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눅 15:20-30
20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할렐루야! 11월의 마지막을 예배와 함께 보내시는 사당중앙교회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곧 연말인 12월이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해의 끝인 12월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또 눈이 내려서 연말의 분위기가 더 나더라구요. 11월에 해당되는 여러 이벤트들을 무사히 마치고 뒤돌아보니 여러 생각이 듭니다.
아마 얼마 전 수능을 치뤘던 수험생들이 가장 그렇게 느낄 것 같아요. 수능을 앞두고서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그리고 끝나고는 후련함과 허탈함이 동시에 드는 복합적인 상태일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긴장과 설렘으로 새 시작을 준비하는 귀한 영혼들을 위해 계속 응원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이제 시험을 보았다고 끝이 아니죠? 결과를 확인해야 합니다. 시험을 보고 나면 그에 대한 성적표가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는지에 따라 성적이 갈리기도 하지요. 시험 점수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다시 시험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내년의 향방이 갈릴 정도로 학생에게 있어 성적표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이 성적표는 수험생들만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2023년의 한해를 살아온 것은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올해 내 수험표는 어떤가요? 그리고 우리의 수험표는 무엇으로 채점되어야 할까요?
11월은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보고 앞으로 올 새 해를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11월 추수감사절을 통해 우리는 익은 곡식을 열심히 추수하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에 감사하는 시간을 갖죠.
우리 성도님들께서 생각하시기에 이번 23년에는 어떤 열매를 추수하셨고, 얼마나 많이 감사하셨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이렇게 느끼실 것 같아요. 감사하기에는 올 한해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입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슬픈 뉴스들이 국내외적으로도 자주 등장했죠. 전쟁, 기후재앙, 마약, 흉기난동, 자살, 사기 등등 여러 논란과 사고가 참 많은 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집니다. 내 지위에 따라 남을 좌지우지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손해는 개의치 않고, 내 권리를 주장하며 누군가 입을 상처는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세상의 이치처럼 느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먼저 공격하고, 또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사람을 경쟁자요, 제거대상으로 보게 된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일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 권력다툼은 형제간, 즉 가족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태초를 기록하는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볼까요?
인류 최초의 살인은 형제 간에 발생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 사이에 일어났지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자 이에 분노한 가인이 아벨을 돌로 친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 이 죄악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서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의 추악한 죄성을 하나님은 아신 것입니다.
한 배에서 태어나 같은 공간에서 자고, 먹으며 생활하는 사랑하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자신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 같이 보이면 그 마음에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분노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서도,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도, 야곱의 12명의 아들들 사이에서도 권리에 대한 갈등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싸움은 세대와 세대를 걸쳐 그러니까 해결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갈등의 굴레였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함께 광야로 내몰리게 되었고,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하였고,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한 동생을 없애버릴 계획을 도모하였습니다. 이들이 서로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장자권, 즉 아버지의 모든 권력과 유산을 그 첫아들이 소유한다는 장자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앞서 언급된 이 모든 싸움 속에서 언제나 둘째 아들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세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던 규범이었습니다. 세력을 유지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처럼 여겨지기도 했지요. 이러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은 완전히 뒤엎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주장할 권리가 없는 둘째 아들을 택하심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장자권이 전복되었다고 해서 싸움이 멈추고 불평등의 문제가 사라졌나요? 결코 아닙니다. 싸움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첫째 아들이 권력을 잡던, 둘째 아들이 권력을 잡던 둘 중 누가 통치자의 자리에 앉느냐가 갈등의 해결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승자와 패자, 위와 아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십니다. 권력을 잡고 군림하는 승자와 모든 권리를 빼앗긴 패자가 명확히 존재해야하는 세상의 법칙을 완전히 부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무척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간결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내용으로 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지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 요청합니다. 멀쩡히 살아계시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그의 사후에 받게 될 자신의 몫을 달라 요청하다니 이루 말 할 수 없이 불경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 몰상식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의 몫을 나누어줍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둘째는 자신의 재물을 다 모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모든 재산을 낭비하게 됩니다. 결국 흉년의 때에 먹을 것이 없어지자 가장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되는데, 바로 이스라엘에 있어 부정과 불결함의 상징인 돼지를 치는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둘째 아들에게 허락 되지 않았습니다.
