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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반포 한강'에서, 《문》을 읽다...

by tat tvam asi 202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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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가족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다...

 

오후 시간, 잠시 커피 타임을 가지려는 순간...

서로 약속이라고 한듯, 통창으로 흘러들어온  맑은 가을하늘을 바라보다가...

 

"우리, 한강 가자! 김밥과 라면, 커피 싸들고~~~"

 

급하게 저녁 거리를 준비하고, 책과 텐트를 챙기고는 한강으로 갔다... 

 

 

≪올리브나무≫ 출판사의 책은 거의 다 소장하고 있는 편이다...

책의 내용이 주옥 같아서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책이,  《문 :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이다. 저자의 의견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다...

 

 

《문 :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의 저자, 루비 넬슨의 말이다.

 

"언제 어디에나 있지만 눈 뜬 사람에게만 보이는 문, 

궁극의 그 문이 열리면 만사가 풀려 나가고 

그 문이 닫혀 있으면 아무리 큰 부자로 살아도 

'창살 없는 감옥살이'다"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을까? 예수는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나 그 사랑에 안겨 마음이 늘 부자였기에, 그는 외부의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속삭임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 숨소리를 듣고 자기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그 숨을 쉬게 하는가? 누가 그 심장을 뛰게 하는가? 누가 심장을 뛰게 하여 온몸 구석구석으로 피를 돌게 하는가?

 

동서양의 무릇 성인들은 이 '사랑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다 그 큰 사랑 속에 있으며,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님을 깨달았다. 심지어 산천초목까지도!

 

사실 그대는 나의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지 않는 날이 없다. 나는 그대의 세계를 나 자신의 '영'으로 건설하였고, 내 존재의 빛과 향기가 어디에나 없는 곳 없이 스며들어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대가 내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그대의 존재를 가진다는 것을 역력하게 알 수 있도록...

 

그대가 내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그대의 존재를 가지듯, 나 또한 그대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나의 존재를 가진다.

 

그대는 나에 관한 짤막한 단서라도 손에 쥐고자 수없이 많을 곳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아 헤매지만, 정말 "이것이다!"하고 잡히는 것이 없이 늘 막연하기만 하여, 내 현존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데에는 실패해 왔다. 

 

그동안에도 나는 내내 그대와 너무도 가까이 있었건만  그대는 나를 지나쳐 버렸고, 더 이상 나를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대가 나를 찾고자 바깥으로 손을 뻗을 때, 나는 그대의 마음속에, 그대의 가슴 속에, 그대의 영혼 안에 숨어 있고, 그대 안의 의식 속에 숨어 있다. 

 

나는 생수가 솟아나는 그대의 샘이요, 그대의 생명력의 보고(寶庫)이다. 만일 그대가 나의 보물 창고에서 끌어내어 쓸 수 있는 법을 간절히 배우고자 하기만 한다면, 이 보물 창고는 그대의 존재 전체가 신성한 광휘로 빛날 때까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또 내어줄 것이다.

 

그대 내면 의식으로서의 내 존재는, 그대 주변으로 우주가 끝없이 펼쳐지는 것만큼이나 무한하다. 

 

표면 아래에 잠겨 있는 마음은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면으로 끌어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경이로 가득 찬 보물 상자와도 같다. 나는 그 안에 나의 모든 힘, 나의 모든 지혜, 우주의 모든 진리, 존재의 기록, 생기를 불어넣고 완전하게 하는 힘,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을 그 안에 저장해 놓았건만, 그대들은 대부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미지의 상태로 남겨놓아왔다. 

 

표면 아래에 잠겨 있는 마음은 그대들의 신성한 지혜의 중심이지만, 그대들의 절대 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잠재의식은 본래 순수하고 거룩하며, 제한적인 믿음이나 부정적인 믿음에 의해 결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살아 있는 부분이다. 그대가 이 잠긴 마음을 끌어올려서 그것을 그대의 표면 의식과 통합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대의 존재 전체는 그것의 신성한 본성을 입을 것이고,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그대가 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것이 신성을 도둑질하는 짓이 결코 아님을 알게 되리라. 

