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밖에'(out there) 계신 하느님, 즉 스콜라주의와 뉴턴식 세계관의 하느님 이해는
관상 경험 자체에 의해 철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의 동굴로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은 살아계시며 모든 것 안에 스며들어 있고
모든 것을 비추고 계시며 모든 것을 불타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 자신의 마음은 거룩한 삼위일체 마음의 홀로그램이며,
활동 중에 있는 사랑이고,
따라서 유한과 무한의 영역은 상호 갈망이라는 깨지지 않는 유대에 의해 연결된다.
'여기 안에'(in here)라는 식의 신관은
예수님과 신비가가 보는 신관(神觀)에만 가까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과학적 이해의 발견에 의해서도 점차로 확증된다.
잘 알려진 성공회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bara Brown Taylor)는,
양자물리학을 알게 되면서 생긴 그녀의 하느님 이미지의 급진적인 전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은 사방 도처에 계신다.
하느님은 위에도 아래에도 나의 피부 안과 밖에도 계신다.
하느님은 망(web)이며, 에너지이며, 공간이고 빛이시지만,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으신다.
마치 이 가운데 어떤 개념도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진짜인 것처럼,
오히려 거기 있는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단일하고 광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드러나 계신다..."
≪향심기도≫ 중에서
『내 안의 나』를 온맘다해, 전심(全心)으로 읽고 있다.
그야말로,
존재를 떠받드는 거룩한 손길에 머리를 조아리며 읽고 있다...
『내 안의 나』는, 나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영감을 받아들이게 하는 파이프라인이 되었다.
『내 안의 나』는, '나의 신성한 이데아'를 계발하고 펼친다는 비전을 더 깊이 이해하는 관문이 되었다.
『내 안의 나』는, 여기에 그려진 것보다 더욱 온전(穩全)하게 '나의 이데아'를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었다.
이 책에서는 숱한 방법으로 '나'를 나타내 보이는 '참된 뜻'을 말해주기 위해, 그 진실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늘 여백을 남겨 두고 있다.
'내가'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金希宣' 안에서 일깨워 보이기 시작함에 따라,
金希宣의 인간적인 의식을 '나'를 표현하는 '초자아적인' 통로로 만들어 나감에 따라,
'나'는 金希宣에게, '나의 이데아'의 실재를 점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金希宣으로 하여금 '나'를 보지 못하게 했던 것들의 '환상들'이
하나씩 사라져 없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金希宣을 통하여 '나의 천상적인 속성들'을,
인간의 옷을 입고 있는 '신성의' 완전함으로,
이 지상에 펼쳐 보일 수가 있으리라...
다시 『내 안의 나』, 그 안으로 들어간다.
심오한 그 안으로... 광활한 그곳으로... 확장된 차원으로...
쓰임새 USE
☞나는 지금껏 '나의 실재'를 언뜻언뜻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내 보여진 그만큼 분명해진 것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대의 내면은 더욱 열려 갈 것이고, 지금 그대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경이로운 풍경을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에 있는 '나의 이데아'가 육신의 껍질을 뚫고 솟아올라 마침내 완전하게 빛을 발할 때, 그대는 '나'를 예배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에, 그대의 인간적인 마음과 지성을 모두 벗어던진 채, 이젠 '신'으로서의 마음과 지성을 품고서.
그대가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진실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내가' 드러내 보여줄 수 있도록 그대와 그대의 인간적인 개성이 허용해야만 한다. '하나'이자 '유일한 원천'인 '내면의 나'에게로 고개를 돌림으로써,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과 신뢰하는 가슴을 지닌 채,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그대의 그릇을 텅 비워 '나'에게로 가져옴으로써.
