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1-9
한 부유한 남성이 마차를 타고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부유한 남성은 밤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마차 안에 있었고 그 안에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부유한 남성에게는 따뜻한 공기가 있었고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 마차를 끌기 위해 차가운 밤 기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어두움 속에서 열심히 말을 모는 마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어두운 밤 길을 비춰주는 등불도 없었고, 차가운 밤 기운을 막아줄 따뜻한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시간 마차 안에서 따뜻한 공기와 밝은 등불을 누리던 부유한 남성은 결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며 말을 몰고 있던 가난한 마부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 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들의 행진이었습니다. 가난한 마부에게는 하늘의 찬란한 별 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를 통해 과학의 급격한 발전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성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유럽 지식인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곧, 과학이라는 등불과 이성이라는 등불이 오히려 온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해당되지요. 작은 마차 안에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켜 놓은 등불에 만족하여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신가요? 가난한 마부처럼 차가운 밤공기와 싸우고 계신가요? 비록 차가운 밤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들여야 하고, 자신의 앞에 그 어떠한 등불도 비취지 않는 것처럼 보이신다면, 바로 그 때 온 땅을 뒤덮는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8편은 굉장한 기쁨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 시 8:1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1절만 보아도 다윗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높은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봄꽃이 만발한 들판을 걷거나, 곱게 단풍이 진 산길을 걸을 때, 놀라운 광경을 보고서 그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고, 그 장관에 잠시 취할 수 있지만, 그런 자연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주위 사방의 자연을 보고서 그 자연보다 훨씬 위대하시고, 장관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경험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맛 본 사람은 자연을 보면서도 "아 하나님!"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양떼를 돌볼 때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삶, 인정 받지 못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차기 왕으로 세울 가문을 사울의 집안이 아닌 이새의 집안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집으로 차기 왕에게 기름을 붇기 위해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누가 기름부음의 대상이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모두 집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외였습니다. 아버지가 생각해도 자기 아들 8명 중에서 첫째에서 일곱째까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막내 다윗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도 주목 받지 못했던 다윗이지만,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에는 나이아가라 같은 거대한 폭포가 있거나, 만리장성이나 그랜드 캐니언과 같은 놀라운 자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그만큼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시 8:2 /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여기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대조되고 있지요. 한편에는 대적, 원수, 보복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린 아이들, 젖먹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적, 원수, 보복자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인들을 말합니다. 반면 어린 아이와젖먹이들은 누군가의 돌봄이 없으면 생존할 수조차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합니다. 반면 원수들과 보복자로 대표되는 세상의 거인들의 입은 잠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이라는 세상의 거인 앞에 서 있던 어린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와 같았던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였던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그의 입을 막아버리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해져라', '어린 아이와 같이 선한 삶을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로서의 어린 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 다윗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납니다.
❚ 시 8:3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의 삶은 참으로 치열했지요. 그날도 온종일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어두운 밤이 되자 다윗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어린 시절 다윗이 목동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돌보는 양떼를 공격하였던 곰이나 늑대와 싸우느라 하루 종일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다윗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후 다윗이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인지도 모릅니다. 사울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이곳 저곳을 정처 없이 도망다니던 어느 날, 사울의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또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다시 캄캄한 밤이 되었을 때 다윗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다시금 바라봅니다"
혹 다윗의 노년 시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왕궁을 급하게 나와야 했던 어느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왕궁 안에서 쉬지 못하고 다시금 군인들과 야영을 하면서 다윗이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노래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바라봅니다"
다윗은 이렇게 치열한 하루를 보낸 뒤,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고, 결국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에게 참으로 놀라운 깨달음을 찾아옵니다.
❚ 시 8:4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은 치열하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날이 저문 뒤 비로소 자신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거죠? 자신은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치고 이제야 한숨을 돌리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생각하시며 돌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저 자신의 코 앞에 펼쳐진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그때에도,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늘 생각하고 계셨으며, 하나님은 그를 늘 지켜보시며 보호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 다윗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기억하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지만, 우리가 삶의 한 복판에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 비해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치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였고, 그 영광 가운데 자신을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의 깨달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이 치열한 하루의 삶을 마무리하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자, 이제는 자기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목표, 곧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게 됩니다
❚ 시 8:5 /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오늘 본문 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표현, 나아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다'는 표현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입니다. 특별히 바로 앞 절인 4절의 "사람이 무엇이기에"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노쉬)는 완전히 타락한 인간, 철저하게 범죄한 인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4절과 5절을 조합하면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치열한 삶을 살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혹, 여러분 가운데 예전에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예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느덧 생활이 바빠 너무도 많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계신 분들 계십니까?
다시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모습이 우리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 시 8:6 /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 시 8:7-8 /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실제로 시편 8편의 말씀과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던 다윗을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장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거나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거인 앞에 서 있는 어린 아이와 같고,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는 세상의 강력한 세력 앞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8편이 말하는 하나님의 비전,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꿈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매우 명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도 없고, 세상을 지배할 수도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죠. 그리고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며 다스리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과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의 거인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지금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세상의 거인들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 고후 5:17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깨달으면, 자신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서만 자신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새로운 관점으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영이 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항상 내면에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입니다. 내가 나 자신 속의 신(神)을 보는 것 같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특권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한,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먼저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일을 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곧바로 연결된다면 하나로 집중되어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일이 조화롭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조화롭게 하려면 인간 본래의 실재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맞추어 재조정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주고 있는 가르침 중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을 것입니다.
❚ 요 14:12 / 나를 믿으면 너희는 내가 하는 일을 너도 할 것이고, 그보다 큰일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의 상념을 예수님에게 집중한다는 것이고 예수에 집중할 때 예수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그를 품는다는 의미는 바로, 우리의 상념을 예수님이게 집중하여 예수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중심으로 살아 가셨습니다.
❚ 요 8:29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다윗은 이런 고백으로 노래를 마무리합니다.
❚ 시 8:9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파가 제 아무리 거세게 몰려온다 하더라도 어디에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요, 바로 그때 온 땅을 뒤엎는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시면서도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모든 주의와 집중을 영광의 주님께로 돌리십시오. 비록 오늘 하루 치열하고 피곤한 삶을 사셨을지라도 여러분이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요, 여러분이야 말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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