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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과학과 신앙 대화의 필요성>

by tat tvam asi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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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화란 무엇인가?

 

진화 : 시간에 따른 변화  경험 데이터

 

진화 이론 : 진화라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과학 이론

 

- 자연 선택, 유전자 변이(진화론은 무신론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진화주의 : 무신론에 기반한 세계관, 과학이 아님우리가 배격할 것이다.

 

2. 창조란 무엇인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창조 순서(창세기 1)

배경 완성
첫째 날 우주, (1:1-5) 넷째 날 , , (1:14-19)
둘째 날 궁창(1:6-8) 다섯째 날 , 물고기(1:20-23)
셋째 날 바다, , 식물(1:9-13) 여섯째 날 짐승, 사람(1:24-31)
일곱째 날 안식하심(2:1-3)

 

3. 창세기 1장에 대한 창조과학의 해석

 

창조과학의 대부 : 휘트콤과 모리스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창조가 6일에 걸친 것으로 묘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본문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아무런 정황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적이며 합리적인 행위이다.”창세기 홍수

 

창조과학(젊은 지구 창조론) :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앙에 기초한 유사과학

 

4. 창세기 1장에 대한 여러 해석들

 

월튼 : 창세기 1장이 태초에 대한 물리적 관점이 아닌 기능적 관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물질을 만드는 분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이미 거기에 존재했던 것은 6일에 걸쳐 질서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간격 이론 : 창세기 1:1 1:2 사이에 긴 간격이 존재했다. (재창조)

 

-시대 이론 : 하루를 한 지질 시대로 이해(고생대/중생대/신생대)

 

슈뢰더 : 시간이 다른 준거 틀에서는 다른 비율로 흐른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적용. 하나님의 준거 틀에서 6일은 지구에서는 수십 억 년에 해당할 수도 있다.

 

상징적, 신학적, 예전적 차원으로 이해

 

 

5. 창세기 1장에 대한 여러 해석들

 

해석 없는 성경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자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사전 이해(해석)가 들어간다.

 

성경은 무오하지만, 무오하다는 말은 성경이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당대의 역사적, 과학적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적 지식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1) 열왕기상 7

지름은 열 자요, 둘레는 삼십 자라둘레는 지름의 3.14배가 되어야 한다. 파이값을 계산할 수 없었던 당대의 수학적 지식의 한계. 이 본문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의미가 있다.

 

2) 성경에는 토끼가 되새김질한다고 되어 있지만, 현대 과학은 아니라고 말한다.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11:6)

 

3)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하시며“(1:16) 달은 광명체가 아니다.

 

6.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는데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어떻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을까?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창조주하는 사실을 기록한 것. 태양, , 바다, 짐승 같은 것들을 섬겼던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을 말함. 과학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과학 너머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순서가 현대 과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창조에 대한 사실 여부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 전투를 목격한 사람의 기록 vs 교전일지의 기록

 

하나님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당대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성경 기자들에게 지동설이나 근대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태초의 창조를 설명했다면, 기록자들도 못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은 말도 안 되는 책으로 당대에 사람들의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 궁창 위의 물(히브리 우주관)

 

7. 천문학적 창조 이해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 언제 만들어졌으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광속(빛의 속도,  30km/s, 음속은 약 340m/s)

광속으로 지구에서 달까지 1, 태양까지 10분미만

가장 가까운 별까지 4, 보통 하늘에 보이는 별까지는 수백~수천 년

 

은하 : 수천 억 개의 별들이 중력에 의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우주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25,000광년 거리에 있음

 

안드로메다 은하 :  260만 광년. 우리 은하에 있는 성운인 줄 알았으나, 허블에 의해 거리가 측정 되어 새로운 은하로 인정받음.

우리 은하보다 두 배 정도 큼.

지금 보이는 안드로메다 은하는 260만 년 전의 모습임.(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현상)

 

달의 1/50 크기의 하늘에 약 5,500개의 은하가 있다.