그때에야 비로소, '나'의 채움을 방해하는 개인적인 의식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나'에 대한 의식으로 그대를 넘쳐 흐르도록 채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대에게 '나의 참된 의미'의 영광을 가리켜 보여줄 수가 있다. 이 모든 '메시지'는 단지 그것을 위한 예비 작업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대가 이 모든 것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점에 당도한 것 같다. 내면에서 말하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대를 준비시키는 일은, 이제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대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그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내가 말하는 '진리들'이란, 그대가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의 이데아'의 여러 모습들을 그대의 의식에 더욱 강렬하게 새겨두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이미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대에게 '진리'로서 가슴에 와 닿은 것들의, '나의 이데아'가 그대의 내면에서부터 표현하고자 고투해 왔던 것들의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들은, 그대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지 않는 것들은, 그냥 지나치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아직까지는 내가 원치 않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진리'는, 하나도 내버려짐이 없이, 그대 마음에 가 닿기를 기다리며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적힌 모든 말들은 '나의 이데아'라는 막강한 힘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숨겨진 '진리'를 인식하는 마음에게는, 이 진리가 살아 숨쉬는 '실재'가 될 것이고, '나의 이데아'의 모습이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무한한 나의 마음'의 모습들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한 나의 마음'이 세상의 본질에 맞게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일 뿐이다. 내가 이 책의 저자라는 매체를 통해 그대의 마음에 말할 때, 나는 단지 '나의 세상적인 자아'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고, '나의 무한한 마음'과 더불어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나의 이데아'를 밀어올려 세상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렇게, 그대는 '내 생각'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내가 그대의 내면에서 인간적인 의식을 향해 직접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대는 '나의 속뜻'을 알기 위하여 더 이상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나를 드러내보여주었다는' 다른 책들을 뒤적일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말해진 것이든, 씌어진 것이든).
'내가' '그대'의 내면에 없는 동안에는, 그래서 '내가' '그대'가 아닌 동안에는, 그래서 '그대'와 '내가' '하나'가 아닌 동안에는, 누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인가? 누가 마음의 인식을 통하여 말을 하는 것이며, 누가 사물을 알아보는 것인가?
그대가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내 마음'의 '전체 의식'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뿐이다. 거기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뿐이다. 심지어는, 내가 '그대의 마음' 안에 있는 '나의 이데아' 속에서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때에야 비로소 만물이 지금 '나의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것'이 된다. 그 모두가 '나의 이데아'가 겉으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물은 내가 '생각'으로써 그들에게 의식을 부여했을 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은 의식의 문제일 뿐이다. 그대의 의식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그대는 '나'와 분리된다. 그대의 마음은 '내 마음'의 한 초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그것을 단지 알 뿐이라고 해도, 그대가 '그대의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의식'이다. 그대는 그대 안에 있는 '나의 의식'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호흡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자, 이제 그대가 곧 나라고 생각하고 믿으라.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우리가 분리되는 일이란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믿으라.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이고,
'그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렇다고 '생각하라'.
그것이 그렇다고 확고하게, 마음에 '그리라'.
그대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순간,
그대는'하늘'에 있는 '나'와 함께하게 된다.
진실로, 진실로 그렇다!!!
그대 자신이 스스로를 이런 존재라고 믿으면, 그대는 바로 그 '믿음'이 가리키는 존재가 된다. 그대는 그대가 그렇다고 '믿는' 바로 그 존재이다. 그대의 삶 속에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그렇다고 그대가 '생각하고' '믿음'으로써만, 그대에게 가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대가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라. '초자아적 영토'에서 나와 함께 산다고 생각하라. 거기에서는 모든 권능이, 모든 지혜가, 모든 사랑이, '나의 이데아'의 삼위일체적인 본성이, 그대를 통하여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대의 초자아적 실재' 안에 있는 '나의 신성한 초자아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각도로 이야기했다.
그렇다, 여러 가지 '진리들'을 반복해왔고,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다. 그대가 주의 깊게 읽어나간다면, 내가 하나의 '진리'를 반복할 때면, 이미 말했던 것에 무언가를 항상 덧붙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인상이 그대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렇게 되면, 나의 의도는 이루어지게 되고, 그대는 머지않아 그 '진리'를 한 '영혼'으로서 깨달을 수 있으리라.
그대가 이해의 경지로 들어서게 되면, 그대는 모든 단어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읽고 또 읽어서, 그대를 위해 비축해 두었던 경이로운 '지혜의 진주들'을 모두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그대에겐 단지 영감의 샘물이 되어줄 뿐이다. 그대로 하여금 '초자아적인' 영토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 그래서 그대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인 '나'와의 달콤한 친교를 나누게 해줄 문이 되어 줄 뿐이다. 그땐, 그대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내가 가르쳐 주리라.
