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명상 통합 표현예술치료사인 김의일은, 자신의 저서 《내 몸이 춤추게 하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손과 발로 추는 춤은 잠시 자신을 즐겁게 하지만 가슴으로 추는 춤은 자신과 공동체를 치유한다!
춤·명상은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는 명상이 아니다. 내 안에 꼭꼭 숨겨진 나만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자동적으로 넘쳐흘러 나오는 감정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정화되고 청소되는 명상이다. 즉, "춤·명상은 심리적 억압을 해방시켜 한과 신명을 풀고,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바람직한 수행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인위적으로 나를 틀 속에 가두어 어렵게 하는 명상이 아니라, 그저 물 흐르듯이, 바람 불 듯이 몸의 느낌을 느끼면서 내 마음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고, 몸이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나타내면 동작이 되고, 그것이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나는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날갯짓하며 춤을 추고 있다. 나도 모르게 나만의 춤을 추는 자기를 발견한다. 참으로 신기하다. 내 몸이 도구가 되어, 그저 몸짓이 뿜어져 나와 춤이 된다. 이것이 바로 춤·명상의 시작이다.
즉 춤·명상이란 경직되어 있는 몸과 마음에 자연스러움을 되찾게 해주는 움직임이며, 명상 속에서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우주 만물의 자연스러운 리듬과 동작, 호흡을 되찾게 해준다.
'명상은 사랑을 배우는 기술 중의 기술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내 안에는 바깥보다 더 크고 놀라운 깊은 세계가 있다. 즉 바깥세상 보는 눈만 있지 않고, 인간 내면을 볼 수 있는 눈도 있다. 이 눈을 다시 사용하여 자기 내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감각을 통하여 바깥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대의 습관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즉 마음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명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바깥으로 치닫고 있는 마음의 습성은 명상으로 다스려지질 수 있다. 명상은 요가식이 아니라, 노력이 없는 명상이어야 한다. 요가식의 명상은 그대에게 어쩌면 몸에 대한 의식을 더욱 일어나게 만들 것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자신의 근원을 관찰하게 하는 자유를 향한 명상을 말한다.
명상은 깨어 있음이다. 있는 그대로 나를 나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뿐, 나중은 그마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개념화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기, 이성적 사유를 이용하여 자아와 대상들에 대한 집착을 초월할 수 있는 명상을 춤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
춤명상의 관점에서 내 몸은 소우주다. 우주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우주 전체와 맞먹는 귀한 존재다. 춤명상은 우주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우주적 관점과 인류의 탄생 역사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는 인간적 관점의 명상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새롭게 확인해 가는 것이다.
춤명상은 어떤 형식이 없다. 잘 추려는 생각이나 의도 없이 그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저절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자연스레 리듬에 맞춰 춤을 추게 된다. 춤·명상은 억지로 동작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느낌만으로도 내 안의 잠재된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춤이 된다.
두뇌교육을 하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이 발현되기 어렵다. 창조성은 쉬면서 비워내고 회복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한 이완이 필요하다.
춤·명상은 스포츠와는 달리 몸 안쪽 근육을 움직임으로써 완전한 이완에 도달하므로 창조성과 자연스레 만날 수 있다. 춤·명상은 동과 정 모두를 포함하지만, 이러한 것을 끄집어내는 명상이기에 획기적인 것이다.
옛 인디언들은 슬플 때 그 슬픔의 고통이 없어질 때까지 춤을 췄다고 한다. 기쁠 때 역시 춤을 취 그 기쁨을 두 배로 누렸다. 춤·명상은 스스로 치유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내면에 숨겨진 창조성이 자연히 발현된다. 철학자 니체도 '몸은 커다란 이성'이라고 말했듯이, 창조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단지 머리가 아닌, 몸이 바뀌고 변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 인지보다는 감성, 감각에 보다 의지하여 오히려 인지적이 아닐 때, 창조성의 잠재력이 나온다. 즉흥, 우연에 창조적 에너지가 더 충만하다. 이제 우리의 신체인 몸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보는 관점을 지식에서 지성으로 전환시켜, 새로운 의식의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할 때이다. 즉 춤·명상을 통해 개인의 삶을 혁신하여 개인과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고 활성화해서 공동의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념, 제도, 규칙, 규범만으로는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개인의 변화를 먼저 선행시킨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시스템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춤을 춰야 할까?'에 대해 고민했다. 춤이 가진 원래의 가치나 본질은 사람에게 너무 필요한 것이고 정말 위대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다. 우리의 기억 정보는 몸에 쌓이는데, 이를 풀어주어야 한다. 이를 풀어내려면 몸을 움직여 표현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서 춤·명상은 세상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병들고 타락한 사회를 해결하는 것에 춤·명상만 한 것이 없다. 춤·명상을 하다 보면 즐거움과 편안함, 그리고 행복이라는 즉각적인 결과물이 생겨난다. 또한 우리들의 몸속 세포 구석구석으로 자유와 행복이 퍼져나가서, 몸속 노폐물을 쏟아내 건강체로 만들어 줄 것이다. 춤·명상은 스스로 면연력을 강하게 하여 진정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통합인으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춤·명상으로 춤을 추면 사회를 조화롭게 만들어 아름다운 인성의 소유자로,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려 깊은 배려으로, 배려하고 나누는 훈훈한 인간미가 넘쳐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니체는 "난 춤출 줄 아는 신만을 사랑한다.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잘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했다.
