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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반식민지 중국, 전족 풀고 혁명에 나서다'

by tat tvam asi 202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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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희정교수의 저서, '역사에서사라진그녀들'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그 중의 한 파트를 발췌해 본다.

 

 

여는 글

 

한국감리교회가 태어난 공간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이 아니다.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버린 동아시아 한복판이었다. 먹잇감을 두고 동서양이 뒤엉킨 적자생존의 아수라장이었다. 19세기는 힘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약육강식의 논리와 승자독식의 지배구조를 당연한 생존법칙으로 여기며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이 선두에 섰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성공시키며 일찍부터 세계로 눈을 돌렸다.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인도의 면화산업을 제물로 삼아 대영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아편을 무기로 중국도 굴복시켰다. 서구세계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한 영국의 성공신화를 부러워했고 앞을 다투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영국을 바짝 따라붙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영국으로부터 떠나온 이민자들이 국가의 기초를 세운 신생국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른 지 겨우 반세기 만에 세계시장을 두고 대영제국과 경쟁할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두 나라는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하며 서구중심의 자유무역 경제체제에 전 세계를 편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세계시장도 빠르게 장악해나갔다. 영국이 중국을 굴복시켜 동아시아 시장의 첫 관문을 열자, 미국은 그 뒤를 따라 일본을 세계시장에 편입시켰다. 일본은 자신이 경험한 서구제국들의 관행을 그대로 좇았다. 한국을 재물로 삼아 별들의 전쟁에 뛰어들었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신생제국으로 일본제국을 완성했다.

 

서구 개신교가 동아시아를 세계 선교 지도에 그려 넣기 시작한 19세기는 분명 모순의 시대였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류 구원의 예수 사랑을 입이 닳도록 외쳤지만, 예수의 선택과 가르침에 정면 배치되는 약육강식의 생존 논리와 승자 독식의 지배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니, 이를 인류 역사의 당연한 법칙으로 받들었다.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종교 활동에 헌신하기로 결단한 선교사들조차 시대의 모순과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몸 되는 글

 

. 모순의 시대, 서구 기독교의 위기감을 드러내다

 

동아시아 선교도 영국과 미국이 주도했다. 정부와 기업들이 손잡고 새로운 시장을 열 때마다 해외선교의 열망을 품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항상 동행했다. 중국선교의 문은 1842년 영국이 열었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후 영국은 난징조약 체결로 중국의 빗장을 여는데 성공했다. 난징조약은 서구열강이 동아시아 국가와 맺은 첫 번째 불평등조약이었다. 특히 5개 항구를 개방한다는 것과 함께 기독교의 포교활동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기독교 선교허용은 일종의 전리품이었던 셈이다. 그 덕에 1807년부터 35년을 지속해온 비밀포교활동 시대도 끝났다. 2년 후 미국도 중국과 통상조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미감리회는 1847년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동아시아 선교에 뛰어들었다. 콜린스, 화이트, 매클레이, 히콕이 개척선교사로 푸저우에 첫 선교부를 개설했다.

일본선교의 문은 미국이 열었다. 1853년 대통령 특명으로 페리 제독이 군함을 앞세워 일본에 통상을 요구했다. 중국이 굴욕당하는 것을 지켜본 일본은 영리한 선택을 했다. 즉각 굴복하고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1858년 미일수호조약을 정식 체결하고, 그 이듬해 4개 항구를 개방했다. 기독교 선교도 허용했다. 일본은 서구열강들과 맞서는 대신 개방정책을 택했다. 서구열강들의 최고무기인 근대문물을 수용하고 제국주의적 확장방식을 배워 강력한 근대국가를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미감리회는 1872년 일본선교를 결의했다. 기독교 선교가 허용된 지 13년째 되던 해였다. 일본은 메이지정부가 들어서 정치적 혼란을 끝내고 유신을 선포(1868)하여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특히 1872년에는 근대개혁 프로그램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반기독교 법령들도 모두 폐기되었다. 이듬해 중국선교를 개척한 매클레이가 책임선교사로 일본에 먼저 도착했다. 코렐, 데이비슨, 소퍼, 해리스 등 4명의 선교사도 차례로 합류했다.

