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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18, 갈라디아서 시리즈 설교(29)

by tat tvam asi 202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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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7-18

           

인간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흔적이 있습니다. 육체에 새겨진 여러 상처의 흔적들, 수술의 흔적들, 노화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들과 인간관계로부터 새겨진 마음의 상한 심령의 흔적들도 있습니다. 영적인 방황과 혼돈 속에서 새겨진 영혼의 흔적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환경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흔적들을 남깁니다. 어떤 흔적은 우리의 기쁨이고, 또 어떤 흔적은 우리의 슬픔입니다. 어떤 흔적은 시간이 흐르며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흔적은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의 할례 받은 몸은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의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육체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흔적을 만드는 과정은 괴로움이지만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의 흔적을 가리켜 우리는 '낙인(烙印)'이라 부릅니다. 낙인은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으로 노예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찍기도 하였습니다.

 

온전한 관계 속에 형성된 흔적들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줍니다. 반면에 깨어진 관계 속에서 형성된 흔적들은 수시로 그의 인생을 좌절과 분노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따라서 흔적을 다루고 처리하는 방식이 온전하지 못하면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의 흔적"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할례의 흔적'을 염두에 둡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혹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이) 이방인이라도 (율법적인 두려움에서 형식적이요 외형적으로 행하여진) '할례의 흔적'은 결코 "예수의 흔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보호와 칭의와 구원의 징표가 될 수 없음을 역설하고자 함입니다.

 

갈 6:17 /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라는 명령은 아무도 사도 바울과 바울이 전한 참된 복음에 대해서 헛된 도전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바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성도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위한 경고입니다.

 

바울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할례입니다. 할례는 몸의 일부를 베어내어 표시를 만드는 행위이긴 하지만 칭의와 구원의 요건이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흔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할례의 흔적이 몸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흔적'도 '예수님의 흔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에게 흔적을 남기려 시도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예수의 흔적"입니다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할례와 율법이나 안식일 등 어떤 외모를 이용하여 흔들어대도 요동치지 않는 최고의 흔적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흔적"을 흔히 성흔(聖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못 박히실 때 손과 발 네 군데에 자국난 상처와 창에 찔리신 허리까지 모두 다섯 군데를 성흔이라 말합니다. 성흔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의 표시요, 보호와 구원의 표시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신실한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상처의 흔적을 몸에 갖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이러한 상처들의 자국이 그 몸에 나타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이고 첫 번째 인물이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1-1226)인데, 그는 43세 때(1224) 알베르나 산(Mount Alverna)에서 기도하던 중에 십자가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허리에 성흔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예수의 흔적"은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난 성흔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받은 고난의 상처요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예수님의 자국입니다.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기간 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 맞고 고문 당하고 갇히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옥에 갇힌 흔적, 매 맞아 죽을 뻔한 흔적,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은 흔적,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주일 밤낮을 깊음에서 지낸 흔적,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한 흔적,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흔적 등 다양한 수많은 흔적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바울의 육체에 남겨진 이 흔적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흔적입니다. 바울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다가 생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자랑스럽게 여기면 "예수님의 흔적"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6:18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축도입니다.

 

"너희 심령에"는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너희 영과 함께"(μετὰ τού πνεύματος ὑμών)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과 함께 있기를 간절이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내 마음에 있는 예수님의 흔적은 세상에 어떤 환경이 온다 할지라도 모든 괴로움도 녹여내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내 마음에 쌓였던 수많은 고통과 아픔도 다 녹여 낼 수 잇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은 요동치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마음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성령의 권능'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만유의 주재자이신 권능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허다한 두려움을 내어쫓을 수 있고 참다운 사랑의 실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흔적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영(靈)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믿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예수의 흔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흔적, 부활의 흔적, 사랑의 흔적, 복음전파 사역의 핍박 받은 흔적 등 예수의 흔적은 바울이 세상 한가운데서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던 힘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힘들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파괴적인 생각이 마음에 들어올 때마다 "예수의 흔적"이 여러분 안에 있음을 믿고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의 짐들,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정죄감, 우리를 고소하는 고소장,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 버거운 상황들,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 속량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짊어질 모든 무겁고 버거운 짐들이 예수 안에서 녹아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골 2:14-15 /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힘들다안 된다할 수 없다...'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주 예수여! 나를 긍흉히 여겨주옵소서!"의 예수 기도를 읊조리십시오. "아바 아버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외치십시오! 예수님에게는 참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 안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믿는 자마다, 그 권세와 능력에 머물게 되고 그 권능을 우리 삶에 실현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나흘 동안 제가 몹시 고통스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처럼 통증이 심하여, 앉았다 일어섰다가 어렵고, 구부릴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이 아주 심하였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라치면, “아!” 소리를 낼 정도였습니다. 잠을 자려고 누우려 해도 너무 아파서 누울 수가 없고, 간신히 누워 잠을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면, 통증이 밀려와 간신히 새벽기도를 다녀 올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의 흔적이 내 안에 있음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반드시 낫는다고 크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치유된 모습을 상상하며,

"예수님의 사랑으로인해, 나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났다!" 반복하여 글로 쓰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나의 무의식에까지 큰 영향을 주어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으로 '반드시 낫는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강력한 치유 에너지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밀어내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예수님에게 생명 있음을 느끼며 나아갈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할까요?

◦ 먼저, 조용한 장소에서 편안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서 눈을 감습니다.

◦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호흡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며 ‘주님이’, 숨을 내쉬며 ‘내 안에’ 를 속으로 읊조립니다.

◦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함을 느끼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주님께께 사랑의 감정을 생생히 느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가장 멋지게 보이는 거울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 대한 격려와 축복의 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의 신령한 복덩이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친구입니다."

 

깊어가는 이 가을, 나를 붙드시고 새 능력으로 인도하는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의 삶의 모든 영역마다 성령이 이끄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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