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지, 벌써 4~5년이 훌쩍 지났다. 시간의 흐름이 이토록 빠를 줄이야...
☆ 요한복음을 쭉 읽어가다가 오늘의 본문을 읽는 순간, 모닥불 가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모닥불 가에서 세 번 물으시는 주님을 내가 만났다. 평소에 자주 보던 본문인데 가슴이 철렁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요 21:5-17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ἀγαπάω)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첫 번째 물으셨다. 이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φιλέω)하는 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했으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ἀγαπάω)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두 번째 물으셨다. 베드로는 또 대답했다.
"예,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φιλέω)하는 줄 당신이 아십니다."
베드로를 향해 세 번째 질문을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가, ‘사랑’의 의미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동사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ἀγαπάω와 φιλέω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고, ‘필레오’ 사랑은 우정 같이 제한적인 인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 즉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필레오는 인간의 사랑이라고 구분지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성서학자이신, 협성대 이진경교수님의 강의를 들어 보니, ἀγαπάω는 ‘의지’의 뉘앙스가 담긴 사랑의 표현이고 φιλέω는 ‘감정’의 뉘앙스가 담긴 사랑의 표현이었다. 즉, ἀγαπάω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와 책임으로부터 나오는 뭔가 결연한 느낌의 사랑 표현이라는 것이다. 혼인서약에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변함없이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고 할 때, 바로 이 ἀγαπάω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 서약 속의 사랑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반면 내 옆에 있는 연인이 문득 너무 사랑스러워 그를 향해 ‘사랑해’ 라고 말한다면 φιλέω가 된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어여삐 여기는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사랑, "아, 정말 사랑스럽다"라고 말할 때 느끼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무조건 ἀγαπάω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 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은 ἀγαπάω지만, 요 5:20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의 사랑은 φιλέω다. 교수님은 φιλέω를 ‘애정(愛情)하다’라 고 해석하였다. 애정(愛情)이라는 단어 속에 감정을 뜻하는 ‘정(情)’이라는 한자가 담겨있으니 φιλέω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다시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을 들여다보았다. 질문이 바뀐 것을 보게 되었다!!!
"네가 나를 애정(φιλέω)하느냐?"
ἀγαπάω로 물었으나 끊임없이 φιλέω로 대답한 베드로에게, 혹시 주님은 그러면 정말 나를 φιλέω로는 사랑하는 거냐고 물으신 것은 아닐까?
베드로는 끝까지 φιλέω로 대답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침내 성령을 받고 다시 정화되고 새로이 주님의 수난을 닮은 사명을 받는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의지’와 ‘감정’이라는 잣대로 명확하게 구분지어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품고 주님을 사랑한다. 사랑 속에 담긴 ‘의지’와 ‘감정’의 구별은 작은 뉘앙스의 차이이지 선명하고 커다란 의미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감정’이 들어 있다. φιλέω(애정)이다.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의지’가 담겨 있다. ἀγαπάω이다.
어제는, 아빠가 소천하신 지 삼 년이 되는 날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신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하다. 내가 이럴진대, 평생을 아빠의 극진한 사랑과 보호 속에서 공주처럼 살아온 엄마는 어떨까?
2년 전 일기를 보니,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 의연하게 믿음으로 이겨내신다던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하셨다. "희선아! 너 바쁜 줄 아는데...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아빠의 빈자리가 너무 커... "
애도 기간 동안만이라도 아들&며느리와 함께 있자는 말을 뒤로 하고, 홀로 우뚝 서서 자녀들을 위로하던 엄마가, 요즘 아빠 생각에 잠을 못 이룬다고 하신다. 아빠와 함께하던 넓은 공간이 텅 빈 것 같아, 허전함과 쓸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덧붙이기를,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무릎이 아파서 그런 것 같다. 아빠가 해주던 일들을 내가 다 하려니 버거워서 그런 거야. 엄마 걱정하지 말고 엄마 위해 기도해 주렴. 어버이날 즈음에 와서 맛있는 거 함께 먹자."
한 달에 두 번 이상 수지 친정엘 간다. 엄마가 드실 음식을 만들고 한 끼씩 구워 드실 수 있도록 생선과 고기를 준비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발걸음도 가볍게 배낭을 메고 지하철을 타고 간다. 학교에 가야 하기에 오랜 시간을 함께 머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엄마를 향한 감정적 사랑이 물밀 듯 밀려오면, 아무리 힘들게 밤샘을 했더라도 벌떡 일어나 찌개와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든다.
학교에서 밤11시 경에 수업을 마치면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묻고, 엄마가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드린다. ☜
내가 책임져야 할 여러 일들이 산재해 있기에, 때론 φιλέω(감정적 사랑)가 아닌 ἀγαπάω(의지적 사랑)로 엄마를 섬겨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으로, 엄마를 끝까지 아끼고 사랑하며 극진히 섬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ἀγαπάω + φιλέω)을 힘입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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