 

한국선교의 문도 미국이 열었다. 1882년 슈펠트 제독이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2년 뒤 매클레이 선교사가 교육과 의료활동에 제한된 선교허가를 받아냈다. 슈펠트 제독은 무력으로 통상을 요구하다 불태워진 제너럴셔먼호사건(1866) 때부터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6년을 기다려 한국을 다시 찾았고, 중국의 외교적 채널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한미수호조약을 성사시켰다.

 

미감리회가 한국선교의 문을 열게 된 데는 한국정부에서 파견한 사절단이 해외에서 미감리회 인사들과 조우하면서다. 1882년 일본수신사로 파견된 김옥균, 이수정 등이 매클레이와 연결되었고, 1883년 보빙사절단은 미국에서 존 가우처 목사와 만났다. 이들은 학교를 세우고 근대지식을 보급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야말로 한국의 근대개혁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선교요청에 가우처 목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선교는 일본선교부에 맡겨졌다. 1885년 개척선교사로 아펜젤러, 윌리엄 스크랜턴, 메리 스크랜턴이 입국했다.

 

동아시아를 찾은 개척선교사들은 대학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미지의 땅 아시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리로 나가 설교하고 열심히 전도했다. 기대했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경험한 신앙체험과 복음전파의 방식이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교지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자신들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구 기독교가 인간의 욕망과 힘의 논리를 충실히 수행한 자국 정부와 기업들의 도움은 받으면서까지 해외 선교 시장 개척에 나서야 했던 현실적 동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된 탈기독교 현상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급속히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위기감이 해외 선교 시장 개척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에 자리를 내주었던 기독교가 미국에서 재기를 꿈꾸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종교적 기제가 작동한 결과였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가파르게 줄고 있다는 위기감에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고, 해외선교에서 답을 찾게 되면서 미국 사회 전역에 퍼진 복음주의 열정과 자국의 정책적 지지에 힘입어 미국 개신교 여성들의 아시아 선교도 빠르게 이루어져 나가게 되었다.

 

가정 안에 머물며 공공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이전 세대와 달리, 19세기 후반의 미국 여성들은, 도덕과 종교의 영역에서 타락해 가는 세상으로부터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자신들의 할 몫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적 변화에 따른 역할의 확대일 뿐, 개신교 여성들이 추구한 근대 여성관과 성별에 따른 사회적 역할 분리는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여성들의 전통적 젠더 관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를 지켜내기 위한 여성의 의무로 모성을 찬미했고,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경제 활동에 전념하는 남성들과 타락해 가는 사회로부터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경건하고 순결한 어머니를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종교적 동기로 시작된 개신교 여성 운동은 출발부터 나름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 사회가 급속히 세속화 되고 모더니즘의 바람이 강하게 불자 복음주의 신앙에 근거한 기독교 페미니즘은 급속히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와 아울러 이들이 말하던 전통적 모성도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전통적 여성관의 위기는 개신교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을 해외선교에 더욱 쏟아 붓게 만들어서, ‘이교도 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선교활동, 특히 교육 선교를 통해 자신들의 전통적 여성관을 영구화하고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보편 규범으로 해외선교지에 이식하고자 했다.

 

. 불청객으로 찾아온 기독교

 

서구 열강들의 기독교 선교는 모두에게 기쁨을 선사한 유쾌한 역사가 아니었다. 상대를 굴복시켜야 얻을 수 있는 승리는 결코 모두를 위한 승리가 될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가 허용된 것은 가치에 대한 공감이나 종교적 실천에 대한 감동이 아닌, 무력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힘에 의한 굴복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중국은 요구 조항에 따라 서구인들에게 반 강제적으로 항구를 개방했고,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포교활동을 허용했다. 중국, 일본, 한국 등 세 나라가 서구 열강들과 맺은 통상조약에는 입국한 서구인들에게 치외 법권(治外法權)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약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었고, 이들은 안전하게 선교 공간을 확보하고 종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수문을 열 수밖에 없었던 아시아인들에겐 말 그대로 굴욕의 역사였고 그로 인해 동아시아를 찾아온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본래 의미인 기쁜 소식이 되지 못했다.

