기준이다. 카리스마는 결코 비범한 것이 아니다. 카리스마는 오히려 교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일상적인 현상들이다. 우리는 보다 큰 은사를 갈망해야 한다. 모든 카리스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은사는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방언이나 예언은 아무것도 아니다. 심지어 사랑이 없는 신앙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 없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 사랑 없이 순교하는 것 또한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 13:1-3)

 

카리스마 중의 카리스마로서 다른 모든 카리스마들을 조절하는 카리스마는 일상의 평범한 상황 속에서 명시되며, 인간이 자신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완성시켜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 4-8)

 

'사랑' 안에 머무르면(13:34~35)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고,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을 수 있다(14:12~17).

 

카리스마란 하나님의 영이 부르고 깨우며 창조한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의 모든 은사와 모든 부르심을 카리스마로 부를 수 있다. 먹고 마시는 것도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안에서', '주를 위해' 행해질 때 카리스마가 될 수 있다. 주님에게 복종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먹거나 금식하는 것, 규정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것, 살거나 죽는 것 모두가 카리스마가 된다.

 

전체로서의 인간은 그의 인간적인 모든 은사를 갖고 봉사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새로운 선물이 선사되고 삶의 목적이 주어질 것이다.

 

 

11. 성령과 말씀

 

요한복음은 바로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말씀에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어떤 것보다도 강조한다. 요한에게는 영의 다른 측면들(부활과의 관계성, 카리스마들)이 언급 되지 않고 있으며, 세례 및 교회와 관련된 영의 차원들도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성령과 말씀의 통일이라는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이 부각되어 있다. 성령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식하게 하는 기독교 선포의 힘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힘이고, 하나님 자신이 '믿는 모든 자들'과 만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성령의 증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증언 하신다(요일 5:6~12). 인간들은 말씀인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생명을 주신다(요한 6:63; 3:6). 육이 창조할 수 없는 것들인 신앙과 중생, 영생의 영은 말씀을 통해 창조하신다. 물론 성령과 예수를 단순히 동일한 존재로 이해하시는 안 된다. 성령은 예수가 떠나가신 이후에야 비로소 교회에 오시며(16:7, 7:39) '다른 보혜사'(14:16)로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예수가 떠나신 자리에 보혜사가 오심으로써 실제로 예수 자신이 그의 사람들이 오는 것이다(16:12~24).

 

선포 속에서 성령을 통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선포 속에서 성령의 계시가 사건이 된다. 성령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으므로 증거하느니라!"(15:26). 교회를 진리로 인도하는 성령의 말씀은 예수의 영과 말씀이 통일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밝혀 준다(16:12).

 

그리스도의 자유의 영은 교회를 거듭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이 영을 신앙하는 교회는 성령께서 자신을 거듭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 심판 앞에 세우신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교회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과 복음에 대한 보다 큰 충성, 복음에 상응하는 갱신된 삶을 거듭 요청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무조건 옛것에 머무르려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히려 이 세계와 교회의 얼굴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 이 영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고 말씀하신 분의 영이다.

 

 

12. 이단과 열광주의자

 

요한에게서 성령은 종말론적 은사로 이해된다. 요한에게 성령은 공동체 내에서의 선포와 인식의 힘으로 이해된다.

 

모든 시대의 열광주의자들이 요한복음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구절들을 근거해 성령이 예수께서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령이 직접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성령이 직접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그들이 말한 성령의 계시는 성서의 말씀과 연관된 계시와 다르다. 둘째, 그들의 성령은 교회의 직무를 통한 성령 전달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성서는 제한적인 신앙 척도에 불과 하다. 그들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를 넘어선다.

 

이단과 열광주의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열광주의자들은 영과 직접적으로 통한다는 주장으로 교회에 많은 의문점들을 제기했다. 대표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보다 높은 신비 전통으로 요한 공동체를 위협했다. 이단과 열광주의자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중요한 과제다.