가장 멀리 있는 은하는 100억 광년이 넘는다.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은하가 있을까?(천억 개~2조 개?)

우주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인간이 헤아릴 수도 없는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8. 물리학적 창조 이해

 

빅뱅 우주론 : 1920년대에 성직자이자 물리학자인 조르주 르메트르(1894-1966)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많은 우주론자들이 이 모델에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은 너무 종교적이고, 시간의 절대적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유대-기독교적 창조관과 너무 유사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혼돈과 공허'(1:2)는 플랑크 시대의 초기 앵자 상태를 상기시키고, 빅뱅의 초기 거대한 에너지 섬광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 행위인 :빛이 있으라”(1:3)에 연결된다.

 

우주는 138억 년 전 시작, 지구는 46억 년 전 시작 추정.(우주의 팽창은 인정된 과학적 사실이고

역추적하여 빅뱅 시기 추정)

 

'인터스텔라'의 시공간 우주와 신학

물리학적 이론을 토대로 시간을 초월한 5차원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 블랙홀에 빠진 주인공(쿠퍼)은 강한 중력으로 인해 시간을 초월하게 되고, 결국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게 된다. 동시에 보지만 다른 시간의 영역에서 있는 주인공은 딸(머피)과 소통할 수가 없다.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데 바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사랑의 힘으로 (중력을 발생시켜) 시계의 초점을 움직여 모스부호를 전달하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서 시간의 영역에 들어오신다. 모세에게는 불타는 가시덤불로, 엘리야에게는 떨어지는 불로, 요셉에게는 꿈으로, 예언자들에게는 환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영원의 영역에 계시는 분이 매개체를 통해 시간의 영역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다. 가장 큰 개입은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셔서 시간의 영역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다. 영화에서 드러나듯 이것은 사랑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9. 창조에 대한 문제는 구원과 상관없지 않는가?

 

창조와 구원은 서로 연결된 주제다.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은 첫 창조(태초)에서 시작해서, 계속적 창조(현재), 새로운 창조(구원)로 끝이 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창조와 과학에서 말하는 시작이 다를 경우, 성경 전체를 믿지 못하거나 신앙의 회의를 느낄 우려가 있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오류가 있다고 느낀 사람이 예수의 구원 사역을 다루는 복음서는 옳다고 믿기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크신 창조 사역을 인간의 제한된 이해에 가둘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 천동설

 

10. 모든 것이 과학으로 설명된다면 하나님의 설 곳은 없어지는가?

 

자연 현상의 기초가 되는 물리법칙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면, 하나님은 자연 현상에 깊게 개입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스스로 만들어져가도록 창조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표현이자 사랑의 표현이다. (인공지능 로봇)

 

진화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강제적 방식보다는 설득적 방식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피콕(1924-2006) : 하나님은 우연과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개입함으로써 창조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과 우연으로 이뤄진 전 과정을 통해 창조.

 

11.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

 

과학 : 자연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 사실의 영역

 

과학은 자연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능력이 없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신앙 : 자연 세계를 움직이는 분이 누구인지. 진리의 영역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사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 왜 내 차가 움직이니? 바퀴가 굴러가기 때문에/ 차 내부에서 피스톤이 움직이기 때문에/ 철수가 운전하기 때문에

 

성경 : 특별 계시, 예수 그리스도, 구원, 창조주, “

자연 : 일반 계시, 하나님이 우주를 어떻게 주관하는지, “어떻게

특별 계시인 성경을 일반 계시로 전락시켜 읽으면 안 된다. 또한 성경이 말하지 않는 내용을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용하면 안 된다.

 기독교와 과학은 모순되지 않는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설명해준다.

과학으로 밝혀지는 우주의 역사를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창조되었으며, 그분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 과학이 말하는 우주는 엄청난 규모이며 엄청난 시간 동안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초월하는 놀라운 세계를 만드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즉흥적인 사건이 아니라, 100억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긴 시간의 마지막에 와서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엄청난 우주의 조그마한 구석인 지구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은 감동 그 자체다. (창조주의 피조물화, 초월자의 시간/공간의 임재)

 

12. 무엇이 두려운가?

