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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 막 1:21-26

by tat tvam asi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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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 일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무척이나 많이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이방 땅에서 가장 먼저 하신 사역도 거라사 광인의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던가. 예수님의 사귀축출에 대해 여러 가지 물음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 마가복음 본문을 읊조리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회당에 악한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회당 안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헬라어 원문을 찾아보기로 했다. 

 

​εθς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었다. immediately(그러자) 즉시이 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 선포되자 곧바로 그 자리에 귀신 들린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되는 본문은  νθρωπος ν πνεματι καθρτ이다. 이 뜻은 악한 영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다", 이상하다. 악한 영 안에 있는 사람, 귀신 안에 있는 자의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데..다시 말해 ν삽입 되어 있다는 것은 악한 영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보통은 다 귀신 들린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지, 귀신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을 위해 ν을 쓰지 않는다

 

​τί ἡμν κασοί, ἸησοΝαζαρηνν? 나사렛 사람 예수님우리를 간섭하러 오셨습니까?  

λθες πολσαι μς;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우리란 악한 영과 사람 즉 귀신과 사람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귀신과 사람이 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현재분사 인칭 남성 단수 주격의 λγων 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화자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악한 영과의 연대감을 해체시키지 말아달라는 말을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서는 귀신 안에 있는 사람이 말을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귀신과 연대감을 갖던 사람이 케리그마에 부딪히자 악한 영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말씀에 부딪히기 전에는 연대감을 느끼며 괜찮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부딪히자 악한 영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마가는 이 본문에서 귀신들린 일반적인 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다른 상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영적으로 망가진 사람을...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귀신과 연대감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귀신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셨다. 즉 인간과 예수님과의 조우인 것이다. 

 

본문을 묵상할 성령 안에 있는 악한 안에 있는 마음 안에서 대비되었다. 

 

어거스틴은  인생의 욕심을 desire(욕망)으로 풀어냈다. 합당한 욕망과 불합당한 욕망.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질서에 맞는 욕망은 합당한 것이고, 합당한 desire탐욕으로 바뀔 그것은 불합당한 욕망이 된다고 했다. 

 

 

☞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무지하고 말씀의 통치를 무시하면, 탐욕 많은 인간의 마음에 귀신이 들어가기 쉽다. 안에서 호응하는 나의 더러운 것을 물리쳐야 한다. 욕심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밖에서 오는 악한 영을 환영하며 받아들여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서 뒹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알면, 이 바람 저 바람이 불어도 아무 상관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만이 내 보물 중의 보물, 내 기쁨 중의 기쁨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만큼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목적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전부이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다시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되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 숭배임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다. 

 

하나님 사랑에 나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숨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귀하기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다. 

 

​밖에서 쳐들어 오는 악한 영(원수)을 단칼에 쳐내겠다. 내 안에 있는 무지몽매함, 탐욕(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같은 악한 영의 유혹에 장단을 맞추는 것들을 처단하리라. 원수를 처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다.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권능이 내 안에 빼곡히 채워지게 해야 할 것이다.  내 입장이 이렇게 분명해지면 밖에서 아무리 유혹이 와도 아무 걱정이 없다. ☜

☜ 이 안의 내용이 2015년 헬라어를 공부하며 내가 묵상한 내용이다. 지금은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수와 예언자들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방적으로 훨씬 큰 힘을 떨치는 그런 신학은 이제 점검을 해 보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원죄 교리의 성서적 토대가 흔들림을 깨닫고 그것을 믿음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망가지고 찢기고 죄 많은 세상에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고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에 둘러싸여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시면서 자신을 주셨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나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동방 출신 서방 신학자인 이레니우스의 주장에 한 표를 던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악 이해에서는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성에서 이탈했으므로 그 이탈의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레니우스의 악 이해에서는 인간이 원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을 필요로 하는 미성숙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불완전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신 역시 책임을 진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도 미성숙한 데서 비롯된 시행착오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이름을 등에 업고 16세기 동안 주도한 서양신학은 너무 많은 죄책, 너무 많은 내성(內省), 법과 죄와 은총에 대한 너무 강한 몰두와 집중으로 말미암아 우주와의 관계를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동방교회 신학자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의 의견에 따르자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성적 양심”이 당대 이래 실제로 얼마나 서양 신앙인들의 성서 읽기 전체를 왜곡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한 서양 전통에서는 하느님이 지나치게 내면화되고 우주와 단절시킨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타락/속량 전통은 혼이 몸에 대해 내적 차원이라고, 즉 혼이 몸이라는 새장에 갇혀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온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할 때 행복에 이르고 풍요를 누린다고 기록되어 있건만, 원죄를 출발점으로 삼고 죄와 속량에만 집중하게 될 때, 참다운 신뢰는 가르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도 자신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야기한다.

