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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습관이 영성이다』 책 요약, 습관이 영성이 됨을 확신하며 촘촘하게 읽다...

by tat tvam asi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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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비아토르 -

 

 

여는 글

 

예수님께서 내게, “너는 뭘 원하니?”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본서(本書)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바람과 갈망과 욕망은 우리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며 우리 행동과 태도가 흘러나오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5세기 철학자 & 신학자인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마음(καρδία) 인간의 가장 근원적 갈망을 떠받치는 버팀목 곧 세상에 대한 본능적이며 잠재의식적 지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마음은 우리 사랑의 실존적 공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갈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연연하는 자세를 버리고 과거로부터 배운 것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미래 세대를 세우는 것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 목표이다.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 공동체는 불확실성이 크게 증폭된 시기, 엄청난 위기와 기회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이런 시기에는 통찰력이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의 미래적 사활(死活)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삶을 관조하고, 지속적으로 영성(靈性)과 습관을 훈련하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함께 살아나는 교회와 지역사회를 소망하며 미래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성도들을 포함하여 많은 어린이, 청소년, 청년, ()중년(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세대, 50~70)들이 하나님의 인재(人材)로서, 조화와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춧돌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기획을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른 목적으로, 우선 새로운 미래의 하나님의 인재로서 준비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함께 숙지하고 싶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의 하나를 새로운 미래 패러다임이 요구하는 인재상은 무엇인가?’라고 생각했고 또 하나를 변화된 패러다임에 맞추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어떤 기독교적 훈련이 필요한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책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형성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에서 그 해답을 찾아갈 수 있었다.

 

우리가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궁극적 목적(τέλος), 우리가 목표 삼고 살아가는 왕국의 모습을 지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욕망이라고 할진대, 우리 교회 성도들의 소망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행복하고 건강하며 소망이 가득 찬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 자신의 궁극적 목적(τέλος), 역사적 기독교 예배를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양식이 통전적으로 다듬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삶 속에서 민감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함께 추구하자...”. 라고 오롯이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맨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참 특이하다고 여긴 것이 있었다. 자연스레 예전(liturgy)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의례를 문화적 실천으로,  예전으로 읽어 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예전이라는 렌즈를 착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예전(liturgy)이라는 단어는 예배를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어휘로서, 로마서 13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표현의 헬라어 단어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일(ργον)과 백성(λαός)의 합성어로서, 고대 희랍에서의 레이투르기아는 국가의 전체 이익을 위하여 실시하는 공익사업을 뜻했다. 그 원리는 세금을 내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서 세금은 물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는 영어로 리터지(liturgy)로 번역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어권에서는 예배의 총체적 표현을 리터지(liturgy)라 한다.

 

즉 예배의 영어식 표현인 리터지(liturgy) 사람의 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전(liturgy)이라는 관점으로 예배하는 인간’, ‘세속 예전, 가정의 예전, 신앙 교육의 예전, 소명의 예전 등을 풀어나간 저자의 의도가 마음에 분명하게 와 닿았다.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때, 결국 예배’(liturgy)로 귀결(歸結)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꿈이 있다. 내 마음속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참되게 실현하고 행복한 가정과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소망 찬 인류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에 나의 힘을 보태는 것이다. 이 꿈을 위해, ‘사람이 어떻게 해야 변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을 들어보기 원한다. 또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그의 견해도 살펴보기 원한다. 그리고 저자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실천에 관해 소상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몸 되는 글

 

하나님은 그분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 마음은 그분 안에서 목적을 발견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사랑의 형성을 통해, 우리의 사랑을 재정향할 필요가 있다.

 

.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예배하는 인간

 

저자는 문화 창조자들의 영성을 다루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몰입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며 원동력임을 보여 준다. 예배를, 문화를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지향하도록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길러 내는 상상력 저장고라고 말하면서, 제자도는 앎과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열망과 갈망의 문제라고 일깨워주고 있다. 정의를 추구하고 문화를 새롭게 하고 모든 창조세계의 잠재력을 펼치라는 소명을 수행하는 것에 열정을 느낀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형성하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예배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예배한다.“라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함으로써, 서로 가르치고 권면함으로써,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옷 입고 사랑이라는 덕을 입는다.” 기독교 예배라는 실천이 우리의 사랑을 훈련한다. 그분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의 사랑이나 갈망을 그분의 사랑이나 갈망과 일치시키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하나님이 욕망하시는 바를 욕망하고, 하나님을 열망하며 갈망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세상을 간절히 구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라는 줄임말로 요약할 수 있는 전망이다. 예배는 오실 왕국을 위한 실천이며,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길러낸다.

 

누구나 좋은 삶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나름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사람 안에서 욕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욕구는 그로 하여금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이 바라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사람을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이런 움직임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그 사람의 존재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특정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지만, 저자는 그 욕망이 궁극적으로 그가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을 2의 천성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에 관해 생각하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습득한 습관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규정하며, 이는 다시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으로까지는 옮겨놓지 못한 채, 이론으로 도피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 우리의 삶에는 간극(間隙)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 추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반드시 우리가 정말로 꿈꾸는 삶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 대신 우리가 가진 습관들, 그 배후에 있는 욕망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우리가 꿈꾸는 좋은 삶에 대한 그림을 성찰(省察)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덕이 습관에 뿌리를 박고 있고, 습관은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사랑은 예배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저자의 표현은 실로 대단하다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세속 예전을 읽는 법

 

