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부자
마 4:1-11
1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할렐루야!
큰 비가 내려서 여기저기 피해가 심각한데, 이 물난리 가운데서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걱정과 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모쪼록 비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는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실 저희 집도 어제의 폭우로 인해 천장에서 물이 새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밑에 양동이를 받쳐 놓고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자니 우습기도 하고 또 나름의 운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기사와 뉴스를 보니 예기치 못한 이번 폭우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장마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번 여름을 그나마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던 한랭건조한 티베트고기압이 고온의 공기와 만나 기록적인 폭우로 돌변할 줄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내가 예측하지 못한 문제들이 내 삶을 침범할 때마다 우리 안에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지?” “정말 존재하시는가? 아니면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를 벌하시는 것인가?”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하는가?”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자니 벌을 받을 것 같고, 내가 책임을 지자니 마음 속이 불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부모님과 또 교회 성도님들의 사랑과 보호 덕분에 큰 신학적 고민이 없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세상에 얼마나 고통이 많고 억울함이 많은지 알게 되는 과정 속에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시점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믿음이 해답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려낸 하나님이 아닌, 직접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먼저 알고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셨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 안에서, 그리고 직접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셨고, 구원을 이루셨으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알리는 표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또한 인간이셨기에 우리의 고통을 고뇌를 동일하게 겪었습니다.
마 8:2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또한 예수님은 세상 끝날,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의 말씀입니다.
마 24:36 /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우리와 동일한 육체의 고통과 앞을 알 지 못하는 괴로움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먼저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가장 인간적으로 힘이 없을 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제 주변에는 40일 금식을 하신 분이 한분 계신데, 바로 사당중앙교회 김희선 사모님입니다. 제 어머니이기도 하시죠. 그때는 제 나이가 12살이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40일 금식을 강력하게 명받고 기도원으로 향하던 어머니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는 어렸던 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항상 밥을 2공기씩 먹으며 나는 밥만 먹는데 왜 살이 찌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과 함께 한가득 밥술을 뜨시던 복스러운 사모님은 곧 40키로가 되고, 40일 후반으로 갈수록 숨이 가빠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금식 마지막 40일을 향해 가던 그때 자녀인 저와 제 오빠는 아직 철이 없어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엄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기도하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금식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40일 금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생각해보면 40일 동안이나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120끼를 거르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피골이 상접하던 사모님의 모습에 예수님이 겹쳐 보입니다. 아마 주리다라는 표현이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매우 지치고 육체적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전에 해결해야 할 이상한 말이 하나 있어요. 1절의 말씀입니다.
마 4:1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단련하시기 위해 시험, 고통을 지나가게끔 만드셨다라고 이해하면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두렵게 느껴집니다. 마치 우리가 장기 말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우리를 함부로 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넷플릭스에서 즐겨보는 프로그렘 중에 나의 첫 심부름이라는 일본 예능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어린 아이들이 인생에서 첫 번째 심부름을 하는 순간을 담은 리얼리티 예능인데요, 아무래도 나이가 많이 어리기에 실수도 많고, 돌발상황도 일어나겠죠? 그런데 첫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기까지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이뿐만 아닙니다. 그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부모는 아이의 동선을 머릿 속에 그리며 언제쯤 집에 도착할지 계산을 합니다. 모처럼의 휴식인데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언제 아이가 오는가만 생각합니다. 아이를 기다리며 공연히 베란다 바깥을 내다보거나 입구를 서성이는 일은 다 경험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십니다. 예수님이 금식을 하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성령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눅 4:1 /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님은 비록 사십일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주리셨지만 하나님의 영과 함께 있어 육이 죽고 영이 사는 상태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곁에 마귀가 찾아와서 너무나 그럴듯한 3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가장 먼저 배고플테니 돌로 빵이 되게 하라는 유혹은 일견 합당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유혹은 첫 사람 아담에게도 주어졌고 결국 아담을 넘어뜨렸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식욕, 탐욕의 욕망과 또한 안정과 명예에 대한 욕구를 건드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인 시험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마 4:3 /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할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만일 이 돌을 떡으로 만들지 못하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능력을 사용하여 아들임을 인정받을지, 아니면 그 말을 실행하지 못하여 아들이 되지 못할지. 그런데 예수님은 제 3의 선택을 하시죠. 아예 그 질문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참 인간으로 오사 우리의 길잡이가 되심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4절의 말씀입니다.
마 4: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0일 금식 후 주린 배를 채우고 싶은 것, 그리고 내 존재와 능력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일 텐데 예수님이 거기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전에 제가 좋은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식사 장소는 뷔페였는데요 평소에는 갈 일이 없는 비싼 곳이기에 가기 전부터 무슨 옷을 입는다, 화장을 한다 난리를 피우고, 또 가서 무슨 음식을 먹을지 신나서 다 정보를 찾았습니다. '기왕 가는 거 많이, 비싼 것만 잔뜩 먹어야지' 큰 결심을 하고 식당에 갔습니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상합니다. 제가 제일 꾸몄는데, 제가 제일 촌스러웠습니다. 그 자리가 익숙한 사람들은 편한 옷을 입고 가벼운 식사를 하더라구요. 저는 그런 곳이 처음이었기에 더 꾸미고 간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부자들은 티를 안 낸다. 왜?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아도, 인정 받지 않아도 이미 찐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귀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명백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사실은 몸과 마음 깊은 곳에 심겨있습니다. 떡이 아닌 말씀을, 천사의 수종과 천하만국의 영광보다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찐 부자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호위하던 이 믿음이 오늘 저와 사랑하는 사당중앙교회 성도님들과도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삶을 회고하는 것으로 우리가 가진 고통의 문제와 하나님을 향한 질문들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내 삶에 벌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 하나님께 부단히 기도하시며 때로는 내 모든 응어리를 쏟아내는 탄원의 기도를, 그리고 위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가족끼리만 용인되는 차림과 말투가 있습니다. 집에서 가족에게만 보여주는 편하고 솔직한 모습입니다. 밖에서는 최대한 좋은 모습만을 드러내지만 진정한 내 편에게는 일상의 모든 것을 나눕니다. 부모님께 편하게 투정부리고, 짝꿍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그 마음 전부를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내 삶을 위협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마침내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이번 폭우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과 일터에 물이 차고, 또 물질적으로 심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그 상한 심령과 고통의 상황들을 속히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 또한 그 도움에 자리에 서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에 아버지, 어머니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힘과 능력 주시길 원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옆에 계신 하나님,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항상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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