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요 15: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할렐루야! 거리가 알록달록 단풍으로 예쁘게 옷 입는 이 계절, 즐겁게 보내고 계신가요? 이제 슬슬 연말이 가까워올수록 여러 행사와 약속들로 분주해지는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그 중 10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요한 날이 있는데요, 자 우리 성도님들은 10월 31일하면 어떤 날이 생각나시나요? 혹시 할로윈데이? 물론 분장을 하고 사탕과 초콜릿같은 간식거리를 즐기는 이 날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기억해야하는 날이 있죠. 바로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개신교인로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입니다. 잠시 기독교의 역사적인 흐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기원후 4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받은 뒤 그 세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다 중세시대에 이르러 교회는 큰 아이러니에 빠지게 됩니다.
중세, 특별히 15-16세기에 종교적으로 왕성한 활동과 많은 열심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시대는 어둡고 암울했던 것입니다. 이 중세 시기를 가리켜 교회의 암흑기라 표현할 정도로 마르틴 루터가 살던 때는 교회와 성직자들이 많이 부패하였던 시기입니다.
화려한 교회 건축, 활발한 순례 여행, 여러 고행들과 종교 의식들 그리고 기독교 성유물 수집이 유행하는 등 외관으로 보이는 교회의 모습은 거대하고 웅장했습니다. 일례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당시 그곳에는 스칼라산타라 불리는 성스러운 계단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올라가신 계단을 옮겨놓은 것이었는데요, 이 성지에 방문한 수많은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 구원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그 28개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무릎으로 계단을 올랐으니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며 멍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죠.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인간의 피나는 노력과 제 살을 깎는 고행 속에 계실까요? 벌레만도 못한 우리는 고통 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종교적인 열심은 있었으나 실상 타락과 모순으로 가득 차있던 교회에 루터는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렇게 무릎이 벗겨지고 고통을 받아야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그 마음가짐이 어떻든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단 말인가?'
그러다 루터가 교회의 변혁을 꿈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면죄부 판매입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 이 면죄부는 죄를 사하여주는 증서로 누구든지 이 증서를 구입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대대적인 선전과 함께 등장하였습니다.
결국 구원까지 돈으로 사고파는 교회를 향해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며 종교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가 원했던 것은 교회의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개혁이 아닌 “이러면 안 됩니다”하는 탄원서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의 제 1의 소망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내가 바꾸겠다는 주도적인 결심이라기보다 그저 하나님 사랑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큰 의미는 단순한 구교, 신교의 분리가 아닙니다. 루터는 우리가 제물과 형식에 파묻혀 있는 사이에 잃어버리게 된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되찾기 위해 이 모든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값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은 이것이 성취가 아닌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세속적 힘에 집중하던 인간중심의 교회가 다시금 참된 하나님의 모습에 관심을 쏟게 된 것은 루터가 사랑의 하나님을 끄집어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세속에 물든 눈을 씻고 참된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하나님의 여러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다양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시간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하나님을 잘 아는 것입니다. 티비를 보다, 한 연예인이 웃긴 일화를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끔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굉장히 반갑게 인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초면인데, 왜 사람들이 그 연예인을 익숙하고 친밀하게 맞이한 것일까요? 답은 간단하죠. 티비에서 그 연예인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럼 반대로 그 연예인은 그 상황에 당황하는 이유는 뭐죠? 연예인은 그 사람을 처음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상대를 얼마나 보고 얼마나 아냐에 따라 그 사람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증가합니다.
티비에서 보던 연예인을 만나는 것도 이처럼 반가울 진데,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얼마나 더 즐거울까요? 연예인과 팬 사이에 서로를 향한 애칭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다양한 이름과 별명이 존재합니다. 성경에 표현된 수많은 하나님의 이름 중, 오늘 소개할 것은 친구 하나님입니다. 함께 요한복음 15장 11절로 15절의 말씀을 봉독하시겠습니다.
