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M.Div. 3학기 과정을 밟을 때, '한국교회와 사회' 강의를 들으며 작성한 글이다.
여는 글
1960년대 이후 급성장하던 한국교회가 2000년대에 와서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심각한 위기는 성장이 멈추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 그 평판이 나쁘다는 것이 더 뼈아프게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2017년 한국교회신뢰도조사’를 살펴보면 전반적 신뢰도에 있어 (그렇다 20.2%, 그렇지 않다 51.2%) 부정적인 의견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2천 년대에 와서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여 사회적 공신력을 상실했다는 질적인 측면에서 생겨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신뢰하는 종교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도, 가톨릭 32.9%, 불교 22.1%, 기독교 18.9% 순으로 기독교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신뢰도 제고를 위한 개선점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함 28.3%, 남에 대한 배려 부족 26.8%, 배타성 23.2%를 지적하여 한국교회의 그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노출하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개신교가 공신력을 잃어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정재영에 따르면 ➀ 개신교인들의 신앙이 삶과 일치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➁ 한국 교회가 사회에서 기대하는 올바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동안 한국개신교는 사회와 소통하려고 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며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 결과로 한국 개신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하여 책임 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교세 확장과 교회당 건축이라는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 년에 삼천 교회가 문을 닫을 정도로 개교회가 매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극소수의 큰 교회로 교인들이 몰리고 절대 다수의 작은 교회는 존폐를 걱정하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재영 교수는 양극화 현상으로 작은 교회들이 고사 상태로 내몰리고 공동체성을 상실한 대형교회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지금,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 공교회성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은교회 정신이 몇몇 교회의 작은 몸부림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계에서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확대재생산해야 한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계에서 규모와 상관없이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새로운 대안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적실성 있는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선교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작용하고 있다. 선교를 복음 전도로 이해하려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는 단순히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이웃사랑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며, 이 땅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작동하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제1장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과 현실을, 제2장에서는 일제하 1930년대 일제와 사회주의 운동권 속에서 흔들리던 기독교를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오늘의 목회상황 속에서 새로운 대안으로서 작은교회론을 살펴보면서, 2018년 한국교회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모색하고자 한다.
몸 말
1. 오늘날 한국교회 특징
1) 교회성장이 멈춘 교회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이 1990년대 후반부터는 멈추어 버렸고 교회마다 교인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은 늘고 있으나 새로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인식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한국 교회는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리고 그 위상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수 천 명의 신학생이 매 해 쏟아져 나오지만 이미 교회는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다. 치열한 신도 경쟁 가운데 문을 닫는 교회가 일 년에 삼천 교회에 이르고 있다. 성장하고 있다는 교회도 알고 보면 주로 수평이동(다른 교회로부터의 신도 이동)에 의해 성장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교회는 정체 흑은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에도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라는 진화 원리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왜 한국 교회에서 이제는 성장이 멈춰버리게 되었는가? 여기에도 상황적 요인과 교회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먼저 상황적 요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선 여가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대체종교의 발달이 교회의 성장을 억제하는 작용을 했다. 오늘날 잘 발달된 여가산업은 긴장해소나 정신적 치유를 대신해 줌으로 개인적 위기 극복의 대안이 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교회참여와 헌신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요인으로는 경제성장을 들 수 있다. 소득이 크게 증대되면서 생존 문제에 대한 절박성이 약화되었고, 이것은 나아가서 박탈에 대한 보상 효과가 있는 종교에의 기대심리를 감소시켰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여유는 사회, 심리적 여유까지 만들어 종교 이외의 것, 예를 들면 ‘인생을 즐기는 것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종교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복지적인 측면에서도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적인 불안이나 소외 심리가 약해지게 되고 이것은 나아가서 종교에 대한 의존감정을 약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킨 다른 요인은 교회적인 것이다. 즉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 교회성장 둔화에 보다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다른 종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➀ 수평이동 및 가나안 성도의 급증 현상
