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제1장 낮은 자가 높아지다 : 기독교 지형의 변화
계몽주의와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사회과학자들은 종교에 대하여 검증될 수 없는 인간의 원시적 흔적일 뿐이라 과소평가하며, 종교는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 대담하게 예언하였다. 특별히 사회진화론자에 따르면 인간의 과학과 지식 의 발달은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진화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종교는 자연스럽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라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상도 종교는 계급모순으로 생겨난 부수적인 현상으로 보고 혁명적인 역사발전 과정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1960년 급변하는 사회상황 속에서 교회의 몰락을 주장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사회학자 피터 버거와 신학자 하비 콕스이다. 그러나 최근에 피터 버거는 종교가 그 어느 때보다 부흥하고 있으며 활기가 넘친 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세속화론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유럽에서 기독교가 현저하게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비서구 사회에서는 크게 부흥하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축이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근거로 저자는 서구의 기독교의 시대는 끝나고 뜨겁고 역동적인 제3세계 기독교의 시대가 밝아 오고 있다고 선포한다.
제2장 세계는 나의 교구 / 세계 기독교의 현황
선교의 2가지 요소는 종교지향성과 신에 대한 믿음이다. 종교지향성은 민족종교와 보편종교로 나뉜다. 민족종교는 부족, 민족과 동일시되고, 특징은 선교를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보편종교는 개종에 목표를 두고 있다. 특별히 유일신 사 상은 선교와 개종을 추구한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을 통해 & 위계적 질서를 통해 선교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엘리트주의적 선교는 군사력이 수반된다는 점과 대중의 마음을 붙들지 못한다는 큰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편 현재 세계 종교의 현황을 보면 기독교는 세계 인구의 1/3, 이슬람은 1/5, 힌두교는 14%, 불교는 6% 수준이다. 지난 100년간 서 구사회의 기독교는 급격히 쇠퇴하고 제3세계는 크게 증가하였다. 특별히 제3세계 기독교인들이 전체 기독교의 62%로 12억 4천만 명에 이른다. 이는 유럽 기독교가 세속화 현상과 저출산으로 말미암아 급격히 감소(1900년 71%에서 2025년에는 20%로 감소) 그리고 북미도 10%까지 감소하리라 보지만,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는 높은 출산율과 성령운동의 영향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점에서 큰 대비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이를 가리켜 기독교의 중심축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서구에서 비서구로 넘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3장 무너지는 종교제국 / 제1의 기독교 세계 유럽
중세 유럽은 기독교의 황금기라 불린다. 이는 왕들이 먼저 개종을 하고 그 뒤에 왕들은 기독교를 국가를 통치하는 기제로 활용함으로 기독교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유럽에서 백인 기독교인의 수가 계속 줄고 있다. 그리고 유럽 기독교인의 종교성도 낮아지고 있다. 20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어난 근대화는 종교의 권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나게 하였다. 한편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붕괴는 기독교 부흥의 희망이었지만, 공산주의 이후 젊은 세대들의 교회 출석이 점 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한편 유럽기독교에서 이주민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제3세계 이주민은 기독교 사회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시도하고 있다. 요즘 런던의 교회 출석자 절반이 흑인이다. 이런 20세기 유럽의 상황은 기독교의 주도권이 미국의 기독교로 넘어가게 만들어 버렸다.
