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제1부 종교의 종말
1970년대는 옛 형태 기독교의 마지막의 시작이었고, 수십 년이 흐른 이제 우리는 그 시작의 마지막을 보고 있다. 전통적인 종교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고 주일 예배의 실제적인 출석률이 상당히 낮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새로운 영적 공동 체를 갈망하고 있다. 21세기의 첫 10년은 정확하게 종교의 대불황이라 불릴 수 있다.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도 성장이 멈추 었다. 사람들은 실증을 내고 있다. 실천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구현하는 공동체를 찾고 있다. 오늘 날은 마지막 때가 아니라 매우 도전적인 시대이다. 우리의 시점을 바꾼다면 상황은 쇠락보다 오히려 새로운 탄생으로 보일 것이 다. 마지막은 흔히 시작이기도 하고, 몰락은 갱신으로 가는 통로이다.
2009년 미국인의 48%가 신과의 신비적 만남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하는 그 수치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의 신앙이 외면화된 종교로부터 내면화된 영적 경험으로 심오하고 광범위하게 재정립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미국의 종교사가들이 인정하는 세 차례의 각성운동(1730~1760년의 첫 대각성 운동, 1800~1830년의 두 번째 대각성 운동, 1890~1920년의 세 번째 대각성 운동)의 각 시기동안, 옛 형태의 종교생활은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고 점차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수반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제도를 만들어냈으며, 국가적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우리 시대는 북아메리카 역사에서의 여타의 주기적인 각 성에 이은 또 다른 각성의 시기이며, 종교의 종말의 시대라기보다는 문화적 재활과 재정향의 시대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들은 모든 종교가 대답하는, 모든 위대한 영적 스승이 가르치는 인간의 영적 갈등을 촉발하는 기본적인 질문들이다. 사회학자들은 '믿음'(종교적 관념), '행동'(종교적 헌신), '소속'(종교적 귀속)을 종교의 세 차원이라 말하는데, 최근 연구들을 살펴보면 21세기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증대되는 종교적 다양성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 전통적 교리, 성서에 대한 미국인의 믿음은 보다 넒은 범위의 자료, 경험, 관계, 신앙 전통의 영향에 대해 열려 있다. 이제 미국인은 커다란 다양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윌리엄 맥루린의 저서 ⟨부흥, 각성, 그리고 개혁⟩에서 설명된 종교 갱신 운동의 형성을 보면, 적합성의 위기 → 문화적 왜곡 → 새로운 비전 → 새로운 길을 따르기 → 제도적 변형의 단계들이, 종교적 ‧ 문화적 변화의 한 형태를 보는 방식을 제공하며, 영적 각성에 있어 우리의 보다 큰 공동체와 우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도록 돕고 우리에게 미래 가능성의 의미를 부여한다. 매우 많은 조사 자료들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말세 현상도 세속화도 아니다. 옛 신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신을 찾는다는 것이다.
오랜 서구 역사에서 '종교적' 그리고 '영적'이라는 두 용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초 그 단어들은 신앙의 다른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성'은 긍정적 용어로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종교'라는 용어는 부정적 용 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성'이란 단어는 제도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이며, 의미 있는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영성은 새로운 신의 탐구라고 하는, 각성의 중요한 단계를 나타낸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을 잘 교육시키고 영적 활기를 불어넣고 사회적으로 고양시키는 일을 잘 수행하던 종교적 모 델이 이제는 더 이상 그 목표를 이전만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2000~2010은, 안일한 태도의 교회, 내부의 긴장, 외적 추문, 지도자의 위선이 경제적 위기와 겹쳐 마침내 미국의 기독교가 엉망이 되어버린 끔찍한 10년이 되었다. "영성"에 말하는 것은 동시에 종교 제도에 대한 불만, 그리고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새롭고 다르고 보다 깊은 관계성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코튼이 ⟨대전환⟩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대전환은 하나의 각성 - 관계성, 경제적 평등, 민주주의, 창조, 그리고 영성을 향한 인간 문화를 다시금 지향하려는 운동 - 이다. 각성은 새로운 깨달음, 내면의 변형, 마음과 생각의 변화, 그리고 우선순위, 헌신, 행위의 재배열을 의미한다. 코튼은 대전환에 있어 영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한다. 지구적 상황에서 인간의 행복과 의미의 길을 추구할 때, 종교는 절대로 무시될 수 없는데, 종교는 영성에 의해 변형되고 갱신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영성 사이의 관계성, '렐리기오'를 추구하고 있다. 렐리기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을 경험할 것을, 그리고 열려진 마음으로 믿음, 행위, 소속을 새롭게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각성을 통해, 우리는 깨어서 오늘의 세계를 보게 된다. 자아, 이웃,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인도된다.
