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피
막 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할렐루야! 10월의 첫 수요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10월에 태어나 가을의 쌀쌀함을 좋아하는 저는 이런 날씨가 되면 집순이에서 벗어나 자주 산책하고, 또 카페도 가서 커피 한 잔을 즐기곤 합니다. 어디에나 있는 체인점 카페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참 다양한 연령층이 카페에 방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청소년들, 공부하는 대학생, 취준생들, 오랜 만에 만나 반갑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어른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이야기들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불안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청소년들은 수험이, 대학이, 학원이, 청년들은 취업이, 결혼이 어른들은 대출이, 사업이, 부동산이... 물가와 환율이 요동치고,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한 현 상황 속에서 이 대화들은 점점 가속도를 얻고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불안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회는 때로 병원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다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경험을 다들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상처를 받았을 때입니다. 내가 그토록 기도하던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벌어질 때면 우리는 하나님께 큰 상처를 입습니다. 내가 기도하던 건강, 경제, 관계, 기업, 가정 등 여러 문제들이 틀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해왔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절망하며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왜 나의 기도에 침묵하시나요?”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질문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내 신앙의 부족함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의 완전하지 못함과 마주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 그저 침잠하는 것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최근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교수님이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미개척 종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과연 어느 나라 어떤 민족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였을 것 같나요? 정답은 대한민국 20대 아래의 아이들입니다.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와 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3%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멀리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 많은 이들이 복음과 교회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연례 행사처럼 여름성경학교만 되면 온 동네 아이들, 심지어는 하나님의 하자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다 나와 예배와 교회 활동에 참석했다고 하는데, 불과 30-40년 만에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 지금 한국교회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참석한 사람들에게 전해진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10년 후에도 대한민국에 교회가 있을까요?”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암담한 질문이었습니다.
올 한 해 처음 유초등부를 맡게 되어 창세기부터 사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에 대한 설교 말씀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참 우리 아이들이 똑똑하다고 느끼는 것이 제가 한 마디를 하면 아이들이 열 마디를 합니다. 분명 마이크는 제가 들고 있는데 아이들 목소리가 더 커요!
이렇게 신나는 분위기 속에서 설교를 진행하는 중에 한 아이가 질문합니다. “전도사님! 근데 이거 거짓말 아니에요?” 갈라진 홍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7바퀴를 돌고 소리를 질러서 무너뜨린 여리고 성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과연 아이들이 믿음이 없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아이들은 자기 속에서 최대한 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의 질문은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질문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가장 무서운 순간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큰 고난의 파도가 우리를 덮쳐올 때면 우리의 신앙의 배는 난파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산산조각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치유되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하기를 멈춥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나의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보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는 기분으로 살아가기 급급한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에 닥친 고난과 더불어 전(全)지구적으로도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전쟁과 기후로 인한 재앙들, 이로 인한 기근과 폭동에 대한 뉴스가 넘쳐납니다. 이러한 재난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마가복음 1장 1절을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막 1:1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이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외친 베드로의 고백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고 처절한 선언입니다.
자세한 설명에 앞서 복음서에는 3가지의 배경이 있다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는, 복음서가 기록한 예수님 당시의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제자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그 다음은, 복음서의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한 시대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복음서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교회 공동체를 위해 목적을 가지고 복음서를 작성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그 말씀을 읽는 우리의 삶이 복음서의 배경이 됩니다. 즉 복음서란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내게 있는 삶의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해 기록된 문서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너무나 큰 위기의 상황이 닥쳤습니다. 로마 대화재로 인한 기독교인 박해가 한창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큰 지도자들이 순교하게 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극심한 환난에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심지어는 삶을 포기할 때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으로 하나의 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다양하게 전해지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한 말씀이 마가복음에 담겼고,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작성된 마가복음은 로마에 있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질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즉 전해지는 문서와 이야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그들은 마가복음을 통해 목숨을 위협하는 고통 속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미 걸으신 그 길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이 기록한 복음(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로마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승리의 소식 특별히 황제와 관련된 기쁜 소식을 전령관이 도시 곳곳에 전할 때 함께 축제를 즐기는 것이 유앙겔리온을 듣는 로마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구원자가 탄생하셨다는 기쁜 소식과 새로운 통치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통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35절의 말씀입니다.
