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계산기
삼상 13:8-14
8 /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 /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할렐루야! 7월의 첫 시작을 예배와 함께 열어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장마가 한창이라 비가 많이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기도 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위로 인해 무척이나 무더운 날들을 보냈죠? 어떤 기사에서는 그래도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고 하던데요. 폭염의 날씨가 되면 잠깐의 외출도 쉽지 않습니다. 더위로 인해 일상적으로 수행하던 일들도 갑자기 난이도 높은 미션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날씨가 좋지 않으면 예배를 준비하다가도 ‘아 오늘은 성도님들이 교회에 나오기 힘드시겠구나’하는 마음이 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위해 오신 성도님들을 뵈면 너무나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따뜻하고 편한 집을 뒤로 하고 더운 열기나 큰 비를 맞으며 여기에 오기까지 쉽지 않은 걸음을 하셨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서 여러 선택지를 마주합니다. 무엇을 먹느냐, 어디를 가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와 같은 매일의 쉬운 선택도 있지만, 때로는 인생이 달린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한 우리 성도님들의 결정이 훌륭한 선택이 되길 기도합니다. 유명한 말이 있지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인간의 삶에서 선택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최근에는 밸런스 게임이라는 것이 유명해지면서 선택으로 게임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요, 이게 무엇이냐면 고르기 어렵운 2가지 질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임입니다. 예를 들면 한 가지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잠 안자도 피곤하지 않기,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기. 이런 종류의 황당하고 재밌는 문제들을 받고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밸런스 게임이에요. 여기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편하게 이 게임을 즐기다 보면 어느 새 자기의 취향이나 심리를 조금씩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내가 무엇을 선택하냐는 곧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 후의 선택에 따른 책임까지도 온전히 짊어지는 것입니다. 내 판단 하에 내려진, 내가 선택한 중대한 결정이기 때문이죠.
성경에서도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가 등장하죠. 바로 선악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보다 하나님과 동등해지길 선택한 인간의 욕망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수고와 고통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나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바르고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기준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작은 이득을 위해 밤낮없이 뚜드리는 계산기에 불과한 삶을 살게 됩니다. 계산기의 삶은 모든 일에 앞서 손해를 걱정하고 가격을 살피며 전전긍긍한 삶입니다. 요행을 바라며 손쉬운 방법으로 싼 가격에 많은 이득을 얻고자하는 불안전한 삶입니다. 끊임없이 둘 중 하나를 저울질하며 상대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불행한 삶입니다. 하나님 같이 되고 싶었던 아담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며 그분을 닮아가기 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시간과 노력을 대신하길 원했습니다.
사실 아담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엔 그 선택이 이해되고 공감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쉬운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성경은 그와 같은 선택을 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울 왕도 그러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긴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시대의 첫 포문을 연 인물입니다. 왕이 되었으나 불순종으로 인해 금세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지요. 사울은 재위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다윗을 향한 질투로 보내다 결국 전쟁터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사울과 다윗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그리고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뿌리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둘 다 큰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둘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죠. 사울은 불안과 신경증에 시달리다 파멸에 이르렀다면, 다윗은 그 왕위를 예수님께서 이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로서는 좀 억울할 것 같은 게 사실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다윗 쪽이 훨씬 더 심각해보입니다.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자신의 충직한 신하, 우리야를 죽인 다윗. 쉽게 말하자면 불륜, 살인입니다. 어렸을 적 성경을 읽을 때마다 다윗은 참 멋이 없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수준 낮아 보이는 정욕의 죄를 지은 다윗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걱정하다가 제사장 대신 자기가 번제를 드리는 실수를 저지른 사울이 더 나아보입니다.
사무엘상에서는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게 된 두 가지 사건이 등장합니다. 둘 다 사울의 불순종 때문이었는데요, 먼저는 오늘 본문 13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중에 번제를 드릴 사무엘 사사가 오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사울이 자기가 대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두 번째 사건은 사무엘상 15장에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로 23절의 말씀 봉독하시겠습니다.