 

우리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오해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열광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정통주의자들도 말씀에 대한 오해를 한다. 정통주의자들은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에 근거해 옛것을 사수하지만, 열광주의자들은 동일한 성령에 근거하면서 교회 내의 새로운 모든 현상들을 성령의 계시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 둘은 성령의 말씀을 오해한다. 그들 모두 말씀을 본연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 내의 정통주의자들은 성령에 근거하면서 교회 내의 전통주의를 사수한다. 하지만 이 '정통주의자들'은 인간을 진리로 인도하는 성령에 대한 것을 간과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 성령은 물론 이 세계 내에 존재하면서 속화된 교회 또한 책망하신다. 성령은 세속화된 교회의 죄를 거듭 들추어내신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죄와 의, 심판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드신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앙의 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의를 입증하신다. 교회는 우리 또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상응하는지와 의에 근거해 사는지를, 그리고 이미 내려진 심판을 고려하는지를 항상 되물어야 한다. 교회는 항상 죄를 고백하고 보다 새로운 충성을 다짐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한다(15:3).

 

또 한편으로, 교회 내의 새로운 모든 현상들을 성령의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열광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왜곡될 수 있다. 이러한 열광주의자들은 성령께서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문장 다음에 나오는 내용, 즉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내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6:13-15)를 간과하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자는 그때그때 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가 된 가운데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다. 그 어떤 예언자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못한다. 예언자들은 서로 의존되어 있다. 한 예언 다음에는 또 다른 새로운 예언이 뒤따른다. 그러나 예수의 계시를 능가하는 새로운 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계시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성령을 통해 교회에 선사된 새로운 계시는 계시자로서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을 보완하거나 불과하다. 성령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해준다(14:26).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것만을 말한다(16:13). 성령은 "(예수의) 것을 가지고"(16:14), 예수를 "증거하실" 것이며 (15:26) 예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16:14). 성령의 말씀은 예수의 말씀을 넘어서지 않는다. 성령은 말씀에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열광주의에 맞서 성령의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한다.

 

자유의 성령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 위에 어떤 새로운 계시, 교리, 약속들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새로운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진리로 인도하신다. 이 전체적 진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컫는 것이다. 성령은 선포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모든 것을 거듭 새로운 빛 속에서 계시되도록 만든다. 예수의 말씀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을 넘어서서 ''에 의존하려는 열광주의는 그 어떤 영에 기초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영은 분명 예수의 영이 아니다. 따라서 요한이 강조했듯이, 개인과 공동체는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들과 함께 성령이 존재하며, 신앙과 함께 사랑이, 칭의와 함께 성화가, 선포와 함께 봉사가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근본 확신이다.

 

 

13. 이단과 열광주의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신약성서가 말하는 이단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개념은 공동체 내부의 '분열' 또는 '분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단'이란 오히려 '다른 복음'을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신앙적 토대를 뒤흔들어 놓는 공동체, 따라서 교회에 대립되는 공동체를 가리킨다. 성서에서는 참된 구원의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한스 큉은 이런 이단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대하라고 말한다.

 

일단, 그들에게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형제들아 이단을 어떤 보잘것없는 영혼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단은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는 이단의 본질인 '선택'은 실수를 저지르게도 하지만, 종종 장엄한 집중력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마르시온의 경우에 그의 집중력을 통해 기성 교회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어 온 기독교 선포의 중심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다음으로, 한스 큉은 이단이 등장할 수 있었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교회는 스스로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한다. 교회가 원칙상 모든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좋은 주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 만이 진리를 가졌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귀중한 생각과 다양한 믿음의 표현 방식들을 놓치게 되었다. 발굴되지 않은 보화, 의식되지 않은 지혜, 충족되지 않은 요청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교회도 이단과 마찬가지로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발굴되지 않은 보화 외에도 쓰레기와 오물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의식되지 않은 지혜 외에 오류가 존재한다. 이러한 오류와 충족되지 않은 요청 외에도 죄와 악습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이단을 생성해 내는 원인을 제공하고, 또한 이단이 공격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한스 큉은 교회가 먼저 복음을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는 왜곡시켰기 때문에 이단이 등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정할 때만 진리가 지양(止揚)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될 때도 포기되고 만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단은 교회에 권고와 경고의 기능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이단자에게도 선한 신앙이 존재한다고 과감한 선언을 한다. 양심의 결단을 내리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단자에게 양심의 결단은 내적이며 외적인 위기, 투쟁, 비극, 심지어는 죽음을 의미했다. "누가 감히 이러한 양심의 결단을 판단할 수 있는가?" 오류들은 정죄될 수 있다. 그러나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은 결코 정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스 큉은 이단들도 용감하게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확신한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들은 무분별하고, 고집 세며, 오류를 저지르고, 교회를 황폐케 한 적도 있지만, 그들에게도 선한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교회는 이단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단자와 관련된 교회의 사랑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이해다. 교회는 '폭로와 반박'으로 이단들에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이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논쟁으로 시작하려는 사람은 결코 이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단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한다. 교회는 이단들의 사상을 전체 맥락에서 분리시켜 이해하고, 그들의 사상을 왜곡시켰다. 그 때문에 교회는 그들의 사상에서 그들의 사상과 무관한 논쟁을 펼쳤다.