나도 춤·명상을 해보려 한다. 춤이란 본질로 돌아가 내 삶의 원형을 찾아 나를 나타내는 동작, 내 삶이 춤으로, 내 상각과 감정이 몸으로 전달되어 움직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뇌 과학자 장동선은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 교류한다.
둘째,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장소가 어디든 불문하고 표현해 본다.
셋째, 몸을 많이 움직인다.
춤·명상 동작을 하면 이 세 가지 모두 일어난다. 또한 다른 운동들과 비교할 때 춤·명상이 정신과 질환, 우울증, 치매, 파킨슨병 등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많이 나와 있다.
☆ 나를 찾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난제일 수 있다. 나에 대한 문제인식을 갖지않은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가 대한히 쉽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가가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말과 글로 설명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물을 때 나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병들은 나를 잃었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나를 찾으면 병은 해결된다. 나의 본성을 찾는 여행은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춤·명상에서 '몸 깨어나기'는 우리의 몸을 깨워 잠자고 있던 세포 하나하나 감각이 다시 살아나게 하여, 몸을 살리는 과정의 첫 관문이다. 나를 찾아가는 길에 있는 '몸 깨어나기'는 우리 몸 구석구석을 보듬고 깨워 몸이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과정으로 가는 필수 코스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찾았던 사람도 조금만 인식하지 못하면 금방 잊고 길을 헤매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래서 켄 윌버는 '의식의 상태state'는 일시적이지만 의식의 단계 stage는 영속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듯이 내가 잠깐 어떤 몰입이나 깨달음의 순간을 일시적으로 만날 수 있지만, 그것을 그 단계에 도달하여 올려놓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를 찾았다고 자만해서도 안 되고, 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원히 발견한 것도 아니다. 찾았다는 것은 순간이다. 그 순간 그때 나를 찾고, 잠시 내가 깸 상태를 경험했을 뿐이다. 그것이 오래도록 간직하는 지식처럼 머리에 저장해서 가지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간이고 찰나다. 지금 이 순간 발견하고 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깨달아서 나를 발견했다는 것안 내가 누구인지, 내 몸이 뭘 원하는지를 지금 현재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몸을 알아치리는 단계에 진입하면, 내 몸 진단서를 병원에서 받은 것이다. 진단서만 받으면 소용 없다. 행동만이 나를 동굴에서 나오게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를 나타내는 움직임이 동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춤·명상은 그냥 있음 그 자체가 이미 춤이며, 앉고 서고부터 춤의 시작이다. 눕고 엎으리며, 호흡은 놓치지 않은 상태로 팔을 뻗고 오므리며, 다리는 왼발 오른발 한 발씩 떼어놓으면 춤이다. 춤이 뭐 별것인가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리듬이 절로 나오고 리듬을 타게 된다. 그러더 보니 자연스럽게 나만의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오로지 그 어디에도 없는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춤·명상 춤을 온 국민이 서로 나누면서 출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일할 때 신은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가 춤 출 때 신은 우리를 사랑한다." - 늙은 수피의 말-
매일매일의 일기를 춤으로 써보는 것은 어떨까? 내 몸을 음악에 맡겨 선율이 인도하는 대로, 몸이 가는 대로 따라가 보라. 한참 몰입하다 보면 나는 없고 춤만 남고 선율이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몸을 움직여보라. 나 자신을 춤에 맡기고, 춤이 내면에 있는 혈관을 지나 심장과 손을 거쳐 나가도록 내 몸의 각 부분에 귀를 기울여 보라. 각 부분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각 부분의 이야기가 펼쳐지도록 내 몸을 맡겨 보라.