 

자본과 무기를 장착한 서구 열강들의 통상요구는 수천 년간 지탱된 동아시아의 정치지형에 균열을 내어, 동아시아 세 나라가 근대국가를 세우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행히 불청객으로 찾아든 서구 선교사들의 등장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불행만을 안겨주지 않고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오래된 관습들과 결별하게 만들기도 하고, 기독교선교사들이 도시 곳곳에 세운 여학교들로 인해 아시아 여성들이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기도 하였으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터주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여성이 여성에게 라는 기치 아래 아시아 여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종교적 포석으로 학교를 세웠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문명화의 기초로 인식되었던 서구식 근대 교육이 우선되어야 했다.

 

Christian Missions and Enlightenment라는 책 속에 소개된 최근학자들의 분석이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복음주의 신앙이 초자연적인 종교체험과 확신을 강조하고, 이성을 중시했던 계몽주의 흐름을 거부했다 할지라도 이교도들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선교 전략으로써 계몽주의의 유산인 해방의 언어 교육의 언어를 적극 활용했다...”

 

이는 아시아 여성들의 사회적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의 목표로 설정한 근대 국가 세우기에도 필수불가결한 동력이었다.

 

. 무너지는 중국, 과연 신의 뜻인가?

 

1807년 존 모리슨(John R. Morrison)을 필두로 하여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첫발을 들였다. 포교활동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개별적 차원에서 조용하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중국 개척선교사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첫 번째 도전은 언어였다. 푸저우 방언을 배우고 토착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순간 흩어지는 말보다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는 글이 위력이 있었다. 직접적인 전도보다 성서번역과 문서발행, 학교교육이 더 효과적이었다.

 

또 다른 도전은 건강문제였다. 5년 만에 선교사 4명 중 3명이 귀국했다. 내부갈등의 어려움도 한몫했다. 중국인들의 적대감도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결국 한동안은 매클레이 부부가 홀로 남아 중국선교를 이끌어야 했다. 성서번역과 문서출판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냈다. 매클레이는 학교교육 외에 성서를 번역하고, 감리교 교리서나 예문집을 토착어로 발행했다. 그의 부인은 여성교육을 시작했다. 이는 이후 일본과 한국선교에도 이어져 동아시아의 전형적인 선교방식으로 정착했다. 동아시아는 오랜 역사를 가진 경전과 우주적 차원의 생명사상을 담은 고등종교들이 깊이 뿌리내려 있었기에, 감성적 호소보다는 이성적 논리를 갖춘 글이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초기 개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기는 어려웠다. 서구열강들의 야만적 침략을 직접 경험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않지 않았다. 첫 세례자를 얻는데 10년이 걸렸다. 이후 개종자들이 점점 늘고 토착사역자들도 생겨났지만, 중국인들의 삶에 깊이 녹아들지는 못했다.

 

중국인들을 개종의 대상으로만 인식했던 기독교 특유의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가 한계였다. 이들 눈에 중국인들은 구원받아야 할 타락한 백성이요, 중국은 야만의 땅일 뿐이었다. 토착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기독교의 핵심가치를 공유하기보다는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알리고 개인적 차원의 개종에만 몰두한 것도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선교방식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했다.

 

배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여성 선교는 비교적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1836, 미국 침례교 소속의 헨리에타 셔크(Henrietta Shuck)가 마카오에 첫 여학교를 열고, 중국 여성들에게 근대 교육을 시작했다. 그 후 1876년까지 최소 121개의 여학교가 세워졌고 2천 명 이상의 여학생들이 공부했다. 한마디로 중국에서 여성 근대 교육을 출발시킨 것은 기독교의 작품이었다. 수천 년 역사 동안 시도하지 못한 것을 기독교가 해냈다.

