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신약성서가 한눈에 보인다』는 신약성서를 읽기 위한 전초작업을 시도한 책이다. 우선은 신약성서를 바르게 읽기 위한 기초지식을 보게 되고, 신약성서가 기록된 역사적 상황을 간략히 살피게 된다. 이어서 신약성서의 전체적&부분적 조감을 통해 27권의 신약성서 문헌들의 구조와 내용을 훑어보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신약성서를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눈을 장착한 채, 한눈에 신약성서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Ⅱ. 몸 되는 말
제 1부 신약성서를 바로 읽기 위한 전제
1. 신약성서에 대한 기초지식
신약성서를 “신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전 11:25와 눅 22:20에서 유래한다. 성만찬을 제정하는 말씀인 이 구절들에서 예수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을 한다. 기독교는 원래 유대인들의 성서인 “구약”을 철저히 “신약”의 빛에서 읽고 해석한다.
신약성서는 27권의 책들이 모여 있는 책들의 모음집[총서]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이 코이네 헬라어는 일반적인 대중이 사용하던 쉬운 헬라어였다. 신약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이네 헬라어 문법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 27권의 문헌들이 최초로 기록된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 원본을 나중에 베낀 사본들만 존재할 뿐이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개신교회가 사용하는 구약 39권, 신약 27권 말고도 구약과 신약 중간에 “외경”이라는 제목으로 9개의 문헌들이 더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문헌들을 신약 “정경”이라고 한다. 그 말은 이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초대교회의 많은 문헌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최근에 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유다복음 외에도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등 매우 다양한 복음서들이 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의 본문들은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것은 1555년 프랑스 파리의 인쇄업자였던 로베르 에티엔의 작업이었다고 전해진다. 신약성서 27권의 순서는 기록 연대 순서대로나 문헌들이 가치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정경을 27권으로 확정한 고대교회는 예수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기록이라고 여긴 복음서들을 맨 앞에 놓았다. 예수에 이어서 교회의 출생과 선교에 관한 기록인 사도행전을 복음서 다음에 놓고, 그 교회에서의 신앙과 삶에 관한 가르침인 서신들을 놓은 후, 역사의 마지막과미래에 소망을 담고 있는 계시록을 맨 나중에 놓았다. 그러므로 27권의 순서는 구약성서→예수→교회(태동과 선교)→교회의 삶→역사의 완성이라는 신학적인 견해에 의해서 매겨진 것이다.
2. 신약성서와 시대사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를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역에, 특정한 민족 곧 유대인으로 보내셔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과 로마인의 합작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예수에 관한 증언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은 인간의 특정한 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문헌을 남긴 사도 바울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교 교육을 받고 살다가, 사도가 되어 로마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헬라어로 전도하고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의 사역의 모든 과정에는 로마의 정치와 유대교 그리고 헬라문화가 종으로 횡으로 엮어져 있다.
신약성서의 사회적 구조를 살펴보면, 예수와 초대교회 당시 대다수의 주민들은 하층민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의 교인들도 대다수가 하층민이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선교가 확장되면서 부유한 사람들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심지어는 로마 황제의 가족 중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여성들의 지위는 헬라-로마 세계에서는 비교적 좋았으나, 팔레스틴-유대에서는 열악하였다. 사회적 가치관은 전반적으로 가부장적이었고, 특히 노예들에 대한 주인의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신약성서 시대의 지중해 권의 문화는 한마디로 헬레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샤 제국을 무너뜨리고 지중해 동방지역을 장악하면서 헬라의 문화와 동방 지역의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은 지중해 동방 지역에 헬라문화를 전파하여 헬라화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헬라어를 할 수 있어야 했고 헬라교육을 받아야 했다. 헬라문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는데, 헬라문화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벌려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헬라문화는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스토아 철학, 에피큐로스 철학, 플라톤 철학 그리고 제우스 신 숭배나 밀의종교들 그리고 황제숭배와 같은 수많은 헬라-로마의 종교와 철학 사상이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에 몰려들었고, 이들은 동방의 종교사상과 혼합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했다. 특히 유대교와의 충돌은 심각했으며, 결국은 마카베어 전쟁과 유대 전쟁으로 발전했다. 신약성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철학과 종교 및 윤리 사상들이 이때에 생겨났고, 또 이러한 종교와 철학사상의 발흥과 혼합의 소용돌이 속에서 초대기독교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유대교이다. 예수도 유대교 토양에서 활동했고, 그의 처음 제자들도 모두가 그랬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는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해서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때의 유대교는 이미 적어도 300-400여 년 동안이나 헬라문화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유대교는 지역적으로 크게 둘로 구분된다.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디아스포라 유대교이다.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아람어나 히브리어를 사용하면서 비교적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고수한 반면에,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유대교 신앙과 헬라사상을 연결하려는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대교 안에는 여러 개의 종파들이 있었다. 이 종파들을 묶어주는 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과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삶의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 밖의 신앙 내용은 각 종파들마다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안에 있는 중요한 종파들로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첼롯파(열심당), 쿰란공동체 등이고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별도의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AD 70년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이후 사두개파나 첼롯파 그리고 쿰란 공동체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지만, 바리새파는 살아남아서 유대교의 대표적인 종파가 되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은 지금의 텔아비브 근처의 얌니아(현재는 야브네)에 모여서 무너진 유대교를 재건하였다.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재건된 이 유대교를 랍비유대교라고 하며, 이들은 구약성서의 정경을 확정하였고,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던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적대자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반영일 수 있다.