지금껏 잃어버렸던 내의 시간을 보상 받기 위해 내 몸이 움직이기를 원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관심을 기울여 몸의 각 부분의 움직임을 통해 나에게 말하도록 해 보라. 몸의 부분들을 감지하여 그들이 자신의 의견과 불평을 털어놓게 하여, 마침내 영혼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영으로 충만된 존재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첫 번째 리듬인 자연의 리듬, 땅의 리듬에서 내몸을 움직여 보라.
♬ 지구의 나
지구에 내 몸을 가지고 가지고 나타난 나는 누구인가? 나 없이 있음 존재로 있었던 내가 어느 날 때가 되어 이 지구상에, 아니 현상계에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 원래 나는 자유다, 나는 無다. 나는 없었다. 그냥 있음이다. 내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난 나는 이곳에서, 이 땅에서 소풍 끝나고 돌아가는 날,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즐거웠다고 말하며 떠나면 된다. 그때까지 신명 나게 내 춤을 추면서, 내 목소리를 내면서 나답게 나로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춤을 추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니까.
태초의 리듬에 나를 맡겨라, 그때 올라오는 그 느낌, 감정이 나를 안내할 것이다. 부드럽고 내 몸 마디마디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으로 나와 지구와 우주는 하나다.
춤·명상을할 땐 지구의 리듬에 맞춰 현재 살아 있음을 누리며, 온 우주와 내가 연결된 기분으로, 내 뼈 마디마디가 다 연결된 것처럼 호흡을 놓치지 말고 움직여라!
♬ 불을 가지고 온 나
나는 불이다. 나는 스타카토다. 우주로부터 온 나는 이제 내 고향을 잊고 여기서 나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힘Power가 생명이다. 힘 차게 흔들어라. 거기에 절제의 미덕 또한 포함하며 가지고 있는 나의 '끼'를 발산하라. 불은 강렬하다. 너무 강하면 주변이 타고, 남을 상하게 할 수 있다.그렇지만 너무 약하면 타다가 다 타지 못하고 꺼지고 만다. 적당한 강렬함과 따뜻함이 그 속에 공존하게 해야 한다. 나를 발산하면서 그 속에 나를 다듬어 가는 절제미를 함께 나타내며 춤 추라.
불살라라. 춤·명상에서 불의 리듬은 강함, 직선, 끊음, 안에서 밖으로, 중심에서 말단으로, 나에서 너로, 나에서 우리로, 나에서 모든 것으로 힘이 이동한다. 그것처럼 당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라.
♬ 혼돈의 나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태어났지만, 내 자궁으로 나를 잉태하지 않고는 카오스, 혼돈일 수밖에 없다. 카오스는 기회다. 내 인생에서 하나의 변곡점이다. 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내 몸을 음악에 맡기고, 그저 혼돈의 움직임을 처음 떨림으로 시작한다. 몸을 털어라. 내 몸의 모든 것들, 즉 내 고정된 생각, 무지로부터 오는 고집과 아집, 모든 중독된 감정,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불안, 고통, 우울, 무기력으로부터 나를 내려 놓은 기회를 잡으라.
다 바꿔라!!!
다 변화시켜라!!!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내 속에 집중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털고 비울 때 우리는 더 큰 에너지로 채울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장이 나를 감싸고 나를 보호할 것이다. 우리는 충만으로 채워지는 기쁨을 선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춤·명상의 리듬은 떨림 음이다. 온몸의 60조 개 세포가 다 살아나도록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람에 떨듯 털어내라!
♬ 자유로움의 나
나는 나다.
나는 자유다.
자유로움이 나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하라.
자유로움의 나, 춤·명상의 리듬은 가장 창조적인 춤인 나만의 춤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춤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 자신이 정말 자유를 실감할 것이다.
♬ 있음으로의 나
나는 충만하다.
나는 다 이루었다.
이것이 나다.
내 여행은 이제 마무리해야 한다. 다시 나로 돌아와 나를 돌아본다. 더 바랄 것이 없는, 내 존재만으로도 다 채워진 삶, 나는 조용히 내 춤을 춘다. 아주 낮은 곳으로 임하신 주님처럼 다 내려 놓고, 한 마리 새가 되어 드넓은 창공을 날아간다.
있음으로의 나, 춤·명상은 침묵이다. 이는 영혼의 완전한 휴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비스러운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호흡의 리듬에서 호흡이 올라가면 몸도 몰라가고, 호흡이 내려가면 몸도 내려간다. 호흡은 들숨에 길게 들이쉬고, 날숨에 길게 내쉰다. 동작은 자신의 중심에서 시작하여 몸 전체 말단으로 움직인다. 의식은 참나, 즉 진아와 일치된 궁극의 상태가 된다. 또한 정서는 자비를 , 관계성은 온 우주 만물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 춤·명상 치료의 대상과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자아실현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신병동의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저마다 자신의 신체감각을 깨워 자신의 몸을 인식하고, 몸을 알아가기 위해 감정과 정서를 몸의 반복된 움직임을 통해 표현해 보고, 여러 감정을 움직임으로 표현하면서 몸의 표현을 익히고, 통합을 통한 창조성 개발을 위해 몸의 움직임을 나눈다. 이렇게 몸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보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마음을 나누면서 관계 맺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온 세상을 마셔라!