 

 

그대가 깨어나게 되면, 그대의 잠긴 마음은 열리기 시작하여 느낌의 중심 영역인 가슴으로 확장되어 간다. 나는 그대의 가슴 안에서, 측정 불가능한 '사랑의 저장고'로서 살고 있다. 그대의 희망과 꿈과 지고한 열망은 이 '느낌의 저장고'에서 솟아난다. 그것들은 나의 고요하고 세미한 소리의 메아리이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음표처럼 그대의 겉거죽 마음에 부딪히고 솟아올라, 그대가 그대의 숨겨진 재능과 기술을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그대에게 영원토록 울림을 주고 자극을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대 존재의 중심이 되는 그 '느낌의 저장고' 안에서는 희망과 꿈, 지고의 열망뿐만 아니라 그대의 인간적인 욕심들이 뒤섞여 삶 자체를 어지럽게 만들 많은 것들이 잉태되어 왔다. 그대의 머리와 가슴이 함께 손을 잡고 일함으로써 훨씬 강력한 힘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느낌과 결합하면, 활동이 시작되고, 일이 이루어진다. 느낌이 강렬할수록, 실천력 또한 커지게 마련이다. 

 

너무 간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이렇게 순수한 가슴과 순수하지 못한 머리가 손잡고 일함으로써, 세상을 줄기차게 괴롭히는 수많은 종류의 문제가 생겨났다. 

 

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잘못 사용해 왔고, 자신들의 느낌을 잘못 사용해 왔다. 물론, 그들이 순진하게 그렇게 해온 것은, 생각과 느낌이 한데 섞이게 될 때 작용하는 막강한 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행성 지구가 비뚤어지게 나아가는 것은, 생각과 느낌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구는 내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준비하여, 나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고 충만하게 꽉 채워진 완벽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생각과 느낌은 살아 있는 힘인 데다 나의 아이들이 불완전한 수준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굴리며 헤매곤 하기 때문에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하면서, 불완전한 조건과 환경이 마치 불길한 거미줄처럼 겹겹으로 조성되어 나의 아름다운 행성 위에 작용하고 있다.

 

겹겹이 처진 '파괴의 거미줄'은 근원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퇴행하는 인간의 표면적인 마음이 창조해낸 것이다. 나의 완전한 창조 세계와는 달리, 거친 인간의 마음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하위창조 세계'에서는, 내 지혜의 보물상자가 잠재의식 속에 숨겨져 있어 활용될 길이 요원하다.

 

예수는 이러한 하위창조의 거미줄을 '겉모습'이라 불렀다. 그는 겉모습이 실상과는 너무나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세상 사람들에게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겉거죽만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표면적인 마음이 부정적인 환경에 대한 믿음과 파괴적인 사람이나 세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위창조를 하게 되고, 거기에 힘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의 속성이 지상의 모든 영혼들에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부분이지만, 이것이 인간들에게는 숨겨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신적인 속성을 '아버지 의식'이라고 불렀고, 인간들 안에 있는 그분(근원)은 바깥의 어떠한 힘보다도 강하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잠재의식 속에 감추어두고 있는 생각과 느낌의 창조력을 꺼내어 쓸 수만 있다면, 표면 의식에서 비롯되는 생각과 느낌의 창조력보다 수만 배 이상으로 막강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표면의식을 거룩한 근원 의식과 어떻게 통합하는지 그 원리를 터득한 사람은 누구라도, 하위창조의 세계에 만연하는 파괴적인 힘들을 극복할 수 있다. 

 

내가 그대들을 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하였을 때, 나는 그대들을 완전하게 만들었고, 완전한 세상 속에 자리잡게 하였다. 나는 그대들에게 완전한 마음을 주었고, 그 완전한 마음은 나와 함께한다. 그럼에도 그 한마음 안에는 여러 진동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여러 층의 의식이 존재하게 된다. 