본서(本書)에서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례와 주기를 돌아보게 하면서, 현대 미국 문화의 세속 예전들에 대해 사려 깊은 분석을 제시하며, 세속 예전을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에 관한 궁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의례로 정의하고, 제대로 예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무의식을 재조정할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쇼핑몰을 소비주의 복음을 설파하는 현대의 신전으로 바라보는 흥미진진한 시각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형성적 체험을 제공하는 다른 세속 신전들에 대해서도 예전적 감사를 실시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세속 예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피면서 마치 뒷문을 통해 더 의도적인 기독교 제자도로 인도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저자는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의례를 문화적 실천으로,  예전으로 읽어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예전이라는 렌즈를 착용하면, 전에는 한 번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문화적 풍경에 우리가 얼마나 자연스레 편재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쇼핑몰이 은밀히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만들어가는 형성적 공간임을 자각하기 시작한다는 저자의 지적에, 이곳에서 습득한 습관이 내 안에 아로새겨져 있음에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의 예견처럼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종일 우리를 거기에 묶어 두는 의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실천의 형식이 나를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 자기중심적 전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 성령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을 만나주신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위한 역사적 예배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훈련을 반복적으로 하여 습관이 형성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저자는 자신의 경험 하나를 소개한다. 제임스의 아내는 건강을 위한 행복한 먹거리를 강조하며 실천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 덕분에 건강한 먹거리를 섭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어느 날 바른 식습관에 관한 책 하나를 발견하여 내용에 감동하면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고 있는 그 순간, 자신은 코스트코 푸드 코트에서 행복한 돼지고기로 만들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한 팔뚝 길이만한 핫도그를 베어물고 있었다. 그 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즉 지식과 습관 사이에는 간극(間隙)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좋은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는 지식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 되지 않은 것이다. 지식과 습관은 다르다. 지식이 영성이 아니라, 습관이 영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지식은 있으나, 기도하는 행위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습관화 되어 있지 않으며,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도 습관화 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혀 새로운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지금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걱정  근심  염려  불안  두려움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 등이 아니던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훈련을 통해 습관화 되어야 하는 것들은 무척 많다. 묵상훈련, 성경읽기 훈련, 단순한 기도 훈련, 의식 성찰 훈련, 양심성찰 훈련, 영성일기 쓰기 훈련, 성경 암송 훈련, 영적 예배 훈련, 섬김 훈련 등 많은 훈련들을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알고 있다는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힘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습관이 형성되게 하려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 몸에 자동적으로 배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습관이요 영성이다. 실천이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이 새로운 갈망을 갖게 될 때까지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성 형성을 위해서는 수많은 습관의 재형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수많은 무질서한 습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영성 형성이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중요한 소명 중 하나인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습관을 형성하는 실천에 몰입할 기회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의 영성 형성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다. 가정과 교회에서 아이들의 머리에 정보를 주입하는 데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의 습관 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과정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뿌리 깊은 습관이 바뀔 수 있도록 순순히 훈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그 공간, 그 간격에서 우리의 신체적 습관을 징집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신다.

 

또한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은총이 언제나 특별한 사건이기라도 한 것처럼 새롭고 특이한 것에서 성령을 찾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성령이 일상적 은총의 수단 곧 기도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신실히 역사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예배가 제자도의 핵심이라고 할 때, 우리는 예배를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배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라는 초대이고, 성령이 강력히 임재하시는 독특한 공간이다. 예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시며, 예배는 그분을 위한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행위, 그분을 위해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예배 가운데 활동하신다. 우리는 살아계시며 일하시는 주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새롭게 만드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배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저자는 예배 형식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전체적 서사

 이 구현된 서사의 구성 요소를 이루는 구체적 실천

 

예배가 단순히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형성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형성하는 예배 형식에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예배를 단순한 표현과 분리할 때, 반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예배를 상향적 표현 행위로 생각할 때는 반복은 진실하지 않으며 진정성이 부족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예배를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근원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 가시는 하향적 만남으로의 초대로 이해할 때 반복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반복은 하나님이 우리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방식이다. 형성적 패러다임에서 반복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것이다. 덕의 형성을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반복 없는 실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며,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요하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넉넉히 쏟아 부으신 사랑을 길러내기 위해 사랑의 연도(連禱 - 연속적인 기도)를 주셨다. 기독교 예배라는 예전은 우리가 반복해서 드리는 사랑의 연도(連禱)이다!

 

. 당신은 어떤 이야기 안에 있는가? - 형성적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

 

예배는 직감을 사로잡고, ‘카르디아(καρδία)를 재조정하고, 상상력을 장악할 때에만 제자도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욕망하시는 바를 욕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의 습관을 재조정하고 우리 상상력을 다시 사로잡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사회적 상상계의 지향적 중심이 되고 우리가 무언가에 관해 생각하기도 전에 그것을 지각하는 방식을 규정할 때 그런 일이 생긴다. 따라서 쇼핑몰이나 경기장, 대학 동아리의 세속 예전처럼 기독교 예전은 지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몸에도 영향을 미치고 감각을 통해 욕망을 징집한다. 대항 형성적인 기독교 예배는 신체적이며 감각적이고 직감적이어야 한다. 마음에 도달하려면 몸을 통해 가야만 한다.

 

기독교 예배는 그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이를 위해 우리를 성경이야기 속으로 초대하고 그 이야기를 우리 속에 심어 넣는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목적은 타고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창조 목적대로 그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된다. 기독교 예배의 목적은 창조명령의 갱신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어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세상을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우리 성품을 형성한다. 하나님의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되게 하고, 덕을 반영하는 성품을 획득하게 한다. 이렇게 두 의미로, 성령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특정한 종류의 사람으로 만드는 성품을 우리 안에 새겨 넣으신다.

 

우리는 때로 기도를 행동과 맞바꾸려는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기도는 모든 행동보다 우선한다. 기도가 심리 에너지의 원천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에 걸맞은 예배와 영광 돌림의 행동, 즉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이기심 없이 응답하려고 노력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포를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라는 뜻에서 그렇다.