하나님의 사역이 스스로 만드신 질서(과학)에 예속되어야 하는가?

 

 

과학이 증명해 줘야만 믿는 연약한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자연 질서, 시공간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부족한 지식에 그분을 가두지 말자.

 

⸙ 결론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 등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고, 태초에 한 번만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닌,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의 방법으로도, 물리학에서 말하는 빅뱅의 방법으로도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다. (물론 창세기 1장에서처럼 6일 동안 창조하실 수도 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증언하고 있고, 현대 과학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8:3-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과학은 신앙에 반대되는가?>

 

1. 종교와 과학의 관계(Ian Barbour)

갈등(Conflict) :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립, 과학적 유물론, 성서문자주의

 

독립(Independence) :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 객관적인 사실 vs 궁극적인 의미, 인간의 관찰과 이성 vs 하나님의 계시, 실험의 검증될 수 있는 수치로 표현 vs 상징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

 

대화(Dialogue) : 과학과 종교는 대화 가능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질문 : “왜 우주는 질서 정연하며 이해 가능한가?“

 

폴킹혼 : ”종교와 과학은 이론을 경험에 연관시켜야 바로잡을 수 있고, 근본적으로 단순한 객곽적 실재보다 불가사의하고 형상화하기 어려운 실재적 존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방법론적 유사성)

 

통합(Integration) : 체계적이고 폭넓은 동반자 관계

(1)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 자연을 통해 신을 인식. 윌리엄 페일리의 시계. 신이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설계 바르트는 자연신학이 불필요하고, 신의 계시를 훼손한다고 주장(신이 자신의 모습을 이미 드러냈는데, 굳이 자연 속에서 신을 찾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

 

(2) 자연에 대한 신학 : (theology of nature) : 종교적 전통 안에서의 주장을 과학을 통해 재확인하려는 신학. 신학의 중요한 근거는 과학 밖에 있지만, 과학 이론은 특정 교리, 특히 창조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교리를 재정립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3) 체계적 융합 : 과학과 종교는 모두 과정철학과 같은 포괄적 형이상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과정사상에 의하면, 실재의 기본 구성 요소는 두 종류의 영속적인 존재(정신/물질이원론) 혹은 하나의 영속적인 존재(유물론)가 아니라 두 가지 양상 또는 단계를 지닌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새로움과 질서의 원천이며, 창조는 오래도록 계속되는 완성되지 않은 하나의 과정이다.

 

피콕 : 하나님은 우연과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개입함으로써 창조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과 우연으로 이뤄진 전 과정을 통해 창조

 

2. 종교와 과학의 관계(John Haught)

(1) 갈등(Conflict)

(2) 분리(Contrast)

(3) 접촉(Contact) : 바버의 대화“ + ”통합

(4) 지지(Confirmation) : 종교가 심오한 수준에서 과학적 진리 탐구에 도움을 줌

 

3. 신앙과 과학의 관계(John Haught)

 

이안 바버의 과학과 종교 대화 유형 + 존 호트의 Science and Faith 1장에서는,

(1) 갈등(Conflict) :과학과 신앙은 반대되며, 화해할 수 없다.

 

(2) 분리(Contrast) : 과학과 신앙은 구별되지만,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과학과 신앙은 철저히 다른 질문들에 대담을 하고 있으므로, 둘 사이에 어떤 갈등도 존재할 수 없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 어떤 경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실제적인 강등도 존재할 수 없다.

 

(3) 대화(Convergence, 수렴) :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구별된다. 하지만 과학과 신앙은 여전히 생산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대화 입장은 갈등 입장과 분리 입장을 넘어 더 풍부하고 더 조화로운 관점으로 이동하기를 시도하는 것이자, 과학과 신앙 사이에 계속적인 대화를 위한 충분한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특히 대화 입장은 서론에서 언급한 새로운 우주 이야기에 대한 신학적 함의에 초점을 맞춘다.