 

인간 의식의 정점 중에서도 최고 정점에는 하나의 '문'이 있으니, 그 문을 통과하면 그대는 하위창조 안에 있음으로써 생기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예수는 수많은 이들의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나의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heart)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진짜이며 자신들의 정체성 또한 자신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생각대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다.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가슴'이란 잠재의식으로 알려진 곳에서 비롯된 깊은 느낌의 영역이다. 잠재의식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의해, 두려움과 의심과 불유쾌한 기억들에 의해, 선과 악이 뒤섞인 혼합물들에 의해 완전히 조건화되고, 이렇게 조건화된 잠재의식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행위와 반응은 자동적인 습관이 되다시피 한다. 이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느낌이 일어나는 곳을 '가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슴'이야말로, 그대가 진실로 누구인지를 알고 진실돤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가슴'은 광대한 저정고와 같아서, 그대가 표면적인 마음을 통하여 무엇을 쏟아붓든, 다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그대 개인의 저장고에 있는 아이디어들의 질은, 그대의 행동과 반응의 질을 결정한다. 그대가 그대의 저장고를 한계 지워진 인간의 믿음들로 채워왔다면, 그대는 그대의 모든 행동들 또한 그렇게 한계 짓게 된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비우고 나로 하여금 영원한 진리로 채우도록 허용한다면, 그대는 대전환을 경험하게 되리라.

 

그대의 가슴을 그대의 창조 센터이다. '가슴'은 생각들과 감정들을 물질화된 형상으로 변환시키는 강력한 발전기와도 같다. 그대가 가슴으로 원하는 것들은 항상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나의 의도이다. 이 창조 저수지의 적절하고 바른 활용을 통하여, 아버지가 가진 것은 어떤 것이든 다 그대 자신의 삶 속에 구현될 수 있다. 그대가 인내를 갖고 추진하고, 그대의 열망이 강렬하기만 하다면.

 

 

나의 우주의 완전함을 깨닫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대의 표면적인 마음을 '비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창조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고, 나는 그대를 그대가 '느끼는' 어떤 것이든 가질 수 있도록 창조했기에, 그대는 그대가 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실감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나와의 '완전한 하나 됨' 또한 경험할 수 있다. 

 

비결은 그대가 스스로 어디에 관심하고 집중하는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조절하는 데에 있다. 나의 자녀들은 모두가 다 나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힘을 지니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다 '작은 신들'이다. 의식의 초점을 조절함으로써 하위창조는 그것이 생산될 때만큼이나 쉽게 지워질 수도 있다. 

 

그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그대가 준비되어 있음을 나로 하여금 알게 하자마자, 나는 즉각 그대들을 내 보호의 날개 아래로 모은다.

 

그대의 표면적인 마음이 선과 악 사이에서 이리 저리 표류하고 있는 한, 그대의 느낌과 감정들이 이러한 표면적인 혼합물들에 의해 주입되는 한, 그대는 그대가 뿌린 것들을 거두게 된다. 그대가 나의 영원한 완전성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표면적인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자마자, 그럼으로써 그대가 자신의 느낌의 저장고를 컨트롤하게 되자마자, 그대의 의식 수준은 모든 악의 조건들이 나의 '빛'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초월의 지점으로 상승하게 된다.

 

예수는 이렇게 높은 의식 수준에서, 표면적인 마음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잠긴 마음'과 통하는 '문'의 안쪽에서 살았다. 이렇게 고양된 의식으로, 그는 하위창조에 나타난 겉모양들을 지울 수 있었고, 병든 나의 자녀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의 죽음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다른 사람들의 몸도 회복시켰다. 

 

'회개'란, 지금 이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의 생각과 느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이키라! 

 

그대가 하위창조의 그물망에 걸려 더 이상 헤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계속해서 머리를 쓰곤 하는 습관을 멈춰 세운다면, 바로 그 순간, 그것은 그대 앞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처음에는 그대 개인적으로, 다음으로는 그대들 집단적으로 그리하여 결국엔 그대들 모두가 기름진 약속의 땅으로 들려 올라가리라. 