 

기독교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대양으로 항해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우리 안에 장차 올 나라인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11:16). 성경이 그리는 샬롬’, 곧 어린 양이 우리 빛이 되시는 세상,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드는 세상, 모두가 풍요를 누리는 세상,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같은 찬양을 부르는 세상,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는 세상은 기독교 예배에서 재연되어야 할 전망이다. 이 전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임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예배라는 가시적 실천이 이를테면 그 전망을 성경 이야기의 은유와 시편의 시, 찬송가와 합창곡의 박자, 떡과 포도주라는 만질 수 있는 성례전의 요소,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이미지를 통해 그려 보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우리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도록 가르친다.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 : 모든 전통에서 역사적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로 만물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사건을 중심으로 한 기본 줄거리나 서사 구조를 반영한다.

 

모임  들음  사귐  보냄

 

수 세기에 걸쳐 전해 내려온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재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임은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음을 상기시키고, 창조주가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되는 예배에서는 예배 가운데서 일하시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는다. 이런 기독교 예배 구조 자체가 이미 대항 문화적이다. 이런 예배 구조는 자기중심성과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려는 욕망을 버리게 한다. 우리는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듯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다. 매주 죄를 고백하라는 요청을 받는 것은 복음 이야기의 핵심 장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일주일 내내 세속 예전은 자기 자신을 믿으라라고 암묵적으로 가르친다. 죄의 고백이라는 실천은 우리의 사랑을 재형성하기 위한 핵심훈련이다.

 

거룩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은혜롭게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들음의 장으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행위가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귐에서 절정에 이르러, 우리가 우주의 창조주와 만찬을 나누도록 초대를 받는다. 우리 모두 초대를 받기에 그들과도 화해해야 한다. 이 사귐을 통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의 중심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주의 만찬은 단지 과거에 이미 성취된 바를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영양을 공급하는 잔치다.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고 그분의 말씀으로 지혜를 얻고 생명의 떡으로 영양을 공급받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가꾸고 돌보며 모든 백성을 제자로 삼도록 세상으로 보내진다. 우리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살도록 보냄을 받는다. 예배는 축복이자 가라는 명령을 담은 축도로 마무리된다.

 

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새로운 이야기 안으로 이끄시는 영적 운동을 단계적으로 하게 만드시는 체육관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싫은 날에도, 원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에도 주의 만찬은 필요하고 말씀이라는 양분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독교 예배의 서사 구조 안에서 이야기에 몰입할 때, 성령이 우리의 습관을 바꿔놓으실 것을 알고 있다.

 

저자는 죄의 고백 사죄의 확신이라는 실천을 강조하며, 이것을 예배에서 배제할 때 어떤 위험이 뒤따르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북미 복음주의권은 후에 메가처치로 알려지게 된, 혁명에 가까운 혁신을 경험했다. 메가처치 운동의 목회와 전도 철학을 흔히 구도자 중심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미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구도자들”, 즉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다가가기 쉽고 자신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즐겁게 해 주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행사에 참석해 볼 생각을 할 정도로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데 더 집중했다.

 

하지만 교회가 그런 종류의 공간이 되려면 이를테면 덜 교회처럼 느껴져야 했다. 구도자에게 민감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이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졌던 실천과 전통의 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이들이 환영 받는다고 느낄 수 있게 하려면, 교회가 익숙하고 다가가기 쉽고 멋있는곳처럼 느껴져야 했다. 사람들이 콘서트의 짜릿한 즐거움이나 상품을 구입할 때 느끼는 기분을 연상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했다. 구도자 중심 교회는 쇼핑몰과 콘서트, 스타벅스가 하나로 합쳐진 곳처럼 느껴졌다. 이런 곳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며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북미 복음주의 교회의 건축과 장식뿐만 아니라 예배하는 방식도 크게 바꿔놓았고, “전통 예전은 구식이고 무미건조하다고 기독교적 선포와 예배의 특정 요소들을 약화시켰다. 진노는 더 적게, 행복은 더 많이, 심판은 더 적게, 격려는 더 많이, 죄의 고백은 더 적게, 용서는 더 많이...

 

구도자 중심교회에서 사라진 전통적 기독교 예배의 요소 중 하나는 공동체가 함께 죄를 고백하는 실천이다. 역사적 예배에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모일 때마다 자신들의 실패와 잘못, 하지 말아야 할 바를 행한 죄와 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은 죄를 고백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한 다음에는 언제나 사죄 선언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의 선포가 뒤따랐다.

 

그런데 이렇게 정기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엄격한 실천이 구도자들에게는 즐길 만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실천은 까다로운 질문을 제기하며 자신에 관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하여 구도자들에게 민감한 태도와는 정반대인 것처럼 느끼기까지 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하는 기회가 바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일 수 있고 죄를 고백하라는 권고가 사실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에 대한 대답일 수 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기 원하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깨닫지 못하였을 수 있고, 죄의 고백은 모든 깨진 마음의 갈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죄를 고백하라고 권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세심한 행동, 구도자를 위한 선물일 것이다.

 

구도자 중심교회 운동이 놓친 것이 있다. 사람들은 고백하기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고백하는 의례는 그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우리를 자리 잡게 하고, 그 이야기가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될 때, 우리 사랑의 습관이 바꾸어진다. 복음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되어, 우리 상상력의 배경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선 가운데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영생 가운데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고 믿을 때, 우리는 다른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마음을 지키라  가정의 예전

 

스위스의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는, “...어머니가 아이의 마음속에 사랑을 일깨우고 아이는 사랑에 일깨워졌을 때 지식에도 일깨워진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랑 받을 때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사랑의 빛으로 드러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적 사랑을 지각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가정에서 배우게 된다. 이것은 참 중요한 사실이다.