 

이해(理解), 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숙고(熟考)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 속에 있는 진리를 찾아내고, 접촉점을 인지하고, 잘못된 문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참된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빗나간 진술들을 자신의 신학의 잣대로 재지 않고 근원적인 복음의 빛에서 평가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단자에 대한 조소와 정죄는 사라지며, 그 대신 그의 참된 형태가 우리 눈앞에 드러나게 된다. 이 때 비로소 이단자를 참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단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의 실천이라고 한스 큉은 말한다. 교회와 이단자의 논쟁은 말로 끝나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의 관심을 알고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라면 실현시켜 주어야 한다. 타자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에게 배우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타자의 정당한 요구와 소망과 관심을 실현시켜 준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한 모험은 비판적 사고, 영을 분별하는 은사,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고 믿는다. 이로써 그는 이단도 교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14. 새로운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

 

이단은 복음에 대한 다른 견해를 대표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단뿐 아니라, 내부 자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동서방 교회의 분열, 종교개혁 등등 여러 신학적 다름의 이유로 교회 스스로가 분열되었다.

교회의 통일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제도 교회가 성서 구절 가운데 하나인 요한복음 156절을 가지고 이단자 화형의 근거로 채택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도대체 복음을 이토록 왜곡시킬 수 있는 것일까?

 

요한복음 15:1~8의 포도나무 비유는 요한의 교회론을 밝히는 데 중요한 본문이다. 먼저 15:1은 예수와 하나님을 구분함으로써 고기독론에서 일견 이탈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곧 아버지는 농부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로 설정되는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요한은 그리스도(포도나무)와 요한 공동체(가지)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15:4~5) 요한복음 154, 5, 7, 10절에서 네 차례 발견되는 '상호 내재'의 관계는 요한 공동체의 자기이해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요한은 유대인에게 친숙한 포도나무 표상을 활용하여 하나님-아버지-요한공동체 이미지를 형상화 한다. 그리고 요한 공동체는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머물러 있으면 (15:8)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주목을 끌만한 본문은 예수의 기도 단락이다. 요한 공동체에게 있어서 요한복음 17장의 본문은 전통적으로 교회 연합의 메시지로 간주되어 왔다.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17:11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부재 상황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인 것처럼 남겨진 독자들도 하나가 되도록 해달라는 기원이 그것이다. 아울러 17:18, 20은 요한 공동체가 선교하러 나선 정황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은 보호(17:15)와 하나 됨(17:21)을 기원하고 있다.

 

요한에게는 요한369절 이하를 제외하면 '에클레시아' 또는 '그리스도의 몸'등의 개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에클레시아에 대한 관심(요한 1,2,3)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 속에 내포되어 있는 현실, 즉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교제&믿는 자 상호간의 교제에 대한 관심이 요한에게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요한의 주된 관심은 계시자와 그의 말씀에 대한 개인의 결단에 있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하나 됨을 지시하는 일반적 개념들(에클레시아,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건축물, 그리스도의 몸) 대 예수의 '제자들'(13:35), 그의 '친구들'(15:13-15), '자기 사람들'(13:1) 등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교회는 모인 개인들의 공동체, 양 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목자의 소리를 듣는 '양의 무리'(10:~30) 등으로 표현된다. 세계 속에 흩어져 잇는 그의 사람들은 모여서 그와 하나 되어야 한다. 목자의 부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될 것이다.(10:16)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는 말은 항상 새롭게 실현되는 신앙의 결단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러한 신앙의 결단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싹이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나무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속에 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되고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주'는 교회의 제자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 15:4)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외적으로는 교회에 속해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분리된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단자 화형의 근거로 채택된 요한복음 156절은 파문당하고 화형당해야 할 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교회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생명을 선사하는 나무줄기로부터 떨어져 나가 결국에는 죽고 말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신실한 자는 생명을 얻고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불충(不忠)으로 인해 생명과 분리되어 나가는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

