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마음의 길』에서 저자는 특히 향심기도 수련이 그리스도교의 고전적 관상 전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고, 그 방법론의 차이점들을 지적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이 책은 향심기도의 신학과 심리학을 자세히 해명함으로써, 아직까지 향심기도와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주류 교회들과 신학교들 사이의 대화를 촉구한다. 특히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는다’(마태 16:25)는 말씀에 대해 그리스도교 관상전통과 현대 심리학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저 밖에 계신 하느님 대신에 우리들과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을 어떻게 예배할 수 있는지, 우리들의 애착과 혐오를 조종하는 무의식적 상처들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를 해명한다.
이 책의 내용과, 종교철학 수업 중에 장왕식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도 곁들여 기록해 보련다.
책 속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혹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또는 가장 적절한 것으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가장 긴급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의 전적인 변형을 중시하는 종교 중 하나이다.
비슷하게 불자들은 이것을 '원숭이 마음'monkey mind[역자주-心猿意馬에서 온 말로 번뇌로 인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생각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원숭이와 말에 비유한 것]이라고 부른다. 그 작은 짐승이 우리가 가진 것 전부를 취하려고, 한 나뭇가지에서 다른 나뭇가지로 점프한다. 주체/객체라는 양극성을 통해 만들어진 '자기'에 대한 안정적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내면의 혼돈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주위를 소용돌이치는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자기반성적인 '나'는 지속적으로 자기와 관련된 질문을 함으로써 아주 견고하게 세워진다. 가령 세상을 조사하고 측정하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여기서는 안전한가?" "그녀는 뭐라고 한 것이었을까?" "나는 괜찮은가?"
'일상적 알아차림'의 또 다른 이름은 '에고적 사고'egoic thinking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정상적인 기능 영역normal functioning zone이다. 당신이 박사이든, 주교이든, 핵물리학자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성적인지 혹은 얼마나 경건한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별한 영적 훈련이 없어도, 세상에 대한 지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각은 이 알아차림의 수준에서 형성될 것이다.
서방 그리스도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다."로 시작하였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당연히 역사를 뛰어넘는 그러한 거대한 도약은 퍼즐의 중요한 조각들을 무시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에서 그리스도교 구도자들은 말씀과 침묵의 기본적인 관상 리듬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직관적으로 노력함으로써 헌신적이고 신비적인 운동이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퀘이커교는 그러한 운동의 일환인데, 앞서 말했듯이, 내가 관상기도를 처음 접한 것도 퀘이커교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있었던 관상적 재각성이 현대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자랐던 사람들에게 '혁명'과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수련 자체가 그 본디의 정박장에서 얼마나 멀리 가버렸는지를 증명해준다.
'저기 밖에'out there 계신 하느님, 즉 스콜라주의와 뉴턴식 세계관의 하느님 이해는 관상 경험 자체에 의해 철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의 동굴로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은 살아계시며 모든 것 안에 스며들어 있고 모든 것을 비추고 계시며 모든 것을 불타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 자신의 마음은 거룩한 삼위일체 마음의 홀로그램이며, 활동 중에 있는 사랑이고, 따라서 유한과 무한의 영역은 상호 갈망이라는 깨지지 않는 유대에 의해 연결된다. '여기 안에'in here라는 식의 신관은 예수님과 신비가가 보는 신관神觀에만 가까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과학적 이해의 발견에 의해서도 점차로 확증된다. 잘 알려진 성공회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bara Brown Taylor는 양자물리학을 알게 되면서 생긴 그녀의 하느님 이미지의 급진적인 전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은 사방 도처에 계신다. 하느님은 위에도 아래에도 나의 피부 안과 밖에도 계신다. 하느님은 망web이며, 에너지이며, 공간이고 빛이시지만,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으신다. 마치 이 가운데 어떤 개념도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진짜인 것처럼, 오히려 거기 있는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단일하고 광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드러나 계신다.