 

주일 예배 시간의 예전(Liturgy)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가 실천하는 예전들(liturgies)을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는 실천을 매주 드리는 예배의 실천과 결합하여 공동 예배의 형성적 힘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 예배를 확장하여 삶의 방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행하는 기독교 예배라는 예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 집의 예전에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속도 때문에 우리는 별다른 반성 없이 일상에 쫓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 안에 자리 잡게 해야 하며 우리 가족을 교회라는 첫 번째 가정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

 

예배에 포함된 가정에 대한 강력한 두 이미지, 세례와 결혼을 생각해 볼 때, 먼저 세례는 은혜 가운데 먼저 일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고 인 치시는 성례전이다. 아래에서 위로 우리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상징인 것이다. 세례는 우리가 한 백성임을 뜻하고,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집에서 혈연관계보다 그리스도의 피가 더 우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드러낸다. 교회는 도전이자 축복인 우리의 첫 번째 가정이 되기에, 가정의 사생활에 도전하기도 하고 반가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세례 받는 이 아이들을 우리 혼자 힘으로 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세례로 재정립된 가정의 사회적 역할은 더 큰 사회적 실체에 의존한 가정이 되는 것이고, 신학적 관점에서의 가정은 교회라고 부르는 사회적 모험의 일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을 것이다.

 

결혼이라는 문화적 예전 역시, 분별하고 판독할 수 있는 비판적이고 묵시적인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결혼의 예전은 결혼이 다른 이들을 섬기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과, 또 서로 언약을 맺어서 이스라엘과 교회처럼 열방에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은 작은 백성이 된다. 결혼은 하나님 나라를 닮은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가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희생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거룩한 결혼의 성례전은 성찬대에서 성만찬으로 마무리 되는데, 이곳에서 모든 참석자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의 살과 피를 마신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신부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신랑의 이야기를 맛보아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주일이 결혼 갱신 예식인 것이다.

 

우리의 가정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중심으로 끊임없이 돌아감으로써 영양을 공급 받아야 한다. 매주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 나라 안으로 이끈다. 회중의 공동예배는 가정을 하나님 이야기 안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더 광범위한 관계 안에 위치시키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집과 가정으로 다시 파송 받으며, 교회 예바를 우리의 작은 교회로 확장할 기회를 얻는다.

 

가정의 형성적 의례는 단순한 사적 실천이 아니라, 공적 영향력을 미친다. 공동체의 형성이나 예배처럼 가정의 형성도 보냄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하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러나 숨을 수 있는 순수한 가정을 만들려는 게 아니다. 이런 태도는 가라는 사명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가정의 형성적 리듬에 대해 의도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정이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가 문화 명령과 대위임을 수행하고 우리 이웃에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는 또 다른 재정향의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는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을 품어주고 보호하고, 그들을 교육할 책임이 있으며 그들의 상상력을 지키는 자인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가오는 위협을 멀리서 감시하는 보초병처럼 아이들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모든 자녀 양육 전략은 인간 본성에 관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성경지식을 공급하여 아이들의 믿음을 길러주고, 세상이 퍼붓는 거짓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을 우리 욕망의 방향을 조정하는 형성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바로 가정에서 우리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재조정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모든 가정마다 특정한 목적(τέλος)에 조율된 노래,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도록 마음을 조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가정과 가족은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일종의 회계 감사를 실시하고 예전이라는 렌즈로 이를 점검해야 한다.

 

가정의 예전에 대한 이런 감사는 가정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를 것이다. 대학생이 있는 가정의 일상은 영유아 자녀가 있는 젊은 부부의 가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고, 각 가정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화적 예전에 유혹을 받고, 그런 예전에 참여하도록 권유 받을 것이다. 즉 가정마다 전혀 다른 일상을 살아갈 것이기에 전혀 다른 유혹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예전의 유혹과 왜곡된 형성은 언제나 우리가 속한 환경에 따라 다르다. 각 사람은 우리 가정이 당연히 여기는 일상의 실천을 평가해야 한다. 대개는 우리가 이런 실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기에 그 형성적 영향력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할 뿐,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일상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나면, 거기에 맞서기 위해 무엇을 할지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가정이 더 광범위한 하나님의 가정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우리 가정의 예전은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형성적 예전에 의해 규정되고 그 예전을 강화해야 한다. 성경적 예배는 우리를 그리스도가 중심이신 구속의 드라마 안으로 이끌어, 이러한 예전적 형성이 우리 성품을 만들어 간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 안으로 엮어 넣고, 우리의 성픔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형성적 예전은 예배라는 교회의 자원에 의존한다.

 

또한 우리 가정이 교회력이라는 전례력의 주기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대강절과 성탄절, 주현절과 성령강림절, 사순절과 부활절이라는 주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가 예수의 삶 가운데 살 수 있게 해 준다. 이 절기들은 우리 가정의 영적인 분위기를 고양(高揚)시켜줄 것이다. 강림절을 시작으로 보다 큰 단위의 절기를 지키게 된다. 4주로 이루어져 있는 강림절에는 크게 세 인물(세례요한, 마리아, 이사야)을 통하여 그 교훈을 경험할 수 있다. 성탄절을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의 신비한 연합 사건을 선언할 수 있다.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하여 주일을 포함하지 않는 사십일의 신앙여정인 사순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가르침, 회개와 회복, 부활의 능력을 미리 맛볼 수 있다. 부활절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고 다시 생명을 회복하고 영원히 살아 있음을 선언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사건을 기념하며 영생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부활 절기를 지낸 가정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교회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지만,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강림 절기를 시작으로 성령강림절까지 일 년의 순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가르침, 고난, 죽음, 부활, 승천, 다시 오심의 약속, 교회의 사명과 선교를 경험하며 기독인으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재확립하며 이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다. 즉 가정의 형성적 의례가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가 문화 명령과 대위임을 수행하고 우리 이웃에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는 또 다른 재정향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자녀를 잘 가르치라  신앙 교육의 예전

 