제4장 우리는 신을 믿는다 / 제2의 기독교 세계 미국
미국의 기독교 특징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국가와 교회의 탄압을 피해 이주하여 국가를 세웠다는 데 있다. 미국 청교도들은 선택과 하나님과의 계약적 관계에 대한 정신이 강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완전한 멤버가 되기 전에 회심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내적인 감정적 상태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의 신앙적 유산과 전통은 미국 건국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청교도들에 의한 18세기 1,2차 대각성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도 미국 부흥운동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반작용으로 사회 복음운동이 일어나, 사회 참여와 개혁의 실천을 촉구하였다. 한편 미국의 종교의 특징은 개신교로 표준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자의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독자적 전통의 경계선이 개신교의 경계선과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 기독교의 특징은 교파주의이다. 즉 다원주의적 종교상황은 경쟁이며, 종교적 자유 시장 상황은 교파주의의 발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탈교파주의 경향도 늘어가고 있다. 특히 미국의 기독교가 21세기를 맞아 탈교파적인 독립교회의 눈부신 발전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주류 개신교 교파들 중 자유주의 교파 와 보수주이 교파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에 비하여 비주류 개신교 교파는 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교단의 몰락에 대하여 저자는 한마디로 머리의 종교는 저물고 가슴의 종교가 뜨는 것이 최근의 대세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미국 중심의 기독교 에서 21세기는 제3세계에 새로운 기독교 세계가 열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제5장 잠에서 깨어나다 / 기독교의 희망 제3세계
제3세계라는 말은 서구의 식민지를 경험했고,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의미한다. 중세 유럽의 문화 제국주의는 기독교를 식민지 국가에 잔인하게 전파했고, 착취의 수단으로 삼았다. 따라서 제3세계 나라들은 식민제국의 붕괴이후 기독교를 거부하기도 했으나 20세기 후반부터 이곳에서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아시아에는 기성의 종교도 있고 민족주의 성향도 강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급성장하고 있다. 식민시대에는 기독교를 통해 서구를 닮으려는 열망 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제3세계의 복음은 풀뿌리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토착화되고 있다. 제3세계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성령운동’이다. 특별히 성령운동에서 이적과 치유가 중요하다. 치유가 중요한 것은 그만큼 기적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번영의 복음’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저자는 이와 같은 성령운동에 대하여 그들의 일상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인 환경 즉 정직, 성실, 자조, 절제로 사회이동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비록 제3세계 안에서도 해방신학, 흑인신학,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민중신학이 나타났지만, 전문가의 계몽적 성격은 민중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3세계 민중의 구원은 사람들 가슴을 울리는 성령운동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제6장 황무지에서 꽃이 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가톨릭의 깃발을 들고 라틴 아메리카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원주민들의 토착 문화를 말살하였다. 억압과 착취에 대해 원주민과 흑인들이 저항을 하였지만, 결과는 항상 무자비한 진압과 대대적인 희생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에 독립된 국가가 세워지면서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많은 성직자들은 추방되고, 떠나갔다. 1960년 이후 가톨릭은 새로운 상황에서 기독교세계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20세기 개신교가 라틴 아메리카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는 경제적 정치적 힘의 균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는 상황과 인구의 증가 및 농촌에서 도시 사회로 급격하게 도시화가 진행되어 가톨릭교회의 연계와 충성심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개신교가 확산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와 빈부의 격차는 민중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위안이 필요했고, 이것을 제공한 것이 바로 개신교 성령운동이었다.
한편 아프리카 지역에서 기독교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식민주의가 끝난 이후 1960년대부터 아프리카의 기독교인이 처음으로 무슬림을 추월하게 된다. 7세기 무슬림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16~18세기 포르트갈 제국의 보호아래 대륙선교가 비로서 시작된다. 그러나 식민통치 노예무역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세기 말 마을학교, 교리 문답교사, 번역된 성서를 가지고 근대식 초등 교육의 필요성은 아프리카 선교에 큰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백인 선교사 중심의 선교는 제한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아프리카에서 주목 받는 두 교회 운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독립교회운동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운동이다. 또한 아시아는 종교에 관한 매우 특이한 대륙이다. 세계 4대 종교가 모두 아시아에서 생겼다. 아시아에서는 무슬림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 기독교도 몇 십 년 내에 전체 기독교인의 절반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 신학은 처음은 서구 중심적 신학이 받아들여졌지만,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정체성, 제3세계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토착화신학, 제3세계 신학, 민중신학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대세는 복음주의이며 성령운동이다. 결국 아래로부터 생겨나는 풀뿌리 신앙,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성과 열정의 신앙이라 할 것이다.
제7장 뜨거운 것이 좋아 / 성령운동의 열풍
성령운동의 뿌리는 복음주의이다. 복음주의란 일반적으로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하여 이후 미국에서 꽃을 피운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며, 뜨거운 신앙운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 교리의 특징은 성서의 절대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믿음의 필요성은 물론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 17세기 청교도주의는 영국 개신교 정신에 이러한 신앙을 확고하게 심어 주었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회심과 경건주의 갱신을 주도한 것이 복음주의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복음주의는 이주와 선교를 통하여 미국에 국가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물론 성령운동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으나, 공통점은 성령세례와 카리스마 수행을 강조한다. 특별히 성령운동은 20세기 후반 제3세계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우 그들의 정령 신앙으로 인해 성령운동과 친화성을 가질 수 있는 요인으로 보고, 미국의 경우 주류 교파에 대한 사회적 소외계층의 저항성을 그 요인으로 본다. 성령운동의 동력인 ‘번영의 복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기존 정통적인 교단의 무미건조한 예배에 식상한 기독교인들도 성령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성령운동은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하층민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결혼의 중요성과 이중적 성 관념을 제거함으로 가족관계와 도덕질서를 회복시켰다. 비록 성령운동에 대하여 유럽신학자들은 기독교 카리스마적 교회로의 회귀, 심지어 성령활동에 대한 악마적 모방이라고 혹평한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성령운동은 믿음과 수행에 있어서 심리적이고 치유적인 순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치유를,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좌절한 사람에게 용기를, 슬픈 사람에게 위안을, 외로운 사람에게 소속감을, 자신감을 잃은 사람에게 정체성을, 방황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제 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인 운동이 어디에 있는가를 저자는 반문한다.