"복음은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다. 복음은 그 안에 관상적 차원을 가진다. 이 차원은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초대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바로 그 본성을 나누고자 하시는 초대인 것이다. 그것은 귀로, 눈으로, 마음으로 듣는 방법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란다. 이는 자기의 죽음으로써 혹은 자기를 비움으로써 가능해지는데, 이로써 하느님을 향한 철저한 비움과 하느님의 사랑의 경험이 일어난다. 우리가 관상기도라고 부르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방식을 통해,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하느님 본성의 이 역동적 나눔은 각 인격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명을 그들에게 개방한다. 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에너지의 도구가 되라고 그들을 도전하면서 말이다. 이 관상적 의식은 각 인격을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그리고 모든 다른 인격들과의 일치 안에 묶어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일들 속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향심기도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드리고, 내어 맡겨 드리는 기도이다. 향심기도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그 하느님을 향한 지향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끊임없이 생각을 내려놓음을 통해 예수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을 실천하는 것이다. ‘케노시스’는 바로 이 기도의 정신이며, 중심적인 신학이다. 향심기도를 통해 끊임없는 자기 비움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은총으로 우리의 의식이 깊어지고, 무지의 구름을 넘어계시는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며,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삶(reality)을 살아가게 된다.
본질적으로, 향심기도는 정신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분주하게 된 어른들을 내적인 삶을 행한 자연스런 경향 곧 어린 시절의 단순성에 다시 연결시켜 주기 위한 간단한 방법이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의자나 기도 걸상 혹은 매트 위에 앉아,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현존하고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되,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들을 그저 지나가게 하고, 그 깊은 곳을 향해 개방적이며 고요한 주의를 두는 것에로 돌아가면 된다. 생각을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흘러가게 놓아두기 위해, ‘평화’, ‘잠잠하라’, 예수님이 하나님을 가리켜 불렀던 ‘압바’(abba)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것을 20분 동안, 더 원하면 원하는 만큼 길게 가지고 가면 된다. 그런 다음에 일어나 삶의 자리로 옮겨가면 된다.
가슴 챙김을 통해 우리 기독교 공동체에 조화, 위엄, 깊이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 챙김을 하는 동안에 침묵의 깊은 곳에서 내면의 재배열, 내면의 깨어나기가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내면의 소음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내면은 끊임없이 말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과 논쟁하고, 백일몽을 꾸고, 공상에 빠져 들어간다. 가슴 챙김이란 바로, 우리 존재의 더 깊은 곳, 다시 말해 우리의 생명이 신적 생명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와 다시 흘러들어가는 그 곳과 만나기 위해서, 내면의 말을 누그러뜨리는 내부의 점멸 스위치 같은 것이다.
인간 존재로서 우리는 소위 '자기 반성적 의식'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은 자신을 자기 밖에 세워두고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살펴보는 능력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 4:18b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가장 진정성 있는 자기이해의 핵심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진정성과 능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중에 발견하게 된 것은 가슴 챙김의 수련 없이는 “완전한 사랑”의 수준에 도달하고 지속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풍성함을 경험하려면 먼저 영적 알아차림에 깊이 관여되어야 한다.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에 그칠 경우 늘 스스로를 저버리고 자기 방어와 자기 합리화라는 평소의 자세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들을 멈추는 것이 아닌, 단순히 그 생각들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개발하는 것...
우리는 가슴 챙김(향심기도)을 통해, 어떤 생각에도 저항하지 말고, 어떤 생각도 간직하지 말고, 어떤 생각에도 반응하지 말고, 거룩하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혼잣말, 내적 대화, 두려움, 욕구, 필요, 선호, 백일몽, 환상들을 가게 놓아두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다만 '생각들'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가게 놓아두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줄곧 그것과 더불어 머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의 경향성에서 손을 떼면서, 단순히 더 깊은 살아있음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가슴 챙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위한 작은 리허설을 경험할 수 있다. 에고가 더 이상 우리를 붙잡지 못하도록 하는 때가 온다. 그러면 우리의 정체성은 존재 자체의 자비에 맡겨진다. 이것이 '자신의 목숨을 잃는' 실존적인 경험이다.