 

서구인들에 대한 의구심과 배타적 태도가 강하게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사회적 노출을 꺼리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여, 귀족이나 중산층 여성이 아닌 소외 계층의 여성들이 기독 여학교 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전혀 반갑지 않게 여겼으나, 선교사들이 풀어놓은 여성 교육이라는 선물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모든 형태의 교육으로부터 배제되고, 세상에 대한 무지가 여성의 겸손이요 지혜라는 생각이 중국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던 터라, 초기 학생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고아 출신이거나 낮은 계층의 여성들이었다. 신분이 높은 가정일수록 여성들이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 또한 엄격해서 낯선 외국인이 가르치는 학교에 부인이나 딸들을 보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과 배타적 태도는 지배 계층의 지식인 남성들에게 유독 강하게 나타났는데, 중화사상에 젖어 있었던 이들은 선교사들을 무지하고 비과학적인 사람들로 여겼다. 중국을 이끄는 고위층 대신, 사회적 규범에서 비켜나 있는 소외 계층 여성들과 힘없고 가난한 가정의 부모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음식과 숙식 제공 등 다양한 인센티브(incentive)를 제시하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줄 것을 설득했다.

 

중국 여성들을 위한 교육 선교는 소수의 지배 계층, 그 중에서도 남성들의 특권으로만 여겨졌던 교육의 기회를 신분이 낮은 계층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유교적 가부장제의 위계질서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마침내 지식과 사회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던 소외계층의 여성들이, 선진적으로 근대지식과 학문을 흡수하여 중국의 근대 여성 운동을 이끈 모던 시대의 선구자들로 성장하여, ‘새로운 중국(New China)’을 이끌 전위 세력이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성 교육을 통해 꾀한 것은 무지로부터 중국 여성들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고통의 근원이 되는 전족이나 여아살해, 조혼, 축첩 등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은 중국 여성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며, 여성의 무지는 곧 중국 사회의 이교적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교도 나라인 중국을 문명사회로 바꾸는 데 여성 교육이 필수라고 확신했다.

 

중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크게 환영 받지 못했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의미가 적지 않았다. 1860, 중국의 베이징 조약에 서명하면서 사회 악습으로 꼽힌 전족, 여아살해, 조혼, 축첩 등을 거부하는 운동도 함께 펼쳐졌다. 그 중 전족 반대 운동이 가장 먼저 성과를 거두었다. 1874, 샤먼의 한 교회에서 전족을 반대하는 첫 단체가 조직된 후 전족 반대 운동이 상하이로 뻗어나갔고, 1902년에 정부로부터 전족 폐지령을 이끌어내었으며, 1924년엔 드디어 중국 정부가 전족을 완전히 폐기시켰다.

 

그러나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한 대로 서구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은 복음주의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서구 여성들이 경험한 가부장제의 성차별적 모순을 모든 여성들의 단일한 억압 경험으로 보편화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방식은 1960년대 2의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났을 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일례로 여성학자 메리 데일리는 자신의 저작 Gyn/Ecology:The Metaethics of Radical Feminism에서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인도의 사티, 중국의 전족,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 유럽의 마녀 화형, 미국의 부인학과 정신요법 등을 여성의 몸과 마음에 행해진 가학적 의식들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했다. 문제는 정체된 동양 진보하는 서양이라는 식민주의 시대가 만든 낡은 프레임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다시 꺼내든 것이다. 중국의 전족, 인도의 사티,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 등이 보여주듯이 동양에서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여성 억압적 관습들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반면, 유럽의 마녀 화형이나 미국의 부인학은 서구 역사에서 특정 시기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끊이지 않고 진보해 가는 것으로 설명했다. 아시아 신학자 곽퓨이란은, 데일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들을 억압해 온 가부장적 요소들을 끄집어내 비판의 칼날 위에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식민 시대에 형성된 인식론적 프레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중국의 전족을 다룰 때에도 중국 여성들을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만 그려낼 뿐, 전족에 대해 저항한 중국인들의 목소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짚어냈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식민구조가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시대가 만든 프레임은 지속적으로 재생 반복되었다. 기존의 프레임을 뒤집어 읽는 데 선구안을 보인 페미니스트들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성교육을 이교적 야만성으로부터 중국 여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전략적 도구로 인식한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시도한 여성 교육은 중국에서 의미 있는 변화들을 이끌어냈다. 중국 여성들은 근대 교육을 제공 받았고, 중국 사회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으며, 기독교 학교는 중국의 성차별적 악습 철폐와 제도 개혁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비록 중국에서 기독교 학교들은 빠른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중국의 유교적 봉건질서와 여성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토대가 되었다.

