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예전에 성서 원어를 공부하다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젊은 여자( עַלְמָה almah)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의 구절이 헬라어 70인역[셉투아진트]으로는 “처녀(parthenos)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번역되었는데, ‘마태가 이 오역에 근거하여 예수의 처녀 탄생을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한 3세기에 오리겐은 이사야서 7장 14절의 ‘알마아’를 어떤 유대인들은 ‘동정녀’가 아니라 ‘젊은 여자’라고 하지만, “알마아( עַלְמָה Almah)라는 단어는 70인역에서도 처녀(a virgin) 또는 젊은 여자(a young woman)로 번역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사야 본문은 이사야가 르신과 베가의 공격을 받아 패전의 위기에 처한 아하스 왕에게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를 보여 주리라.”고 전제한 후 처녀 잉태를 예언한 내용이므로 “동정녀가 아닌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무슨 징조가 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동정녀 해석을 주장하였다. 바르트(K. Barth) 역시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번역상의 오류에 근거한 역사적 전설이라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이러 저러한 주장들을 들으며 ‘어느 것이 맞는 걸까?’하는 의구심을 가지던 있던 차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 살펴보기로 하겠다.
몸 되는 글
Ⅰ. 동정녀에서 순결한 처녀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붙여진 처음 이름은 동정녀 마리아였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마 1:23) 에 나타난 ‘처녀’와 ‘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 못된다. 본래 동정녀는 오늘날 상상하는 생물학적 차원의 육체적 순결을 간직한 미혼 여성을 뜻하지 않았다.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종교적 순결을 서원한 미혼 여성을 구별하여 부르는 이름이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과부’라는 단어도 남편과 사별한 기혼 여성을 부르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남편과 사별한 여성 가운데 일생을 ‘하나님의 딸’로 살겠다고 결단하고 종교적 삶에 헌신한 여성들을 존중하여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회적 관습에 따르는 평범한 삶을 마다하고 스스로 고독한 길이 될 종교적 사람을 선택한 여성들은 자연스레 신앙의 모범이 되었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존경 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 여성에게 종교생활은 은둔이 아니라 가정생활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한 삶에 헌신할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사회적 공간이었다.
하지만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동정녀 개념은 크게 달라졌다.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성실히 살아낸 강직함과 신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육체적 순결함을 끝까지 지킨 정숙한 여인이라는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헬레니즘 세계관에 익숙한 남성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생겨난 변화였다. 특히 로마 사회의 최고 지성으로 교육 받은 이들이 정통을 자처하며 교회의 리더가 되고 기독교의 첫 변증론자로 나서면서 로마의 여성관을 그대로 들여왔다. 동정녀 마리아의 위상(位相)과 표상(表象)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강직한 신앙의 모범이 아닌, 육체적 순결을 간직한 순종적인 처녀로 부각되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초상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기독교교리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의 글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브(하와)가 불순종하여 자신과 인류 전체에게 사망의 원인이 되었듯이, 마리아는 미리 정해진 남편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녀였으며 순종하여 자신과 인류 전체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었다. ...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처음 난 자가 되셔서 옛 조상들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중생시키시고 살아 있는 자들의 처음이 되셨으니, 이는 아담이 죽은 자들의 처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브의 불순종의 매듭은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풀어졌다. 왜냐 하면 처녀 이브가 불신앙을 통해 맨 것을 처녀 마리아가 신앙을 통해 풀었기 때문이다.”(『이단 반박론』Ⅲ. 22. 4)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레네우스가 이브와 마리아를 일컬어 둘 다 처녀였다고 강조하고 나선 점이다. 또한 처녀 이브와 처녀 마리아를 불순종과 순종의 상징으로 대비시킨 부분이다. 