한국 교회의 또 다른 특징적인 양상은 개종과 수평이동 현상이다. 개종(conversion) 이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가 종교에 귀의하거나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가 다른 종교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수평이동(horizontal mobility) 이란 다니는 교회를 옮기거나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한국 사회는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사회이다. 따라서 여러 종교, 교파, 교회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유롭게 그 가운데 하나를 취사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이 종교를 갖기도 하고, 가지고 있던 종교를 포기하기도 한다. 하나의 종교나 교파, 교회에서 다른 종교, 교파, 교회로 옮기기도 한다. 이러한 개종, 교회이동은 종교의 교세를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국갤럽이 1984년부터 2014년까지 30년간 한국인들의 종교와 종교의식 변화를 비교한 ‘한국인의 종교 실태’ 에 따르면 전반적으로는 무교가 늘어나는 등 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 가슴이 아픈 현실은 청소년과 20-30대 연령대의 이탈율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2018년 1월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를 전체적 결론을 언급하자면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하향세라는 말이다. 2015년 정부가 실시한 종교인구 조사에서 개신교 인구는 967만6천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19.7%에 달해 불교 15.7%, 가톨릭 7.9%보다 크게 앞섰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더 내밀하게 들여다본 결과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 가나안 교인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현재 가나안 성도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다. 정확한 통계도 없다. 교계에서 집계한 개신교인의 수는 1190만 명이지만, 2005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862만 명이다. 일각에서는 그 사이에 발생하는 큰 차이를 착안하여 잃어버린 혹은 소실된 300만 명을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최근 2108년 가나안 성도 신앙생활 탐구 세미나를 통하여 정재영 교수는 가나안 성도 신앙의식 및 신앙생활 조사발표를 하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5년 전보다 교회를 떠나는 속도가 빨라지고, 짧게 신앙 생활한 사람보다 오래 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응한 가나안 성도들의 신앙 연수는 평균 27.8년이었는데 교회를 떠나기 전 신앙 연수는 평균 20.1년이었다. 이는 5년 전 조사에 응한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해수인 14.2년보다 7.7년이 짧은 수치로, 최근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고, 이들 중 다수가 신앙생활을 20년 이상 오래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떠난 이유로는, 가장 많은 31.2%가 ‘꼭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라고 교회 출석 욕구 부재를 나타냈고, 13.9%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라고 응답하여 절반 가까이가 교회라는 틀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을 나타냈다. ‘교회 출석 욕구 부재’는 젊은층(20ㆍ30대)과 고학력층(대재 이상), 신앙 단계가 낮은층(구원의 확신 없음, 기독교 입문층+그리스도 인지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았다.
‘앞으로 교회에 다시 나갈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물음에는 ‘나갈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가능한 빨리 나가고 싶다’ 3.7%, ‘언제가 다시 나가고 싶다’ 52.2%를 합하여 총 55.9%의 응답자들이 나갈 의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15년 발표된 조사 보다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10% 이상 늘었고, 이 중에 “가능한데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의견이 10%이상 적게 나와 가나안 성도들이 점차 교회 출석 의지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교회 출석 욕구 부재’는 젊은 층(2,30대)과 고학력층(대재이상), 신앙 단계가 낮은층 (구원의 확신 없음, 기독교 입문층 + 그리스도 인지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개인적 이유’는 장년층(4,50대 이상) 저학력층(고졸이하), 신앙 단계가 높은층 (구원의 확신 있음, 그리스도 친밀층 + 그리스도 인지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신도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은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래사회를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항상 역사 형태로 나타난다는 한스 큉의 말대로 교회는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대에 설득력을 줄 수 있는 모습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교회론은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 상황에 대한 응답이자 요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고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조직은 보다 탄력적이고,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조화가 될 필요가 있다.
로버트 우스노우가 거주의 영성과 추구의 영성에 대한 대안으로 실천의 영성을 강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스노우는 미국의 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주로 공동체적인 영성과 개인적인 영성의 2가지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영성은 단순히 공동체적이거나 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성은 다른 개인들과 조직들에 의존하면서도 하나님의 공동체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은 개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수행될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영성이 수행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성스로움에 대한 관계를 더 깊게 하는 활동들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실천의 영성이 봉사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개신교가 현대인들에게 설득을 갖게 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성스러움을 회복한다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이미지의 성스러움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에서 성스러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버트 벨라가 말한 것처럼 종교의 본질인 초월성을 견지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적절성을 갖는 실천적 성스러움의 회복을 의미한다.