 

4. 과학은 신앙에 반대되는가?

 

우리의 세 번째 접근법인 대화 입장은 갈등 입장이 명료성을 향한 중요한 첫 번째 단계일 수는 있어도, 그 입장이 실재에 대한 보다 논리 정연한 묘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만족시키지는 못한다고 본다. 지식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너무 강력해서 무한정 억누를 수 없다. 그러므로 갈등 입장은 우리가 과학과 신앙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우리의 대화를 불만족스러운 고립으로 이끈다. 137억 년 된 우주의 새로운 이야기가 신학적인 결론을 갖지 않는다는 말인가? 찰스 다윈, 알버트 아인슈타인, 조르주 르메트르, 에드윈 허블, 스티븐 호킹,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다른 과학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혁신적인 생각들이 신앙과 신학과는 어떤 관련성도 갖지 않는다는 말인가?

 

대화 입장은 이들 간에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화 입장은 갈등 입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계가 무한정 분리된 탐구 영역들로 나눠진다고 보지 않는다. 대화 입장은 과학과 신앙이 서로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는 갈등 입장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대화 입장은 신학과 과학적 지식이 계속해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의 완전히 다른 영역에 갇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주론, 지질학, 생물학, 뇌 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은 신앙과 신학을 향한 암시를 제공한다. 대화 입장에 따르면, 성숙한 신앙은 이에 가까이 적응해야 하고, 새로운 발견들이 우리의 자연 이해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신학도 변화되고 성장해야 한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신학은 종종 새로운 과학 이해를 힘입어 전적인 변화를 수행해왔다.

 

대화 입장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제한을 두지 않는 대화를 추구한다. 여기서 대화(Convergence, 수렴)’라는 단어는 과학과 신학 간의 전적으로 만족스런 통합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과학과 신학 간의 안이한 결합을 피하고자 하며, 서로 간의 교류와 대화를 추구한다. 이 입장은 융합은 상호 고립을 둘 다 배척한다. 대화 입장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고, 신앙의 관점은 과학적 발견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대화 입장은 특히 이 책의 서론에서 새로운 우주 이야기(new cosmic story)“라 명명하고 간단히 설명한 것의 신학적 중요성을 탐구하는 데에 관심을 가진다. 대화 입장은 과학으로부터 신 존재를 입증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생명이 진화하고 우주가 여전히 형성 과정에 있다는 새로운 과학적 깨달음에서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한다. 대화 입장은 과학적 증거의 특정한 부분에 호소함으로써 신앙적 주장을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새로운 우주 이야기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신론적 신앙 전통은 특성상 신자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식을 주입하려 노력한다, 약속의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미래로 이끌린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예언자적 신앙 전통들은 모두 절망적이고 비관론적 우주론에 반대한다. 이 신앙 전통들은 희망, 즉 심지어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이 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완성된 진실한 신앙을 생각한다. 과학의 시대에 진정한 신앙은 미래가 열려 있고, 인간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게 상상할 수 없는 성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이다.

 

이런 희망적 관점이 과학에 상충되는가? 대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뜻 보면, 희망을 말하는 신앙적 정신 상태가 과학의 실재론(realism)과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대화 입장은 실제적 약속의 의미로 묘사되는 신앙적 관점과 현대 우주론에 의해 묘사되는 우주의 특징 사이에는 엄청난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어지는 각각의 장에서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일관성과 명료성을 증가시키려는 과학에 의해 제기된 전체적인 탐구는 아브라함 신학의 토대를 이루는 희망이라는 주제와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 적어도 이것은 대화 입장이 취하는 방식이다.