이브와 마리아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라는 종교적 프레임을 만들어 두 여인을 한 줄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순종과 불순종을 신앙과 불신앙의 도식(圖式)으로 치환시켜, ‘하나님의 딸’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동정녀 마리아의 강인함과 용기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로마 사회에서 강인함과 용기는 남성적 권위의 상징이요 미덕으로써 여성이 보유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정신이었던 탓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기록된 마리아 찬가는 식민지의 딸로 태어난 마리아가 본래 얼마나 당차고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마리아는 로마 식민 시대의 억압적 상황에서 보란 듯이 의의 승리를 이루는 신의 자비하심을 노래한다. 신의 자비하심이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것이며 비천한 자를 높이실 것이라고 당당히 외친다. 자기 민족의 해방 역사를 소환하여 제국의 폭력성을 고발한 것은 히브리 사상에 온전히 녹아있는 예언자의 목소리 그 자체다.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눅 1:50-53)
마리아 찬가는 희망가였다. 폭압 정치로 민중을 도탄에 빠뜨린 압제자들을 반드시 벌하고 비천한 삶을 강요받은 민중들을 다시 일으켜 새 시대를 열어갈 신의 승리 역사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노래했다. 하지만 이레네우스는 권력의 폭력성을 당당히 고발했던 마리아의 본래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대신에 남자 아담을 유혹하여 세상에 죄를 가져온 ‘요망한’ 이브의 불순종을 갈음하고, 순결을 지켜 교회의 권위에 순종으로 응답한 ‘믿음의 여인’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악한’ 이브의 죄를 소멸하고 마침내 승리자가 된 ‘순결한’ 마리아... 이는 실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찬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남성 리더들이 여성에 대하여 얼마나 이중적이었는지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동정녀 마리아를 ‘순결’과 ‘순종’의 미덕을 갖춘 믿음의 아이콘으로 해석한 것은 남성 리더들이 교회에서 여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쳤고 기대했는지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혐오’와 ‘찬미’의 적대적 이분법은 이브의 사악함을 배경으로 마리아의 ‘순결’과 ‘순종’을 극대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다. 혐오는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악함에 대한 두려움을 극대화하여 ‘순결’을 지키게 하고, 안전이라는 보호막을 쳐서 여성들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는 데에 ‘혐오와 찬미’의 적대적 프레임만큼 효과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러한 프레임은 중세로 접어들며 더욱 진화했다. 중세 여성관을 연구한 차용구는 여성에 대한 남성 리더들의 부정적 서술은 여성 자체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유혹으로부터 보호막을 쳐 순결과 독신의 삶을 지키려 한 자구책이었다고 설명한다. 동시에 사악함에 대한 ‘혐오’와 순결함에 대한 ‘찬미’의 적대적 이분법은 여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에 더없이 유용하고 이념적 도구였다. 자기혐오와 자기 검열을 통해 여성 스스로 순종과 순결을 여성성의 가치로 수용하게 하고, 믿음 있는 여성의 미덕으로 실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당시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자임하고 나셨던 교회들은 여성들의 영적 권위와 리더십을 인정하는 공동체들을 대부분 이단으로 단죄했다. 이브와 마리아의 대비는 이러한 배제 프레임 안에서 더욱 효과를 발휘하여, 이단으로 배제된 공동체에 속한 여성들은 볼순종의 죄를 지은 사악한 ‘이브의 딸들’이요, 남성들이 리더십을 독점한 정통파 교회에 남은 여성들은 순종과 믿음의 여인 ‘마리아의 딸들’로 상징화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정녀 개념은 정통파 교회의 비공식적인 여성 사역으로 제도화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정착하게 되면서 신의 뜻을 따라 살기로 서원한 ‘하나님의 딸들’은 남성들의 리더십 위에 세워진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며 말없이 봉사해야 하는 보조적인 존재로 그 역할이 공식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초기와 달리 2세기에 접어들며 교회 공동체의 리더십은 점차로 남성 지식인들로 채워졌고,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교회의 요구도 달라졌다.
Ⅱ. ‘신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가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로 추앙 받기 시작한 것은 5세기쯤이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있었던 ‘마리아 논쟁’이 계기가 되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고 기독교가 박해받는 종교에서 로마 황실이 후원하는 종교로 급변화한 이후로 새로 생겨난 현상 중 하나가 공의회를 통한 신학 논쟁 종식이다. 마리아 논쟁도 그 중의 하나다. 전에는 기독교의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데 있어 공동체가 합의한 신앙고백이나 리더들의 신학적 변증이 중요했다. 하지만 제국의 종교가 된 후로는 황제의 이름으로 공의화가 소집되고, 황제의 정치적 선택이 신학 논쟁을 결정지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가 된 것이다.