3. 예수에서 신약성서 문헌들의 기록과 정경의 형성까지
기독교와 신약성서의 출발점은 예수이지만 예수가 활동할 당시에는 신약성서는 없었다. 그리고 예수는 단 하나의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지금의 신약성서에 있는 문헌들은 예수가 쓴 문헌들이 아니라, 나중에 예수에 관하여 쓴 문헌들이다.
예수는 BC 6-4년 사이에 태어나서 AD 30년경에 죽었다가 부활 승천했다. 33-6년의 삶 중에서 약 3년 동안을 공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았다. 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그는 많은 행동을 했고,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의 행동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 보여주는 질병의 치유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기적 행위들과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에 관하여는 그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자, 그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곧이어 일어난 예수의 부활과 그 부활에 대한 체험은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았고, 결국 예수의 제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예수의 공동체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 승천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예수의 행적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예배에서는 주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 역 구약성서(LXX)가 낭독되고 기독교적으로 해석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구약성서에 약속되어 있고,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는 확고한 성서로서 제자 공동체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셈이다. 그러나 구약성서 외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의 말씀과 행동에 관한 이야기가 말해지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 직후의 이 단계에서는 그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되기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이었을 것이다. 이 구전 전승은 매우 다양한 갈래들로 나누어졌을 것이고, 조금 나중에는 그 일부분이 여러 개의 쪽지형태로 기록되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처음 증인들인 제자들이 세월이 가면서 점차 죽어감으로써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은 증대되었다.
예수와의 생생한 교제의 경험이 점차 사라짐으로써 기억이 분명하지 못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확장, 그리고 예수에 대한 잘못된 전승 등이 생겨남으로써 증인들이나 그들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들에 의한 기록의 필요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전 전승들이나 쪽지 형태의 문서 전승들은 초대교회의 전도 설교, 신앙과 교리교육 그리고 예배에서 부르는 찬송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구전 전승의 원래 형태나 쪽지 형태의 기록들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복음서들 안에 여러 변형된 모습으로만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예수의 말씀들만을 모아놓은 자료가 있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한다. 이를 Q-자료라고 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러한 전승 자료들을 수집하여 지금의 복음서들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승들이나 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서만 전해지거나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말함으로써 각자가 처해 있는 시대의 교회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 즉 예수의 역사화가 아니라, 현재화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록 훨씬 이전인 AD 48-50년경부터 사도 바울의 서신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전달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의 상황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믿음이 무엇인가, 다른 종교들에 비교해서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교회 생활을 위한 질서는 어떠해야 하는가,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이전에 생겨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다양한 전승들을 암시하거나 인용한다. 바울이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을 몰랐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바울은 부활 이전의 예수의 말씀이나 행동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부활 이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제자들이 고백하고 선포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세워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예수 자신의 말씀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들 이후에 기록된 복음서들은 달랐다. 앞에서 말한 예수에 관한 구전 전승이나 단편적인 문헌 전승들은 거의가 이 복음서들 안에 들어와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러한 전승들을 기초자료로 해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 형식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먼저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이어서 마태와 누가 그리고 맨 나중에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이들 복음서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예수像은, 예수가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등장해서 갈릴리에서 활동한 이후 예루살렘으로 활동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하거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결코 아니다. 부활 신앙에 근거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음의 진리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부활 이후에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이전의 나사렛 예수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통해서 입증된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기록된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서신들이 기록되었다. 이들은 주로 신약성서의 후반부에 수록된, 일반적으로 “일반서신”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제2바울서신”이라고 불리는 것들 그리고 “요한계시록” 등이다. 이들은 교회 내적인 위기와 외적인 위기로부터 교회를 공고히 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미 권위 있는 사도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후이고, 사도들의 제자들에게는 사도들이 가지고 있던 그런 권위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기된 교회 안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스승인 사도들의 권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도들의 이름을 이용해서 서신들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된 27개의 문헌들이 신양성서라는 하나의 이름 곧 “정경”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으며 모든 교회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아타나시우스가 AD 367년에 이집트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39번째 부활절 서신에서였다. 그는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을 포함해서 신약성서 27권을 정경으로 규정함으로써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정경의 범위를 확정한 것이다.
AD 139년경에 구약성서를 성서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또 신약성서 문헌들 중에서 일부만을 받아들이려는 이단자 마르시온 운동과 영지주의적인 이단 사상이 정경의 범위를 결정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2세기 말에 신약성서 핵심 문헌들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졌었고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동방에 있는 교회들이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문헌의 저자와 묵시적인 메시지에 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서방에 있는 교회들은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였다. 히브리서가 두 번째 회개의 가능성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초대와 고대교회의 신앙과 정치적인 투쟁을 거쳐서 27권을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확정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정경 형성의 역사를 피상적으로 보면, 교회가 정경을 확정한 것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그 내면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정경을 주신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이 신약성서를 읽고,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다.