 

여기서, 베어드 T. 스폴딩이 자신의 저서 ≪초인생활2≫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가 주장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한다. 

☆ IS THERE A GOD?(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어떤 질문보다도 많이 받는 질문에 지금부터 답하겠다. 이 문제에 관하여 과학은 최근에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놀랄 만한 성과도 이룩하였다. 이 방면의 연구는 일단의 의학자들에 의해 상당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위대한 원리가 존재한다. 이 진리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앎으로서, 이 앎이 맨 처음 시작된 시기는 너무나도 오랜 과거라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절대적인 법칙과 절대적인 질서인 이 원리는 과러로부터 항상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해왔고 지금도 질문하는 것은 "신은 존재하는가?"이다. 정통적인 종교에서는 인간의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한 존재, 즉 신을 인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단순한 믿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완전히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종교에서 교리에 의해 주장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가?"

이 문제를 조사하여 합리적인 대답을 찾는 것이 과학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 우주 에너지라고 불리는 우주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에너지는 온 우주에 두루 퍼져 있고 무한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에너지는 원리가 구체화된 것으로 원자폭탄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에너지는 어느 한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다. 이 에너지를 아는 사람에게든 모르는 사람에게든 똑같이  작용하므로, 이 에너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작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에너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에너지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만물에 두루 퍼져 있다. 이 에너지를 통하여 인간은 살아가고 활동한다. 이러한 원리가 없다면 여기에서 사진 한 장도 찍을수 없을 것이다.

이 원리가 신성 원리이며 신성 에너지이다. 이 신성 원리는 만물에 내재하고 두루 퍼져 있다. 이 신성 원리는 영원하며 모든 것을 포용한다. 우리는 사진을 찍어서 이를 증명하였다. 만일 신성 에너지가 없다면 어떤 사진도 찍히지 않는다. 필름에 찍히는 영상은 다상으로부터 나오는 파동을 기록한 것이다. 이 파동이, 신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가 이 신성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언제까지나 찾지 못한다. 신성은 내부에 있다. 손과 발처럼 가까이 있고, 심장처럼 내 안에 있다. 내 안에서 찾았다면 모든 것에서 신성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이 신성임을 알게 된다. ㄱ런데 왜 신을 찾는다고 밖에서 방황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선배, 형제들인 대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대사들은 바로 지금 여기에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우리의 손발같이 가깝고, 우리의 심장같이 안에 있다. 대사들을 만나려고 인도나 히말라야로 갈 필요는 없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스승은 나타난다."

아득한 과거에 어떤 위대한 문명이 출현하였다. 이때부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구체화된 원리와 신의 속성으로 채워진 거대한 선(善)의 저장원(reservoir of good)이 조성되었다. 이 선의 저장원은 어떠한 부정적인 에너지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이 선한 에너지, 순수한 것이 축적된 거대한 저장원은 지금도 존재하며, 또 언제까지나 존재할 것이다. 

이 엄청난 선의 저장고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근원은 마르지 않는다. 인간은 다만 이 에너지에 동조하여 하나가 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 에너지가 파동치고 맥박치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자신 속에도 실재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이 에너지를 신이라고 부른다. 신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알려진 말 중에서 가장 강한 파동력을 지녔다. 우리가 신이라는 말을 올바로 사용하면 신의 힘을 가지게 되어, 일체의 법칙과 일체의 질서와 일체의 물질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일체의 만물을 "내 것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 있는 "네가 묻기도 전에 나는 대답하였고, 네가 말하기도 전에 나는 들었다"는 말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말씀을 분명한 순서와 질서로 내보낼 수 있다면 우리가 말하는 순간 우리 것이 된다. 여기에는 시공의 제약이 없다.