... 우리가 에고 중심적 자기에서 하늘나라의 더 높은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 깨어나기, 즉 영적 알아차림으로의 전환을 이룰 때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작은 자기에서 더 큰 자기로 옮겨가기 위해, 가슴 챙김을 하는 동안, 분노, 두려움, 혹은 자기를 정당화하는 생각들이 일어날 때, 만트라를 읊조리는 것이든 내적 주시를 하는 것이든 가게 놓아두는 것이든, 우리의 수련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애착하는 것, 즉 즉각 우리를 더 작은 자기로 다시 끌고 가버리는 것을 피하는 법을 가르치며, 알아차림의 더 깊은 수준과 연결시켜 준다.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수련하면 명상으로(향심기도로) 만들어진 이런 기술들은 '진정한 삶'으로 이동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는 실제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나 우물가의 여일이나 탕자의 비유에서의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살기 시작한다.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 디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상적 알아차림에서 영적 알아차림으로의 이행을 수반한다는 것을, 진정한 삶은 명상을 통해서 점차 우리 안에 깊이 배어들게 한다.
토마스 머튼을 비롯한 수많은 영성 작가들의 글 속에서 에고는 그 자체로 거짓 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 자기란 에고 자체를 자신의 온 전체(whole)인 양 혼동한 부분이며, 신적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무시한 채 그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만들어낸 부분이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자신의 가르침에 그 용어를 가져다 쓰면서 매우 의미심장하고 미묘한 차이를 덧붙인다. 그의 가르침에서, 거짓 자기는 항상 상처를 입고 있다. 그것은 특별히 유아기나 초기 아동기 동안에(심지어 모태에서도) 지각된 위협과 박탈에 대항하는 방어기제로 생겨난다. 그는 '에너지 센터'라고 부르는 곳에서 어떻게 거짓 자기가 생겨나는지를 추적한다. 에너지 센터란 안전/생존, 존중/애정, 힘/통제라는 세 가지 영역 가운데 있는 상처들을 말한다. 이런 상처들은 결과적으로 애착(사람이 안전과 지지를 느끼기 위해 자신의 삶에서 요구하는 일들)과 혐오(사람을 격발시키는 일들)라는 소용돌이에 시동을 걸게 된다. 거짓 자기는 그 자체로 신경증적이며,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 뿌리는 궁극적으로 애정 어린 앵육이 불충분한 데 있기 때문에, 거짓 자기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예방할 수 있는 실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만일 거짓 자기가 에고 존재의 왜곡된 표현으로 정의된다면, 참자기는 그 왜곡과 방어가 치유된 에고, 아니면 건강한 에고일 것이라고 추론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에고의 초월에서 비롯한 '은총 위의 은총'과 신경증상의 완화에서 비롯한 '건강'의 의미가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건강한 에고를 참자기로 오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건강한 에고가 참자기로 진전되지는 않는다.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에고는 여전히 에고이며, 어쩔 수 없이 저급하고 일시적인 이기심의 영역에 묶여 있다.
중세 영성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시메온(949-1022)은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의식적인 현존의 차원을 주장한다.
정신이 영적인 알아차림이라는 더 깊은 샘물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마음 안에' 있을 때만 위선과 탈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 수 있다. 복음은 염려와 두려움에 지배 받는 에고의 능력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개방과 자비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깊은 물(마음 안)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에 주의를 두라고 권면한다.
마음의 주의(attention of the heart) : 다른 모든 것 이전에 세 가지를 준수해야 한다... 악하고 헛된 것에 관한 염려뿐만 아니라 좋은 일에 대한 염려 등 모든 염려에서부터 자유해야 한다. 양심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깨끗해야 한다. 그리고 정욕적인 애착을 완전히 비워야 한다. 그래서 생각이 세상적인 어떤 것에도 기울어지지 않아야 한다.
영적 생활의 가장 큰 절실한 것, 즉 마음의 주의는 감정이나 정신의 집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악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에 기울어지는 것도)을 단순히 내려놓음으로 성취된다.