 

그러나 사랑 안에 거할 때만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다(15:9~13). 바로 여기서 종교재판의 허구성과 교회의 의미가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 없는 고립된 신앙으로 가지 말고, 사랑 안에서 결실을 맺는 산 신앙을 가져야 한다. 사랑은 교회를 통일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이 사랑은 아들을 믿는 모든 교회들을 하나 되게 한다.

 

 

15. 교회 개혁과 봉사로서의 교회 직무

 

교회는 항상(恒常) 개혁 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교회가 죄 많은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교회가 인간의 제약성과 죄 속에서 추악해지는 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거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자신을 개혁해 나가야 한다. 교회 개혁은 교회나 지도층의 의향에 좌우될 수 없다. 교회 개혁은 오히려 교회의 주님이 교회에 부여한 과제인 동시에 주님이 교회에 선사한 가능성이다. 교회 개혁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개혁에도 장애물이 존재한다. 무관심, 교회의 상황을 환상적으로 평가하는 것, 교회의 자기만족, 태만한 전통주의, 변증적 자세, 피상적인 교회론과 협소하거나 세속화된 교회론, 패배주의적 절망 등이 바로 이러한 장애물에 속한다. 개혁되지 않은 교회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교회를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 참여를 통한 건설적인 교회 비판, 주님을 위한 열망과 사랑만이 개혁의 의지를 거듭 새롭게 할 수 있다.

 

이런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사제''성직자' 등의 이름 대신에 그 어떤 이름을 봉사하는 직무 담당자에게 적합할까? 교회의 직무를 규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를 결코 사소한 문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서는 공동체 내에서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와 기능을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 봉사)라는 말로 묘사했다.

 

봉사(디아코니아 Diakonia)

 

예수는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 즉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인 이웃 사랑의 계명에 근거해 봉사에 대한 이해를 전적으로 새롭게 이해했다. 예수는 디아코니아(셉투아긴타에서는 이 명사가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동사의 형태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를 제자들의 특징으로 이해한다. 신약성서에서도 디아코니아는 식탁에서 시중 든다는 본래적인 의미를 갖는다. 요한복음 122절에는 예수에 대한 마르다의 행위가 봉사로 묘사되고 있다. 제자 됨에 필수적인 것은 권리나 권력 또는 지식이나 위엄이 아니라 오직 봉사 뿐 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모델은 국가 권력자나 지식을 가진 서기관 또는 백성 위에 군림한 제사장이 아니라 식사 시중을 드는 자다.

 

봉사(섬김)의 뿌리와 목적은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 이야기가 들어가야 할 곳에서 섬김의 자세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요한복음 13:1~17절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섬김은 타자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세상에 있는 자가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따라서 그는 만찬 중에 일어서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리고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라"(13:12~15)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에 대해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는 오직 하나, 세계에 대한 봉사뿐이다. 봉사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과학적인 문제 등 세계의 모든 문제에 끼어들어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다. 봉사란 때에 따라서는 뒤로 물러서서 침묵을 지키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할 필요도 없다는 것과 오늘날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봉사란 사회적인 권력을 모두 단념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교회는 사회적 권력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기껏해야 반교회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거나 고조시킬 뿐이다. 세계에 대한 봉사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정치권력, 세속적인 주도권, 세속적인 위신과 특권 등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봉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천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회는 세계의 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교회는 기아 문제나 인구 폭발 문제, 전쟁 문제나 권력의 익명성 문제 및 인종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는 없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언제 세계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가? 교회는 먼저 세계의 실상을 알게 될 때에만 세계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은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세계는 하나님과 인간, 구원과 불행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교회는 신앙을 통해 교회의 하나님이 세계의 하나님이시며, 세계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안다. 교회는 한 분 하나님이 전 인류와 계약을 맺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뿐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죽고 부활하셨으며, 세계의 영광과 불행도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 안에 포괄되어 있음을 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 세계의 근원과 길과 목적을 알며, 또한 신앙을 통해 세계의 가능성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세계를 위해 존재할 능력을 갖게 된다. 교회에 주어진 은사는 지성적인 개방성과 비판적인 자유, 포괄적인 선() 속에서 세계의 본래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교회는 세계와 결합됨으로써 세계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교회는 세계의 본래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물론 교회는 세계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세계가 되고,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를 도외시하게 된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한 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 속에서 교회는 처음부터 세상과 결합되어 있다. 교회는 세상과 함께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인간 세계를 이루어 나간다. 교회가 공동의 과실과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는가?