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떠올릴 때 저 멀리 하늘에 계셔서 우리가 잘하나 못하나 살펴보는 분, 특별히 우리의 처벌에 관여하시는 말하자면 수직적 상하 관계 속에서 일방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마치 중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보냈던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기준 삼는 평가자로 생각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을 얻을 때 그에 상응하는 값을 지불하는 것에 익숙하고, 또 남들에게 판단당하는 것이 당연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수직적 상하 관계로 상정하고 그에 맞게 신앙의 생활을 펼칩니다. 그리고 내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나님이 주신 상벌로 판가름하게 되니 우리의 삶은 금세 지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지금 우리 행실 하나하나 꼬투리 잡는 변덕스러운 신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날 위해여 자기 목숨도 버릴 정도로 나를 크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생기를 담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삶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천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하셨고, 더 나아가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시며 창조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매일 동산을 함께 거닐며 동행하였습니다. 이 둘은 친구이자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죄와 욕심으로 인해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이제 사람에게는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이 더 이상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친구였던 하나님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고만 것입니다.
혹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무슨 말로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아시나요?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동산을 거니는 것이 그들과 하나님의 사이를 좁히는 진정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자기 불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결국 선악과라는 최악의 결과를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해야하는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바른 믿음과 더불어 참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함께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 15:5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선한 목자 등등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셨습니다. 그중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시작되는 요15장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고 하나님은 이를 관리하시는 농부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참 사랑과 생명을 보이셨고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은 그 사랑을 가지에게 흘려보내셨습니다. 그 사랑과 생명을 계속 공급받기 위해 요한복음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흘려보내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 충만한 사랑 안에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자기 이해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런 하나님께 속한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확증입니다.
예수님께 붙은 가지인 우리 역시 참포도나무입니다. 나무를 가리킬 때 나무와 나뭇가지를 분리하여 이야기하지 않듯이 예수님께 붙어있는 한 우리는 참포도나무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열매를 많이 낼 수 있는 능력의 선포자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면 저희 아버지, 어머니께서 제 등을 쓰다듬으며 한 마디를 하십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이 한 마디 안에 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과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기억일 것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못하는 아기를 보살피고 사랑해주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랑스러움은 자녀가 어느 덧 장성하여 그 부모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생각을 나누며 깊이 대화하고, 자녀가 꿈을 이루어나갈 때 생겨납니다.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 수준까지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선악과와 같은 죄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제 어머니가 과거로 추억 여행을 할 때면 꼭 하시는 18번 이야기가 있습니다.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인데요, 당시 6살이었던 제가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엄마 눈 안에 나 있어.”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던 우리 모녀는 이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내 얼굴을 담고, 내 눈에 하나님 얼굴을 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열렬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하나님을 곁눈질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나누는 친구 하나님과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 고통의 문제와 마주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꾸 면죄부를 구매하려고 합니다. 가장 빠르고 손쉽게 은혜를 얻고자 하는 그 마음은 헌금통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그 허무맹랑한 믿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행실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는 자리에 서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결심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먼저 자신을 향한 자기 이해를 바꾸시길 부탁드립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불안의 사슬이 이미 습관화 된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가 행위로 다가올 때 지레 겁을 먹고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내 행동 이전에 나의 정체성입니다.
행동이 바뀌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정체성'과 '과정', '결과'입니다. 한 책에서 우리의 생각과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정체성 중심의 습관이 아닌 결과 중심의 습관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선 우리의 인식이 이렇게 되어야합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책에서 나온 예시를 소개하고자 하는데요,
만약 두명의 사람이 금연을 한다고 가정합니다. 누군가가 그 중 한사람에게 담배를 권하였을 때 첫 번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괜찮습니다. 담배를 끊었어요..." 언뜻 듣기에 금연을 위한 이 사람의 결심이 확고해 보이지만, 언제든 흡연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를 기대하지만 이를 위해 무척 애쓰고 있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흡연자가 아니거든요." 담배를 끊으려는 결과에 집중을 하면 계속 담배가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흡연자라는 정체성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흡연자와 동일시 하지 않기에 그 노력과 유혹에서 보다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을 방해받는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내 안의 쓴뿌리들이 올라와서 익숙한 생각, 행동, 습관들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그때마다 되뇌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제 죄가 우리에게 말을 걸며 우리를 유혹할 때 죄에게 대답해주세요. “괜찮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친구에요”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친구 하나님, 내 안에 계신 예수님, 함께 하시는 성령님, 죄와 사망의 문제에서 나를 풀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내가 주님께 붙들려 있을 때 나는 자유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내 삶에 충만하게 넘쳐서 이제 그 받은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세요. 주님께서 하실 일을 나에게 보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가는 모든 믿음의 성도에게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을 더하실 것을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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