4. 신약성서 문헌들의 저자 문제
복음서의 진정한 저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4복음서들은 그 어디에서도 저자가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다. 서신들에서는 저자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80% 이상의 현대 학자들은 에베소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목회서신에 대해서는 90%가 넘는 학자들이 바울의 저작을 부정한다. 바울은 AD 64/5년에 네로 황제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다는 것이 교회 전통이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런데 에베소서나 목회서신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실정이나 신학적 표현과 내용은 AD 80-1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학자들은 서신의 언급 자체보다도 역사적-신학적 내용과 상황을 더 우선시한다. 그것은 고대 세계에서는 후대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전대의 위대한 스승이나 인물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모세5경이 모세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거나, 잠언과 전도서가 솔로몬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시편이 다윗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도 그런 것이다.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글을 썼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들이 모두 죽고 없는 권위의 공백시대에 제자들이 사도의 이름으로 서신을 써서 새롭게 제기된 교회의 신앙의 문제들에 답을 주고자 했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나 목회서신의 저자가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서신을 썼다면, 그들은 철저히 사도 바울의 신학적인 정신 안에서 서신을 씀으로써, 그들의 문헌이 사도 바울의 서신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서신들의 저자를 인용부호와 함께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5.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읽혀져야 한다.
성서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에 의해서 성서 문헌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아서 또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성서 문헌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성서의 저자들을 단순히 하나의 도구나 기계로 사용해서 성서 문헌들을 기록하였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 인격적인 존재, 역사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그 인간이 처해 있는 제반 상황 안에서 그를 만나고 사용하신다. 성서의 모든 문자들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문헌들을 기록하는 저자와 그 문헌을 읽는 독자들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고, 전달되고, 실천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은 작용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안에 있는 27개의 문헌들의 저자와 독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그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고, 전달하고, 실천하게 한다. 표면적인 모습만 보면, 서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이해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신약성서의 다양한 27권의 문헌을 하나의 정경으로 수집해서 확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초대교회와 고대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 마음 열고 성서를 읽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성령 안에서 깨달은 말씀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이 두 가지 관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실제로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순간,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살았던 예수 그분과 복음서 저자들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살아계셨고, 또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예수 바로 그분을 동시에 만나고 읽고 만나야 할 것이다.
제 2부 신약정경 읽기
▶ 1장 복음서와 사도행전
입으로 전달되고 선포된 예수의 말씀과 예수에 관한 말씀이 어느 시점에서 문서로 기록되면서 이 문서를 복음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복음이라는 말에는 3가지의 의미가 농축되어 있다. 첫째, 예수께서 하신 말씀 ; 둘째, 예수에 관해서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 ; 셋째, 그 말씀들을 문헌으로 기록해 놓은 福音書.
복음서의 저자들은 과거의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박물관으로서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 속에서 항상 살아계시는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역사와 사람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을 말하고자 한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영원하신 예수는 과거 갈릴리에서 살았던 바로 그 예수와 동일한 분이다. 실제로 과거 역사의 어느 한 순간,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살았던 예수 그분과 복음서 저자들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살아계셨고, 또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시는 예수 바로 그분을 읽고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1.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AD 90년경에 시리아 지역에 있었던 초대교회 안에서 기록되었다. 사람들은 이 교회를 “마태 동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마태 공동체는 이스라엘(회당)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대립하ㅗ 있었다. 또 마태복음은 이방인 선교가 이미 오래 전부터 실행되어 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거듭 반복되는 것을 보아, 마태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 내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저자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해서 예수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태 공동체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하나님의 메시아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이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저술되었다. 마가복음에는 이방인들이 예수의 활동 안에 매우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나타난다.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읽은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활동과 선포의 대상에는 명시적으로 이방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은 데 반하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받아들였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구원사적인 특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다.
마가복음이 처음 읽혀진 마가 공동체에는 거짓 예언자들의 문제와 말세 신앙의 문제, 박해 상황에 직면한 문제 등이 있었다. 마가복음은 여러 가지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는 공동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고 선언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3. 누가복음
누가복음과 사도행정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동일한 사람이 기록한 이 두 문헌을 다로 떼어서 읽기보다는 연결해서 한꺼번에 읽는 것이 더 좋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저작된 장소는 팔레스타인 바깥지역, 아마도 로마제국의 동방일 것으로 보이며, 저작 시가는 대략 AD 90년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저자는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던 의사 누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서 의심하는 경행이 강해졌다. 저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는 수준이 높은 헬라어 구사 능력과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저자는 자신이 기독교 제3세대에 속한 인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제3세대 기독교인이라면, 그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도 마차가지이다. 제3세대 기독교(AD 90년 무렵)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임박한 재림기대가 무산되었다. 누가복음은 주님이 불확실한 시간에 오시기 때문에 항상 인내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둘째, 교회 안에서의 가난과 부의 문제가 생겨났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가복음은 돈과 소유에 대하여 어/던 것이 바른 자세인가에 관한 주제를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윤리로 보았다. 교회 안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독선적이고 탐욕스럽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며, 교회 안에서 빠져나갈 위험에 빠지자,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즉 자발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대조적인 공동체로 보여준다. 예수는 소유에 집착하는 대신에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셋째, 교회가 점차로 로마제국 안에서 교세를 확장해나가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로 나타났다. 누가복음은 예수와 로마제국의 대표자들 사이의 만남에 관해서 말할 때 이미 로마제국 안에서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로마제국을 향하여 예수와 기독교의 무해성을 강조한다.