제8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기독교 성쇠의 배경
종교의 성장과 쇠퇴에 대한 이론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세속화 이론’으로 ‘수요측 이론’이라고 한다. 세속화 이론에 따르면 종교의 성쇠는 종교를 필요로 하는 수요가 사회와 사람들에게 강한가 약한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특별히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➀ 사회의 합리화 수준 에 따른다. 합리화의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종교적 영향력은 약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➁ 산업화의 정도이다. 피파 노리스(Pippa Norris) 와 로날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는 부유한 후기 산업사회 국가들은 종교적 행위와 가치가 가장 세속화된 상황이고, 농경사회 국가들은 가장 종교적임을 발견했다. 또한 종교적 수요와 관계된 변수는 ➂ ‘박탈’이라는 것이다. 찰스 글락(Charles Y. Glock)은 어떤 형태이든 그 박탈에 대한 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종교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교시장 이론’으로 이는 ‘공급측 이론’이라고도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종교시장에서 여러 종교들이 경쟁적으로 공론하는 다원주의 사회는 종교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가지게 되지만, 반대로 특정 종교가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 종교를 원하지 않으면 비종교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적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성장하지만, 종교적 독점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한다고 주장한다. 핑크는 종교 활성화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규제는 다원주의로 인도하고, 다원주의는 경쟁으로, 경쟁은 생산의 전문화와 공격적인 전도로, 전문화와 전도는 더 큰 수요로, 더 큰 수요는 더 큰 참여로 인도한다."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은 분명히 각 종교들을 긴장시키고 신앙을 활성화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한 기독교의 성장과 쇠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구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대륙별 인구 증가율의 차이는 대륙별 기독교 성쇠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연령의 분포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유럽과 같이 부유한 나라들은 출산율이 낮고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은 연령의 중앙값이 16세에 불과하여 출산율과 인구 성장율이 높은 지역에서 기독교는 성장하겠지만, 낮은 지역에서 기독교가 쇠퇴하리라 예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 고 기독교의 성쇠는 사회나 국가의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dict)는 문화 유형을 아폴로(Apollo) 형과 디오니소스(Dionysos) 형으로 나누었다. 아폴로 문화가 합리성과 논리성,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문화라면, 디오니소스 문화는 감정과 정열, 흥분과 황홀의 경험을 중시하는 문화다. 그런데 종교 문화 자체도 그 사회의 문화적 성향을 따른다. 유럽문화는 아폴로적이고,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디오니소스 적이다. 미국은 두 성향이 다 발견된다. 이것은 성령운동 같은 뜨거운 신앙이 유럽에서 자라지 못하고, 제3세계에서 성장하는 지의 이유가 된다. 종교를 받아들이고 유지하는데 보다 적절한 규범 문화로서 집합주의, 권위주의, 도덕주의, 인정주의와 같은 전통적 가치는 제 3세계에서 주로 발견되며, 개인주의, 평등주의, 물질주의, 합리주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는 유럽, 북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문화 국가가 여성문화 국가보다 종교성이 강하다. 즉 성평등이 높은 나라일수록 기독교는 쇠퇴하고, 그 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기독교가 성장한 다. 이는 박탈-보상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성차별이 심할수록 여자들이 박탈감을 느껴 그 보상을 얻기 위해 종교에 참여하 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교회의 성쇠는 신앙의 성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딘 켈리(Dean M. Kelley)는 보수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를 제시하는데, 그의 논지는 교회가 강하거나 약할 수 있는데, 강한 교회는 성장하고, 약한 교회는 쇠퇴한다는 것이다. 그 에 따르면 강한교회는 특징은 충성심, 사회적 연대감, 강한 헌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헌신의 요구는 무임승차를 걸러내는 효과를 갖기도 한다. 또한 선교에 대한 신학적 노선차이도 교회 성장에 요인이 된다. 선교를 복음화로 보는 복음적 보수주의 교파는 성장한 반면, 선교를 인간화로 본 자유주의 교회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고려할 것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보수적 일수록 성장 가능성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모든 교회가 성장한 것은 아니다.
