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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39,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40)

by tat tvam asi 2025.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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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39

 

심한 갈증 · 타는 목마름, 다들 경험해 보셨지요? 아주 심하게 목이 마르면, 물 이외의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타들어가는 갈증, 극심한 목마름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줄 테니, 물 마시는 것을 참고 있으라 한다면, 그 다이아반지에 만족이 되겠습니까? 목마름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의 66% 정도가 물로 이루어져 있어,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고 합니다.

 

지인 한  분이, 수분이 우리 몸에 들어가서 하는 역할을 알려주었는데,

우리 몸에 수분이 들어가서,혈액의 점도를 낮춰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혈전 생성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은 신장을 통해 노폐물을 배출하여 신체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신체 기능을 향상시킨다고 해요. 또한 땀을 통해 체온을 조절하기도 하고, 소화액 분비를 촉진하여 소화를 도우며,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여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고, 노폐물 배출을 돕는다고 하니, 물의 역할이 대단하지요!

 

 타는 듯한  목마름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은 "인간의 본성은 물이 새는 항아리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깨진 항아리에 물을 계속 붓는다 할지라도 물이 빠저 나가기 때문에 금방 비워집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이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마름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 7:37-38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절기가 끝나가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초청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을 《인피니트 웨이》 - 올리브나무 / 조엘 골드스미스 지음, 유영일·이순임 옮김 - 의 책을 통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대체로 신비한 용어, 미지의 실체, 알려지지 않는 존재, 거의 경험하지 못한 무엇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 우리들 내면의 신성한 존재, 신성한 힘으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구적이고 지속적으로 베풀어지는 시혜로서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면에서 활동하는 '실상'에 깨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머지않아 내적 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식 안에서의 '실상'의 활동이며, 그리스도의 성취이다.

 

우리는 순수한 영적 존재, 신성한 의식이며, 자기충족적인 생명이고, 만물을 두루 포용하는 마음이다. 이 빛으로 인해 개인적인 오감으로 인한 환상은 저절로 스러진다.

 

깨달음은 모든 물질적 속박을 해소하고, 영적인 이해의 황금사슬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깨달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도만을 따르고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의 성소를 언제나 밝히고 있는 내면의 '불꽃'이 아닌 다른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 이러한 하나 됨 안에서는 영적인 형제애가 저절로 흐르게 된다. 영적인 형제들이 유념하고 애써 실천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의 훈련뿐이다.

 

깨달은 자들은 은혜에 의해,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인생길을 걸어간다.

 

우리가 이미 신의 성취임을, 신이 우리를 통하여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야 한다. 영적 깨어남이란 모든 개인이 신의 임재라는 사실, 즉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신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제한된 개념일 뿐이며, 이는 결코 영적인 실재가 아니다. 이것이 영적인 지각이다.

 

'그리스도-의식'은 개인의 오감이라는 안개 속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빛나는 신을 본다.

 

우리는 보통 감각의 세계 속에서, 감각의 대상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럼으로써 선과 악, 고통과 쾌락을 경험한다. 우리가 자기 탐구와 명상을 통해서 정신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더 고상한 생각을 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정신적 자질이 더욱 다듬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인내심을 갖게 되고, 더 친절하고 자비로워지며, 더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인 경험들은 이러한 자질들을 얼마나 발휘했느냐를 고스란히 되비추어 보여준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몸과 마음의 차원보다 높은 곳에 '영혼'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 존재의 본질, 우리의 신적인 본성을 발견한다. 몸과 마음은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우리들 존재가 겉거죽의 활동을 멈출 때라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혼'의 영역에서, 우리는 온전한 평온, 절대의 평화, 조화, 그리고 진정한 주권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고통도 쾌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의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적인 감각이 깨어난 사람은 더 이상 오감의 세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아도 '있는 그대로', '실상'의 나타남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주를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사람과 장소와 사물 안에서, 행복과 주권을 찾고 추구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영적인 감각, '영혼-감각'(Soul-sense)을 통해, 전 세계가 우리에게 선물들을 가져다준다. 사람들과 사물들을 향한 욕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매체로 삼아서, 물질적인 감각으로 보면, 사람과 사물은 우리의 대상이고, 우리가 바라는 바이다. '영혼-감각'으로 보면, 우리의 선은 우리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자신을 펼쳐나간다. 사람으로나 개선된 환경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할지라도, '영혼-감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서 친구와 가족을, 인간 경험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앗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아름답고 더 영원한 구차원의 의식을 바탕으로, 우리에게로 그런 것들을 더욱더 확실하게 데려다준다.

