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오늘 읽은 복음서의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의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맨 처음에 위치시켰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맨 처음에 놓는 것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임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회당장의 부탁을 받은 예수님은 선 채로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앉아서 강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서서 읽고, 그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앉아서 합니다. 이것은 겸손의 표현입니다.
사 61:1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다음의 네 부류의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첫째 가난한 사람, 둘째 마음이 상한 사람, 셋째 포로된 사람, 그리고 넷째로 갇힌 사람입니다. 이들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당시의 실제적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당시 갈릴리의 급속한 상업화로 많은 농민들이 빈곤계층으로 급속히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큰 부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심각한 영양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된다는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1. 그리고 예수님은 한 마디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
눅 4:21 /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는 말씀이 듣고 있는 청중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에게도 이루어졌다는 선포였습니다. 저는 한 30년 전 목회할 때 단체로 백두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가이드 말로는 조상 3대가 덕이 있어야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백두산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높은 산을 차로 올라가는데, 비도 내리고 안개도 많이 끼어서 정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겠구나 실망하며 올라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에 올라가보니 구름이 끼어 있어서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광경을 옆에서 파는 사진을 통해 보고 아쉬움을 많이 느끼고 있는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가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천지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개와 구름으로 막혀 있을 때 필요한 것은 강한 바람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앞에서 시야를 뿌옇게 가로막는 온갖 안개와 구름이 낄 때가 있습니다. 이를 몰아낼 줄 수 있는 것은 강한 바람입니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가득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서는 '성령'을 바람에 비유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라는 단어를 씁니다.
루아흐는 영, 호흡, 혹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참여해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호흡 즉 성령을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생명체)이 되게 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을 '프뉴마'(pneuma)로 표기합니다.
❙ 성령이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 위에 임하셨습니다.
❙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으로 거기 모여 있는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생명의 강한 바람입니다.
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성령님과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 4:18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주눅이 들고, 정체되고, 침체되고, 나른하고, 권태 속에 빠진 사람들을 통해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영혼에 바람이 들어가야' 합니다. 주의 영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기, 즉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신명' 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특징이 있습니다.
① 성령의 특징이 자유이기에 성령의 사람도 인간의 제도와 틀 안에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요 3:8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고 말씀하십니다. 즉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모르는 게 바람입니다. 자기가 불고 싶을 때 부는 게 바람입니다. 자기가 불고 싶은 곳으로 부는 게 바람입니다.
이처럼 바람의 특성은 '자유' 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자유롭습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성령이 인간의 마음에 불어오면, 인간을 제도나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게 성령의 바람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특징이 자유이기에 성령의 사람도 인간의 제도와 틀 안에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② 그런데 성령의 사람이 인간의 제도와 틀속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기 시작 할 때, 성령의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일 4:2-3 /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왔음을 시인하게 하는 영이 하나님이 영이고 그것을 부인하는 영이 적대자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육신'(flesh)이 무엇입니까?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 고통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역사의 한복판에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단지 살짝 왔다 간 것이 아니라 그 살과 피의 밑바닥까지 그리하여 십자가 죽음까지 기쁨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의 영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런 주의 영이 임하였을 때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눅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성령이 임한 자에게 특징이 있어요. 성령의 바람은 자유하시나 그 바람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포로 된 사람들,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을 향해 나아감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마음이 향하는 곳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성령의 바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마음이 있는 곳을 그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바람은 우리로 하여금 제도와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친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승리하는 길이 어디에 있을 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처럼 주의 영의 내게 임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요 15: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러분, 포도나무를 보면 가지는 포도나무에 전적으로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포도나무는 가지가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농부가 되시고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조금도 실수할 수가 없는 완벽한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계시니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실패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살아가면서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은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종교적으로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모든 자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 사함의 자원이 되시고 성결함과 성령 충만의 자원이 되십니다. 또, 치료의 자원이 되시고 축복의 자원이 되시고 천국의 자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 14:14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의 삶에는 고갈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소식들을 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무궁무진한 자원이 된 이상, 우리는 자원 고갈로 말미암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성령을 나의 성공의 도구와 발판으로 여기고 성령을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면, 열매 맺기 위하여 면 성령을 먼저 내 마음로 환영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나를 단순히 이용하려 하는지, 아니면 나를 전정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을 역사를 내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기 원합니다.
“성령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성령님,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눈길과 손길이 있는 곳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라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모든 진리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요 16:13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의 바람은 김삿갓의 방랑기처럼 발 닿는 대로 아무 데나 유랑하는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바람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침체 되고, 나태나고, 구태의연하고, 정체되고, 변화가 없는 우리에게 새 바람을 불어넣어 우리들의 삶에 생기, 신바람, 새 소망, 새 목적, 새 비전, 새 힘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리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눈먼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그런 주의 은총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예배시간에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빈손으로, 빈 마음으로 오직 한 가지를 간절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메마르고 더러워진 우리 삶에 단비를 내리소서.
우리 죄를 씻기시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소서.
사랑의 불을 우리 안에 붙여 주시어 우리의 냉담함을 태워버리소서.
주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를 녹이시고 방황하는 우리 발을 인도하소서."
우리 앞에 자욱한 안개와 구름을 어떻게 날려 보낼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강한 바람이 오늘 내 마음과 이 교회 위에 불어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약성서가 한눈에 보인다』 요약 & 정리 (0) | 2024.05.26 |
---|---|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북 리뷰 (0) | 2024.05.25 |
성령의 권능으로 비상하라, 이사야 40장 31절 (1) | 2024.05.25 |
오순절 - 성령강림 - 행 2 : 1 - 4 (2) | 2024.05.25 |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호 8:8-14, 호세아 시리즈 설교(16) (0) | 2024.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