에베소 공의회에서 있었던 마리아의 논쟁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으로 부를 것인지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Christokos)’으로 부를 것인지, 용어의 통일을 두고 교회가 지역으로 나뉘어 갈등한 데서 시작되었다. 논쟁 당시 대중들은 이미 예수의 어머니를 성모로 추앙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시릴(Cyril)이 치밀한 책략으로 공의회를 조종하여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으로 관철시키는 데 성공하자, 안디옥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제동을 걸었다. 네스토리우스는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성서에 근거가 없는 것이며 마리아를 신적인 존재로 경배하는 것이라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에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Christokos)’,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견해였다. 반대로 시릴은 대중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Theotokos가 옳다고 주장하며 수호자로 나섰다. 두 사람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최종 결정권자인 황제는 시릴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공식적으로 ‘처녀 어머니’가 아닌 하나님을 낳은 ‘신의 어머니’, 성모가 되었다. 한마디로 서방교회는 마리아를 신의 소명을 받든 ‘특별한 사람‘에서 신적인 존재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다.
네스토리우스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단으로 파문 당하자, 리비아를 거쳐 이집트 사막으로 갔고 그곳에서 451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를 따랐던 공동체는 시릴이 마리아를 신격화시킨다고 비판하면서 공의회 결정에 불복하고 독자적인 교회를 세워나갔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박해가 뒤따르자 동방으로 향했고, 동방 기독교의 한 갈래를 형성했다. 635년, 중국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가 그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위치가 성모 마리아로 승격되었다고 해서 당시 여성들의 위상이 달라졌거나 여성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마리아 논쟁은 처음부터 동정녀 마리아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를 두고 벌어졌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교리 논쟁(381년)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리아는 이제 단순히 예수를 낳은 ‘순결한 여인’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거룩한 분’으로 예수와 함께 경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후부터 마리아는 궁정에서 시종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왕좌에 앉아 있는 황제나 황후처럼, 천상의 궁전에서 천사와 성자들에 둘러싸인 신의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에 등장했다.
물론 성모 마리아는 이러한 위엄을 갖춘 황후의 모습으로만 교회에서 공경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일반 대중들도 마리아를 찬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신비에 참예하고자 하였다. 특히 교회가 점점 화려해지고 예전과 예배가 장엄해질수록 지방의 촌부들이나 여인들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의 표상을 통해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따뜻한 하나님을 느끼고 싶어 했다. 자신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자비로운 하나님을 찾는 민중들의 종교적 갈망은 자연스럽게 마리아 경배로 이어져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자리잡아갔다. 이러한 흐름은 중세 시대 대중적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동방의 기독교인들에게 성모 마리아는 주로 “거룩함”의 의미로 다가왔다. ‘지극히 거룩한 여인 마리아(Panhagia)’의 아이콘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룩해진 마리아처럼 보잘것없는 자신들도 온전히 거룩해지기를 소망했다. 이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게는 ‘인도자’의 의미도 더해졌는데, 이는 주로 서방의 기독교인들에게 어필했다.
중세의 대중들은 거룩함 그 자체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직접 활동하시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가 죄와 죽음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거룩한 길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은 성지순례라는 중세의 또 다른 신앙 전통을 낳기도 했다. 가장 많은 숫자의 성인들의 유골이 묻혀 있던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울의 성당,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관련된 예루살렘, 동정녀 마리아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곳 등이 가치 있는 성지로 꼽혔다.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겠다고 나선 십자군들은 ‘승리의 마리아(Nikopoia)를 외치며 성모 마리아의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섰다. 십자군전쟁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이슬람에 위기를 느낀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서방에 구원 요청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대성당 앞의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을 향해 성지를 되찾는 성스러운 임무에 참여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제후들과 기사들을 중심으로 십자군이 조직되기를 바랐던 우르바누스 2세의 기대와 달리, 십자군에는 처음부터 기사뿐 아니라 전혀 훈련되지 않은 농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이들 중에는 남편을 대신하거나 남편과 함께 하겠다고 따라나선 여성들도 많았다. 1차 정규 십자군보다 먼저 조직되어 한발 앞서 출발한 그룹도 은둔자 피에르가 이끌었던 ’민중 십자군‘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십자군 전쟁은 단순히 이슬람을 무찌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었던 성지를 찾아 떠나는 ‘영적 순례’였다. 이들은 힘든 여행길과 순교의 위험을 동반하는 전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룰 수 있기를 갈망했다. 십자군에 참여했던 대중들은 이러한 순례의 길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신들을 특별히 보호해 줄 것이며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었고, 제후들과 기사들 역시 전쟁에서 마리아가 특별히 도울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리아의 성화를 품고 전쟁에 나갔다.