 

여러 세기 동안,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왔으며, 그동안 삶의 영적인 의미는 빛과 어둠의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으로 치달아 왔다. 16세기의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지만,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그들 역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 안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말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신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그리스도 예수가 행한 것을 그들 역시 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뿐만 아니라 많은 영적 선견자와 선지자들이 많은 부분 영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살았다는 것을 깊은 사랑과 기쁨으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실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실현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들 안에 있습니다. 밖에서 그것을 찾는 사람은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구하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그가 이미 그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만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의식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그대는 여전히 필멸의 존재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자신을 영으로서, 신의 현존이자 성취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 어느 날엔가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그 모든 애씀을 내려놓고, '주는 자'(the Giver)로서의 우리 자신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돌아올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5천 명의 사람들을 먹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영성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믿음 안에서가 아니고는, 어떠한 결핍감도 자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내려놓고,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필멸의 존재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세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환상이며, ()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필멸의 존재나 물질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두려움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허상에 지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무한한 힘을 개인화하는 진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난, 우리와 동떨어진 바깥의 힘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비례하여, 우리는 무한한 힘을 개인화한다.

 

하나님이신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다. 하나의 '생명'만이 있으며, 이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이고, 모든 개인의 '생명'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개인화한다. 한 사람 안의 신이 다른 사람 안의 신보다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 병도 없고, 죽음도 없다. 이러한 참된 의식은 우리의 내면에서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

 

오직 하나의 '의식',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이 '의식'의 개인화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존재하는 우리의 도우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존재'를 향해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접속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대신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성한 '의식'이 곧 우리의 의식임을 깨닫고,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진실에 대한 앎은 '생명', '진실', '신'의 현존 의식 안에 우리를 터 잡게 해준다. '의식'의 하나 됨에 대한 우리의 이해, 우리의 삶으로서 펼쳐져 나가는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영원한 '진실'의 펼쳐져 나감이다.

 

펼쳐짐의 다음 단계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 의식을 개인화하여 우리의 몸, 우리의 비즈니스, 우리의 가정을 구현한다는 깨달음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속해 있는 의식의 아이디어들임을 알 때만이, 우리는 날씨, 기후, 소득, 건강 및 신체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증거 할 수 있다. 가정, 직업, 몸은 우리 내부의 아이디어들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으로서, 우리의 이해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게 되고, 이러한 진실을 알아야 우리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주권을 행사하는 일은 인간성을 높이는 일도 아니요,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인간성을 쓸어버리고, 우리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가 물리적인 면들을 개선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지켜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펼쳐짐의 단계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나 동물 또는 식물이 갖고 있는 유기체적인 생명이 하나의 '생명',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참 '생명'의 제한된 개념화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물리적 우주를 치유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고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의식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식은 모든 생명을 하나님으로 인지한다. 시각과 소리로 나타나는 물질적인 것은 그 생명 자체가 아니라, 단지 환상이나 존재의 거짓된 감각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영으로서의 우리 의식을 무엇이 참된 '생명'인지를 분별한다.

 

문제의 차원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습의 차원에서는 겉모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겉모습의 차원을 뛰어넘어야 한다. 오감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사물의 참모습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겉모습을 무시하고, 오감으로 나타나는 그림에서 떠나,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7:39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 훌륭한 생산자, 돈벌이가 좋은 사람, 탁월한 세일즈맨, 능력 있는 치유자 등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식 상태가 치유를 하고, 갱신시키고, 페인트를 칠하고, 글을 쓰고, 작곡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의식 상태가 우리에게 한 사람으로서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장면 장면들은, 신에 대해서나 인간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개념 때문에 벌어진 사태들일 뿐이다.

 

우리가 '신'이나 '생명', '신적인 지성', '신적인 자질'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믿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 곧 '의식'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질들을 영원토록 표현하고 있다. '의식', '생명', '영'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긴장을 풀고 우리의 '영혼'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허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에고는 개인적,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통해 무언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려고 하고,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해내려고 한다.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은 머리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지 말고, 신의 생각이 우리의 의식을 채우도록 허용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화된 '영 의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성취하고 자신의 사명을 다할 것임을 언제나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이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성취하는 활약상을 지켜보는 관중이고 증인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관중이 되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생명'과 '생명'이 펼치는 조화를 지켜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운 날이 펼쳐져서 매시간 새로운 기쁨과 승리를 드러내는 모습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계시, '의식'의 무한한 표현들, '영'의 활동과 그 장대한 나타남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의식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일상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신께서 우리 자신의 뒤쪽에 서서 활동하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사랑이 우리가 하는 일들 위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신께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밤마다 우리의 휴식으로 인해 우리를 위한 신의 활동 또한 멈추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잠자는 중에도 '사랑'은 날개를 펼쳐 우리를 보호해 주고, '의식'은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나누어주고, '신성한 섭리'는 밤 동안 내내 우리를 지켜준다. 바깥의 어떤 것도 '의식'으로 들어와서 더럽힐 수가 없다. '신'은 우리의 정신의 출입구에 서서, 오직 실재와 실재가 펼치는 조화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지켜보는 사람이 되라! 증인이 되라! 당신의 의식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활약하시는 것을 목격하라!

 

영과 육 사이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 전쟁은 우리가 육신의 감각을 기꺼이 환영하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물질적 개념들 위에 '영'과 '영'의 법칙을 적용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이 전쟁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우주에 대한 구조적 감각과 인간에 대한 육적 감각이 극복되었을 때만이 평화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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