➁ 개종 - 가톨릭 교회로 이동
1995-2005년 동안 한국 그리스도교의 교세 성장 추이는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총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비율은 1995년 19.7%에서 2005년 18.3%로 1.6% 감소한 반면, 가톨릭 신자는 1995년 6.6%에서 2005년 10.9%로 74.4% 증가하는 ʻ교세 성장의 엇갈림ʼ 현상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두 종교가 최근 한국에서 상이한 교세 변화의 추이를 나타내는 원인은 무엇일까? 정재영과 조성돈 교수는 이 문제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주제를 개종으로 보았고, 또 하나는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내 보이고 있는 현대인들의 종교성에 대하여 14명의 개종자, 즉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에 대해서 심층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여러 가지로 분석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인들의 종교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현대인들은 종교에 대해서 지난 과거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한국사회에서 종교인구는 늘어났다. 어떤 측면에서 한국사회는 그 만큼 종교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층으로 들어가 본 결과는 사람들이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개종을 하였듯이 다시 천주교에서 개신교로도 쉽게 이동이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 종교를 마치 옷을 갈아입듯 그 이미지에 따라서 자기에 맞는 것으로 걸쳐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나 실존적 고민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히 그 시대에 비쳐지고 있는 그 종교의 이미지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조성돈 교수는 "가톨릭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큰 요인은 신뢰성"이라며 "이는 소비자들이 품질에 비해 비쌀 수도 있지만 적어도 구입의 실패는 맛보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선택하게 되는 '브랜드화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톨릭의 신비적 이미지를 꼽았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쉼 없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가톨릭의 전통적 전례는 현대인들에게 멈춰 설 수 있는 존재의 공간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어느 개종자는 '개신교는 표현의 종교, 가톨릭은 묵상의 종교'라고 말했다"며 "현대인들은 내면의 쉼을 얻을 수 있는 신비의 장소를 찾고 있는데, 가톨릭은 그들 기대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사회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천주교가 봉사하는 기관으로 비춰진 점에 주목했다. 소록도에서 한 평생 봉사하다 떠난 오스트리아 수녀들, 마더 데레사 수녀, 헌신적 봉사를 하는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약자들의 피난처로서의 이미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는 "삶의 성찰과 존재 의미의 추구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가톨릭 장점은 선동적 설교에 익숙한 개신교에서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정재영 교수 등은 개종자 면접을 통해 사람들을 '개신교가 밀어내는 요인'과 '천주교가 끌어당기는 요인'으로 구분해 살펴보았다. 정재영 교수는 “그들은 왜 가톨릭 교회로 갔을까?”에서 개신교에서 사람을 밀어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⓵ 개신교는 전체적으로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톨릭은 묵상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개신교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밖으로 노출하는데 더 몰두하여, 설교나 성경에 대한 가르침도 깊숙이 숙고하기 보다는 덮어놓고 믿는 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⓶ 교회가 지나치게 외형에 치중하고 있다. 따라서 헌금강요. 교세확장에 대한 몰두와 지나치게 직분에 대하여 연연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⓷ 가족같은 분위기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가족같이 너무 복잡대고 부대끼다 보니 상처를 많이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개종자들이 성당에 대한 이미지는 성당은 지역이나 규모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표준화 또는 평준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면 교회는 목회자에 따라서 수준이 천차만별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가 멀리 이사를 가더라도 대부분의 목회자는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기를 강요한다.