넷째, 누가복음의 교회에서는 거짓 교사들과의 논쟁도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거짓 가르침에 대처하기 위해서 전해져 오는 올바른 가르침에 충실해야 함을 말한다. 예수와 사도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음으로써 오늘의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선교적인 사명을 고취하려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이다.
4.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신약성서의 어느 문헌보다도 발전된 신학, 특히 기독론의 높은 단계를 보여준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신약성서의 문헌들 중에서 비교적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대략 AD 90년-100년경에 소아시아나 시리아에서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들 중에서 저자문제로 가장 치열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문헌적인 특징이나 신학적인 내용으로 볼 때, 사랑 받는 제자 요한이 요한복음을 저술했다는 것도,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형제인 사도 요한이라는 것도 이심을 받는다.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 곧 소위 “요한 공동체” 안에서 이 복음서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동체 안에서 요한 1, 2, 3서도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요한복음을 처음 읽은 교회 공동체는 소아시아에 있었던 것 같다.
요한볶음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교회의 문제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를 엄청나게 박해하고 있는 유대교와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셋째, 교회 내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믿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 문제들은 요한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이야기를 공동체에게 들려주려고 한다. 이 문제들은 결국 예수가 누구이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생애와 활동 무대에 차이가 있다.
둘째, 예수가 죽은 날이 다르다.
셋째, 성전정화 사건의 위치가 다르다.
넷째, 세례 요한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다섯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이 알지 못하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 니고데모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베데스다 연못 이야기, 생명의 떡,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 선한 목자 이야기,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 등등.
여섯째, 특히 이적 이야기의 양과 기능이 현격히 다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해 훨씬 적은 7개의 이적 사건만을 말하며, 그것도 은유적으로 예수의 신적인 본질을 밝히려는 기능을 한다.
일곱째, 예수의 선포 내용과 像이 다르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는 거의 설교하지 않고, 그 대신 예수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주로 설교한다. 공관복음에서 “천국”을 설교하던 예수가 요한복음에서는 자기 자신을 곧 “나”를 설교한다.
여덟째, 비유의 내용에도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는 주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교훈적인 비유들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누구이냐에 대한 기독론적인 비유가 많다.
아홉째, 요한복음의 예수는 공관복음의 예수가 비교적 자주 말씀하셨던 하늘나라, 율법, 이혼 등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5. 사도행전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성령 그리고 교회와 선교이다. 구약성서는 그 구원시대의 서막이자 예고에 속하고, 예수의 시대는 구원이 실현되는 중심 시대이며,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시대는 예수 안에서 실현된 구원을 땅 끝까지 선교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과 이유를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통해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구원사적 신학의 기본 구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령의 활동이다. 출발점은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최초로 성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준다. 영은 예수를 광야로 내몰고 또 그를 나사렛으로 인도하는데, 여기서 예수는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에, 주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라는 중요한 말을 한다. 이미 세례 요한이 예고한 것처럼, 예수가 성령을 받은 것이 누가복음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이다. 예수 자신은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영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성령은 구원사의 흐름에 거듭 반복해서 개입할 뿐 아니라, 중대한 교회사적인 결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예수는 교회 안에서 계속 살아계시며,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일으키고 확장시킨다.
▶ 2장 바울 서신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도시 출신이다. 바울은 소아시아 최고의 교육 도시에서 최고의 헬라 교육을 받았으며, 천막을 만드는 수공업을 익히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철저한 바리새인으로서 절대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실천해야 구원을 얻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있는 거룩한 곳이라고 철저히 믿는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박해했다. 그런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일평생 이방인의 사도라는 소명의식 속에서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바울의 서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철저한 변화의 사건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 변화의 사건은 그의 믿음, 인생관과 가치관, 미래의 소망까지 포함한 전부가 완벽하게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는 바울의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핵심이 이 변화 사건에서 결정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바울의 신학은 선교의 과정에서 점차 발전되고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6. 로마서
바울은 그의 제3차 선교활동의 막바지인 55년 말이나 혹은 56년 초에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을 로마교회에 전달한 사람은 집사 뵈베였을 것이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 있는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개척되지 않았다. 로마에 언제, 누가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생겨나게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지만 AD 49년의 추방으로 인하여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조직에 관해서도 알 수 있는데, 로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것 같은 가정교회들이 상당수 있어서, 여러 가정교회들이 네트워크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 바울이 스페인 여행을 위한 인적, 물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서신을 기록하게 된 동기나 목적을 네 가지로 말한다.
