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권세
마 20:24-28
24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이제 곧 다가오는 긴 추석 연휴로 인해, 다들 많이 분주하시리라 예상됩니다. 한국 최대의 명절인 만큼 준비해야하는 것이 많지요? 그런데 날이 이렇게 더워서야 도통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것이 맞는지, 추석이 오고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날씨가 비협조적이라고 해도 우리의 할 일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선물 사랴, 추석 인사말 나누랴, 모임 장소 정하랴, 음식 준비하랴 등등 즐거운 만남을 가지려면 그전에 준비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추석은 가족·친지가 함께 모이는 기쁨의 자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수고와 노동이 있는 날이기도 해요.
명절증후군, 곧 명절 동안 받은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증상들이 있다고 하니, 그 피로도를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약간의 강제성을 띈 섬김이 동반되다보니 명절이 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꽤나 있겠죠? 긴 귀성길, 복잡한 제사 준비 등 어느 것 하나 수고롭지 아니한 일이 없습니다. 분주한 그 시간 동안 가장 편해 보이는 것은 '상' 위에서 인자한 미소를 띄고 계신 조상님들이시지요. 제사라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제사가 옳냐 옳지 않느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니,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적, 제사를 준비하고 지내는 과정에 대해 초등학교에서 간략히 배우고 난 뒤, 집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외쳤다고 합니다. “우리 집은 기독교여서 제사 준비 안 해도 되지? 와, 예수님 믿어서 다행이다.” 제사 준비를 안 해도 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가장 좋은 이유로 꼽다니 정말인지 너무도 철이 없었다는 게 팍팍 드러나네요.😂
농담처럼 이야기 하였지만, 아무래도 '추석을 가장 기피하는 사람'하면 종갓집 며느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인 만큼, 명절 음식, 제사 음식에 대한 노동 강도는 상당합니다. 발언권이 없이 노동에 대한 의무만을 갖는다면 누구나 불편하겠지요.
전통적으로 집안의 가장 높은 권력은 그 집의 가장 어르신이 갖게 되었고 이는 사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을 받는 쪽, 그리고 절을 하는 쪽, 마지막으로 그 절을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쪽 순으로 권력이 자리 잡게 되지요. 이러한 구조 안에서 가만히 있는 사람은 권위가 높은 사람, 가장 바쁜 사람은 권위가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됩니다. 섬김은 마치 권세와 대비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어요. 이 과정 속에서 섬김의 의미가 낮은 사람이 당연히 취해야 하는 행동 정도로 퇴색하게 되지는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모쪼록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가장 행복하고 평안하며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계속 말씀을 진행하겠습니다. 섬김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과거에도 동일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하고 가혹하였죠. 그때는 노예제도가 있었으니까요. 누구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고 싶지,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해야 하는 볼품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섬김은 아무런 힘도 권세도 없는 노예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 중, 두 사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중한 부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요구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마가복음에서는 그들이 직접 요청한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요구사항은 동일합니다. 내용인즉슨, 이 두 사람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팔, 왼팔이 되겠다는 야망과 열정이 돋보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걸작인데요, 마태복음 20장 20절로 23절의 말씀을 교독하시겠습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내가 가려고 하는 그 길이, 내가 서려고 하는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겠니? 그렇다면 나를 따라 너희도 그렇게 행하라"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권유와 따뜻한 독려가 돋보입니다. 오히려 이 두 제자의 갑작스런 요청에 대한 즉각적이고 극명한 반응은 제 3자에게서 터져나오게 되었는데요. 바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10명의 제자들에게서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분노하며 화를 내었어요. 너희 둘이서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니 이것은 불공평하다는 입장이었죠. 이해가 갑니다. 지금 다들 똑같이 집을 나와서, 고생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둘만 쏠랑 좋은 자리 얻겠다고 설치는 모습이 곱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입 밖으로 내었냐의 차이일 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다 입니다. 이 목적은 동일내용을 기술한 마가복음에서 보다 잘 드러나있는데요. 마가복음 10장 35절로 37절의 말씀을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35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나라에서 혹은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세요."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주의 나라, 또는 주의 영광은 언제를 의미하는 것인가요? 예수가 왕이 되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인 로마를 물리치고 이 나라의 새로운 정권을 잡아 치리하실 영광스러운 날이 하루 속히 도래하기를 바라며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영광의 날에 주어질 보상만이 지금의 고난을 견디는 유일한 원동력이었죠.