가톨릭이 개종자들을 끌어 들이는 첫 번째 요인은 성스러운 이미지이다. 개종자들은 가톨릭의 성스러움을 개신교의 세속성과 대비시켜 이야기 한다. 가톨릭의 엄숙한 분위기에 있다 보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나아가 용서를 받는 것과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개종자들이 표현한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한마디로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지나친 전도행위, 다른 교회 사람들까지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노력 등을 곱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보이는 친절이 진정성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가식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세 번째 요인으로는 성당은 융통성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술과 담배에 대한 규제가 없다는 점,제사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현대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종교 공동체의 우월함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선택한 종교가 가르치는 바대로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각 교회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의미 있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 1930년 일제하 한국개신교회 위기
1) 일제 침략기 반기독교 운동
19세기 말 조선시대 후기 우리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어 중요한 과제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라는 두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 근대화와 관련하여 기독교를 구국의 수단으로 수용했던 기독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3·1운동의 실패로 민족운동은 단순한 시위나 청원 또는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극복할 만한 힘을 갖추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기독지식인들은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기독교적 대외인식의 한계 및 미국의 대외 정책에 실망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대한 확고한 전망을 제시하는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개화나 발전의 확실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21년 11월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은 여전히 조선 문제를 일본의 내정문제로 간주하여 버리자, 미국이 정의와 인도의 나라가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교회가 독립에 대해 보여준 태도도 사실은 선교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제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 혹은 기독교에 의존하는 운동을 통해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비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는 동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국제회의인 극동근로자 대회를 통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함으로써 식민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민족주의적 기독교지식인들이 제국주의 국가에의 기대라는 환상을 버리고 사회죽의를 통한 민족해방을 추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이동휘로 그는 구국의 수단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1909년부터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으라” 또한 “신도 백만을 이룩하는 날이 독립하는 날이다“라는 구호 아래 국내외 각지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그가 1017년 무렵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와 접촉한 이래 민족해방의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는 이동휘 뿐 만 아니라 초기 사회주의자들 특히 상해파 고려 공산당의 활동가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실제로 김립, 계봉우, 윤해, 김하구 등 한중노기독교선교단 모든 단원들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주요 활동가가 되었다. 따라서 반기독교에 대한 입장에 있어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창당선언에서 미국식 정의와 인도에 의존하는 민족주의 한계를 지적한 후 강령에서 반종교운동을 조심스럽게 천명한다. 곧 ”종교적 미신이 사회해방의 장애이므로 “종교적 미신의 굴레로부터 모든 무산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과학적 문화운동 및 종교배척운동을 실행하되 종교적 맹신을 도리어 독실하게 만들 염려가 있기 때문에 신자의 신앙심을 모욕하는 행위는 피해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사회주의 세력의 반기독교운동이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차원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기독교계가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침략을 합법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침략의 발판으로서 ‘기독교’를 이용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마취제’인 종교는, 인간해방과 결코 양립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사람이 종교에 대해 정당한 지식을 갖게 되어 필연적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종교사멸론’ 을 주장했다. 이외에도 기독교가 민중을 열악한 현실로부터 분리 시켜 민중의 현실 변혁적 잠재력을 말살시키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회현실에 대한 민중의 무관심을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말부터 1926년 초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그 절정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신흥청년동맹이 192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위해 반기독교대회를 소집한 것을 비롯하여, 한양청년연맹은 1926년 1월 임시대회에서 그 해 12월 25일을 ‘반기독데이’로 정했다. 그리하여 1925년 후반부터 1926년 초까지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 사상단체나 청년단체들은 강연회․ 연설회 등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1926년 여름 ‘허시모사건’이 보도되어 기독교 선교사의 잔인함과 무책임함이 문제가 된다. 일명 ‘허시모사건’은 의료선교사 허시모(許時模, C. W. Haysmer: 1925년 봄 평남 순안 안식교병원의 원장으로 옴)가 1925년 9월 선교사 사택 정원에 열린 사과를 서리하던 어린 아이들 가운데 김명섭(당시 12살)을 잡아 서리한 과일 값을 받으려다 일어난 사건이었다. 