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행하라
갈 5:24-26
1. 존 그레이(John Gray)의 베스트셀러,「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작품, 많이들 알고 계시지요?
저자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원인을, 바로 '나와 같은 또다른 나를 원하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내가 느끼는 대로 느끼기'를 기대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상대의 반응으로 인해 믿음이 깨져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며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되나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헤아리지 않고, 자기 식대로 행하는 것이 문제겠지요. 이것은 사랑의 바른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왜 느닷없이 책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지 의아하시지요?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사랑하기'가 그들의 화성과 금성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이질적이고 어렵듯이, 땅의 사람이 하늘 하나님과 사랑하는 것이 이질적이고 동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아서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하기 원한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야 해요. 아마 경험으로 모두 알고 계실 거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으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요.왜냐구요?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스런 신부이니까요.
바울은, 교회를 신부 &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그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원하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야겠지요.
하나님은 그의 원하심의 뜻을, 믿는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권능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안에서 일깨워 보이시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인 의식을 '하나님의 영'을 표현하는 '초자아적인' 통로로 만들어 나감에 따라,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실재를 점차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보지 못하게 했던 것들의 환상들이 하나씩 사라져 없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천상적인 속성들'을, 인간의 옷을 입고 있는 '신성의' 완전함으로, 이 지상에 펼쳐 보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셉 베너'의 책, ≪내 안의 나≫에 나온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자, 이제 그대가 곧 나라고 생각하고 믿으라.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우리가 분리되는 일이란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믿으라.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고,
'그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렇다고 '생각하라'.
그것이 그렇다고 확고하게, 마음에 '그리라'.
그대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순간,
그대는'하늘'에 있는 '나'와 함께하게 된다.
진실로, 진실로 그렇다!!!
그대 자신이 스스로를 이런 존재라고 믿으면, 그대는 바로 그 '믿음'이 가리키는 존재가 된다.
그대는 그대가 그렇다고 '믿는' 바로 그 존재이다.
그대의 삶 속에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그렇다고 그대가 '생각하고' '믿음'으로써만, 그대에게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대가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라. '초자아적 영토'에서 나와 함께 산다고 생각하라.
거기에서는 모든 권능이, 모든 지혜가, 모든 사랑이, '나의 이데아'의 삼위일체적인 본성이,
그대를 통하여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전 말씀을 통해 나눈 것처럼 성령의 열매 맺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정과 욕심을 절제하며 살아갑니다.
❚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울 수도 있으나, 두 가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인간들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라고 이야기한 이레니우스의 말을 벗 삼아, 앞으로 수많은 작은 변화들을 우리 안에서부터 일으켜 나가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악에 집중하지 않고 선에 집중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기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어 있는 앞으로의 현실을 이야기하자고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부족이나 결핍'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한, 자신의 소원과는 달리 건강 · 풍요 · 좋은 관계 · 성공 등이 자신에게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본질을 초대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할 것입니다. 바라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이고 어둡고 우울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고 신나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하십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일들이 초대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고 미래를 두려움 없이 살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아로 있는 우리에게 엄마와 가족 〮 주변인이 들려준 말을 듣게 되고, 어려서부터 말을 배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아무런 의지를 발휘할 수 없을 아주 어린 시절, 우리의 부모가 혹은 할아버지‧할머니가, 또는 다른 어떤 양육자가 우리에게 한 말을 통해 ‘지금의 나’ 자신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하다 보니, 오히려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이 바로 우리 인생이 펼쳐지는 모습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은 표현되어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달시켜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기술'은, 아마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기술'일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재빨리 그 상황을 파악한 다음,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을 신속히 결정한 후, 그것에 우리의 주의와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에 능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생각을 통해서 내면의 에너지를 일치시키자는 것입니다. 생각을 이끌어가는 훈련들을 통해 에너지를 한 데 모을 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하는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바라는 것'이 오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만일 그것이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라는 결핍에 관한 생각을 곧바로 시작하기 때문에,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럭저럭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이 듭니다.