제2부 새로운 비전
기독교가, 하나님에 관한(about) 종교로부터 하나님의(of) 경험이 되는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러 세대 동안 무엇에 매여 살아왔기에 거의 탈진한 상태가 되어버린 영적 공동체에게, 내면적 탐구에 몰입할 공간을 제공해야 하고 하나님의 경험을 훈련하는 새로운 영적 각성의 세계로 초대해야 한다. 오늘날의 종교적 쇠퇴는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상실감과 비탄의 감 정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서구 기독교는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의 순서를 정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믿음이 처 음이고, 행위가 다음이고 마지막은 소속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오래 전 기독교인들은 신앙은 첫째로 공동체의 문제요, 수행은 두 번째요, 믿음은 그 둘의 결과라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 이제 그것을 원래의 순서로(믿음, 행 위, 그리고 소속 대신에 소속, 행위, 믿음의 순서로) 회복시켜야 한다. 바로 거기에 제도로서의 종교와 영적으로 활기 찬 신앙으로서의 렐리기오의 차이가 있다.
단계1 : 소속
기독교는 우정으로의 초대로 시작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사랑과 봉사에 기초한 관계성을 형성했다. 예수는 내면적인 삶, 즉 마음으로 시작하셨다. 마음의 성향이 진리의 근거라는 것이다. 영적인 자유는 바르게 지향된 마음, 즉 자아로 부터 생겨나는데, 그것은 두려움, 미움, 고립, 그리고 탐욕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랑은 관계성을 연결시키는 조직, 즉 하나 님을 향해 뻗어 올라가고, 다른 이들을 향해 뻗어 나아가는 내면적 성향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소속을 감행해야 한다.
단계2 : 행동
예수를 따랐던 초기 공동체는 실천의 공동체였다. 예수는 갈릴리 호숫가를 걸으시며 어부들에게 "믿음을 가져라!" 하고 소리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청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행동을 닮는 문제이다. 행동이 믿음을 형성한다. 영적인 수행은 희망을 발생시킨다. 행동은 믿음을 위한 문을 열어준다. 실천 없이는 신앙은 공허한 약속일뿐이다.
단계3 : 믿음 신앙의 성서적 형태에 있어 믿음은 맨 마지막에 온다.
경험적 기독교는 하비 콕스가 '성령의 시대'라고 설명하는 것인데, 이 시대에 이르러 "삶의 방식으로서의, 혹은 인도하는 지침으로서의 신앙이 다시 한 번 시작되었다." 그 바람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그러나 북아메리카 와 유럽과 호주에서도 또한 불고 있다. 남반구에서 그들은 성령을 유지하기 위해 고투하고 서구에서는 그것을 포용하기 위해 고 투하고 있다. 성령의 시대, 이 새롭고 오래된 경험적 신앙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독교가 매우 새롭거나 혹은 매우 오래된 곳에서, 교회가 세워지거나 혹은 문을 닫고 있는 곳에서 "신의(of)' 경험이 그에 관한(about) 이론을 대체하고 있다."
관계적인 공동체, 열심 있는 수행, 그리고 경험적인 믿음은 21세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비전, 곧 세계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영적 각성의 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제3부 각성
종교는 제지할 수 없는 변화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 같이 보일지 몰라도 순수한 영적 변화는 역사적 결정론으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니다. 영적 각성은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문화적 힘의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다르게 보는 깨달음의, 기도의, 그리고 회심의 작업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는 어떤 것이다. 각성은 신약성서 기자들이 메타노이아라고 부르는 것, 혼돈을 넘어서 인간을 하나님, 그리고 신적인 일과의 새로운 조화를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관점과 전망의 변화이다. 메타노이아는 모든 창조물을 위한 조화, 일치, 평화, 존엄, 그리고 기쁨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향한 '대전환' 혹은 '대회귀'이다.