 

교회는 결코 자신을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게토(Ghetto) 속에 안주하거나 고립된 삶을 살려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개방하고, 세상을 지지하며, 세상의 문제와 희망에 참여하고, 세상의 모험과 거부를 함께 짊어져야 한다. 책임지지 않고 참여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과 결합된 교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청하는 한- 다시 세상과 함께 하기 위해 세상에 저항할 수 있다.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 곁에, 세상과 함께 존재하는 것, 즉 세상과 연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은사인 동시에 과제가 된다.

 

교회는 세계에 의무를 가질 때에만 세계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교회와 세계의 관계는 적극적으로 서로를 위해주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주를 따르는 가운데 한 아버지를 가진 모든 피조물 형제들을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 지신만을 위해 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밖을 향해, 즉 인류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에 의해 산다. 세계는 알든 모르든 간에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계에 대해, 즉 세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교회에게는 은사인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다.

 

교회의 근원적인 사명은 주께서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이러한 사명으로 부르시고, 이러한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선포하며, 그의 증인이 되고,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지배와 우리에게 요청된 신앙의 결단을 선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죄인의 칭의, 성화, 소명, 율법과 죄, 죽음에서 자유한 영적인 삶, 즉 이미 현재 속에 진입한 미래 속에서 만물의 완성을 바라보는 믿음과 사랑과 기쁨의 삶...

 

세상에 직면해 교회에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 즉 세상 앞에서 증인이 되라는 사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인식될 수 있다. 교회는 열린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길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그 어떠한 것(참여)도 교회에 금지되어 있지 않다. 창문 너머로 단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되며, 문제 그 자체에 뛰어들어야 한다.

 

감동적인 설교, 장엄한 예배, 잘 조직된 목회, 체계적인 교육, 영적으로 충만한 신학, 효율적인 자선 행위들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폐쇄적으로 자신들만 뜨겁게 모이는 교회, 자신만을 위해 사는 교회에게만 도움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세계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이 교회 안에 일어나도 괜찮은 것인가?

 

세상은 때로는 함께 동참하지만 때로는 멀리하며, 때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때로는 말을 하며, 따로는 항의하지만 때로는 감사하며 교회 곁에 있다. 교회는 오직 세계 앞에 증언을 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봉사와 교육(성령과 거룩한 독서)

 