제9장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 21세기의 기독교
초대교회 가슴의 종교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4세기부터였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 교회에서 중세교회로의 변화를 하비콕스는 신앙의 시대에서 믿음의 시대로 변화라고 부른다. 믿음은 머리의 지적인 작용으로 이런 의미에서 중세기 기독교의 특징은 머리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서구 기독교가 이성과 지성의 종교가 된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에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유형으로는 세속신학, 역사적 예수연구, 종교신학, 급진신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오랫동안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성으로 무장된 기독교가 몰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피터 버거는 이를 ‘번역 모델(translation model)’이라는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저쪽 세상에 관한 것을 이쪽 세상의 말로 번역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경험적으로, 초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그런데 이런 대안의 문제는 결국은 자기 소멸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현대적 세계관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 언어도 포기 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20세기 후반부터 개신교 안에 복음주의가 부활한다. 새롭게 도래한 복음주의 시대를 콕스는 성령의 시대라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스러움의 경험이며, 그 경험의 뜨거운 표현이다. 성령운동은 산업사회나 후기 산업사회에 서도 모두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감성의 종교, 성스러운 종교를 찾는 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화된 교회가 그들의 영적 관심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영적 교회 모델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전통적인 기독교 모델과 다르다고 해서 ‘후기-기독교 영성(post Christian spirituality)’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은 영성과 종교성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영성’은 종교의 기능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을 나타내는 반면, ‘종교성’은 본질적이며 외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이 아니면서도 영적일 수 있으며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기독교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아발견 영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과는 다르다. 이렇게 종교성이 제거된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웨이드 루프(Wade C. Roof)는 ‘자기 확인 구도자’라고 한다. 그래서 뉴 에이지 같은 유사 영성 운동은 후기 기독교 영성이라 할 수 없다. 후기 기독교 영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운동을 들 수 있다. 도날드 밀러(Donald E. Miller)는 미국 독립교회 가운데 성장하는 새로운 교회의 분석하며 발견한 것이 있다. ➀ 첫째는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 즉 성스러움의 경험이다. 그동안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성의 힘에 눌려 사라지거나 주변으로 밀려나 버린 성스러움의 재발견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경험과 표출이 그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➁ 둘째는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문화적 표현이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문화적으로 진보적이다. 독립교회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➂ 그리고 저자는 독립교회에서 영성, 도덕성, 그리고 공동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영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도덕성은 삶에 대한 질문이요. 공동체성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인데, 맥그래스는 공동체 교회는 미국의 작은 마을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단지 공동체 교회에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거기에 속해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고, 이런 후기 영성의 기독교를 밀러는 새천년의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이라 지적 한다. 바야흐로 21세기 새로운 기독교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제10장 넘어야 할 산 / 새로운 도전과 과제
21세기 기독교의 당면한 도전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종교간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교 간 대립과 분쟁은 개인과 사회 국가와 인류에 큰 비극적 결과를 가져 온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스 큉(Hans Kung)은 종교간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따라서 어떻게 갈등이나 충돌 없이 종교간 대화와 선교를 함께 이룰 수 있겠는가의 문제가 21세기 기독교의 새로운 과제라 하겠다. 한편 기독교 중심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구 세계에서 비서구 세계로 옮겨가고 있다. 문제는 두 기독교 세계가 서로 다른 종교문화에 대하여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 라 비판과 공격을 통해 서로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교회는 제3세계 교회의 신앙이 주술적, 미신적 토착신앙과 혼합된 형태로서 비기독교적이라 비판한다. 비서구 교회는 유럽교회와 미국교회의 신앙이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포기한 세속적 형태로서 비기독교적이라 공격한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는 미래 기독교 발전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대체로 종교는 처음에 하나의 작은 신앙운동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규모가 커지며 조직의 형태를 갖춘다. 막스 베버는 종교조직을 ‘교회’와 ‘종파’라고 불렀다. 베버에게 있어서 교회는 종교의 가르침을 지성적으로 만들고 예배에서 감정주의를 제거하는 공식적 조직으로 보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파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개인적인 신비적 경험을 권장한다. 