 

. 여성들이여, ‘국민의 어머니’(國民之母)가 되어라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민족주의 시대(Age of Nationalism)로 접어들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애국 의식이 한껏 고조되었다. 교육을 통한 여성 근대화는 서구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서구 사상을 수용해 근대개혁을 시도하고자 한 중국 지식인들에게까지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창한 캉유웨이는 헌법에 의거한 평등사회를 추구하며 점진적인 대중 계몽 운동을 주도했고, 그 뒤를 이은 량치차오는 대중교육을 통해 백성이 황제에게 복종하는 제국시대를 마감하고 국민이 국가의 일원이 되는 근대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창했다.

 

아시아에서 여성교육을 처음 시작한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종교적 목적으로 출발했다 할지라도, ‘가정 모성의 강조는 근대 국가 건설이라는 아시아의 민족주의적 요구에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이 곧 국가의 기초라는 유교적 전통 윤리를 근대 국가실현을 위한 도덕적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법치주의를 통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 초기의 개혁 운동은 청일전쟁(1894-1895)을 계기로 좌초되고 말았다. 서구 열강들에 이어 작은 섬나라 일본에도 패배한 중국은 강한 충격을 받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을 목도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점진적 개혁이 아닌 혁명을 통해 봉건주의적 제국시대를 마감하고 막강한 공화정부를 세워 정부 중심의 국가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은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서로 급부상했다. 중국의 지도층이 여성 교육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청일 전쟁이 일어난 1890년대 후반부터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통해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았던 것이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단기간에 신생 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에 큰 도전을 받은 젊은 개혁가들이 중심이 되어 1897년에 상하이에 처음으로 사립 여학교를 세우는 등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20세기 초부터는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있었던 여성 교육의 주도권까지 손에 넣었을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여성 교육을 실시하도록 직접 청 정부를 압박했다.

 

이들의 압력으로 청 정부는, 기독교 학교들의 폐쇄령을 철회했으며, 과거 시험을 폐지하는 칙령을 반포하고, 서구 교육 시스템을 채택한 일본의 모델을 따라 근대교육을 시행할 수 있는 교육부를 신설했다. 그러나 정부 개혁안은 남성들을 위한 것으로 여성들은 여전히 배제되었고, 1907년에 이르러서야 여성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청 정부가 여성들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세우기까지 중국에서 여성 교육을 담당한 이들은 환영 받지 못한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중국이 여성들을 위한 근대 교육에 관심을 갖는 동안 기독교 학교들도 계속 성장했다. 특히 중국 고위 관리들이나 특권층 가정에서 여성들을 기독교 학교에 입학시키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남녀 공학의 서구적 시스템을 소개하여 정착시키는 등 여전히 교육제도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1912, 초등 교육에 처음으로 남녀 공학을 도입하여, 2년 후엔 전국적으로 정착시켰다. 이 시기에는 중국 여성들도, 강력한 근대 중국 세우기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으로써 여성들의 사회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남녀동등 교육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남성 개혁가들과 달리, 여성 리더들은 여성들의 동등 권리에 대한 의식 개혁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실용적인 여성 교육을 주창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1906년 중국 북부 지역에 여자 대학이 설립되었고, 후에 옌칭여자대학(Women’s College of Yenching University)으로 발전했으며, 1915년에는 푸저우와 난징에도 여자 대학이 설립되었다. 근대 교육 시스템 도입에 힘입어 중국 여성들은 앞서 변화를 경험하고 근대 학문과 사상을 접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 근대 지식의 습득은 여성들의 사회적 힘의 획득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선교사들은 초기의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교육 기준과 학제를 따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문화 제국주의라는 따가운 비난이 이어지기도 했다. 중국의 개혁적 지식인들이 여성 교육을 중국 재건의 필수 요소로 인식했다 할지라도 서구의 교육 방식과 고등 교육에까지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여성들을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국가에 대한 봉사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국가의 통합과 사회질서를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가족 제도와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인식과 태도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중국 여성들도 서구적 우월감에 근거한 아시아의 문화 비판이나 선교사들이 추구하는 교육을 무조건 따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선교사들의 서구 우월적 선교 방식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하곤 했다.