이제 눈을 돌려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 교회를 다시 바라보자. 가톨릭교회는 제도로 인해 많은 성직자들이 떠나가고, 개신교회는 자기만이 진리를 가졌다는 독선적인 주장이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반 일리치는 이런 총체적 난국이 다름 아닌 신학 교육의 위기에서 나왔다고 지적하면서, 교회의 성직자 교육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반 일리치는 기독교 제도 교육이나 예배당 대신 '디아코니아(봉사)'가 교회의 기본 단위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봉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전문적인 신학교에서 직업적으로 키운 졸업생들이 맡는 것이 아니라, 친교에 참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봉사를 수행하는 데에 지적 소양이 부족해서는 결코 안 된다. 지적 소양은 훌륭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교육의 바탕 위에서 자랄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만 인격적 성숙이나, 영웅적 선행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 교육에서만 할 수 있는 고유한 가르침을 이반 일리치는 '교회적 감각' ('센수스 에클레시아' Sensus Ecclesiae)이라고 말한다. 이 감각을 지닌 사람은 교회의 살아있는 가르침에 자신의 부리를 두고, 믿음이 주는 풍부한 창의성을 삶에서 발휘하며, 성령의 은혜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적 감각', 믿을 만한 기독교 전통 문헌들을 읽고, 오래도록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남다른 삶의 방식을 지킬 때 얻을 수 있다고 이반 일리치는 주장하고 있다. 교회적 감각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서 얻는 결실이며, 기도자의 진정한 깊이를 보여주는 척도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지성의 빛과 의지의 시험을 거쳐 신앙을 충실한 내용으로 채울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반 일리치는 친교의 봉사를 수행할 사람을 뽑을 때 그 사람의 내면에 이 '감각'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신학 자격증이나 세속으로부터 은둔한 시간에 따라 이 감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대중을 가르칠 전문적 능력보다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조율해 나갈 예언자적 겸허함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이반 일리치는 매주 전례를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 독서가 전문적인 신학 연구보다 성직자 훈련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렇다고 그는 엄밀한 신학 연구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학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싶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신학의 기능은 오늘날에 맞게 그리스도의 진술을 명확히 밝히거나, 계시의 진리에 그 진술이 충실한지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된 진리를 오늘에 맞게 표현하는 능력은 교회의 신앙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 능력이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신학은 믿음을 검증하지만 영적인 독서는 그 믿음을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이 현대 사회의 문제에 맞춰 복잡하고 전문화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도 믿음을 새로운 언어로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강조하며 말하고 있다. 이 영적인 독서로 교회는 한 번도 복음의 빛으로 밝힌 적이 없는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공동체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교회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과 지적으로 깊이 있는 신학을 가짐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영적인 독서로 '교회적 감각'을 키우고, 성령을 통해 교회를 끊임없이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때 성령은 새롭게 나타나 사람들 마음속에 하느님 왕국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임을 통해 교회 전체, 인간성 전체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키우고 가꾸며 실현하는 곳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격적인 만남에서 출발하고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인격적인 만남이란 모든 사람이 축복해 마지않는 사랑을 끊임없이 기쁘게 드러내는 것임을 뚜렷이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하며 말한다. 이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봉사와 친교의 장을 성령과 함께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 맺는 글 신학(Theology)에서 신공동체(Theocommunitas)!!! 지역 봉사 섬김이 성패

 

요한의 교회론과 한스 큉, 구티에레스, 이반 일리치가 이해한 교회론을 한국의 현실교회 안에서 어떻게 목회 신학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 전후로 한국 교회는 외적으로 주류 종교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교회 성장이 정체되고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2가지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교회가 바른 가르침을 통해 신학교육과 교회 교육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1세기 말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주류 교회는 전자의 방법을 택했고, 요한 공동체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

 