각성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각성이 비전으로부터 실천으로 옮겨갈 때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지로 눈을 돌린다. 낭만적인 영적 운동으로서의 제4의 대각성 운동, 교조적(dogmatic) 신앙과 낭만적(romantic) 신앙 형태의 긴장을 볼 수 있었다.
맥루린의 도식에 근거하여,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붕괴와 불만족의 첫 두 단계와 씨름하고 있다고 믿 는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세 번째 단계의 새로운 비전을 보며 그것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비전을 구현하는 새로운 실천과 공동체를 창조하는 네 번째 단계로 들어섰다. 제도적 갱신의 마지막 단계를 촉구하거나 그것에 감연히 진입한 지도자는 극히 드물다. 각성의 그러한 양상은 아직은 미래의 일이다. 왜냐 하면 조직적 변화라는 지난한 작업을 위해서는 모종의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로서 미국은 두 번째 단계의 마지막과 네 번째 단계의 처음 사이 어딘가에서 씨름하고 있으며, 각성의 방향을 둘러 싼 중요한 긴장 가운데 휘말리고 있다.
각성은 과거가 아니라, 깨어서 오늘의 세계를 보게 한다. 전통적인, 위로하는 기독교는 실패했다. 그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영성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번영을 위한 가능성을 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식별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별하는 것은 자아,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 무엇 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 -로 인도한다. 깨어나라, 식별하라, 마음에 그리라, 그리고 행하라. 미래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며, 우리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키는 사랑 - 과 충분히 소통하는 신앙에 대한 각성이다
⟪느낌⟫
책을 덮는 순간 눈앞에 내비게이션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본 이 책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교회 목회자들 가슴에 달아드려야 할 내비게이션이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를 끊임없이 곤혹스럽게 하였던 문제, '지금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는 실제로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길눈이 밝지 못한 나는 길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직접 운전을 하지는 않지만, 내비게이션의 필요성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성령님, 제가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며 우리 교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의 주소를 입력했다. ☞경험적 기독교 : 새로운 비전
그러자 성령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마치 ⟨교회의 종말⟩내비게이션을 켠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나를 사로잡아 ⟨교회의 종말⟩을 구석구석 살펴보게 하셨다.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마음, 주님의 비전이 ⟨교회의 종말⟩을 통해, 나를 인도하기 시작하셨다. 엉켰던 길들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지워지고, 이제 예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목표를 바로 세우게 된 것 같다. 내 삶의 분명한 목표를 향해 가장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행복하고 건강하며 소망이 가득 찬 천국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특별히 가정과 교회가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작은 천국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행복한 가정을 원하고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소망 찬 인류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는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동안 연단과 시련의 저항 환경에 있었다. 이는 우리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흘린 처절한 피눈물이었다. 한탄하고 절망해 보았다. 처절한 절망을 만나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하나님과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통해서만이 거룩한 힘(divine power)을 얻을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노력해도 안 되는 약점과 어려움이 있어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들은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들의 문제로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언제 깊어질까? 어려움, 고난, 힘듦, 긴장, 초조, 불안, 될까 안될까 하는 전전긍긍함 속에서 깊어진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도 고난의 과정 속에서 깊어졌다. 우리 모두 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사회에,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100개, 1,000개, 10,000개의 건물일까? 아니다!!!!! 100개, 1,000개, 10,000개의 건물을 건축해낼 수 있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그 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나 자신을 몽땅 내어 맡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실 하나님아버지께로 나아가, 그분께 발견되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 되면 세상이 소망 찬 세상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교회가 가져야 할 핵심가치(core value)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책을 보다가, 먼저 우리 교회가 가장 중요시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우리 교회가 지향해 나가야 할 핵심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서로에 속해 있고, 관계성의 그물망 가운데 모두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거기서 우 리는 우리의 가장 참된 자아를 발견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정의와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예수를 닮는 행동으로 열심히 우리의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다. 