막 8:31-35 /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처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니 예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로마를 물리치고 새 권력과 통치를 이루셔야 할 분이 죽음을 이야기하시다니요!” 제자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탄생, 이스라엘이 선두로 선 새 나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너무나 타당하고 깔끔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심으로 참된 복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막 16:19 /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20 /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진정한 통치와 구원의 길을 보이사 방황하던 제자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신 것처럼 마가복음도 초대 교회 공동체에게 진정한 복음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2천 년의 시간을 뚫고 예수님의 삶과 우리의 삶이 하나 되는 귀한 경험을 제공해줍니다.
복음의 기쁨,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부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 소원에 둘러싸인 하나님이 아닌, 그 자체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믿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오히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면 하나님께 직접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다 알 수 없는 일이 내게 일어나고, 극심한 불안과 분노가 찾아올 때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에 서길 바랍니다. 마치 곤충이 동물이 자기 몸을 보호하던 그 껍질을 벗어 던지는 탈피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처럼 고통의 시간, 침몰하기 보다 죽기살기로 하나님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마가복음이 죽음의 시간을 보내는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복된 기쁨의 소식을 전하며 그들을 다시 질문의 자리로 나오게 한 것은 먼저 그들과 같은 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예수님의 일생을 기록한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작성된 문서입니다. 성경에 마가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명시되진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이 바나바의 친척이자, 바울의 동역자이고, 베드로의 통역사였던 마가 요한이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마가를 수식하는 3가지 타이틀이 다 대단합니다. 마가는 초대교회의 아버지, 기둥인 모든 핵심 멤버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어요. 바나바와 바울, 심지어 베드로까지! 엄청납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12제자는 아니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의 이름이 이미 익숙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릴게요. 다락방. 맞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고, 또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은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은 120명이 함께 모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큰 공간이었습니다. 이는 마가가 가진 재력을 잘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마가는 큰 부자인데다가 신앙의 가정에서 잘 교육되었고, 또 헬라어에도 능통한 똑똑한 자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엄친아입니다. 점점 마가라는 인물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족함 없어 보이는 마가가 트러블메이커였다고 이야기 한다면 혹시 믿어지십니까? 마가에게는 부끄러운 사건이 2가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1절로 52절의 말씀입니다.
막 14:51 /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막 14:52 /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오로지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사건을 마가의 자서전적인 고백이라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도망치기 바빴고, 이는 마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건은 모든 제자들이 다 같이 저질렀으니 좀 덜 부끄럽다고 쳐도 마가에게는 더 큰 실패의 경험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바로 선교여행 도중 마가가 중도 포기한 사건입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역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일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마가는 두 사도들을 떠나 예루살렘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선교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서신에 기록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여정은 매우 고달팠을 것입니다. 마가가 고향으로 돌아간 사유는 정확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마 그의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낙오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로 마가가 2차 선교여행에 동행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결국 사역을 함께 하던 바나바와 결별하고 각자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서 신임을 잃고 사역 공동체를 깨뜨리게 된 이 경험은 마가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쉬울 것 없고 부족함이 없던 이 젊은이는 삶과 신앙에 있어 심한 폭풍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의 계획을 여쭈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얻게 되었을까요? 함께 디모데후서 4장 11절과 베드로전서 5장 13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딤후 4:11 /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벧전 5:13 /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마가는 자신의 상황과 마주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2번의 실패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었고 마침내 자기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귀한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정답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해답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정해진 답을 구하지만 아직도 삶은 어렵고 불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문제를 풀어가길 원하십니다.
고민과 불안을 내가 홀로 간직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내 과거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지금까지 지켜왔던 내 겉신앙에서 탈피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의 복음을 알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로 하나님께 질문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응답으로 우리 성도님들의 삶을 가득 채우시길 원합니다. 번데기에서 벗어나 마침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나비처럼 우리 삶 역시 새 생명으로 채우실 것을 믿으며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이끄사 언제나 우리의 눈이, 발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여주세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허락해주세요. 항상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 암송 구절 (1) | 2024.07.26 |
---|---|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 본문 (0) | 2024.07.26 |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말 1:1-5, 말라기 시리즈 설교(1) (0) | 2024.07.25 |
내가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슥 12:1-14, 스가랴 시리즈 설교(15) (0) | 2024.07.25 |
영적 긴장감을 잃지 말라, 미 2:6-13, 미가서 시리즈 설교(4) (0)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