서리한 과일 값을 배상할 돈이 없었던 아이 엄마는 흉터가 지워진다는 말을 믿고 김명섭의 뺨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고 새겨 넣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후 심한 흉터가 남게 되면서 주변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25년과 1926년 초에 정점을 이룬 반기독교운동이 실제로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반기독교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민족통일전선론도 제기 되었기 때문이다. 1926년 중반이 되면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격방침이 사실상 철회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함북청년총연맹은 1926년 7월 24일 집행위원회에서 “조선민중의 최대 이익을 위해 종교, 비종교의 구별을 불문하고 통일 단결할 것과 사교는 박멸하되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이해와 연결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으로서 기독교와의 연대를 공식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반기독교운동은 19세기 말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두 가지 과제 즉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라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 반제국주의라는 과제를 드러냈다. 즉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은폐되어 있던 미국의 제국주의 속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독교 내부의 신비주의, 복음주의 흐름은 민중의 의식을 오도함으로 결국 민족해방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일제 침략기를 통하여 각성되는 기독교 운동
1920년대 중반 이래 반기독교운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계는 민족문제가 결국은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이라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근거를 제공한 것은 사회․경제적 문제였다. 1910년대 이래 회사령,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구축된 일제의 살인적인 식민지 수탈체제는 1920년대 들어와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기만적 정책변화 속에서 본격적인 ‘이식자본주의’의 발전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철저하게 민족차별정책에 기초한 사회경제정책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자본축적이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빈곤과 궁핍함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가운데 당시 전체 조선 인구의 80%인 농민들이 거주하는 농촌사회는 일제의 지주제의 강화로 인해 자작농의 몰락과 소작농의 급증, 농가부채의 증가에 직면케 되었고, 1920년대 중반에는 자연적 재해까지 겹쳐 농민들은 절망적 상태에 처해 있었다. 농촌사회의 궁핍화는 한국교회 전체의 70%를 차지하는 농촌교회의 위기로 연결되었다. 즉 농촌사회의 붕괴는 곧 한국교회의 붕괴로 연결될 수 있던 것이다. 이에 기독교회는 농촌문제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고, 기독교회가 빈농․빈궁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사회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대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으로 인해 교회 청년들이 하나둘 떠나는 상황이었고, 세계대공황으로 농촌경제가 악화되자 농촌 교인들도 교회를 버리기 시작하였다. 1929년 세계대공황은 식민지 조선에 농업공황을 일으켜 농촌경제의 파탄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피해는 더욱 증폭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최대 문제는 농촌경제의 위기였다. 1925년과 1926년 중반까지 격렬하게 발생하였던 반기독교운동과 맞물려 교회 청년이 교회를 떠나는 상황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세력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 세력에게 열악한 사회경제 현실과 기독교 문제에 대한 자기반성과 각성을 하게 하여, 식민지 민족현실을 더욱 분명히 인식케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결국은 반봉건주의가 농촌문제를 해결하는 열쇄임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한다.
반기독교 운동의 유산으로 기독교 세력은 현실문제 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세계열강에 대한 기대도 중요하지만 자력으로 독립을 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한 신흥우는 전체 인구 80%이상인 농민들 대부분이 절대빈곤에 빠져 있다고 인식했다. 그는 소작인이 비참하게 죽도록 일해도 먹을 수 없고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이 파탄되었다고 비판하고, 빈민 소작농을 위해 아무런 시설이 없기 때문에 소작농이 밤낮 일해도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현실인식의 결과, 그는 “생의 원리인 정의인도가 실현되려면 실제세력으로 더불어 나가야만 할 것이며, 정의인도가 혼이면, 실제세력은 체이다”라고 하여, 실제적 실력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 인도는 현실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실력양성론적 신념을 확립했다. 그러나 신흥우의 인식은 단순히 현실인식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갖고 있던 기독교적 신앙노선과 결합된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고정적 교리의 신앙노선에서 벗어나 산적한 사회문제를 기독교적 사랑에 입각하여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려는 사회복음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1928년은 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분기점이 될 만한 해이다. 지금까지 사회문제에 대해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던 장로교와 감리교회와 같은 제도권 교회조직이 농촌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제하에서 가장 큰 현안이 농촌문제였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제까지 농촌문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제도권 교회가 비로소 농촌문제의 해결을 위해 뛰어든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는 1928년에 개최된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가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이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한 사람은 신흥우(YMCA)․양주삼(감리교)․정인과(장로교)․김활란(YWCA)․노블(감리교)․마펫(장로교) 등 모두 6명이었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미국의 사회학자인 브루너(E. S. Brunner)가 한국 농촌의 경제․사회․종교적 상황을 조사하여 작성한 Rural Korea) 가 회의보고서로 채택되어 농촌선교에 대한 토론의 주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한국대표들은 이 대회를 통해 세계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한국에서 시급히 전개할 운동이 농촌운동임을 확인했다.