이런 의미에 서 제3세계는 종파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도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화 과정을 겪는다. 리처드 니버는(Richard Niebuhr)는 종파가 교회화 되는 과정을 ‘종교의 타락’이라 규정하는 ‘신앙의 세속화’로 보았다. 그렇다면 제3세계도 이러한 제도화를 겪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저자는 가능성을 낮게 본다. 그 이유는 문화적 정서와 사회경제적인 현실에 기인한다. 즉 제3세계 빈곤은 더 악화될 것이요. 이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가난해 진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저자는 제3세계 기독교 현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기독교는 계속 성장한다, 그리고 주역은 가난한 세계의 기독교인이다, 이들의 종교는 계속 성령운동 같은 뜨거운 가슴의 종교일 것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에서 신학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앙의 본질을 규명함으로써 교회의 고백적 유산을 정립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종교학자는 믿음의 확신이 없이도 학문으로 신학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는 신학이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시대의 삶을 신앙의 관점에서 의미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비록 목회자와 신학자 상호간의 비판도 있다 할지라도, 신학은 하나님과 그가 하신 일을 아는 인격적 지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인지적이면서 관계적이다. 이 관계는 가슴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학은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 이상의 문제는 서구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면, 지구 남쪽에서는 오히려 신학의 부재가 문제되고 있다. 남쪽에 신학교를 나온 성직자가 너무 부족하다. 신학적 훈련을 받지 못한 관계로 부족에 오랫동안 뿌리 내렸던 정령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혼합시켜 버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교회 제도화에 따른 심각한 문제는 20세기 후반부터 서구교회와 일부 제3세계 교회에서 생겨났는데, 이는 복음이 상품화 되는 문제이다. 종교의 시장상황은 소비자 선호의 역할을 가져왔다. 종교의 문제에 있어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켜줄 상품을 찾아 이러 저리 쇼핑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신앙은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으로 점차 세속화 되면서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사회도 문제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회윤리적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교회도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슈라이(Heinz-Horst Schrey)는 "탈교회화를 통해 위협받고 있는 사회와 탈사회화를 통해서 위협받고 있는 교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어 진다고 지적한다.
에필로그 - 성聖의 복귀? : 21세기 기독교 영성
기독교가 위기를 맞은 것은 18세게 계몽주의 시대 이후이며, 그 결과 20세기에는 교회가 서서히 몰락하게 될 것 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21세기에도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는 오히려 성장하고 오히려 그 성향도 뜨거워지고 있다. 우선 세계 기독교 지형이 변하고 있다. 서구 교회가 몰락하면서 기독교의 중심은 지구의 남반구로 옮겨지고 있다. 저자는 1980년대 ‘종교의 세속화’라는 책에서 미래 종교를 3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미래 종교는 복음적이고 영적인 종교일 것,
둘째, 구속적 성향의 종교가 설득력을 갖게 될 것,
셋째, 미래 종교는 신비적 성향을 띨 것이라 예견하였다.
저자가 예측한 것처럼 오늘 우리시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리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성경대로 사는 삶이 중요한 세계가 되었다. 20세기 머리의 종교에서 21세기 가슴의 종교로 바뀌어 가는 현상이 뚜렷해졌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성스러움은 오히려 전 세대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그렇다면 잠자던 신이 돌아온 것인가? 라고 되묻고 있다. 이데 대하여 잠에서 깨어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눈이 떠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21세기 기독교 영성의 시대를 새롭게 맞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느낌⟫
어디서부터 우리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며 에스겔 예언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진노하 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대변을 말려서 마른 대변으로 불을 피워 거기서 빵을 구워 먹는데, 그냥 앉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모로 누어 390일 동안 먹으라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네 몸에 있는 터럭을 다 뽑아 3등분해서 3분의 1은 삭도로 치고, 3분의 1은 불태우고, 3분의 1은 세계만방에 다 흩어 놓고 그 흩어져 도망 가는 자 뒤에 칼이 따라 다니면서 찔러 죽일 것이라 예언하게 하셨다. 그리고 에스겔 예언자에게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하여 큰 군대를 이루는 환상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에스겔 예언자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 주신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리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라 볼 것이다.
아마도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라는 이 책은 마치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 뼈의 환상과도 같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마른 뼈들이 회복되어 큰 군대로 다시 일어 설 수 있을까? 하나님은 에스겔 43장 10-11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겔 43:10-11 /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만일이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 다시 문을 열어 주시겠다는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것 을 알고,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회복의 문이 열릴 것을 선포하셨다.