장왕식 曰, "하나님을 향해 먼저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한다. 내 마음의 욕망을 먼저 버린다. (ex) 면벽 기도, 침묵 수행(언어는 대상과 만나고 묶여서 자아 활동을 유발하게 되고 관계를 맺음으로 자아(ego)가 활동하게 된다. 침묵 수행을 하는 것은 무념 무상을 갖기 위해 자아(ego)가 발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이야기(ego, self story)는 순간순간 사건에 있었던 만났던 사람과 사건,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풀면 story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압축시키면 자기 주체가 되는 것이다. story란 생각에 대한 해석, 이미지화(picturlization)라고 할 수 있는데, story를 풀어놓은 것이 나의 이야기(story)이고, 압축한 것이 주체적인 '나'인 것이다.
무념, 무상이란 생각, 이미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게 하는 것
무의식에 film & 그림이 담겨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정신분석이다.
시메온은 축어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두지 않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없고 따라서 하느님도 볼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두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할 수 없으며, 눈물을 흘리며 통회할 수도 없고, 부드럽거나 유순할 수도 없으며, 주리고 목마를 수 없고, 자비로울 수도 없고, 평화를 이룰 수도 없으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도 없다."
▸유념 기도 :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입술로 부르짖기도 하는 기도 어떤 면에서 모든 기도는 유념 기도이다.
▸무념 기도 :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없애는 기도. 떠오르는 생각을 잡지 않고 놓아주는 것.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pass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도 실행도 어렵다.
원죄의식에 머물러 있으면, 어느 누구도 거짓 자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아추구를 하는 이상 거짓자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향심 기도는 하나님의식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에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승복하는 방법들은 마음의 순결함을 목표로 한다. 그 방법들은 정념을 내려놓고 의지를 느슨하게 풀어놓는 방법에 의해 거기에 도달한다.
현대 영적 교사 중의 한 사람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에고를 '주시되지 않은 마음'으로 간결하게 정의한다. 그가 보기에, 에고를 에고로 만드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에고 자체를 떼어놓을 수 없는 그 무능력이며, 그 내면의 심리극 안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마는 그 성향이다. 내면 작업의 전통적인 언어에 따라, 그는 이 의식의 수준을 무의식, 혹은 깨어 있는 잠과 같다고 본다.
에크하르트 톨레 曰, "아시다시피, 당신은 잠자는 동안 꿈을 꾸지 않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를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비슷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어 있을 때라도 일상적인 무의식과 깊은 무의식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일상적인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생각 추이와 감정, 자신의 반응, 욕망, 혐오에 동화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그런 상태로 지낸다. 그 때 사람들은 에고의 마음에 의해 움직이며, 그렇게 되면 존재자(Being)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영적 교사들은 내적 관찰자를 그들이 현존이라고 부르는 상태, 혹은 다른 말로, 존재자(Being) 자체의 능동적인 알아차림과 연결시킨다. 톨레가 말한 “반응, 욕망, 혐오”라는 의식의 내용물에 빠져버리기보다, 의식의 場에, 말하자면 강을 따라 흘러가는 배보다는 강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배운다. 이런 동시적인 알아차림으로부터, 더 이상 한때의 충동이나 정서적 반응과 같지 않은, 존재 자체에 깊이 뿌리 내린 “나”라는 온전한 새로운 감각이 나타난다. 그 내적 관찰자는 이 '나'라는 온전한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에고적인 자각과 더 깊은 자기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내적 관찰자의 뚜렷한 특징은 동일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내용물을 움켜잡지 않고 혹은 그 과정을 단독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진행되는 바를 주시할 수 있다. 보통의 심리학적 관점에서,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나는 너에게 정말 화나." 또는 "나는 지금 슬퍼."와 같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은 분명하지만 분리가 없다. 즉 완전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문제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교정하는 것이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면 작업에서 그 목표는 감정과 나 자신의 더 깊은 자아의식 사이에 어떤 공간을 늘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매우 화나게 만든다", 또는 "그것은 슬픈 감정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면서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의식으로서의 나 자신은 분위기, 느낌, 의ㅡ제라고 하는 지나가는 소동보다 훨씬 더 깊고 견고하다.