완전함은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완전함은 창조된 것이 아니다. 완전함은 항상 존재했고, 항상 존재한다.  왜냐허면 완전함이란 지금 여기 그 자체로서 완전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생각,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를 하면 신의 파동력이 생긴다. 먼저 생각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나 말씀이 하느님이다."(요 1:1)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말, 부정적인 행위를 버리면 앞서 말한 에너지가 우리 자신 속에 보존된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신의 순수하고 완전한 에너지가 흩어진다. 그러므로 긍정적, 건설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하면 할수록 강력한 에너지가 보다 많이 발생하여 우리의 요구에 응하며,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구체화된다.

예수가 한 말은 미래의 언젠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었다. 왜냐하면 예수에게는 미래기 없고 모두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처음 말이 생겼을 때는 미래를 표현하는 말도 없었고 과거를 표현하는 말도 없었다. 오직 지금 여기를 표현하는 말뿐이었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기록되어 소멸되지 않는다. 

"나는 신이다"하고 명획히 선언하는 것은 인류를 진보시키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러한 이상이 있기 때문에 인류는 진보한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에 맞는 비전을 갖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언젠가는 성공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상을 온전히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그 이상이  구체화된다. 마음은 본래 구체화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전이 명획히 세워지면 만물의 본원에서 필요한 것들이 흘러나와 그 비전이 구체화된다. 따라서 비전이 명획하면 명확할수록 그 결과도 더욱 명확해진다.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 생각한 일이 실현되기까지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처음 생각을 함부로 흐트러뜨리지 말라. 처음 생각이 완전히 이루어진 이후에는 첫 번째 셍각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그다음 일을 시작한다. 이것이 예수가 도달했던 명확한 깨달음이었다.

"너희는 신이다. 지극히 높은 자(the Most High)의 아들이다." -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에 관한 말씀이다. 항상 최상의 것, 숭고한 것, 순수한 것, 빛만 생각하라.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나 의심하는 마음 등 생명력을 제약하는 행위는 결코 하지 말라. 한 가지 목적에 상념을 집중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세우며 성공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가라. 

우주 시스템도 이와 같이 진행된다. 모든 태양계의 태양들은 에너지를 흡수하고는 더 큰 에너지를 내보낸다. 만약 태양이 거대한 석탄 덩어리라면 언젠가는 다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지금까지 수억 년 씩이나 타고 있다. 이것은 태양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것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이 에너지 교환 법칙을 이해하고 배워야 한다. 

가지고 있는 힘을 억제하면 정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내보내면 새로운 힘이 흘러들어와 빈 공간을 채워준다. 이처럼 에너지는 올바르게 쓸 줄만 알면 무한정이다. 이러한 에너지는 밖에도 있지만 우리 안에도 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몸이 항상 새로워질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만약 신성이 우리 밖에만 있다면 신의 능력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통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안에 있다. 

신의 능력은 끊임없이 고동치며 영원히 거갈되지 않는다. 인간 불사의 진리도 여기에 있다. 또한 인간이 생각(상념)한 것, 말한 것, 행한 것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이러한 인가느이 생각, 말, 행위는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힘이 있다. 인간이 방출한 상념, 말, 행의가 항상 존재하는 실상을 완성한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인간은 태초에 대하여 무척 알고 싶어한다. 이것은 첫 기원 없이는 만사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태초란 하나인 의식이 분리되기 시작한 때이다. 분리되기 이전의 인간은 영적인 상태였으며, 이 영적인 상태로 우리 인간은 돌아가야 한다. 

인루가 과학과 종교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가지면 보다 나은 미래가 약속될 것이다. 인간이 마음 문을 열고 과학과 종교를 받아들이면 부다 나은 미래가 실현될 것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른 것이지, 신이 인간의 형상을 따른 것이 아니다. 신은 일체의 우너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충만해 있는 지고한 지성의 힘이다. 우리가 이 지고한 지성의 힘이 자신 속에 있음을 깨달을 때 그 힘이 활동하게 되고, 우리 자신은 그 힘과 하나가 된다.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새롭게 태어나는 신의 왕국이요, 우리가 신의 왕국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신의 왕국 안에 있게 된다. 