 

그때 그대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고, 결국엔 그대가 그토록 들끓는 지상의 스튜 냄비 속에서  고통 받아 왔던 것이 결코 나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리라. 

 

나는 그대를 나의 이미지와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 그대는 나와의 이러한 동등성을 온전히 깨닫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잃어버린 고리'기 표면적인 마음에 있어 왔고,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왔던 것이다. 

 

나는 그대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그대가 나를 향해 돌아서기만 하면, 그대 자신을 비우고 나의 '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나는 그대의 가슴 저장고에 '빛'을 쏟아부어, 영원한 나날 동안 선과 자비로 그대의 삶을 충만하게 하리라. 

 

이 '빛'의 힘으로 그대의 잠재의식 안에서 느낌의 저장고는 본래이 순수성에로 들어올려질 것이고, 그대의 반응을 고양시킴으로써 그대로 하여금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할 것이다. 하여 그대로 새로운 얼굴과 복장을 하고 그대에게 그토록 가까이에 있었던 의식의 '문'을 열게 되리라.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옛 삶의 질서는 사라져 없어질 것이고,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은 철장처럼 여겨져온 하위창조의 망이 그대 앞에서 녹아 버리리라. 이러한 혁신은 시간이나 장소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그대의 수용성에, 그리고 그대는 진실로 신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적용하는 일에 달려 있다. 

 

 

나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나의 자녀들 모두를 너무나 사랑하여서, 그대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가장 아끼는 '가장 위대한 자질'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대들을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 창조했던 것이다. 그대들을 향한 나의 유일한 명령은, 그것을 믿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뿐이었다.

 

너무나 간단하고, 너무나 쉽다. 나의 형상과 모양은 그대들의 핵심으로서, 그대들 각자 각자의 마음과 영혼의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그대 자신의 참자아를 믿는 것뿐이다.

 

그대가 아무리 의심하고 믿지 않아도, 신의 거룩함은 그대의 '잠긴 마음'에 살고 있는 그대의 한 부분이다. 그대의 느낌의 저장고는 오염되어 있지만, 본래는 산을 일으켜 세울 정도로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다. 나의 형상이 곧 그대의 정체성이니, 왜냐하면 나는 진실로 그대의 '생명의 빛'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를 '위대한 우주적 존재'로 지었다. 그대의 내면에서 '위대한 우주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느끼려고 해보아라. 그러면 그대 스스로 알게 되리라.

 

그것이 바로 예수가 한 일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의 전지(全知)가 모든 이들의 핵심적인 성품임을 예수가 터득했을 때,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요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펼쳐 나감으로써 마침내 나의 현존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와 함께 동행하면서 모든 지혜, 모든 사랑, 모든 권능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그대 또한 예수처럼 살 수 있다. 나는 팔을 활짝 벌리고, 그대가 예수처럼 행하고 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에나 있지만 영의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는 '문'을 흘끗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기도의 빛에 의해 그 '문'을 찾아왔다면,

그대의 굶주린 시선 앞에 그 '문'이 결국 환한 빛으로 서 있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그 '문'을 보게 될 날이 오게 되리라.
기도는 그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그대의 마음과 느낌을 집중하는,
강렬하고도 현저한 마음가짐 자체이다.

원하는 마음을 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믿고 믿고 또 믿어서 
'신성한 힘',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믿음은 시시각각 새로워져야 한다. 날마다 자라나야 한다. 
막연한 어떤 감정 상태에 머물러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몸으로 마음으로 존재 전체로 체험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대로부터 근원 에너지를 향해 방사되는 분명한 진동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영'의 힘을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작동되어야 한다.

'거룩한 영'이 그대에게 내려올 때,
그것은 그대의 정수리에 있는 초감각의 영역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그대 몸의 성전으로 끌어당겨지게 된다.
몸의 성전, 거기에서는 그것을 몸들과 세계들의 건축 불록들로 변환시키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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