 

민족주의 정서가 강했던 지식인들은 외세 지배를 마감하고 강력한 통치 시스템을 갖춘 새로운 중국을 성취하기 위해 유교의 전통 윤리를 국가의 도덕적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기조에서 국민의 어머니라는 개념이 이상적 여성상으로 탄생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 메이지 정부가 국가의 젠더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낸 양처현모 개념과 국가를 위해 여성들의 적극 동참을 촉구했던 서구의 공화국의 어머니 개념이 결합된 것이었다. 교육의 주체가 정부였던 일본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가정에서 신민을 생산하는 것에 맞추어졌지만, 아직 막강한 근대 정부를 갖지 못했던 중국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다음 세대의 교육은 물론 정치적 동참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여성관은 중국 여성들로 하여금 반제국주의 애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중국의 변화에 기독교 선교사들도 선교 전략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교적 전통과 문화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과거의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기독교의 가르침이 중국의 유교적 여성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여성들을 위한 기독교 저널들을 발행하기도 하고, 중국 여성들이 여성 교육은 물론이고 아동 교육과 사회개혁에 동참하여 사회정치적 혼란으로부터 국가를 구하는 데 공헌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기독교 학생들이 반제국주의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1911, 아시아의 첫 공화 혁명이었던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급진주의 정치사상과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 번 더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한마디로 이중전략을 취했다.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 대하여는 기독교와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유연성을 보인 반면, 정치적 급진주의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반하는 유물론이라고 경계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반제국주의 정서가 고조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함께 강화되었는데, 이에 대한 선교사들의 우려는 1910,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세계 선교 대회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대회에서 선교사들은 정치적 동요에 관여하지 말고 확립된 정부에 복종하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중국에서 특히 강하게 퍼져나갔던 정치적 급진주의는 당시 세계 각처에서 경험되고 있던 제국주의적 모순 구조에 대한 사회정치적 각성과 맥을 같이 했다.

 

결국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은 유교전통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이를 국가 통합의 에너지로 삼은 중국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바탕이 되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 중국을 휩쓸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맺는 말

 

이 글을 보며, 선교개척자들의 도전과 한계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동아시아를 찾은 개척선교사들은 대학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미지의 땅 아시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리로 나가 설교하고 열심히 전도했다. 기대했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경험한 신앙체험과 복음전파의 방식이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세대였다. 미국전역을 강타한 부흥운동은 회심체험을 통해 죄에 대한 자각을 심어주고 인류구원에 대한 사명을 기독교 복음의 본질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특히 해외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뿌리가 된 부흥운동을 기독교 복음의 원형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전파하는 것이 곧 선교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덫이 있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19세기 선교방식에는 정복주의 신앙관과 확장주의 세계관이 함께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구열강들이 주도한 서구문명화와 기독교의 세계복음화를 동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세계선교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구열강들의 경제력과 외교력에 압도당한 동아시아는 서구학문과 서구식 근대교육을 동경하며 강력한 근대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끓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아시아의 근대욕구를 선교확장을 위한 기회와 에너지로 활용했다. 이는 기독교를 알리고 그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서구식 문명화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환으로 인식한 것은 명백한 신앙의 오류였다는 것이다. 자기 비움을 통한 진리의 확장을 추구해온 기독교의 신앙적 본질과도 거리가 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서 있는 한국감리교회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선교의 낡은 틀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경쟁 확장이 최고 가치였던 과거의 생존방식으로는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야 하는 미래시대를 이끌 수 없다. 아니 생존하기도 어렵다. 새 술은 새 부대를 요구하듯이, 탈근대로 접어든 21세기에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관점과 입장을 담아낼 수 있는 선교의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첫 걸음은 지나온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틀을 넘어서는 데는 과거에 대한 복기나 회귀가 아닌 미래를 향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하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처음 읽는 기독교 여성사! 흥미롭게 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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