기독교 신앙을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자녀가 뼛속까지 복음을 알도록 교육하려는 핵심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를 가르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젊은이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우리의 접근방식은, 정보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하나님은 참 예배자를 원하신다. 우리는 젊은 그리스도인 자녀들을 공교회적 기독교의 유산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자녀들이 교회의 공간 안에서 전례력 구역, 세례 구역, 성만찬 구역 등과 같은 교회놀이를 할 수 있을 때 그 의미들과 중요성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선한 목자 조각상을 교회 공간에 두어, 예술이라는 유산을 통해 아이들을 고대 그리스도인들과 연결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이미지를 강력히 환기하여, 아이들이 자라 자신들이 어렸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까지도, 이런 이미지화된 진리를 평생 간직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를 떠나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방황하는 순간, 어린 시절 상상력 저장고 안쪽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이미지가 그를 불러 예수의 어깨 위에 앉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마리아 몬테소리 교수법에 담긴 지혜를 원용(援用)하는 어린이 사역 모형을 교회 공간 안에 교사들이 꾸며 놓아서, 학생들이 신체를 활용하여 복음을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큰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 교수법은 새로 믿게 된 이들이 우리가 예배하는 내용과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는 고대의 교육법이다. 이것이 예전적 교리 문답이다. 예전적 교리문답은 조직신학 개론에서 간추려낸 추상적 교리 체계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 교육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성만찬 주위에 모여 예배할 때 무엇을 행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앙교육이다. 예전적 교리문답은 기도에 뿌리를 둔 배움이요, 예배에서 흘러나온 제자도다. 우리가 알기 전에 기도하고 세계관을 갖기 전에 예배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교수법이다. 아버지가 찾으시는 예배자들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형성된 사람이다. 이 형성은 상상력을 사로잡는 어린이 사역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선한 목자 교리문답의 큰 방을, 전혀 다른 공간과 비교해 보라. 청소년 사역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가고 싶은 공간, 편안히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명랑한 에너지 연출을 위해 본질이 아닌 다른 것들에 치중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때 따분하게 들리지 않게 하지 위해 감각적인 포장에 담긴 모호한 성경 메시지를 던지며 다음 주말에는 더 재미있을 거라는 말로 젊은이들을 묶으려 한다. 이런 프로그램은, 다음 세대가 교회와 신앙을 떠날까봐 두려워하는 부모와 성인들이 두려움이 의거해서 만든 창작품이다. 이들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는 주원인을 따분함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두 가지 불행한 결정을 드러낸 청소년 사역에 접근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대별로 나눠서, 예배라는 교호 중심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떼어내어 공식적으로는 교회 건물 안에 있지만 사실상 패러처치(parachurch)나 다름없는 공간으로 보내 버렸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대별로 분할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습관 형성 방식 중 하나인 모방의 기회를 제거했다.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인다면 모범이 될 만한 성도들을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젊은이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면 그들이 신앙을 진심으로 드러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가정 하에 청소년 사역을 거의 전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로 만들어 버렸다. 형성적인 신체적 예배 대신에 이분법에 안주했다. 예배는 감정을 자극하는 30분 음악에 이은 30분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즐거움에 대한 반지성적 집착은 형성에 대한 확신 부족에 불과하다. 젊은이들을 즐겁게 하고 감정적으로 흥분시키는 목적은 그들의 지성이라는 그릇에 메시지를 집어넣을 기화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즐거워하게 만드는 것과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역동적인 일원으로 형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늘날 청소년 사역은 그리스도인들 형성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이들을 복음주의 클럽 카드 회원으로 묶어 두려는 최후의 노력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건물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우리는 기독교를 메시지로 환원하면서 메시지를 배포하기 위한 관문으로 정서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예전과 영적 훈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성육신적 형성 방식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대신 우리는 외향성을 신실함으로 혼동하는 청소년 사역을 만들어냈다. 사실상 우리는 제자도가 합창단이나 응원단처럼 원기 왕성하고 기운이 넘치며 쾌활하고 예수 만세를 외치는 태도를 기르는 것과 같기라도 한 것처럼, 젊은이들에게 진실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예수 때문에 불붙은 것”, 즉 예수 때문에 흥분한 것과 같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위해 외향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메시지를 전할 때, 그렇게 타고 나지 않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일리 없다고 조용히 결론 내릴 것이다.

 

습관을 형성하는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소개하고, 예수를 따르는 아주 오래되고 충분히 검증된 방식을 소개할 때, 그들의 신앙은 두 번째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그런 영적 훈련을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인도하고, 믿음을 형성하는 선물로 받아들인다. 젊은이들은 기도와 경건의 역사적 훈련이 그 자체로 은총의 선물이며 성령이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과 만나시는 방식임을 경험할 것이다.

 

시편을 교회 기도서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 한가운데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성무일도 같은 경건 훈련은 그들의 믿음에 반복적 주기를 부여할 터인데, 이는 그들의 욕망이 우주의 결(grain)과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감각적이며 역사적인 훈련방식이다. 더 이상 그들의 공적이나 표현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런 실천을 통해 성령의 활동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기른다.

 

예배와 제자도의 이런 역사적 실천을 받아들이면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대의 신앙과 연결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의 청소년 사역자보다 더 오래되고 청소년부보다 더 광범위한 몸과 연결시킬 수 있다. 이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의 삶과 관련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근원적 차원에서 사회적 실체인 그분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후기 근대 문화에 만연해 있고 우리를 다른 이들과 피상적 관계만 맺는 사적 개인으로 축소시키는 자율과 독립의 의례에 맞서는 저항이다. 우리는 역사적 실천을 통해 우연히 같은 구주를 사랑하는 원자적 개인의 집합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가 되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은 자신보다 더 크고 오래된 무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일종의 고대적 안정성과 지속성을 지닌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아이들은 전통의 동물이면서 의례의 동물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사실은,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의례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의례인데도 우리의 청소년 사역에서는 그들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할 생각하는 사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젊은이들은 우리가 그들을 형성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교육이 형성적이고자 한다면, 더 구체적으로는 학생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형성하고자 한다면, 먼저 형성하는 이들을 형성해야 한다. 교육자인 우리가 전인적 인격체를 형성하는 교육과 학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선미를 사랑하는 훈련을 시키는 고전적 교육 기획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먼저 재형성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교육 개혁은 우리에게서 시작된다.