나는 지금까지 여러 관점에서 '초자아적인' 영토를 그려왔다. 거기에 친숙해져서, 그대가 아무 실수 없이 그것을 다른 저급한 상태와 분별할 수 있도록, 그래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초자아적인' 영토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 안에 살 수 있을 때,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나의 말들'이 그대의 마음에서 이해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게 되면, 내가 그대 안에서 그동안 일깨워 온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이 능력들로 인해, 그대는 만물의 '실상'을 점점 더 분명히 보게 되리라. 그대 주변의 모든 개성들 속에서, 아름답고 사랑에 넘치는 자질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과 실수, 단점들까지도 보게 되리라.
그러나 그대로 하여금 이런 실수와 단점들까지 보게 하는 이유는, 그대의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요, 그대 자신의 개성 안에 있는 그런 단점과 실수를 극복해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잘 들으라!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실수에 주목하여 비판을 가한다는 것은, 그대의 자아 안에 그런 단점과 실수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대의 자아 안에 그런 단점과 실수가 여전히 남아 있지 않다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실수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 되면, 그대 안의 '나' 또한, 그대 자신의 단점과 실수를 보라고 호소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그대가 가진 모든 것, 그대의 존재 자체를 그대에게 허락했거나 그대에게로 끌어당겼다(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축복이든, 고통이든, 풍요로움이든 가난함이든). 왜 그 모든 것을 허락했는가? '쓸모를 위해서'. 그대를 깨워, '나'야말로 '선한' 모든 것들의 '수여자'임을 알고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그대가 받아들인 모든 것은 저마다 쓸모가 있다. 그대가 그런 쓸모에 대해 알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가 아직 모든 것의 '수여자'인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수여자'인 '나'를 알 때까지는, 나의 그러한 면을 알지 못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대의 개성은, 내가 그대에게 준 많은 것들을 제거하려 들거나 그대 생각에 더 좋은 다른 것들로 바꿔치려는 노력으로 살쪄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대의 진정한 자아'인 '나'야말로 모든 것의 '수여자'임을 알지도 못했고,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이제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야말로 모든 것의 '수여자'라는 것을. 나야말로 그대의 세상과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자 '내밀한 정수'라는 것을. 심지어는 이런 것들에 대해 그대가 취하는 현재의 태도조차도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대가 바라보는 세상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대의 자세도, '내가' 창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내적인 '완전함'이라는 '나의 이데아'를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그 모두를 사용하고 있는 과정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완전함'인 '그대의 내적인 완전함'은 그대의 내면에서부터 점차 밖으로 펼쳐지게 되리라.
그대가 이를 더욱 더 잘 깨달을수록, 사물의 진정한 의미와 그 용도가, 내가 가져다 주는 경험들과 환경들이, 그대 앞에 비밀의 장막을 열어 보이리라. 왜냐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는 '그대 안에 있는 나의 이데아'를 언뜻 얼핏 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렇게 보게 될 때, 그대는 비로소 '나'를, 그대의 진정한 '참자아'를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가 진정 '나'를 알 수 있으려면, 그대는 먼저 내가 그대에게 준 '모든 것'이 '선한 것'임을 배워야 한다. 그것들은 저마다 '쓸모'가 있으며, '내가' 쓸모 있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그대 개인적으로는 그것들에 대한 관심도 없고 그것들에 대한 권리도 없어서 그대에게 아무런 유익함도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대가 단지 그것들을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아마도 그대를 통하여 아름다운 빛과 소리와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리라. 인간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음악이나 시나 그림이 될 것이고, 그것을 듣거나 본 이들로 하여금 그대를 찬탄케 할 것이다.
나는 아마도 그대의 입을 통하여 아름다운 '진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대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쓰도록 영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대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서, 경이로운 설교자나 교사로서 그대를 추앙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마도 그대를 통하여 병으로 신음아는자들을 고치고 있는 것이리라. 악마를 내쫓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있는 것이리라. 세상이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숱한 경이로운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 아마도 나는 그대를 통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대 개인에게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
그대가 이 조화의 소리를 그대가 하는 모든 말 속에 담아내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 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천상의 달콤한 음악처럼 여겨지지 않는다면.