온 우주를 품어라!
참 자유 안에서 내 안의 신이 춤 추게 하라!
창조적 연결로 나를 표현하기는 표현하는 여러 도구들인 미술, 움악, 소리, 글쓰기, 무용 등이 서로 어울려 상호 작용하며 진정한 나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동작을 하고 그림을 그린 후에 글쓰기를 하면 자유로운 연상이 일어나서 작사가 되어 시로 태어나고, 리듬을 붙여 곡이 된다. 이렇듯 창조적 연결 과정은 자기 탐색을 촉진하고, 깊은 자기 이해와 자신의 내적 원천과 연결되고, 나아가 세계와 우주로 뻗어 나간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연결되는, 극과 극이 만나 새로움을 창조하는 연결된 삶을 살 때, 나를 제대로 표현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 통합표현예술의 치유력
통합표현예술의 치유력은 움직임, 동작, 색채로 표현하기, 그리기, 음악,소리로 나타내기, 글쓰기, 드라마, 연극, 무용, 푸드 아트 등을 그때그때 적재적소 적시에 2~4가지 정도를 통합하여 자기 내면의 움직임을 따라 표현할 때 나오는 치유의 에너지를 말한다. 내담자들은 생각이나 대화를 통해서 할 때의 부담스러움보다는, 표현 놀이를 통해서 할 때 훨씬 쉽고 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스스로 본인이 만들어 놓은 철옹성 같은 내면의 장벽도 동작과 춤을 통해서 움직임과 노래로, 그림과 시로 부숴 버릴 수 있는 내적 치유의 힘이 통합예술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깨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진리란 결코 말로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어떤 확실한 태도의 결과로서 갑자기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진리는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성은 지식으로는 배울 수 없는 한계가 있으며, 각성으로 깨달음을 경험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은 어려운 것이 아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혜안이고 깨어남이다. 그렇게 될 때 '삶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영원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들이 늘 똑같이 묻는 물음 중의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그것은 '나'를 알지 못하고는 어떤 정보나 지식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나'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생각이란 오고 간다. 나의 몸도 아니다. 매분 우리 몸은 수백 만 개의 세포들이 달라지거나 새로워진다. 그래서 7년 쯤 지나면 그전에 살아 있던 세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나'라는 것도 정말 계속 변하여, 실제 내 '몸'이 내가 아니다. 더구나 행복은 남에게 있지 않다. 행복은 나에게 있다. 환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의존을 떨쳐 버리라! 진정한 행복은 원인이 없다. 어떤 이유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냥 행복한 것 그 자체이다. 행복은 우리의 본래 상태이기 때문이다. 삶을 참 쉽다. 삶은 기쁨이다. 환상, 야망, 탐욕, 욕심 때문에 힘들 뿐이다. 이런 것들은 바로 온갖 딱지들과 동일시하는 데서 온다.
어느 날 어느 하나로 고정 짓는 순간,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온전함을 보지 못한 채, 단순하게 그것으로만 이해하는 우를 범한다. 현실이란 말이나 개념에 담을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앎을 넘어서 알아야 한다.
애벌레에게는 죽음이 세상 종말이며, 나비로의 부활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지 않으면 항상 전쟁, 폭력이 끊이지 않는 세상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래사 가장 큰 죄악은 자고 있는 사람들이며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覺者들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성장은 우리에게 참을성을 가지고 친절히 자기 자신을 대할 것을 요구한다. 좌절, 자신의 성장에 대한 특정한 기대, 영적 성장에 대한 계획,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자신을 비난하는 것 등이 모두 보편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에고에 대한 방어는 많은 세월 동안 쌓여 왔기 때문에, 한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영성은 개인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며, 깊은 이해와 통찰을 통해 모든 삶이 관계를 포함한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감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통합 의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과 완전한 이해로 참나를 자각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수행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통합 의식은 개인의 영적 성장에 촉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통합인이 되는 하나의 인간 의식 지도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쓴 《의식혁명》에서 인간의 의식 레벨을 수치화할 수 있었던 것에는 운동 역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자극에 대한 근육의 반응에 기초하여, 긍정적인 자극은 근육에 강한 반응을 초래하고, 부정적인 자극은 현저히 약한 반응을 가져온다는 운동 역학적인 근육 테스트가 의식 지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인간의 의식은 순간순간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며 변화한다.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된 것이 아니다.