더 이상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렐리기오여야 한다고! 예수가 가르치셨던 것을 향해 되돌아가는 기독교의 대회귀(the Great Returning)가 있어야 한다고!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 시 91 : 1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심비에 새겨진 단어가 있다면 바로 렐리기오이다. 렐리기오는 신앙(faith)-사랑, 존경, 헌신, 경외, 예배, 초월, 신뢰, 삶의 방식, 신과 자연을 향한 태도를 포함하는 살아있고 주관적인 경험, 혹은 세계를 보고 느끼는 특별한 방식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렐리기오의 원초적 의미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초인적이고 두려운 힘의 현존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였다고 한다. 그 렐리기오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렐리기오라는 단어는 그 단어 자체가 '결속 혹은 결합시키다'는 의미를 가진 리가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렐리기오는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원래의 정의와 의미에 있어 렐리기오는 그리고(and)의, 재결합의,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타인 들과 결속시키려는 열망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렐리기오는 마음에 활기를 주고, 타인들과 창조를 향해 그 영혼을 연다고 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단어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같이' 혹은 '함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 ‧ 나의 가정 ‧ 우리 교회의 핵심가치(core value)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나를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내 존재의 이유, 내 존재의 목적을 점검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핵심가치(core value)가 분명할 때 비전을 세울 수 있으리라.
나의 가슴을 유난히 두드리는 핵심가치가 바로 주님의 부르심(calling)이 아닐까!!! 부르심을 따라 움직일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내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하나님이시다. a church가 아니라 the church가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새 가족이 오면 우리 교회의 비전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핵심가치를 처음에 잘 가르쳐 드리면 실족하거나 상처 받고 떠나는 일이 적어질 터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믿음이 처음이고, 행위가 다음이고 마지막은 소속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오래 전 기독교인 들은 신앙은 첫째로 공동체의 문제요, 수행은 두 번째요, 믿음은 그 둘의 결과라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이제 그것을 원래의 순서로(믿음, 행위, 그리고 소속 대신에 소속, 행위, 믿음의 순서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 이다. 바로 거기에 제도로서의 종교와 영적으로 활기 찬 신앙으로서의 렐리기오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넋 놓고 있지 말고 사람의 가슴을 뛰게 만들어야겠다!!!
핵심가치(core value) ⇛ 비전(vision) ⇛ 전략(strategy)
'성공하는 목회' 쪽이 아닌, '소명을 다하는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회복해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돌아보는 원래의 사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 그 진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예수의 영 안에서 살고, 예수의 희망을 품으며, 예수가 시작했던 일을 하며, 예수 님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예수 안에 있는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직접 경험한 자로서 영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정의를 추구하는 자로 살 것이다!
나더러 성경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존재와 인간과의 관계,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가를 밝혀놓은 책..." 이라고! 믿음의 선진들은 미래를 갖기 위해 본래 받은 약속을 철저히 붙잡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중노동을 하였을 것이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의 정점에서 이런 기도문을 썼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내가 간구하오니 당신에게 기뻐함이 되는 것을 열렬히 갈망하도록, 슬기롭게 탐구하도록, 참되게 인지하도록, 완전하게 당신의 이름의 찬양을 위하여 완수하도록 내게 허락하여 주소서."
나 역시 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학을 슬기롭고 참되게 하여, 여름 가뭄의 시원한 냉수처럼 하나님을 시원케 해 드리고 싶다.
'자기 계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명환 저자의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북 리뷰 (1) | 2024.05.25 |
---|---|
데이비드 호킨스의 책, '놓아버림'을 읽다가... (0) | 2024.05.25 |
『가족목회』를 고찰한 그 특별한 시간, 신학대학원 과제로 제출하다... (0) | 2024.05.25 |
가족생활 주기에 따른 3가지 의례(유아 세례, 결혼 예배, 장례 예배)를 어떻게 상담 목회와 연결할까?! - '상담 목회론' 강의 리뷰 (1) | 2024.05.25 |
『습관이 영성이다』 책 요약, 습관이 영성이 됨을 확신하며 촘촘하게 읽다... (0) | 2024.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