꼼짝없이 굶게 된 둘째는 그제서야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고 잘못을 깊이 후회합니다. 그리고 차라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을 종으로라도 써주십사 부탁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 도착하기엔 먼 거리이지만 아버지가 그 아들을 알아보는 기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뜨겁게 환대하며 아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시 회복하는 기쁨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로 인해 분노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첫째 아들입니다. 그 맏아들은 둘째를 맞이한 아버지를 향해 부당하다고 소리칩니다. 그런 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지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냐고 부드럽게 타이르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맏아들의 입장에 서서 본 아버지의 행동은 너무나 불공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일 리가 있는 입장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모든 의무를 다함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말아먹은 둘째를 위해 잔치가 벌여지다니 별로 공정해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누굴 위해 하신 말씀일까요?
돌아온 탕자 이야기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말씀의 소제목은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잃은 아들인가요? 예수님이 보시기에 두 아들이 다 잃은 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로 3절의 말씀을 함께 합독하시겠습니다.
눅 15:1-3 /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세 가지의 비유를 전하십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자격과 보상, 죄인과 의인, 장자와 둘째 이처럼 권리를 얻을 만한 있는 이과 그렇지 못한 자로 사람을 나누는 바리새인을 향해 예수님은 새로운 가치, 긍휼과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유산을 받기 합당하기 때문에 유산을 주고 사랑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큰아들에게도 그가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도와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였습니다. 그 대가없는 사랑을 자격에 대한 보상으로 해석한 것은 큰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긍휼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큰아들의 눈에는 자신의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채 결국 없애버린 도둑놈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큰아들도,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아버지의 재물을 더 눈에 담았던 불의한 아들들입니다. 그렇기에 둘 다 재물을 얻기 위해 수를 썼습니다. 작은 아들은 일찍이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나 버리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곁에서 남은 유산을 물려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버지는 이런 두 아들을 아시고 그들을 사랑의 잔치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값없는 선물임을 깨달은 자만이 그 긍휼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겸손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겸손은 세상을 잃은 자와 얻은 자로 구분 짓지 않습니다.
겸손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얻을 자입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이 이미 다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꾀를 내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이 가진 힘을 알아도 겸손과 긍휼로 타인을 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형제들의 다툼,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저는 성경 밖에 서서 그들의 잘못을 평가하는 제 3자의 모습으로 이 사건을 바라볼 때가 많았습니다. 동생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 욕심어린 모습을 비판하기만 했죠. 편한 마음으로 가인을 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욕심의 주인공이 제가 될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목사님 가정에서 전도사님과 사모님 사이에 일어났던 난투극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에게는 먼 타지로 나가, 완전히 달라진 생활양식으로 인해 말도 생각도 문화도 제대로 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밥을 굶던 친오빠가 하나 있습니다. 네, 그레나다에 선교사로 나간 최찬영 전도사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쪽 상황이 많이 나아졌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일일식만 할 정도로 경제적인 문제를 겪었다고 합니다. 매일 같이 고생만 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들을 보고 걱정이 되신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부쳐주셨습니다. 여윳돈을 보냄으로 조금이나마 그 아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기 위함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영상통화를 하는데 찬영 전도사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2주 전에 월급을 받았어야 하는데, 본부에서 아직도 돈을 입금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사모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전화를 끊고 사모님은 당장에 핸드폰을 들어 오빠의 계좌로 돈을 입금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만 실언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엥? 돈 또 보내게? 저는 그날 보았던 싸늘한 사모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시베리아 북풍보다 차가운 얼굴이었어요. 한번도 엄마에게 혼난 적 없는 저였는데, 그날만큼은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따뜻한 집에서 생활하는데, 오빠에게 돈을 조금 더 보내는 것을 아까워하다니 너무 치사해 보인다"고요! 그때는 겨우 한 마디 “엥? 돈 또 보내게?”로 인해 혼나는 것이 조금 억울하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 형제의 아픔보다 엄마가 보내는 돈의 액수가 먼저 눈에 들어오다니... 가인의 욕심어린 마음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몆 천년의 역사를 뚫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점 겸손이 무가치하게 평가되는 요즘입니다. 누군가는 겸손을 기만이고 위선이라 말합니다. 남이 나를 칭찬할 때 겸양 떠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의 전부라 생각하는 탓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척이 아닌 진정한 겸손은 우리로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를 향한 계획에 깊이 감응하는 하여 마침내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서두에 우리 성적표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느냐로 평가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으로 궁극의 장자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과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입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권력과 유산을 상속받을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삶을 사셨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도둑놈 같은 동생을 향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유산을 값없이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 가족이 된 우리는 경쟁을 내려놓고 왕의 자녀들로 사랑의 책임을 나누어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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