삼상 15:22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앞 상황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멜렉에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을 내리시지만, 탐심이 생긴 사울은 소와 양의 가장 좋은 것은 남기고 하찮은 것만 없애게 됩니다. 그리곤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장 좋은 소와 양을 가져왔노라고 변명합니다.
여기까지 사울의 죄를 함께 살펴보았을 때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사울에 대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저울에 사울과 다윗을 올려두고 판결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여러분이 재판관이라면 누구의 죄를 더 무겁게 심판해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윗의 죄는 명확히 드러나는 반면에 사울의 잘못은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사울의 죄에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하였을 때는 겨우 그런 실수로 인해 버림 받게 된 사울에게 연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용서하고 사울은 버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의 죄질을 따지자면 다윗은 흉악범이고, 사울은 경범죄자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사울의 편에 섰던 것은 사울에게는 여러 변명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말합니다. 기한이 되었으나 사무엘이 오지 않자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두려운 백성들이 군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막으려고 대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좋은 소와 양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서 제물로 가져왔습니다. 사울의 변명은 너무나 그럴 듯하여 듣는 우리 역시도 헷갈리게 합니다. 이게 죄인가? 아예 불순종은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거나 주관적인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사울에게 속은 것입니다. 저도 최근에야 사울의 변명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죄는 계산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하면서 자기의 욕심을 앞세우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 마저도 속입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지금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
사울은 다른 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그 마음에 욕심이 자라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기름 부으심을 받은 왕이 아닌, 자신의 욕심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과 백성을 좌지우지하려는 욕심에 빠지게 되었고 이는 곧 스스로를 왕이 아닌 계산기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사울을 통해 우리는 왜 계산하는 마음이 무서운 죄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계산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가 옳은 결정을 내린다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사울의 저지른 짓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를 전쟁에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계산하는 마음은 마치 사울이 나라를 위해 그 행동을 한 것처럼 포장합니다.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보다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예배라는 하나님과 나누는 거룩한 교제 시간까지도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곤 합니다. 내 기도 시간과 봉사를 대가로 마치 하나님께 수당을 요구하는 것처럼 예배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에 근거한 모든 행동은 불신앙에 기초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판단은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울은 결국 죄에서 돌이킬 회개의 기회를 잃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 또한 계산하는 마음에 대해 주의를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사람의 욕심과 마음 계획이 끼어는 상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죄를 저지르고 다른 결과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여주어 구원의 길 또한 알려주십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여주시고,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여주시며 우리의 나아갈 길을 비추어 주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마주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자신의 왕위를 걱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행동하거나 회개의 기도를 미루지 않고,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갑니다. 사무엘의 꾸짖음 앞에서 사무엘을 탓하며 자기를 위해 대신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한 사울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진정한 회개, 죄에서 돌이킴은 자신의 죄를 알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죄를 인지한 후에도 이를 멈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의 이득을 추구하고,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면죄부를 주는 행위는 스스로의 힘으로 멈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2가지의 기도법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주기도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지금 매일감사예배를 통해 목사님께서 주기도문에 대해 잘 강해해 주시고 계시니, 저는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로 14절의 말씀입니다.
눅 18:10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세리처럼 기도하라는 것은 자학을 하며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나 예배 중에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그 사이에 집어넣어 온전한 하나님과의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바리세인처럼 되지 말고 오직 이 순간 나와 하나님만 대화하는 1대1의 관계를 느끼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며 다윗이 신이나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한채 옷이 벗겨지도록 춤을 추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나와 하나님 사이 계산하는 마음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이 끼어들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셈이 빠르고 계산적인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저는 저와 또 우리 성도님들이 고장난 계산기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고장난 계산기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과의 충만한 관계를 누리며 작은 이익에 목매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자녀 삼아주신 은혜를 기억하여 이전에 죄악 된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신 새생명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내 뜻과 욕망을 앞세워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리에 서게 하소서. 항상 인도하시고 동행하시고 지키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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