바라는 뭔가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불편한 느낌을 편안함으로 완화시킬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희망'과 '긍정적인 기대'로 바꿔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을 통제하는 기술은, 단순히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지혜는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얻어지는데, 삶의 체험들은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저의 삶을 뒤돌아볼 때, 아주 오랫동안 무언가를 원해왔었는데도 얻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 확실히 알게 된 것인데, 저의 생각들이 '원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것의 결핍에 관한 생각에 저의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원하는 것들이 저에게 올 수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며 성경말씀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면서, 우주법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곧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결과들을 통해서 새로운 믿음과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 우주에 흩뿌려놓으신 충만한 잠재성과 가능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그것들이 저의 경험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잘못되어가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중단함으로써, 그리고 이미 이루어져 있는 현실보다는 제가 바라는 삶의 방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함으로써, 저의 에너지가 커지고 그 에너지가 끌어당김의 자력(磁力)을 상승시키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을 통해 다시 말을 배워, 우리가 바라는 이야기를 시작하십시다. 오로지 좋은 것들만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선포하십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상상하며 미래의 기쁨을 지금(NOW) 누리며 말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그분의 모양과 형상대로 나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나에게 주시며 통치하라고 하셨기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든 힘(POWER)과 능력(能力)이, 바로 지금(NOW) 내 안에 있기에...
≪향심기도≫ 라는 책에 기록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저기 밖에'(out there) 계신 하느님, 즉 스콜라주의와 뉴턴식 세계관의 하느님 이해는
관상 경험 자체에 의해 철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의 동굴로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은 살아계시며 모든 것 안에 스며들어 있고
모든 것을 비추고 계시며 모든 것을 불타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 자신의 마음은 거룩한 삼위일체 마음의 홀로그램이며,
활동 중에 있는 사랑이고,
따라서 유한과 무한의 영역은 상호 갈망이라는 깨지지 않는 유대에 의해 연결된다.
'여기 안에'(in here)라는 식의 신관은
예수님과 신비가가 보는 신관(神觀)에만 가까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과학적 이해의 발견에 의해서도 점차로 확증된다.
잘 알려진 성공회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bara Brown Taylor)는,
양자물리학을 알게 되면서 생긴 그녀의 하느님 이미지의 급진적인 전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은 사방 도처에 계신다.
하느님은 위에도 아래에도 나의 피부 안과 밖에도 계신다.
하느님은 망(web)이며, 에너지이며, 공간이고 빛이시지만,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으신다.
마치 이 가운데 어떤 개념도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진짜인 것처럼,
오히려 거기 있는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단일하고 광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드러나 계신다..."
다시 본문으로 가지요.
❚ 갈 5:25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한글공동번역은 25절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구속받은 자, 거룩한 무리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주님의 성령의 내주하심을 입은 자들이기에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자유를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친히 다스려 주십니다.
❚ 갈 5:26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1. "헛된 영광"이란 쓸 데 없는 영광, 자랑을 말합니다. 즉 "잘난 체 하는 자들이 되지 말자"는 권고입니다. 사람들이 무익한 자랑들을 일삼고자 할 때 자기를 주장하게 되고 따라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헛된 영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헛된 영광을 구하던 육체가 이미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한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입니다.
2. "서로 격동하고"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싸움을 거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라는 권고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감정들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아 서로를 자극하기 쉽습니다. 서로 성나게 하지요. 서로 싸움이나 경쟁에 도전하게 합니다. 이것이 "격동(프로칼레오마이)"입니다.
이러한 "격동"은 우리의 자유와 평강을 빼앗아 갔던 감정적인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을 처리하며 서로 격동함으로써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서로 원수 되며, 서로 분노의 감정으로 대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죄의 세력의 지배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그리고 죄의 세력들이 흔드는 대로 격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 감정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한 서로 격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입니다.
3.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에게 질투하는 자들이 되지 맙시다" 라는 권고입니다. 소유의식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의 "욕심"은 죄의 세력의 지배를 받아 서로를 질투합니다. 서로가 함께 사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경쟁자로서 투기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욕심은 서로를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투기(프흐도네오)"란 이처럼 악한 의도로 질투하며 시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탐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할 수 없습니다. 죄의 세력이 부추기는 대로 이웃과 환경을 질투의 대상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미 그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사는 한, 서로 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자의 자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도네시아의 한 섬을 찾은 선교사님 일행이 밤이 되어 한기(寒氣)를 느끼자,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불을 지핀 후에 빙 둘러앉아서 훈훈한 불을 쬐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멀찌감치 숨어서 혹은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원숭이들은 이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게 여겨집니다. 다음 날, 그들도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지피는 흉내를 내며 삥 둘러섭니다. 그러나 원숭이들의 불을 쬠은 흉내일 뿐 거기에 타는 불의 따뜻함은 없습니다.
성령의 훈훈한 불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다만 신앙의 흉내만 있는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가 되어 날마다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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