1930년대의 특징적인 흐름은 일제의 강압적 통치가 격화되고 그 일환으로 선교사들의 세력 제거가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서 미국 내의 경제적 공황이 겹쳐 미국 선교비의 대량 삭감이 강행되고 따라서 선교사들의 퇴장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기독교 연합운동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1930년대의 교회적 상황은 혼란과 갈등이 중첩하던 때로서 새로운 방향이나 교회의 구조력의 참신한 전개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3)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로 변화하는 교회
이와 같은 절명의 순간 기독교는 새로운 부흥이 일어난다. 당시 기독교의 모습을 심훈이 상록수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감리교 최용신 전도사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조선일보 1928년 4월 1일자 신문에 실린 최용신의 “교문에서 농촌에”라는 졸업소감문을 보면 기독교가 어려운 백성들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농촌에 자라난 고로 현실 농촌의 상태를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구경은 여성의 분투에 있음을 안다. 참으로 현대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북더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헌신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유감이다. 문화의 눈이 어두운 구 여성만 모인 농촌에 암흑에서 진보되지 못한다하면 이 사회는 언제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농촌 여성의 향상은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등교육을 받고 나아가는 우리로 화려한 도시의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처지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하려는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
그리고 최용신 전도사의 기도문이다.
이 거룩한 종소리 몹시도 신비롭고 처량히 울릴 때,
침상에 의지하였던 이 몸은 무한한 감흥의 충동을 받아 방문을 열고 나와,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겨 층층대까지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어둠의 검은 막이 그대로 남았고 종소리 또다시 울린다.
온 우주는 침묵에 깊이 잠들었고 창공에 수없는 별만 반짝이는 그 아래,
혼자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나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대주재 여호와께 감사를 올리게 되었다.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면 어찌 이 아름다운 새벽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들 어찌 나로 하여금 이 기쁨의 동산을 보게 하였으리오.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니 전능하시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니 내 감사하는 바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만세에 높이고 여호와의 성호를 영원토록 찬양하리로다.
오, 하느님 계신 이 동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새벽에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나로 하여금 뛰놀게 하시고 노래하게 하셨으니,
주여 그 은혜 감사하는 바로소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고요하고 맑은 새벽같이 이 마음도 맑고 고요하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들려오는 거룩한 종소리같이 이 몸을 강하게 해 주시며,
이 입으로 나오는 말이 모든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게 하여 주소서.
저 종소리는 거룩합니다. 그 속에는 아무 시기와 질투와 거짓이 없습니다.
오, 주여, 이 마음 속의 모든 불의한 생각을 내버리게 도와 주소서.
주여, 내가 저 종소리를 들음같이 이 죄인의 기도 소리를 들어주소서.
거룩하신 주여, 이 몸은 주님을 위하여 바치나이다.
여호와여,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여호와여,
이 몸을 주께 바치오니 이 아침 공기가 신성하고 깨끗함 같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오, 주여, 오늘 하루를 기쁘게 하여 주소서. (1929년 4월 2일)
결국은 일제하 1930년대 반기독교 운동으로 촉발된 기독교의 위기도 결국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선교의 확장을 통하여 극복 될 수 있었다.
3. 지역 봉사 섬김이 성패
정재영은 2017년 한목협 조사를 근거로 유의미한 통계를 제시한다. 목회자들에게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성장하고’ ‘정체하고’ ‘감소하고’ 있는지 평가하게 한 후에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강점을 물었다. 그러자 감소하는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의 81.8퍼센트가 예배라 응답하였고, 다음으로는 12퍼센트가 전도이고, 사회봉사라고 응답한 경우는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62.7퍼센트가 예배라고 응답하고, 다음으로 12.7퍼센트가 봉사라고 응답하고, 전도라는 응답은 4.8퍼센트에 불과하였다. 저자는 그렉 호킨스Greg L. Hawkins와 캘리 파킨스Cally Parkinson 보고서를 인용하여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최상의 5퍼센트 교회의 특징으로, ‘지역사회 목회’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최고로 모범적인 교회들의 사역은 단순히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의 목자가 되어 해당 지역의 여러 쟁점들에 더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지역 시민단체에서 지역교회 교인들이 중요한 자리를 맡아 공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이것을 근거로 기독교인은 단순히 개교회에 속한 ‘교인’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기독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기독시민 교육을 실시해야 하고, 이렇게 훈련된 기독시민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공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사회를 바꾸고, 정치와 경제를 바꾸고, 우리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역공동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 영적 정체 현상으로 고심하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시민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공론의 장이기에 자기중심적인 개인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인 힘의 원천이 바로 종교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종교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무시되고 있는 도덕의 차원을 다시 공공 영역에서 작동해 주기를 원한다고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도록 하는 데 종교가 기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시민사회는 법과 정치의 강제력이 아니라 결사의 자유가 적용되는 자발적인 영역이고, 이윤과 이기심보다는 헌신으로 동기가 부여되는 삶의 영역들과 관련되었음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가 공공 영역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증진하고, 도덕에 헌신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공동체적 가치들을 형성하는 자리를 마련할 때, 바로 그 곳이 시민 사회와 교회 공동체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된다고 보았다.