신학(Theology)이란, 헬라어 Θεος+λογος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관한 말씀(하나님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다. 한스 큉의 지적대로라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만을 한 결과,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요한의 교회론과 오랜 동안 흘러온 신학을 훑어보면서,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와 신학에 대한 다짐을 말해보자면, 먼저 예수와 깊이 만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요한의 보혜사 성령에 근거하여 '세계를 향한 봉사'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여기에 놓치지 말 것은 성령, 신학, 봉사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독서와 친교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이반 일리치의 조언이다. 이것은 요한 신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진정한 신학의 의미 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공동체(Theocommunitas)이다. 이 신공동체(Theocommunitas)Θεος + con- +mūtō (변하다 “change, alter”)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면서 변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前提)되어야 할 것은 바로 대화(communicate)이다. 대화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의 사랑(13:34~35)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고, 성령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머리, 가슴, 다리가 한 몸 안에서 새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신공동체를 통해 그동안 일정 부분 닫혀 있던 신학의 부분들을 '살아있는 대화'로 재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신공동체 속에서 우리 자신이 재발견되고, 서로가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사랑 속에서, 진정한 성령을 다시금 체험하고 세계를 향해 봉사의 마음을 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봉사의 실현을 위해 여러 자료들을 조사하다가,함께 살아나는 마을과 교회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2017년 한목협 조사를 근거로 유의미한 통계를 제시하여 눈길을 끌었다. 목회자들에게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성장하고’ ‘정체하고’ ‘감소하고있는지 평가하게 한 후에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강점을 물었다. 그러자 감소하는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의 81.8퍼센트가 예배라 응답하였고, 다음으로는 12퍼센트가 전도이고, 사회봉사라고 응답한 경우는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62.7퍼센트가 예배라고 응답하고, 다음으로 12.7퍼센트가 봉사라고 응답하고, 전도라는 응답은 4.8퍼센트에 불과하였다. 저자는 그렉 호킨스Greg L. Hawkins와 캘리 파킨스Cally Parkinson 보고서를 인용하여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최상의 5퍼센트 교회의 특징으로, ‘지역사회 목회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최고로 모범적인 교회들의 사역은 단순히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의 목자가 되어 해당 지역의 여러 쟁점들에 더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지역 시민단체에서 지역교회 교인들이 중요한 자리를 맡아 공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이것을 근거로 기독교인은 단순히 개교회에 속한 교인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기독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기독시민 교육을 실시해야 하고, 이렇게 훈련된 기독시민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공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사회를 바꾸고, 정치와 경제를 바꾸고, 우리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역공동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 영적 정체 현상으로 고심하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시민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공론의 장이기에 자기중심적인 개인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인 힘의 원천이 바로 종교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종교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무시되고 있는 도덕의 차원을 다시 공공 영역에서 작동해 주기를 원한다고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도록 하는 데 종교가 기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시민사회는 법과 정치의 강제력이 아니라 결사의 자유가 적용되는 자발적인 영역이고, 이윤과 이기심보다는 헌신으로 동기가 부여되는 삶의 영역들과 관련되었음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가 공공 영역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증진하고, 도덕에 헌신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공동체적 가치들을 형성하는 자리를 마련할 때, 바로 그 곳이 시민 사회와 교회 공동체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사회학자인 정재영은, 교회가 지역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역설(力說)한다. 그 이유는 교회는 시민사회 내의 중요한 자발 결사체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개인의 극단적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공동체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자원이 있다. 즉 타인에 대한 헌신과 돌봄 등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대부분의 도시 계획이나 도시 재개발 사업이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이라면, 마을 만들기는 관 주도의 지역 개발 운동에 오히려 저항하며 주민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 지역 공동체 만들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교회가, ‘전도의 수단으로가 아닌 진정성을 가지고 지역주민들을 만난다면, 교회의 신뢰가 회복되어 자연스럽게 전도의 문도 열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교회에는 미래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현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단지 세상 속에 머무르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명과 과제, 그리고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고 거듭 새롭게 주어지며 그때그때마다 주어질 봉사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교회의 현재가 채워지며, 교회에 의미가 주어진다.

 

교회에 미래가 있는 것은 교회가 미래 그 자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미래는 결코 묘사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여덟 번째 날,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역을 완성시킨 여덟 번째 날이다. 교회는 바로 이 날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며, 세상 자신의 주를 깨닫게 된다. "일곱 번째 시대는 우리의 안식일이 될 것이다. 이 날의 끝은 저녁이 아니라 영원한 여덟 번째 날, 즉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영과 몸의 영원한 안식을 맞이할 주의 날이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이며, 보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보라! 그것은 끝없는 끝이 될 것이다. 마지막 때 우리는 결국 끝없는 나라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참고자료

 

스티븐 S. 스몰리, 요한신학, 김경신 옮김 (서울: 반석문화사)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공동체의 역사와 신학, 최홍진 옮김 (서울: 성광문화사)

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 서신, 홍인규/ 홍승민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김문호 옮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한스 큉, 교회, 정지련 옮김 (서울: 한들출판사)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경북: 분도출판사)

이반 일리치, 깨달음의 혁명(서울: 사월의 책)

유은걸, 요한복음서의 교회론(한국신약협회 신약논단 24)

김동수, 요한복음의 교회론(한국신학정보연구원 헤르메니아 투데이 10)

김동수, 신학과 목회: 요한 교회론과 교회 갱신(신약논문)

정재영, 함께 살아나는 마을과 교회, (SFC, 2018)

 

참고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

https://www.wiktiona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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