영적 작업에서 이런 상태를 지칭하는 고전적인 명칭은 '이중의식'이다. 이는 의식의 내용물과 場 자체 둘 다에, 아무 편견 없이, 동시적으로 현존하는 능력을 뜻한다. 생각이 올라오면 언제나 그것을 가게 놓아두라는 지침을 가지고 작업함으로써 생각이 올라올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신비스러운 '선택자'는 내 존재의 중심에서 훨씬 더 깊고 확고한 의지로부터 나와야 한다. 내적 관찰자와의 작업은 단순히 이 핵심적인 통찰을 일상생활로 확장한다.
내적 관찰자는 내 안에 있는 두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있다. 그것은 나의 작은 자아를 더 큰 자아로 구제하는 길이 아니며, 내 존재의 수직축을 위하여 수평축을 빠져 나오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두 축의 교점에서 사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 목적은 두 축을 의미심장하게 조정하는 것이다.
내적 관찰자의 임무는, 편견 없이, 의식의 내용물과 場 자체 둘 다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깨어나기의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평소의 관념에 중요한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보통, 영적 깨어나기의 목표는 하부 자기 혹은 에고 자기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것이며, 상부 자기로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젹 깨어나기가 정말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의도하는 것은 그 둘의 결혼이다. 그래서 본질적인 독특함을 가진 하부와 초개인적 빛남을 가진 상부가 참된 개성으로 합치는 것이다.
목격하는 현존은, 우리로 하여금 전모를 보게 하고 전모에 존재하게 하면서, 자비심을 가지고 두 방향 모두를 본다. 그 주된 기능이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격자는 분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목격자의 진정한 기능은 나를 현존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물러나와 존재의 온전한 체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세차게 흐르는 "나다(I am)"가 나에게도 세차게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그것의 목적은 나를 무조건적인 현존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어떤 육체적이거나 정서적 상태도 나를 현존에서 떼어낼 힘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 뿐만 아니라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부정적인 정서를 긍정적인 정서로 대체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적 혹은 외적 폭풍우가 나를 괴롭히든 말든 상관없이 현존은 유지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가 두려움과 분노, 비애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갈망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이 실제적인 내적 맥박으로 끊임없이 인식되는 상태에 머물며, 있는 그대로의 삶의 외양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내 깊은 곳에서 존재자가 여전히 든든하게 붙잡고 있음을 발견한다.
내 안의 주시하는 힘이 있음을 감지하고, 내가 지금 겪는 신체적인 고통, 정서적인 동요 모두 느껴지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라. 아무것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현재에 머물기만 하라. 여기서 명심할 것은 자신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분석은 곧바로 에고로 자기 자신을 떨어지게 한다. 반면에 느껴지는 감각에 머물게 되면, 나의 내적 관찰자에 맞추어 조정될 것이다.
에너지를 내 몸 감각을 통해 신체적으로 알아차리게 될 때, 그에 따른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환영하는 단계를 가져야 한다. 신체적인 진통이든 정서적인 아픔이든 몰아치지 말고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만약 이 거슬리고 요동치는 감정 때문에 훈련이 필요한 것이라면, 왜 그런 감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떼어내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루기 힘든 정서적인 고통을 제거하는 대신 그것을 환영함으로써 내적 환대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거기서 자신을 방어하려 했고 도망치려 했던 것을 껴안음으로서 실제로 그것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를 더 작은 자기 안으로 몰아넣은 그 힘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 순간은 언제나 견딜 수 있고, 환영의 행위는 우리를 현재에 굳건히 정박시킨다. 무조건적인 현존의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은 작은 자기는 내적 관찰자에게 자리를 넘겨주는데, 내적 관찰자는 나를 내적 맥박과 계속 연결되게 한다. 그리고 매번 나를 향하여 흘러들어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윤곽 속에서 신체적이거나 심리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현재 안에 현존하여 머물 수 있다. 그런 다음 감정 등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할 때 부드럽게 작별을 고하면서 가게 놓아두라. “나는 이 분노를 이 두려움을 가게 놓아둡니다.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라고 말해도 좋다.
현대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보통 '회개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메타노이아라는 단어가 실은 '마음을 넘어선다' 혹은 '더 큰 마음으로 들어간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 중심에 존재자가 계시며, 이 안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유지되고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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