 

우리는 젊은이들의 신앙형성을 위해서 표현주의적 경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대의 영적 혼련이라는 유산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영적 훈련은 낯설기 때문에 습관을 형성하며, 우리가 자기 중심주의를 제거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원하는 습득된 욕망에 맞서 저항한다.

 

자녀의 신앙형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 중 하나는 역사적 기독교 예배와 여러 세대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 헌신된 교회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다. 예배가 제자도의 핵심이며 목적지향적인 역사적 예배가 우리가 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한다면, 청소년 사역은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젊은이들을 신앙 안에 머물게 하는것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들을 건물 안 다른 곳에 고립시키지 말고 우리와 함께 예배당에 머물게 해야 한다.

 

또한 형성적 청소년 사역에서는 젊은이들이 더 폭넓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성령의 리듬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많은 실천의 실천이다. 이는 신앙이 행위라서가 아니라, 그런 실천과 훈련이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훈련을 소개 받는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들어갈 진입로를 소개 받는다는 뜻이다. 젊은이들에게 기도와 주목, 분별, 금식, 예배라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훈련을 소개하는 것은 그들에게 은총의 상으로 들어갈 뗏목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다. 성화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면, 효과적인 청소년 사역에서는 젊은이들이 실천을 통해 예수를 입어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젊은이들이 형성적 예배를 제자도의 핵심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성적 청소년 사역은 재미 대신 섬김을 추구한다. 재미에 초점을 맞추는 사역은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더 광범위한 문화적 태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교회는 우리가 습득한 자기중심주의를 바로잡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섬김에 형성적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섬김은 자의식과 자기애를 조장하는 우리 문화의 실천을 무디게 하고 자기중심주의라는 소용돌이에서 우리를 끌어내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형성적 사역은 단순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라 청소년이 주도하는 사역이 될 것이다.

 

예전이 형성적이라면, 이는 예전이 교회 바깥의 학습 환경에도 적용될 수 있는 교육전략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과 과제를 다른 틀에서 바라보게 해 준다. 기독교 교육은 단순히 신앙에 관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제도 아니고, 그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문제도 아니다. 통전적 기독교 교육에서는 두 가지를 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학생들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도 목표로 삼는다. 학교를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신앙을 형성하는 학습 환경을 만들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통전적인 기독교 학습 환경은 지성을 채울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불타오르게 한다.

 

그러려면 교수법과 교육 전략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프레리 교육 센터(Prairie Centre for Education) 소속 교육자들이 변화를 위한 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는데 그 동기를 보면 교육은 무엇보다도 먼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의 문제로 출발한다.“변화를 위한 교육에서는 모든 교재와 모든 학습 경험이 학생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매일 학생들을 더 나은 이야기로 초대하겠다는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설계된 교실로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이야기 틀로, 자신들이 배운 바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삶을 살고 그분이 원하시는 성품을 실천하는 것과 연결하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카르디아(καρδία)에 가 닿는 배움, 학생들이 세상에 관해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이들이 갖춰야 할 습관을 형성하는 배움이다.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된 작은 행동은 형성적 효과를 발휘한다.

 

진리는 삶을 완전히 바꿀 만한 힘을 가졌다.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고 이 책의 내용과 같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를 통해 삶에서 추구할 가치(진리)를 배우고, 삶의 방향성의 설정함으로 먼저 나를 세우고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사회성, 다양성의 중요성을 알아 공동의 선을 추구함으로 전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

 

관계를 해치는 지식은 진짜 지식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해악을 미쳤다면 그것은 진정한 발전이 아니다. 과학이 최고의 가치가 된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과연 진리란....?”

 

우리는 곧잘 학습의 범주에 한계를 짓는다. 감성과 사랑, 침묵 등의 가치를 비과학적, 비이성적, 비상식적으로 치부하고는 교육의 테두리를 객관성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론’, ‘객관적’, ‘실재 이 단어들은 현재 우리의 교육의 지배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험 문제의 답을 위해 정보를 하나라도 더 외우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가르침을 공간의 창조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한다. 가르침은 진리를 향한 탐구이고, 여기서 진리란 인격적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앎이 아닌 을 향한 접근이다. 개인의 욕망에서 벗어나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교육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결과를 이루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위해 저자가 말한 공간의 창조가 필요하다.

 

공간의 창조는 추상적인 계념이 아니다. 삶 가운데서 물리적, 시간적 표현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혼잡한 버스 안에서, 다가오는 마감일 앞에서, 압박을 가하는 상사 밑에서 창조적 생각과 감정이 분출할 수 없듯이, 여러 지식으로 가득 채워진 머리로는 정작 중요한 진리를 담을 수 없다. 학문은 탐구의 끝이 아닌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간의 창조는 비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쌓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리 탐구의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껏 가르침은 공간을 메우는 것이라 생각해왔지만 저자는 가르침이란 비우는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백지의 상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놓여, 스스로를 비워나가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공간의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는 먼저 침묵에서 시작한다. 내 생각과 자아를 잠시 내려놓음으로 지식의 얽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또한 공간의 창조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생각, 즉 관계 안으로 상대를 초대하고, 또 반대로 상대의 자리에 내가 섬으로써 서로를 열어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함으로, 그들의 경험과 삶이 내 일부가 되는 것을 느낀다. 이렇듯 대화는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자 연결고리이다. 이로 인한 공간의 창조는 개인에게 있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교훈을 남긴다. 관계 속에서 진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덕을 가르치는 교사다 되려면, 내가 먼저 덕을 갖춘 교사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을 형성적 교육으로 초대하기 원한다면, 나 역시 독립과 자율, 자기 충족성이라는 신화를 다 버리고 나 자신의 형성이 절대로 최종적이지 않다고 인정해야 한다. 덕은 일회적 성취가 아니다.