저자는 교회가 지역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이유는 ➀ 교회는 시민사회 내의 중요한 자발 결사체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개인의 극단적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공동체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자원이 있다. 즉 타인에 대한 헌신과 돌봄 등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대부분의 도시 계획이나 도시 재개발 사업이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이라면, 마을 만들기는 관 주도의 지역 개발 운동에 오히려 저항하며 주민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 지역 공동체 만들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교회가, ‘전도의 수단’으로가 아닌 ‘진정성’을 가지고 지역주민들을 만난다면, 교회의 신뢰가 회복되어 자연스럽게 전도의 문도 열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지역공동체 운동에서 중요한 부분은 교육 즉 ‘사람 만들기’가 중요한데, 교회도 이에 발맞춰 교인이 아닌 기독시민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이 함께 지역 공동체에 대한 꿈을 스스럼없이 어울려 나눌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지역사회 개발은 그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민들의 의식이 받쳐주지 않으면 전개하기 어려운 제한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 사회의 외면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만 몰두하는 일면적 지역사회 개발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우리나라 지역사회 개발의 과정에서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 단선적 사고의 결과로 통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속 가능한 사회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➀ 지속 가능한 사회의 이념은 경제 발전과 자연환경, 그리고 사회복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➁ 지속 가능한 사회는 의사 결정에서 구성원의 참여를 중시하는 협의적인 참여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사회다. ➂ 지속 가능한 사회는 지속 가능한 농업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사회다. ➃ 지속 가능한 사회에 적합한 기술과 생산방법은 지역 생태계와 공동체에 적합해야 한다. ➄ 지속 가능한 사회는 경제 활동과 생활 자체가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자원순환형 사회여야 한다.
저자는 물리적 환경친화성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통합적인 발전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삶의 조건을 개선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는 지역사회 개발을 위해 기독시민들의 힘을 모을 때라 강조한다. 기독시민 운동이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문제와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사회를 활성화하고 공동체화 하는 데 기여함으로 인해, 현대 사회 속에서 선교의 지평을 열어 놓을 것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맺는 말 - 작은교회론
2017년 12월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 탐구센터’가 공동으로 소형교회의 실태와 목회자 의식 조사를 하였는데, 이결과 정체하고 있다는 응답이 52.5%, 성장하고 있다는 응답이 36.4%, 감소하고 있다는 응답이 11.2%였다. 그리고 현재 목회자들이 목회환경에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교인 수 증가가 더딤이 30.3%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요즘 가장 큰 고민을 물은 결과도 교회성장의 어려움이 44.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이 신앙의 실천부족 26.6%, 신앙의 양적 성장 추구 23.6%로 나타났다. 이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비춰진 교회의 모습이 목회자 눈으로 보기에도 사랑과 섬김의 말만 있었지 실제의 삶 속에서 드러내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지나친 양적 성장의 추구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에는 교회도 양적인 성장을 경험하였지만, 이제 어는 정도 경제 성장을 이루고 나니 더 이상 성장이 어려워 진 것이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종교적 집단 활동보다는 자기 성찰과 명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요즘에는 사람들이 종교적 집단활동 보다는 자기 성찰과 명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덩달아 이제 교회 안에서도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안영혁은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 서론에서 작은교회란 무능하고 게을러서 미래엔 없어져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대형교회가 보일 수 없는 본질을 드러내면서 엄연(儼然)하고 아름답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교는 계속되어야 하지만 대형화, 서구화가 아닌 기독교 문화의 총체적 성숙이 요청되며, 이를 위해 보편화된 작은교회는 곧 이 시대에서 새롭게 하는 본질의 회복을 위한 클리닉임을 주장하였다.