그래서 성경을 읽다보면 때로 열두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혼내거나 가르치려고 한 시도들을 볼 수 있죠.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시자 베드로가 항변한 것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사실이 그러합니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권력을 움켜잡기 위해 울고 웃고 화내고 서로 누가 크냐 논쟁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하시며 그들의 분노를 잠재우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가르침은 놀라운 것을 넘어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해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근면성실하게 살아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라'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이 세상에 아예 없는, 상상할 수 도 없고, 납득되지 않는 거꾸로 된 이야기를 하고 계세요. 새롭게 정의된 하나님 나라의 권세, 곧 종이 된 왕입니다.
지금껏 세상은 힘을 갖기 위한 끝없는 싸움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왕이 되기 위해선 반대편 사람이 죽어야 해요. 이미 왕이 있으면 그를 끌어내려야 자기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했고, 심지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마저 그렇게 행동하고 있어요. '야고보와 요한 너네가 예수님의 우편, 좌편에 앉게 내버려 둘 수 없지. 그 자리는 나의 자리야.' 예수님의 양 옆을 두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들이 목숨 걸고 권세를 차지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연히 섬김을 받기 위해서죠. 날 위해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의 절을 받고, 내 맘대로 해도 괜찮은 그 환경에 살고 싶어서입니다. 왕과 권세자들은 백성을 잘 다스려야한다는 명백한 진리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이 만든 권력과 가치체계 대부분이 악용되기 쉽다는 현실을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 나 자신만 해도 내 손에 있는 이익을 놓치지 않기 위해 타인을 해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인간의 논리를 적용하면 왕과 권세자는 항상 절대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수 위에 군림하는 한 사람. 임의로 주관하고 백성에게 권세를 부리는 왕.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세상을 향해 선포하십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나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왕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왕이거든요. 그래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오히려 종처럼 섬기고, 심지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정반대의 두 가지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왕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한편, '어떻게 해야 왕 같이 살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뒤따르게 되지요. 혹시 말씀을 듣는 도중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아...'하면서 실의에 빠졌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열두 제자보다 더 높은 단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조차 못했거든요. 그래서 "나를 따라올 수 있거든 따라오너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요한과 야고보는 기뻐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분노하였었죠. 그러나 하나님이 이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만져 가시고 결국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솔직히 섬김이라는 단어는 버겁고 그 행위는 불편합니다. 내 수고와 노력을 주는 것도 모자라, 목숨을 다할 정도로 사랑하라니 불가능해보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내 욕심을 추구하며 내 이득을 위해 살고, 부과 권세를 쌓는 것이 여전히 지혜로워 보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성공이나, 성취에 두곤 하는데, 섬김이 이 옆에 서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동떨어져 보이죠. 저 역시도 '섬김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미리 짐작하고 그 가치를 절하하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사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보하셨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 섬김의 단순한 진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서 맘대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해력이 딸린 저에게 하나님이 너무나 쉽고 단순해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로 저를 깨워주셨습니다. 혹시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제 이번 설교 썸네일 화면이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맞습니다. 책 표지와 비슷한 형식입니다. 쉽고 단순해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그 이야기가 책으로부터 읽은 내용이기에, 이를 오마주하여 설교 제목을 넣은 화면도 책처럼 만들어 보았습니다.
감명 깊게 읽은 그 책은 바로 톨스토이 단편집 중 하나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입니다. 10분도 안 돼서 다 읽을 수 있는 간단한 분량이기 때문에 이 내용을 들으실 때 한 가지 과제를 수행하셔야 합니다. 바로 3가지 질문에 답하기 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1.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2.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 책은 한 가난한 구두장이 시몬이라는 사람이, 미하엘을 만나며 벌어지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시몬은 무척 가난합니다. 추운 러시아의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외투가 필수인데, 그조차도 없어요.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먹일 그 다음 끼니조차 변변치 않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난한 채로 추위에 떨며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는데, 한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헐벗은 채 문이 잠긴 교회 앞에 쓰러져 있었어요. 처음에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 남자를 돌보는 것을 주저했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날이 너무 추웠습니다. 시몬의 마음 속에 그를 향한 불쌍한 마음이 들어 결국 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집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집에 도착했더니 야차같은 표정으로 시몬을 기다리던 아내, 마뜨료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내일 먹을 음식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남편이 객식구를 데려오자 그 표정이 더 매섭게 변합니다. 처음에는 무책임한 남편과 변변치 못한 차림의 사내를 보고 화가 난 마음에 그를 쫓아내려 하였지만 곧 마뜨료나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여기서 쫓아내면 이 남자는 죽고 말거야.’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밥과 머물 곳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쓰러져있던 이 사내, 미하엘은 이 모습을 보며 조용히 빙긋 웃음 지을 뿐이었습니다.