 

형성적 교사가 되기 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헌신 중의 하나는, 형성적 기독교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몸이 행하는 화해의 실천에 몰입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 예배라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교사로서의 그 다음의 헌신은, 본회퍼의 말처럼 교수진이 공동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실천 덕목은 다음과 같다.

 함께 식사하라

 함께 기도하라

 함께 노래하라

 함께 생각하고 독서하라

 

교사로서의 또 다른 헌신은 학생들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다. 덕을 가르치는 교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예전적 패러다임이 교육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정보 전파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통전적인 형성을 강조할 때, 더 넓은 시야에서 교육을 바라볼 필요를 느낀다. 어떤 목적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는지,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중요하지만, ‘ 우리는 학생들이 배우기 원하는지도 중요하다. 학생들이 목적론적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특히 대학 수준에서 통전적, 형성적 교육 기획의 일부다.

 

예전적 패러다임에서는 교육의 함의에 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이는 단순히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질문이 아니고, 텔로스(τέλος)에 관한 궁극적 목적, 즉 우리의 사랑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배움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세상이 어떤 곳이 되기를 원하시는지에 관한 더 광범위한 전망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교육에는 텔로스(τέλος)가 있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이러한 통전적이며 형성적인 접근 방식은 목적론적 관점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배움을 이끌고 지배하는 더 큰 전망과 궁극적 이야기 안에 자리 잡게 하는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가 배움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형성적이어서, 더 광범위하고 궁극적인 전망을 강화할 수 있다. 모든 실천 공동체는 그 전망에 이르는 관문이 있으며, 그런 공동체 내의 모든 공간은 함께 하는 일을 설정하는 나름의 작은 축소판 관문이 있다.

 

틀을 잡는 의례는 예배의 실천을 확장할 수 있고, 우리의 배움을 교회 선교의 확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기독교 고등교육의 책무를 복음이야기 안에 자리 잡게 할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을 하나님 나라-텔로스라는 궁극적 맥락에 자리 잡게 하려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정보 차원만이 아니라 형성차원에서도 재연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미시적 차원에서 이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데, 틀을 잡는 실천의 중요성은 어떻게 예배 실천이 강의실과 실험실, 다른 배움의 공간을 성화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고등교육이 지혜의 추구라면 가르침과 배움을 기도 훈련에 복종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틀을 잡는 기도가 지혜와 조명, 공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강의실이 더 넓은 세상 속에 자리 잡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마음으로 배운다. 마음이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 당신은 원하는 바를 만든다  소명의 예전

 

성경의 창조교리는 우리의 과거에 관한 진술일 뿐만 아니라 미래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에 살고 있다. 창조세계는 하나님께 불쾌하고 유감스러운 실수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창조세계에 관한 한 하나님보다 더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창조세계를 악한 자 안에 처한 세상으로만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들은 탈출구만 준비되면 기꺼이 창조세계를 버리려고 하며, 하나님도 창조세계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육신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주의 창조주가 우리 동네로 찾아오신다.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내려오셨다. 하나님의 차창조세계가 훼손되고 망가졌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하시는 중이다.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르심임을 깨닫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들을 귀와 볼 눈을 주셨으므로 창조세계는 우리를 부르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방이요, 초대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책무이자 사명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지구의 자원과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능력을 부여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변자이자 대리인 역할을 해야 할 인간의 왕적 직분이나 부르심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돌볼 책임이 맡겨졌다. 이 책임에는 창조세계를 가꾸고 무언가를 만드는 일 곧 문화를 통해 그 잠재력을 펼쳐야 할 책무도 포함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는 것에는 인간의 사회문화적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공동체적 실천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고 확장하는 일도 포함된다.

 

또한 우리는 창조세계의 잠재력을 펼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의 책무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땅을 가꾸는 것,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세계에 두시고, 그분이 창조세계 안에 접어 넣어두셨던 잠재력을 꺼내고 펼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바로 그 일을 위임하셨다.

 

이를 위해서는 규범이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세계에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계시하셨다.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욕망-이 나라의 이미지에 묘사된 샬롬과 번영-은 어떻게 우리가 창조세계의 잠재력을 펼쳐야 하는지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의 욕망과 일치하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형성의 문제다.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창조신학에서는 창조세계가 선하고 문화를 만들려는 우리의 충동이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철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세계를 차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어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하고 우리가 더 이상 에덴동산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들은 창조세계를 차지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세상에 알리는 특별한 사람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장차 올 나라의 증인이 되어, 세상이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고 중언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과 실천은 오고 있는 새 도성의 맛보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의와 비판이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루려는 바는 쇼를 하거나 문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신실하게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신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창조세계를 차지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하려면 정기적으로 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교회에 나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도록 창조되었지만, 만드는 존재인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바로 당신이며 당신이 원하는 바를 만든다면, 신실한 창조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 즉 지배하는 이야기들의 저장소를 잘 돌보아야 한다. 당신이 예배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고, 따라서 당신이 만드는 바와 당신이 일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회복이라는 문화적 과업을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 좋은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을 다르게 상상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듣고 있는 현상 유지를 위한 이야기들을 간파해 내고 장차 올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에너지와 새로운 전략, 새로운 주도력, 새로운 조직, 심지어 새로운 기관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로잡기 원한다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그런 행동을 촉진하는 기관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적 노력이 회복을 이루려면,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우리에게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을 흡수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혁신과 발명과 창의성은 세상이 창조된 목적,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예언자들이 흔히 샬롬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으로 흠뻑 적셔져야 한다. 정의와 샬롬을 위한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만물을 자신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정기적으로 몰입해야 한다.

 

이런 몰입은 예배 곧 우리가 뼛속까지 가라앉고 무의식으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그이야기를 담아내는 목적 지향적이며 역사적이고 예전적인 형식의 예배에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제한적이며 규율이 없는 교회의 재발명은 우리가 혁신적이며 회복을 이루는 문화 만들기를 수행할 능력을 오히려 약화시킨다.