첫째, 바울이 계획하고 있는 스페인 여행에 대한 로마교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
둘째,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할 때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충돌에 대해서 로마 교회의 기도와 지원을 받기 위해 ;
셋째, 바울을 반대하는 유다주의 적대자들의 공격과 그 영향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도 있기 때문에, 그 공격에 대하여 자기를 변호하면서 동시에 자기 신학을 전달하여 이해시키기 위해 ;
넷째, 로마 교회 안에 있는 특별한 문제들에 대해서 사도로서 해결책을 주기 위해.
로마서는 바울이 가장 마지막 무렵에 기록한 서신으로써,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신학 주제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7. 고린도전서
바울은 이 서신을 에베소에서, 제3차 선교여행 중에 기록한 것으로 본다. 55년 초 쯤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때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와 함께 18개월 동안 선교 활동을 해서 세운 교회로서 매우 역동적인 교회였다. 대다수 교인들이 이방인 출신이었다. 바울이 떠난 후에 고린도교회는 한동안 잘 성장하였지만, 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이 문제들을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사람을 직접 보내거나 혹은 서신을 보내어 알려주면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들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파벌 형성, 음행, 성도들 사이의 송사, 결혼, 독신, 이혼 그리고 재혼, 우상제물, 예배, 은사, 부활 등 다양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울은 직접 가서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신을 써 보내서 간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신약성서 문헌들 중에서 초대교회의 구체적인 삶에 관해서 다양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서신이다. 고린도전서의 신학적 관심의 대상은 교회와 교회의 일치이다. 고린도전서에는 1장에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일치와 거룩함이라는 주제가 흐르고 있다.
8. 고린도후서
바울은 이 서신을 55년 가을에 마케도니아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서신을 쓰게 된 배경은 바울이 55년 초에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후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기까지 약 6개월 동안에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후에 고린도교회 바깥으로부터 거짓교사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비방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을 부정하였는데, 고린도 교회가 이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넘어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소위 “변증서신”을 써 보냈고, 그 뒤를 이어서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해서, 거짓교사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바울의 면전에서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비방을 함으로써 바울에게 심대한 모욕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변증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를 썼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핵심적인 메시지로 담고 있다. 고린도후서의 신학적 주제의 핵심은 사도직의 본질이다. 바울이 말한 진정한 사도의 모습을 간략히 요약하면, 사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화해사건을 말씀으로 선포하는 사람이며, 어느 경우에도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온갖 박해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이다. 바울 자신이 그 진정한 사도의 길을 걸어갔다.
9. 갈라디아서
우리는 갈라디아서가 두 고린도 서신들 이후에, 그리고 로마서를 기록하기 직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55년 늦가을쯤에 마케도니아에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의 바울은 한마디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에베소에서의 극심한 고난, 고린도교회의 문제, 거기에다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자시의 몸에 있는 불치의 질병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AD 55년은 바울에게는 최악의 해였다. 그런 최악의 해에 고린도전서, 후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로마서에 이르기까지 가장 깊고 오묘한 서신들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아픔이 진주를 만든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잘 받아들여서 믿음의 생활을 잘 하던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그들이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을 부정하였고, 갈라디아의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함께 유대교의 할례를 받아야 하고 또 특정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바울의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갔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바울은 자신이 진정한 사도라는 것과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약속에 비해서 율법은 이차적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지 430년 후에야 비로소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오로지 죄를 충동질할 뿐이고, 천사들에 의해서 지시된 것이고, 모세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율법은 인간을 인도하는 초등교사 노릇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가 온 이후에는 율법은 더 이상 그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인간은 이후부터는 율법이 아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산다.
10. 에베소서
서신 자체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이 서신을 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여 동안 선교했는데, 이 기간은 그의 선교활동 중에서 한 도시에서 체재한 가장 긴 기간이었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사도와 에베소 성도들 사이의 친밀감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에베소서는 바울의 다른 주요 서신들과 비교할 때, 언어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매우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서신을 바울의 어떤 제자가 스승의 이름으로 기록한 제2바울 서신이라고 주장한다.
에베소서는 특정한 교회에 보낸 것이라기보다 바울이 선교한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진 회람서신으로 보인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회는 에베소교회였다. 에베소서는 신약성서의 문헌들 중에서 수신자들의 역사적 상황이 가장 비밀에 싸여 있다는 서신이다. 그러나 서신이 교회의 일치와 윤리적인 삶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교회의 일치와 윤리적인 삶이 위기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추적할 수 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사도의 죽음 이후에 서로 일치하기보다는 구심점을 잃고 개교회주의에 빠져가는 현상을 보면서, 저자는 바울의 이름으로 이 서신을 써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인 삶을 버리고 그 이전의 이방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한 것을 보면서 저자는 기독교적인 윤리를 강화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서의 신학적 관심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충만이다.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는 우주만물의 주인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세력들을 그 발 아래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우주적 주권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우주적 주권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곳이 바로 그의 몸이고 충만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충만하게 경험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구원의 장이다. 이러한 교회 이해에 의하면, 교회는 당연히 전 세계에 오직 하나뿐이다. 수많은 교회들은 우주적 주권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듯 교회 역시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셨고, 그럼으로써 교회를 세우셨다. 그럼으로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모두 극복되었고, 그러므로 교회는 유대인, 이방인에 이어서 제3의 인종이다. 교회는 하나의 건물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그 건물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 살아간다. 교회의 본질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안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최대의 과제요 사명이다. 이처럼 에베소서의 교회 이해는 오늘의 교회일치 운동에 확고부동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성도들은 구원을 받아서 이미 하늘에 그리스도와 왕 노릇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악한 영적인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분열된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기로 예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의 보좌에 앉으심으로써, 하늘과 땅을 통일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이 우주적 승리를 교회는 알고 고백하지만, 악한 영적 세력들은 아직 모르거나 혹은 알고도 부정하고 있다. 교회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이 사명을 대표적으로 감당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이다. 바울 사도의 선포활동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다. 에베소서는 그 사도 바울의 활동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다.