한편 생명평화마당을 이끌고 있는 이정배는 종교개혁 500년을 앞두고 ‘작은교회가 희망이다’ 한국적 작은교회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작다는 말은 종래와 같이 자본주의화 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자 좀 더 다양해지는 것(카리스마 공동체)이며 역사적 뿌리에 충실한 것(언더그라운드 교회)이고 종국에는 치열하게 대안적 신앙양식을 창출하는 것을 함의한다. 그는 세 가지 극복해야할 교회론과 세 가지 지향해야할 교회론을 제시한다. 즉 그에 따르면, 세 가지 극복해야 할 교회론은 세 개의 탈(脫) 교회로써 곧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의 교회이다. 말하자면 성장 중심의 교회, 성직자 중심의 교회, 그리고 남성 중심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향해야할 교회론에 대하여 ‘向’, 곧 성숙, 평신도 그리고 여성을 앞세우고 있다. 정작 생명의 빵을 주지도 못하면서 허울 좋은 구원기관, 제도로 전락한 안정된 교회를 지향하는 대신 힘겹지만 상대적 약자를 대변하며 현장의 소리를 청취하는 ‘예수살이’ 공동체로 거듭날 목적에서였다. 요컨대 교회의 존재 양식 자체를 脫자본주의화함으로써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작은교회가 희망이다.’ 라는 화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정재영은 2012년 “한국교회 10년의 미래”라는 책을 통하여 10가지 현상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반신반의 하였는데, 이제는 교세의 급격한 하락을 몸소 체험하면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제 1장에서 세대 불균형의 지적하고 있는데, 고령화와 저출산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러한 인구 고령화를 가속하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출산이라는 것이다. 고령 인구는 증가하는데, 이를 상쇄시킬 신생아 출산이 감소하기 때문에 인구 고령화가 더 심해지는 것이다. 제 2장에서는 새로운 가족의 출현을 예고하였는데, 한 부모가구, 조손 가구, 1인 가구, 비혈연 가구 등 비정형 가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할 것으로 예견한 내용과 같이, 2018년 오늘 우리 사회 가정의 현주소는 전통적인 형태에서 한 부모 가족, 독신 가족, 기러기 가족, 무자녀부부 가족, 재혼 가족, 동거 가족 등 기존의 것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형 가족’의 등장과 증가가 동시에 이루어 지고있다. 이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붕괴를 보여 주는 현상일 것이다. 제 3장에서는 다문화 사회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지방은 물론이요 이제는 서울 영등포 대림동과 관악구 지역은 중국인 집성촌이라 부를 만큼 규모가 점점 확산 중에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막을 수도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현상은 OECD가 발표한 ‘2016년 더 나은 삶의 질 지수’로 드러난다. 특별히 한국은 조사 대상 38개국 중 하위권인 28위이고, 이 조사에서 환경, 주거, 건강에 대한 지표들이 모두 나빠지고 있고, 공동체의 결속도 매우 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척, 친구 또는 이웃이 있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75.8퍼센트였는데, 이는 멕시코 다음으로 낮은 수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급격한 사회 변동은 ‘압축적 근대화’로 표현되는 짧은 시간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우리 사회가 그동안 시행하였던 돌격적 근대화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정재영은 나갈 수 있는 교회의 대안으로 ‘작은교회’를 제시한다. 단순히 크기가 작은 교회가 아니라 성장지상주의를 버린 ‘작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를 교회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을 ‘사회적 영성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적은 수로 유지되더라도 의미 있는 집단으로 남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계속 호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이웃을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과 생각을 나누는 친구로 대하는 교인과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 수평적 네트워크를 넓혀가는 ‘작은교회’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고 있다.
<참고문헌>
정재영, 함께 살아나는 마을과 교회, (SFC, 2018)
이원규, 21세기 한국교회의 변화와 수평이동 현상, (신학과 세계 52집, 2005.3)
정재영, 교회 안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IVP, 2015)
조성돈, 그들은 왜 가톨릭교회로 갔을까? (예영커뮤니케이션, 2007)
박찬승, 한국 근대정치사상사, (역사비평사, 1992)
김양선, 한국개신교연구, (기독교문사, 1972)
이정배,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 신학과 영성, (신학연구 64집, 2014.06)
안영혁, 작은교회가 더 아름답다, (겨자씨,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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