 

켄 윌버는, ≪통합비전(the integral vision)≫ 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대의 현재 의식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대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것들에 주목하라. 그대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생각들, 그대의 몸에 떠오르는 느낌과 감각,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대상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에서 떠오르고 있는 대상들이다.

이제 5분 전에 그대의 의식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생각, 대부분의 몸의 감각,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환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5분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 I AMness'이다. '나'라는 느낌, '나'라는 의식이 아직 그대로 있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바로 그 '나'이다. 그 '나'가 지금 현존하고 있으며, 바로 전 순간에도 있었고, '1분 전에도 있었으며, 5분 전에도 있었다. 

5시간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나'이다. 스스로 자기를 알고, 스스로 자기를 인지하며, 스스로 자기임을 확인하는 그 '나 I AMness'라는 느낌이 5시간 전에도 있었다. 5시간 전에 있던 그것이 지금도 현존한다. 생각은 다 바뀌었고, 몸의 감각도 모두 바뀌었으며, 환경도 바뀌었다. 그러나 '나 I AM'는 여전히 있다. 빛나고, 열려 있고, 비어 있고, 깨끗하고, 광대하고, 투명한 '나'가 늘 현존하고 있다. 대상은 모두 바뀌었다. 그러나 형상이 없는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이 명백하게 현존하는 '나'가 5시간 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있다. 

5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나'이다. 많은 것이 왔다가 갔다. 스많은느낌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생각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극적인 사건, 두려움, 사랑, 증오가 와서 잠시 머물다 갔다. 그러나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인가? 그대의 의식 속에 5년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는 그 하나가 무엇인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현전하는 '나'라는 느낌이 그것이다. 그것이 5년 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있다. 

5세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언제나 현존하는 것은 '나'이다. 모든 사람이 이 동일한 '나'를 느낀다. 이 '나'는 몸이 아니다. 생각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다. 이 '나'는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보는 자'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시하는 비어 있는 목격자이다.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세상에서, 어떤 곳에서, 언제 일어나는 일이든지 모두 지켜보는 목격자이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는 목격자이다. 늘 지켜보고 있는 이 '나'만이 유일하게 늘 현존한다. 이 '나'가 지금도 있고, 5분 전에도 있었고, 5시간 전에도 있었고, 5세기 전에도 있었다.

5천 년 전에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우주가 탄생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본래면목이다. 나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다. 이 '나'가 스스로 창조한 대상들 속에 자신을 숨기고 그것을 찾는 게임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이 '나'를 모른 척하지 않으리라. 이제 다시는 이 '나'를 느낄 수 업슨 척하지 않으리라. 

이제 숨바꼭질 게임을 끝났다. 수많은 생각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느낌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대상이 왔다가 갔다. 그러나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 시간의 흐름 속으로 결코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는 것, 시간을 넘어선 순수한 현존, 영원을 거니는 것이 곧 그것이다. 내가 이 위대하고, 명백하고, 스스로 자기를 알고, 스스로 자기임을 확인하며, 스스로 자기를 해방시키는 '나'이다.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스스로 있는 나 I AM'가 곧 1인칭 영 Spirit, 궁극적인 존재, 장엄한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는 온 우주의 빛나는 참자아이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 '나'를 느낀다. 그 '나'가 나와 너와 그와 그들 안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의 '나'를 모두 합해도 그 수(數)는 1일 뿐이다.

항상 지금 그대가 느끼고 있는바로 그 '나임 I AMness'에 머물러라. 그것은 그대 안에서 그리고 그대로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어나지 않은 영이다. 상황에 따라 그대의 모습을 다양하게 연출하라. 그러나 늘 모든 것의 근거에 머물도록 하라. 완전히 명백한 '나임' 상태에 머물면서, 그 '나'가 창조한 세상에서 그대의 몫을 살아라.

이제 새로운 아침이고, 새 날이고, 새 사람이다. 새로운 인간은 통합적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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