또한, 그대의 다양하고도 조화로운 균형 감각이 그대의 삶 속에 고스란히 용해되어,
사람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생각으로 그대에게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서 '나의 완전함'을 보게 하는
진실한 예술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내 사랑의 힘'이 그대를 통하여 그들의 가슴 가슴마다로 흘러 들어가
그들을 깨워줄 수 없다면.
그런 '내 사랑'의 힘이 담겨 있는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거기에 감추어진 '나의 이미지'를
그들이 내적인 비전으로 그릴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어떠한 영예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진리들'이, 그대를 통하여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대가 매일, 매시간, 이 '진리'를 살고, 이 '진리'를 호흡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들을 '나'를, '나'의 힘'을 상기시켜 주는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대를 위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두를 위하여, 내가 항상, '나를 섬기는 데에' 쓸 수 있도록, '나의 권능'을 아낌없이 퍼부어 주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지 못한다면.
그대에게, 그런 재능들 중 어느 것도 내가 준 적이 없어서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를 섬기는 그런 길들을 찾을 만큼 아직은 나아가지 못한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가 진실로 그대 안에서 '나'를 알아보는 그만큼, 진실로 '나'를 섬기는 그만큼, 꼭 그만큼, 나는 그대를 들어올려 활용한다. 그대의 개성이 어떠하든, 그대의 단점이나 연약함이 어떠하든, 그대의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그렇다, 나는 나를 섬기는 길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대에게조차 많은 경이로운 일을 하게 할 것이다. 그대의 형제들을 깨우고 촉구하여, 그대의 수준만큼 '나'를 알아보게 하는 일을 추구하도록 할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조차 그대가 만나는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감화를 주도록 할 것이다. 그대가 만나는 이들이 더 높은 이상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을 끌어올리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일을 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동료들을 향하게 하고, 궁극에는 '나'를 향하게 하는 일을 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 그대들이 어떠한 재능을 가졌든, 나는 나를 섬기는 길을 찾는 그대들 모두가, 공동체의 선을 위한 생생한 힘이 되어 주도록 할 것이다. 다수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야망과 열망을 다듬어주고,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내가 정해준 자리에서 세상적인 활동의 중심이 되어 서로에게 효모와 같은 존재가 되도록 할 것이다.
그대는 그때에도 여전히, 무지의 구름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섬기는 길을 여전히 갈망하고,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목말라 하고, 자신은 무가치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를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 자신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갈망과 목마름이, 사실은 '나의 영적인 힘'을 그대에게 퍼부어 주는 통로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길이 바로 온전히 '초자아적' 존재가 되는 길이요,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길이요, '그대 안이 내가' 사용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대의 가슴과 삶 속에서, '나'의 다른 자아들과 '그대'의 다른 자아들의 가슴과 삶 속에서, '나의 의도'를 성취시키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그대가 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해감에 따라,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를 섬기는 데에 실제로 사용함으로써 그대의 의지를 증명하는 정도에 따라, 나는 점차 그대에게 나의 '초자아적인' 권능을, '나의 지혜'와 '나의 사랑'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줄 것이다. '나의 신성한 이데아'의 표현물인 이 세상에서. ('나의 이데아'는, '그대'를 통하여 그 완전함을 나타내고자 영원히 고투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그러한 쓰임을 통하여,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이면 결실을 맺듯, '나'의 영적인 능력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대의 능력 또한 날로 발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머지 않아 알게 되리라. 그대의 인간적인 개성이란 것은, 그것이 갖는 능력이든 힘이든, 사실은 그대를 통하여 '나의 것'이 작동되고 있고 표현되고 있을 뿐인 그대의 그 개성이란 것은, 전적으로 '내가' 사용하기 위한 용도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진정한 성공과 성취감이란, 그러한 쓰임새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리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그대의 인간적인 개성을 통해서만이 표현될 수 있는 '나의 이데아'를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이면 결실을 맺듯 그러한 쓰임새도 날로 능력을 불려가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란 '내가' 가진 모든 영적인 힘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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