건강한 의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등락의 폭은 좁다. 쉽게 단계가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다. 의식 세계가 60의 수준에서, 자기 위주에서 자기 희생으로 생각과 사고가 변한다.
깨달음 | 95 | 언어이전 | 순수의식 | 자아 | 존재 |
평화 | 90 | 축복 | 자각 | 있음 | 완전함 |
기쁨 | 85 | 고요 | 거룩 | 하나 | 다갖춘 |
사랑 | 80 | 존경 | 계시 | 사랑 | 자비 |
이성 | 75 | 이해 | 추상 | 현명함 | 의미 |
포용 | 72 | 용서 | 초월 | 인정 | 화목 |
자발성 | 70 | 낙관적 | 의향 | 감화 | 희망 |
중용 | 65 | 믿음 | 자유 | 능력 | 만족 |
용기 | 60 | 긍정 | 긍정적 피드백 | 용납 | 가능성 |
자존심 | 55 | 경멸 | 과장 | 무관심 | 요구 |
분노 | 45 | 미움 | 공격적 | 복수 | 절대적 |
욕망 | 35 | 갈망 | 구속 | 부정적 | 실망 |
두려움 | 30 | 근심 | 후회 | 징벌적 | 무서움 |
슬픔 | 25 | 후회 | 낙담 | 경멸 | 비극적 |
무기력 | 20 | 절망 | 자포자기 | 비난 | 낙심 |
죄의식 | 15 | 비난 | 파괴 | 원한 | 사악함 |
수치심 | 10 | 굴욕 | 제거 | 멸시 | 비참 |
레벨 | 단계 | 정서적 | 과정적 | 영성적 | 세상적 |
<데이비스 호킨스 박사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의식 레벨>
영성은 모든 인간이 지닌 본성이다. 자기 자신, 이웃, 자연 및 신과의 관계 속에서 조화로움을 유지할 때, 역동적·창조적·통합적 에너지로 작용하여 현실을 초월하여 적응하게 하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해주는 영적 성질이 바로 영성이다. 또한 인간 의식은 발달하고 진화한다. 이러한 발달과 진화가 일어나는 구조와 수준, 질서와 방향성이 존재하며, 모든 의식의 물결에 영(Spirit)이 현존한다. 영은 스스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수준마다 그 수준에 존재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의 발달은 한 개인의 발달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 큰 틀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통합 의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통합 의식이란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영성 교육은 참다운 자아를 찾고 자신의 삶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행복한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또한 페스탈로치(Pestalozi)가 말하는 지 ·덕 ·체의 조화이며, 블룸(Bloom)의 인지적, 정의적, 신체 운동적 영역의 균형이고, 종교적 측면에서 육의 욕정을 제어하는 도덕적 의미의 성화(聖化)를 포괄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성격의 사슬에 묶여 통합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에고(ego)가 강하게 형성되어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그 사슬을 풀고 본질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본질은 진정한 우리 자신, 본질적 자아, 우리 안에 있는 존재(being)의 근본을 의미하는 순수 의식(spirit)이다. 순수 의식은 각각이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 의식이다. 진실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본질 상태인 순수 의식을 회복하는 과정을 시작하고 통합 의식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나의 집착에 의한 나의 것이라는 성격으로부터 '나'를 회복시킴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우리의 성격이 안고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올바른 욕망에 근거하여 행동함으로써, 발달 수준이 높아지고 자아 상태가 유연해진다.
다시 말해 해방의 상태에 도달하는 우리의 본질적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그 길은 자기 자각과 내면의 작업을 통합한 결과로서, 자아 초월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길은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과정이다. 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건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은 일회성이 아닌, 통합의 방향으로, '완전히 기능하는 통합적인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고 통합되어 갈수록 우리는 건강한 특성을 포함하는 통합 의식이 발현되고, 우리 자신은 더욱 자유롭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자기 계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IS THERE A GOD?(신은 존재하는가?) (1) | 2024.09.12 |
---|---|
켄 윌버가 그의 저서 ≪통합비전(the integral vision)≫에서 맺은 결론 (0) | 2024.09.12 |
〔물질-관련 및 중독 장애〕를 읽고 있다 (5) | 2024.09.10 |
〔정신분열 스펙트럼 장애〕를 읽고 있다 (1) | 2024.09.10 |
〔급식 및 섭식장애와 충동통제 및 품행장애〕를 읽고 있다 (0) | 202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