11. 빌립보서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와 비단 장사를 하던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개척한다. 루디아는 끝까지 바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한다. 빌립보서는 갇혀 있는 바울이 방문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서신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곧 60년경에 빌립보서가 기록되었다고 본다. 빌립보교회와 사도의 관계는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친밀한 것이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 선교를 할 때에도 선교비를 후원해 주었고, 빌립보서를 쓰는 것도 빌립보 교회가 감금생활에 필요한 헌금을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기 때문에, 비록 감옥에서 쓰지만 감사와 기쁨을 자주 말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빌립보서가 기록될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거짓교사들의 등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도 상당한 갈등과 긴장관계가 있었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헌금에 감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나타난 거짓교사들의 유혹을 경계하며, 긴장관계를 보이는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고난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의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이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에게서 배우기를 바란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낮아지고 포기하는 그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을 위한 모범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인들도 이기적인 싸움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겸손과 일치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면, 교회 안에 파벌싸움이나 갈등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와 마찬가지로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였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심판과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그렇게 살고자 하는 거룩한 의지를 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그 의지를 이루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12. 골로새서
저자는 “골로새서의 바울”이다.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아니라, 에바브로에 의해서 세워졌다. 골로새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이곳의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유래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나 미혹하게 하는 설교들과 새로운 철학이 나타나서 교회들을 바울의 가르침에서 떠나도록 유혹하였다. 골로새서는 바로 이 철학에 맞서 싸워서,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이 가르친 복음과 믿음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골로새서의 신학적 메시지도 거짓 가르침과의 격렬한 투쟁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가 싸우고 있는 거짓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에 맞서서 서신이 말하는 바른 신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골로새 교회에 나타난 거짓 가르침의 내용은, 골로새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 것과 특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며 또 특정한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외에도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많은 영적인 세력들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바울은 세상의 초등학문[세상의 기초원리], 즉 세상을 구성하고 지배하고 있는 많은 영적인 세력들을 따르지 말 것을 촉구한다. 거짓교사들은 천사숭배도 가르쳤다. 한 마디로 거짓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것만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인간의 삶과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많은 영적인 세력들을 함께 숭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거짓교사들의 철학에 맞서서 골로새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인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승리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의 주권자이시다. 그리스도는 이 승리를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우주적인 승리를 거두신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우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기 때문에 골로새 성도들은 거짓교사들이 요구하는 금욕이나 할례를 실행하거나 세상의 초등학문이나 천사를 숭배할 필요도 이유도 없으며, 그런 영적인 세력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성도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영적인 존재들을 숭배하거나, 특정한 절기나 날을 지키는 것 등은 필요하지 않다. 성도들은 그런 것에 구애 받지 말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13.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최초로 기록된 문헌이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때 빌립보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와서 세운 교회다.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되었을 때 이 교회는 개척된 지 오래되지 않은 신생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의 좋은 평판은 희랍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데살로니가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 데살로니가교회 역시 동족인 이방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박해의 문제 말고도 믿음의 문제가 있었다. 예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승리를 하고, 부활에 관한 불확실한 믿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는 이 서신을 기록해 보낸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토대는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선택과 부르심의 토대에 서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참여할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소망이 이 서신의 신학적인 핵심 메시지이다.
14.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사이에 있는 예수 재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학자들은 데살로니가후서의 저자가 바울의 제자들 중의 누군가가 스승의 이름으로 기록한 서신이라고 주장한다. 전서는 주 예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지만, 후서는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는 주장을 오히려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어서 후서는 종말에 일어날 사건의 순서와 과정을 말하는데, 이것도 전서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살전 4:13-18에서는 주의 오심과 모든 성도들이 공중에 들려 올라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되리라라는 기대가 핵심적인 말씀인 데 반하여, 살후 2:1-12는 상당히 다르게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이전에 먼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자처하게 된다. 이 불법의 사람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앗지만 그의 활동은 벌써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살전 5:1은 주의 재림의 날짜를 계산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지만, 후서 2:1-12는 재림 때까지의 과정과 순서를 말함으로써 오히려 재림 때까지의 과정을 헤아리며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전서는 주의 재림의 “임박”에 포인트를 맞춘다면, 후서는 “아직 아님”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정신과 신학으로써 이 서신을 기록한 사람을 “데살로니가후서의 바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가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점차 사라지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책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1세기 말의 상황에서 바울의 이름으로 주의 재림이 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바로 그 바울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주의 재림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게속되는 시간 속에서 책임 있고 질서 있ㄴㄴ 삶을 살게 하려고 이 서신을 쓴 것이다.