미하엘은 금방 기운을 차리고 시몬의 집에서 기술을 배워 그를 함께 구두 제작과 수선을 도왔습니다. 그 기술이 뛰어나 나중에는 오히려 미하엘이 주문을 도맡게 되었지요. 그렇게 일 년이 지났을까, 한 신사가 이 시몬의 집에 방문하여 구두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그는 1년은 너끈히 신을 튼튼한 장화를 주문했어요. 이 신사는 매우 거만하고 무례했습니다.
1년이 안 돼서 신발이 망가진다면 그들을 크게 벌하겠다는 엄포를 하고 문 밖을 나섰지요. 시몬을 덜덜 떨었지만 미하엘은 그저 빙그레 웃고 조용히 신발을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보니 미하엘이 만드는 것은 신사가 주문한 장화가 아닌, 슬리퍼였어요. 이 큰 실수를 보고 시몬이 놀라 미하엘에게 소리치는 사이 누군가 급하게 집에 들어와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방금 방문한 신사의 하인인데, 주인이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죽어서 아까 주문한 장화 대신 죽은 이에게 신길 슬리퍼가 필요하다고요. 미하엘은 말없이 자신이 만든 슬리퍼를 건넸습니다.
다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미하엘이 시몬의 집에 온 지, 어느 덧 6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미하엘은 웃지도, 말하지도 않고 묵묵히 구두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어린 쌍둥이 딸을 데리고 시몬의 구둣방에 왔습니다. 그 중 한 소녀는 발을 저는 아이었어요. 시몬과 마뜨료나는 아이의 사정이 궁금하여 부인에게 질문하자 그 여인이 긴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이 두 아이는 제 친 자녀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가 죽고 제가 대신 아이들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저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일찍 죽고 말았어요. 이제는 이 두 아이들이 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랍니다.” 눈물짓는 이야기를 마치고 부인과 아이들이 돌아갔습니다. 시몬과 마뜨료나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뒤를 돌아보자 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미하엘을 발견하였습니다.
미하엘은 부부에게 뜻 모를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셨으니 이제 작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미하엘은 자신이 사실 하나님의 천사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있었노라 고백했습니다. 사실 이전에 그는 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데려와야 할 여인 옆에는 두 갓난 아이가 있었고,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여읠 아이들의 사정이 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게 하셨고 그 도중 미하엘은 땅에 남겨져 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질문은 우리 성도님들께도 드린 동일한 질문입니다. 미하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마다 조용히 미소지었지요. 그 순간들을 기억하시나요? 하나씩 되짚어가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그가 땅에 떨어져 헐벗고 굶주린 채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근심과 걱정에 눌려 죽어가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한 남자를 보게 됩니다. 그 남자는 시몬이었습니다. 책임져야할 가정이 있기 때문에 미하엘을 지나치려던 시몬은 마음을 돌이켜 미하엘을 집으로 데려갑니다. 집에는 더 깊이 근심에 젖어 말라버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쫓아내려 했지만 결국 미하엘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때 미하엘은 첫 번째 질문에 답을 깨달았습니다. ‘아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구나, 그 사랑은 측은지심, 곧 긍휼한 마음이 되어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와줄 수 있는 힘이 되는구나.’
두 번째 질문, 곧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한 살찌고 거만한 귀족 신사가 방문하였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신사는 자신의 뒤에 죽음의 사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른 체 1년 동안 신을 신발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때 미하엘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구나. 그가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과 죽음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텐데...’
마지막으로 미하엘은 자신이 데려오려던 여인의 아이들이 죽지 않고 성장한 모습을 마주하였을 때 세 번째의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사는구나! 어린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없다면 죽을 거라 생각하여 명령에 불복종하였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셨구나’ 미하엘은 남의 자식마저 가엾이 여겨 자기 아이처럼 키운 부인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겨울철 죽어갈 청년을 측은히 여겨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집으로 초대한 시몬과 마뜨료나의 손길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 나라에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지켜보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내 안에, 나와 같이 있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미하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하늘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나와 남 안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처럼 사는 사람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섬기려 하면 버겁고 불행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섬김은 제한적이고 소모적인 은과 금이 아닌, 부족함이 없고 고갈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 끊어짐이 없습니다.
섬김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고백하는 성경 말씀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11절 말씀입니다.
빌 2
5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그리고 앞으로 추석 명절 때 만날 가족친지들의 안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여 사랑의 섬김으로 하나 되시길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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