 

기존 상황을 더 나은 상황으로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일련의 행동을 생각해 내는 사람은 누구나 디자이너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인간이 지닌 기술의 가장 순수한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디자인은 세상에 관한 진리를 말한다. 문화 만들기는 이처럼 진리를 말하고 생명을 주는 디자인 행위다.

 

인간은 디자인하도록 창조되었다. 복음도 디자인 프로젝트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은 인류가 해방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창조세계에 대한 디자인 작업을 받아들이고, 창조세계의 디자이너로서 우리가 맡은 사명과 받은 위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기독교 예배가 디자인 작업실이다. 교회의 사명은 기존 상황을 더 나은 상황으로 바꾸겠다는 목표로 행동하는 혁신가와 디자이너들을 세상으로 보냐는 것이다. 혁신하고 회복하고 만들고 디자인하는 이들에게도 상상력의 저장고, “온 세상에 대한 참된 이야기에 맞춰 우리의 상상력과 습관을 바로잡는 공간인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시는 하나님 이야기 안에 정서적으로 몰입함으로써 회복되고 재조정되고 재정렬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목적 지향적이며 역사적인 기독교 예배에서 이뤄진다. 우리에게는 기독교 예배가 상상력의 저장소임을 이해하는 목회자와 사제와 예배 인도자와 교사와 청소년 사역자와 대학 교수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이 중요하다. 달리 말하자면, 기독교의 예전적 전통을 문화적 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가 공동선을 위해 문화에 참여하는 회복하는 일꾼을 파송하고자 한다면, 복음이라는 독특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실천, 풍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배의 실천을 회복하고 기억해 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전적 전통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문화 만들기라는 혁신적인 회복을 이루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상상력이 다가올 왕국을 지향하게 만드는 예전적인 전통에 참여해야 한다. 기독교적 상상력을 함양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발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교회를 재발명하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재창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 이야기의 바깥에서 우리 자신만 재발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혁신을 위한 토대는 예전적 전통이다.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습관을 형성하시고 상상력을 재형성하시고 마음을 변화시키시느냐가 관건이다. 우리의 무의식이 이처럼 근원적으로 형성될 때에만 장차 올 왕국을 지향하는 신실한 혁신과 문화적 창조가 참으로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을 직시하게 되자, 우리 모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바라는 제도들, 특히 교회 안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우리에게 부과한 속박에 대해 분노할 때도 있다. 그러기에 이런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곧 백지 상태에서 그 조직을 다시 상상하는 것을 꿈꾸곤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자유롭게 우리의 사명과 이상을 추진할 수 있을 텐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속박은 우리를 자꾸만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무거운 닻과 같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런 속박을 선물로 상상해 볼 수는 없을까? 전해져 내려온 전통의 속박을 창의성과 상상력을 위한 촉매제로 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적인 예전적 전통의 권위와 유산도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종의 해방시키는 제약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도 교회의 예배라는 전통과 영적 훈련의 리듬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제약이라는 선물 안에서 가장 번성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전에서 해방을 발견하고 전례를 통해 갱신에 이를 수도 있다.

 

여기서 나는 저명한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의 말에 감탄하며 기록해 본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철학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우리는 그저 우연히 그리스도인일 뿐인 철학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함, 독립성,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을 지닌 채 우리의 계획을 추구해야 한다.”

 

플랜팅가의 전망은 모든 소명과 직업에 적용된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철학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기독교 철학에 대한 전망에 사로잡혔다.

 

철학은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개념 자체에 관해 상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때보다 수 세기 앞서 산 그리스 철학자였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첫 번째 철학적 논증을 제시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하도록 미시는분일 뿐만 아니라 자신 쪽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분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사랑받음으로서의 운동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추동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유인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를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명에 관한 기독교적 이해에 중요한 점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저 우리가 하는 일을 사라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향해 우리의 일을 끌어당기시는 전망을 우리에게 제공하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한 또 다른 통찰은, 덕이란 실천이 필요한 습관이라는 것이다. 습관이란 우리 성품의 일부가 된 습득된 성향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천과 반복을 통해서, 말하자면 의례를 통해서 그런 습관을 습득한다.

 

사랑이 궁극적인 덕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사랑으로 옷 입어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랑은 실천과 반복을 통해 자라는 사랑이며, 우리가 소명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성품에 스며들게 하고 그 사랑을 우리의 사고방식뿐 아니라 우리 본성의 일부로 만드는 의례와 리듬과 실천에 몰입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주중에 하는 일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예배 의례는 우리 마음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하게 한다. 따라서 예배를 마치고 일터로 보냄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을 향한 습관으로 형성된 지향성을 지닌 채 우리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명의 예전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좋은 의례라는 선물을 주시어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연습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예배는 보냄으로 마무리 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신 대로 그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기 위해 재창조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화해의 대사(大使)로 그분의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을 위해 우리 이웃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사랑의 질서를 잡아주시고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다시 그분께 향하게 하신다. 성령은 혁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사랑의 습관을 재형성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다.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텔로스(τέλος)는 우리를 우리의 시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보냄을 받기 위해 창조되었다.

 

정교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은 예배에 대해 성찰하면서 거룩한 회귀를 잘 포착해 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예배하는 인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교회는 삶의 궁극적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계시 받고 그것을 받아들인 이들의 회합이다. 이러한 받아들임은 아멘이라는 응답을 통해 표현된다. “아멘은 우리도 성부를 향해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따라 올라갈 것이며, 이것을 목적으로 삼겠다는 교회의 동의를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아멘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아멘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아멘이다. 인류의 운명은 바로 이 아멘에 의해 결정된다. 이 아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배의 잔치자리로 가자!!! 그곳에서 성령으로 새로워지고 새로운 습관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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