15.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이 세 개의 서신들을 묶어서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은 아마도 18세기 무렵이다.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다른 서신들(빌레몬서를 포함해서)과는 달리 이 세 개의 서신은 특정한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개인은 사사로운 사람(私人)이 아니라, 교회를 치리하는 목회자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서신들은 그들에게 목회자 직분의 근거와 수행 방식 등을 가르친다. 목회자의 직분을 어떻게 바르게 수행할 것이냐 하는 교훈은 어떤 특정인 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해당하는 보편타당한 교훈이다.
세 서신들에게서 부정적으로 공통적인 것은 사도 바울의 인격과 바울을 통하여 전해지고 보증된 바른 믿음의 전승을 굳게 지키라는 것이다. “목회서신의 바울”은 바울이 가장 사랑했던 두 동역자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교회들에 나타난 문제들을 해결하고 교회들로 하여금 바울이 선포하고 가르친 바른 믿음에 굳게 서서 성장해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서신들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의 두 동역자 중에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래서 사도적인 사역을 대신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바울과 elhaep 사이의 관계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또 다른 동역자 디도는, 바울의 선교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로,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 투철한 투사였다. 나중에 디도는 사도와 고린도 교회 사이에 충졸이 일어났을 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교회에 보내서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게 한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일치의 징표가 되는 이 헌금이 디도에게 부여된 중요한 임무였다. 헌금의 사명을 디도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바울이 디도를 신뢰한다는 표시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나의 동무요 나의 동역자”라고 말한다.
목회서신에 속하는 세 개의 서신들은 “바울”이 지역 목회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거짓 교훈을 물리치고, “바른 교훈”의 바탕을 굳건히 하고, 교회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와 기둥의 터”인 하나님의 교회를 굳게 세울 것을 명령하고 가르치는 서신들이다. 아울러 목회서신은 윤리의 측면에서 성도들의 경건한 삶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가르친다.
경건한 삶은 냉철하고 덕스러운 믿음의 삶으로서, 사랑의 행위, 인내, 겸손, 나그네에게 친절 그리고 널리 자선을 베푸는 삶이다. 그러나 목회서신의 윤리는 고대세계의 보수적인 가부장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여자들은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고, 노에는 그의 주인을 존중해서 순종해야 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한다. 세속 사회의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이런 보수적인 윤리적 가르침도 목회서신이 초대교회의 비교적 후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이다.
16. 빌레몬서
1장으로 된 사도 바울의 이 작은 서신은 빌립보서와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서신의 수신자로 언급되는 빌레몬은 골로새에서 살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와 동역자라고 부른다. 바울은 빌레몬서를 통해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도망친 노예로 그를 대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빌레몬서는 가정교회라는 초대교회의 조직 형태에 대해서 알려준다. 구대세계에서 가정은 종교적인 삶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가정교회는 고대 세계의 가부장적인 질서와 세계관을 깨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새로운 질서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조직화되고, 또 가부장적인 질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의 변화는 바울이 순교를 당했던 AD 64년 이전에는 아직 찾아볼 수 없고, 1세기 말경부터 찾을 수 있다.
▶ 3장 바울 이후 서신들과 요한계시록
17. 히브리서
히브리서 자체는 누가 저자인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저자는 헬라주의-유대교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구약성서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대한 헬라주의-유대교적 해석 전승들에 대핸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사학적인 저술 능력을 가진 윤ㅇ한 인물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는 적어도 제2-3세대 기독교인이 분명하다.
AD 80-90년 즉 기독교 제2-3세대는 기독교 신앙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맞았던 시기이다. 히브리서가 전제하고 있는 당시의 성도들이 상황은 대단히 비판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믿음 생활에 게으르게 되었다. 그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믿음을 포기하려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의 토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탄식한다. 따라서 믿음으로부터 타락한 사람이 두 번째 회개를 해서 다시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 안에서 매우 시급한 주제였다. 바로 이런 신앙의 문제를 가진 성도들에게 저자는 이 서신을 써 보내서,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을 강하게 해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도록 경고하고 격려하려고 했다.
저자는 “권면의 말씀”이라고 이 서신을 규정하는데, 권면의 말씀은 고대교회의 설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서신이라기보다는 한편의 긴 설교이다. 히브리서는 위기적인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구원의 본질을 밝혀서, 그런 유혹과 위기를 극복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것이다.
18. 야고보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는 “일반서신” 혹은 “공동서신”, 혹은 “가톨릭서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바울의 서신들과 구분한다. 이 때 “가톨릭”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일반적인이라는 뜻을 가진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주의 재림 때까지 인내로써 승리할 것을 가르치며,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친다. 성도들은 맹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항상 진실해야 하며, 기도와 찬송의 신앙 생활을 하고, 미혹된 성도들을 바른 길로 돌아서게 인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고보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진리에 합당한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19.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선택 받은 나그네들에게 보내졌다. 수신자 교회들의 상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고난과 박해의 상황이었다. 이 서신에서의 고난은 AD 95년에 극에 달했던 도미치안 황제에 의한 황제숭배 강요로 인한 고난은 아닌 것 같다.