겔 43:5 /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하여 큰 군대를 이루는 주의 영광을 다시 이 땅에 드러내고자, 이 책이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1장을 통하여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단단한 문제들의 실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 및 계몽주의와 실증주의 영향을 받은 사회진화론자들을 통하여 속속히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앞으로 모습은 그저 비관적일 수밖에 없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런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다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셨다. "오늘날 성스러움은 오히려 전 세대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그렇다면 잠자던 신이 돌아온 것인가? 이데 대하여 잠에서 깨어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눈이 떠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21세기 기독교 영성의 시대를 새롭게 맞이하고 있다." 다시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고, 절망하던 우리에게 예수님이 역사를 인도하심을 분명 히 선포하고 있음을 보았다.
결국 제1세계의 문제는 교권화, 제도화의 문제요, 결국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중심축을 흔들어 즉 서구 기독교에서 비서구 기독교로 북반부에서 남반부로 넘어가게 하심으로 역사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학자들이 진단하였던 교회의 몰락은 결국 제국주의의 교회요, 인간이 세운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허상을 헐어 버리시고, 새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1세계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던 기독교로 인하여 제3세계 나라와 백성들이 심한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성령운동을 통해 하나님이 하셨음을 분명히 보여 주시는 증거라 할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부흥이 있는 곳에 성령운동과 체험을 통한 열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주님의 영광이 여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18세기 미국에서 지속적인 대각성 성령운동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 성령운동을 통하여 열정의 회복은 결국 미 국이라는 국가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고, 존재감이 없었던 감리교단에 열정을 회복하여 크게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별히 한국교회가 오늘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장의 소리에 둔감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한국 감리교회를 더 나아가 한국교회를 다양한 현장의 소리를 대변하여 한국인의 교회로 거듭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답변은 옹색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교회 중심의 시스템을 가지고는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각성운동기에 보여 주었던 의로운 세계를 만들려 하였던 그들의 모습과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던 감리교 순회설교 자 제도는 오늘 이 문제에 응답할 수 있는 좋은 단초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열정을 가지고 민중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하시는 성령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치유를,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좌절한 사람에게 용기를, 슬픈 사람에게 위안을, 외로운 사람에게 소속감을, 자신감을 잃은 사람에게 정체성을, 방황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인 운동이 어디에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제3세계 부흥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 부흥의 불씨를 잘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결국의 성령의 역사 밖에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지속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에 황무지에서 꽃이 피듯이 다시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하나님이 패러다임을 전환시켜 주신 것이다. 그럼 으로 저자는 저쪽 세상에 관한 것을 이쪽 세상의 말로 번역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경험적으로, 초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이런 자기 소멸적 짓거리를 하지 말자라고 강력하게 지적한다.
도날드 밀러가 미국 독립교회 가운데 성장하는 새로운 교회를 분석하며 발견을 제시한 것,
첫째, 성장하는 교회는 종교의 본질적인 부분 즉 성스러움의 경험하고 있다는 것,
둘째,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문화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성장하는 교회는 영성, 도덕성, 그리고 공동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읽으며 생각의 가닥이 잡혀갔다.
이는 성령운동이 자신의 몸 불리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새롭게 도래한 시대를 콕스는 성령의 시대라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스러움의 경험이며, 그 경험의 뜨거운 표현이다." 성령 운동은 인간이 만든 허상을 부수고 성스러움에 즉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영적 모델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 다. 따라서 여기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성령운동은 산업사회나 후기 산업사회에서도 모두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감성의 종교, 성스러운 종교를 찾는 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에스겔 43장 1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겔 43:11 /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어떻게 제도화된 교회가 이 문제에 응답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문제의 해답도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고 저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저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제3세계도 이러한 제도화를 겪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저자는 가능성을 낮게 본다. 그 이유는 문화적 정서와 사회경제적인 현실에 기인한다. 즉 제3세계 빈곤은 더 악화될 것이요. 이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가난해 진다는 걸 의미한 다. 따라서 저자는 제3세계 기독교 현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기독교는 계속 성장한다, 그리고 주역은 가난한 세계의 기독교인이다, 이들의 종교는 계속 성령운동 같은 뜨거운 가슴의 종교일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허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결국 성령운동 만이 교회를 새롭게 만들고, 다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돌아오게 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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