 

아마도 대화 입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저명한 고생물학자이자 예수회 수사였던 피에르 테야르드 샤르댕(1881-1955)이다. 20세기 초중반에 저작을 남긴 테야르는 진화 물리학, 지질학, 우주론이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우주에 흥미로운 새로운 묘사를 제공한다는 것, 그리고 이 묘사가 종교적 신앙을 풍요롭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관찰한 최초의 과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전 우주가 고정된 상태라기보다 하나의 이야기(story)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과학자들 둥 한 명이었다. 동시에 그는 성숙한 신앙과 신학은 우주의 이야기에서 전통적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의미의 단계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화 입장에서 주장하듯이, 신학은 어떤 과학적 정보도 제공할 수 없고, 과학도 신학적 체계를 세울 수 없다. 그러나 과학과 신학을 함께 고려할 때, 과학과 신학은 우주에서 발생하는 참신하고, 지적으로 그럴 듯하며, 도덕적으로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테야르는 과학을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입증하고자 이용한 것도 아니고, 과학과 신앙을 융합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앙과 신학은 현재 우리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과학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과학의 발견에 깊이와 의미를 더할 수 있는 것처럼, 과학도 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테야르는 이 책의 각 주제들에 대해 답할 때, 대화 입장을 위한 많은 영감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대화 입장은 과학적 발견들이 신앙과신학적 질문을 위한 중요한 주제들을 거론할 뿐만 아니라, 신학의 주요 가르침들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질문을 지지한다. 신앙과 성서는 우주의 물리적 특성들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갖고 있지 않다. 과학에 대한 신앙의 내재적 지지는 결코 어떤 특별한 과학적 가설이나 이론에 대한 지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에 대한 신앙의 지지는 훨씬 큰 차원이다 : 신앙과 신학은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Intelligible) 과학자의 자발적인 신앙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사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떤 합리적인 과학자의 끊임없는 열정의 뿌리에는, 세상이 이해 가능하고 진리는 항상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존재한다. 대화 입장에 따르면, 신앙과 신학은 우리의 마음을 과학적 발견과 진실 추구의 모험을 향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전체적인 과학 산업을 지지한다. 신앙과 신학은 과학적 의문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신뢰를 강화시킬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계속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동기를 발견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외부로 나가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과학이 종교적 신앙 같은 것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오직 진리와 이해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근거는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샘솟는다. 신앙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데에 타당한 규칙들이 합리적, 즉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나는 그런 심오한 신앙이 없는 진정한 과학자를 상상할 수 없다.”

 

대화 입장은 과학자가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가장 깊고 가장 합리적인 정당화, 즉 과학적 사고가 이해와 진리를 향한 힘겨운 노력을 계속할 때 필요한 신뢰를 지지하고 부여한다. 과학자들이 신을 믿던 믿지 않던, 과학적 질문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자연이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이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이 설명했듯이, 심지어 과학적 회의주의자도 비록 종종 놀랄 만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자연이 결코 변덕스럽지 않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과학을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가 앞으로 보다 깊은 이해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실한 기대를 필요로 한다. 이런 확신은 과학적 모험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자연의 정합성이 궁극적으로 무한한 신적 지혜, 의미,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신학은 모든 합리적 과학자들에 의해 요구된 신뢰를 위한 전적으로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요약하면, 대화 입장은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을 갖고 있다. 첫째, 과학적 발견들은 신 개념을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둘째, 우주의 기초가 되는 무궁무진한 의미와 진실에 대한 신앙 개념은 더 나은 발견을 위해 계속해서 과학적 사고의 닻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한다. 다시 말하면, 합리적인 시기에 결코 존재의 전 영역을 충분히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대화 입장은 신앙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현재의 좁은 이해를 넘어서 보다 깊고 넓은 이해를 향해 밀고 나가도록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과 신학은 과학적 발견의 진취성을 상당히 고무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연구가 자신들이 탐구하는 세계가 합리적이라는 확신을 확산시켰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대화 입장에 따르면, 누군가가 그러한 신뢰를 표기하는 것은 그를 과학과의 갈등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과학적 발견을 향한 위대한 여정을 준비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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