이렇듯 신의 어머니가 된 중세의 성모 마리아는 수많은 얼굴로 표상되었는데, 특히 여성들의 고단한 삶에 가장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얼굴은 ‘피에타(Pieta)이다. 죽은 아들 예수를 무릎 위에 눕혀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 세상의 모든 고통을 품어 안은 성모의 모습 말이다.
피에타는 유럽이 흑사병으로 죽음의 시간을 보냈던 14 & 15세기에 대중들 사이로 널리 퍼져나갔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죽은 아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은 어머니 마리아는, 대중들에게 기꺼이 죽음을 넘어선 희망의 표상이 되어 주었다,
하루하루 슬픔과 두려움으로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이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은 저 멀리에서 그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분이 아니었다. 피에타를 통해 사람들은 몸소 세상에 내려와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죽음의 시간을 지나고자 하였다. 또한 피에타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품게 하는 위로의 표상이 되어 주었다. 피에타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예수처럼 자신도 죽고 나면 어머니같이 따뜻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길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들은 피에타를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의 고통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Ⅲ.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다
15세기까지도 여전히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천상의 존재였던 성모 마리아, 거룩한 신성의 상징이었던 후광이 둘린 채 신의 영역에 머물렀던 성모 마리아가, 한 여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사람들 속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르네상스 시대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이유는, 그녀의 귀환을 너무도 생생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상의 빛도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떤 천사도 없이 오직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비탄에 잠겨 하늘의 자비를 구하는 한 여인이 있을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또 다른 천재화가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이라는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는 허름하고 어둠침침한 창고를 연상케 하는 누추한 방에 시신을 닦는 데 쓰는 촛물통을 앞에 둔 채 누워 있다. 카라바조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모의 거룩함을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져 당시 수도사들에게 수취를 거부당한 작품 중 하나였다.
이제 더 이상 성모 마리아는 순결하고 거룩하기만 한 천상의 여인이 아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성모 마리아가 더 이상 하늘과 땅, 종교와 세속, 거룩함과 불경함이 나누어지는 세계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드러냈다. 아름답고 선한 천상의 거룩함과 죄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이 땅의 삶이 따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듯, 동정녀 마리아는 하늘의 여인이요, 신의 어머니가 아닌,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웃고 우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음을 그들의 예술혼이 먼저 알아본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피에타를 그린 이유 역시, 이제는 마리아의 거룩한 사랑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 함께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맺는 말
우리 시대를 위해, 마리아상을 원천에 기초하여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한 인간이지 천상존재가 아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다. 한 인간이요 어머니로서 예수가 참 인간임을 증언해 주고 있다. 마리아의 증언은 예수라는 존재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고, 그의 깊디깊은 근원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를 믿는 이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는 구원의 신앙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한스 큉은 그의 책 『그리스도교 여성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신앙의 본보기요 전형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영혼을 꿰찌르는 칼, 반대,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 그녀의 신앙은 사실 그리스도 신앙의 극명한 본보기다. 마리아는 무슨 유별난 믿음이나 하나님 신비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믿음도 하나의 역사를 겪어 나가며, 그리스도 신앙의 길을 온전히 그려 보여준다.”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마리아가 대답한 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마리아 찬가(Magnificat)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마리아의 일은 바로 예수의 일, 곧 하나님의 일이다. 마리아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도 남성 중심적이거나 가부장 주의적인 면모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오히려 여인들의 친구였으니, 그들을 제자와 협력자로 불러 자신을 따르게 했으며, 그녀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는 초기 공동체들에서 예수의 참된 친구로 공경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이 자유의 영역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처음 읽는 기독교 여성사! 책 전체를 재미있게 보았다. 5년 전에 만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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