이 서신에서의 고난은 기독교적인 삶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이 세ᅟᅡᆼ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나그네로 살아갈 때 당연히 받는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그 주변의 믿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른 모양의 삶을 사는 것이고, 이것이 주변의 미움과 박해를 가져왔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서신의저자는베드로의 이름으로 글을 써서 믿음을 격려하여 신앙생활에 승리를 하도록 도우려고 한 것이다.
20. 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는 유다서와 매우 우사한 측면을 보여준다. 이 두 서신들 모두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소아시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후서는 서신 스스로가 기록 의도를 분명히 말한다.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맞서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곧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던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재림 자체를 부정하고 조롱한 것이다. 베드로후서의 신학적인 메시지는 그 당시 교회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과이 사움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잘못된 성서해석에 근거해서 주의 재림, 종말 심판 등을 부정하였다. 저자는 이들에 맞서서 하나님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지식과 앎을 강조한 데 맞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르고 깊은 지식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예수는 신성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믿음의 목표임을 가르친다.
21.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복음처럼 요한 공동체 혹은 요한학파 안에서 기록된 서신들이다. 요한의 세 서신들은 공도에 안에서 다른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생겨났다. 저자는 성도들에게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머물 것을 호소한다.
참고 : 요한공동체의 발전사를 3단계로 추측할 수 있다.
1단계는 요한공동체가 원래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언자적이며 카리스마적인 방랑 선교사들의 운동에서 유래했는데, 유대 회당과 논쟁하면서 궁지에 몰려 급기야 유대교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이것이 요한공동체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2단계는 그 후에 소아시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에서 기독론에 대한 논쟁으로 인하여 분열된다. 공동체의 한 무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육신이 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요일 4:2) 영지주의 운동에 비견할 만한 “가현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에 접근하게 되었다.
3단계는 그보다는 규모가 작았던 다른 한 무리로, 예수의 성육신을 끝까지 고수하였고, 소아시아의 다른 기독교 운동에 합류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이때가 주후 90-100년경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라고 추정된다. 요한복음의 최종 편집 작업을 책임진 이른바 정통파에 속하는 요한공동체 무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2세기 공교회에 합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리가 “요한학파”이다. 요한문서(요한복음+요한서신)가 이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22. 유다서
이 작은 서신은 그 저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우다”라고 말한다. 이 서신을 기록하게 된 동기는 수신자 교회 안에서 등장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성도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고 권하고자 함이다.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으로 슬며시 들어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려고 하며, 태연히 교회의 애찬식에 함께 참여하면서 성도들의 믿음과 도덕을 훼손하려고 하기 때문에, 저자는 이 서신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그들에 대항하여 싸워서 믿음의 도를 지킬 것을 권한다.
유다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전승으로 받은 “믿음의 도”이다. 성도들은 사도로부터 전해 받은 “믿음의 도”에 굳건히 서서, 거짓 교사들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유다서가 주는 메시지이다.
23. 요한계시록
신약성서의 마지막 문헌의 저자는 “요한”이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도미치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해당되는 AD 90-95년 사이에 소아시아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선지자 요한은 외부로부터는 로마의 황제 숭배 강요를 당하고, 교회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고난과 위기에 처한 상황 속에서 교회들에게 믿음의 용기를 북돋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한편으로는 로마제국의 살벌한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하여, 그 이전과 그 당시의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묵시문학적인 상징과 환상 등 신비적인 표현 방법을 동원해서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 강요를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부의 신앙적인 문제들에 해답을 주려고 요하계시록을 기록했다. 요한계시록에서 미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미래가 아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성된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 미래이다.
Ⅲ. 나가는 말
신약성서의 27권이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경은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하고 적용되어야 한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윤리적인 문제는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 되신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공통적인 메시지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성서의 다양한 문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독자들에게 다양한 방식과 내용을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귀를 기울이고 지키려는 진보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진보성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진정한 보수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신약성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기준을 흔들림 없이 굳게 붙잡으면서도,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하다는 열린 자세를 갖는 것이야말로 신약성서의 다양한 27권의 문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에 합당한 자세일 것이다. 건전한 교파 의식은 좋은 것이지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주의나 교파주의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배워야 할 중요한 신앙인의 자세가 될 것이다.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되는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신약성서에 근거된 확고하면서도 아름다운 신앙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도정(道程)에 들어선 나, 『신약성서가 한눈에 보인다』를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서를 통해, 기적의 빛이 열려있는 길로 언제나 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돌아오게 하심, 호 11:9-11, 호세아 시리즈 설교(25) (0) | 2024.05.27 |
---|---|
흘려보내는 삶, 롬 15:2, 2024. 5. 26. 주일 예배 설교문, 새생명 전도축제를 준비하며 (0) | 2024.05.27 |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북 리뷰 (0) | 2024.05.25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눅 4:18-19 (1) | 2024.05.25 |
성령의 권능으로 비상하라, 이사야 40장 31절 (1) | 2024.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