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마 22:32
마 22 : 23-33 /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할렐루야!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꽃들이 아름답게 개화하는 이 봄에 예배의 자리에 오신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날이 완전히 풀려서 이제는 반팔,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분들도 많더라구요. 오늘은 비가 와서 약간 흐리긴 했지만 그래도 날씨가 꽤나 따스해진 걸 보니 부활절 예배 중 마지막에 불렀던 '불을 내려주소서' 찬양이 아주 효과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모든 예배가 귀하고 소중하지만, 특별히 지난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며 느꼈던 감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가상칠언과 찬양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영광을 목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함께 나누었죠. 한 성도님께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며 예배가 마치 축제 같다고 표현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예수님을 만난 후 우리의 삶은 축제가 되었습니다. 놀람과 경탄이 따르는 삶입니다. 이전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부활절 예배를 통해 정보로서의 지식을 넘어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잠시 출타하신 목사님을 대신하여 3일 간의 새벽기도를 진행하면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미 예언하신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 놀라운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데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된 모습과 인간 스스로는 의로움에 나아갈 수 없음을 아시고 아주 오래 전부터 온 인류를 구원하실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그 비밀한 일을 예언하게 하셨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히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기쁨 되는 것은 그가 우리 모두를 부활의 자녀로, 살아 있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언약의 성취와 구원의 완성을 누구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깨달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귀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을 정도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부활신앙은 고전 15장에 잘 나타나있죠. 고린도전서 15장 19-22절 말씀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고전 15:19-22
19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울이 어떤 인물이었나요? 그는 출생, 교육, 학문,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평생토록 쌓아올린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부활의 전파자가 되었던 까닭은 그가 땅의 일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이 아닌 오직 나를 살아 있게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대면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실 은혜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의 삶만을 바라보며 작은 것에 분노하고, 두려워하여 파괴하는 삶이 보잘 것 없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단번의 사건으로 인해 이 귀한 깨달음을 얻고 그의 온 삶을 생명의 길로 되돌렸는데, 정작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없이 직접 듣던 어떤 이들은 결국 마지막까지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요?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모세는 만일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지요?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도 자식 없이 죽었고 셋째에서 일곱째까지 모두 그렇게 되었으며 끝내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언뜻 보기엔 공손하게 해답을 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의 의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답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를 물어 예수님의 권위를 꺾으려는 것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전 말씀인 마태복음 22장 15절로 22절에 나온 사건은 이러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속내를 보다 자세히 드러내는데요, 15절의 말씀입니다.
마 22:15 /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기 전, 먼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양자택일의 문제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던지 공격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만일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하면 당시 로마의 지배를 옹호하는 것이 될 것이요, 바치지 않는 것이 옳다하면 반역이라는 오명을 피하지 못할 터였죠. 그러나 사람의 온갖 상념들이 뒤섞인 이 질문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심으로 세금의 문제는 율법이 아닌 바로 그들의 양심에, 믿음에, 마음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다시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한방 먹이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두개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겠죠. 배경을 잠시 설명하자면 예수님 당시 유대의 여러 종파가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노선을 달리하였습니다. 먼저 구별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하였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드렸습니다. 다음으로 사두개인은 대부분 제사장 가문과 예루살렘의 권력자 등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다른 인정하지 않았고, 부활, 내세, 천사의 존재 역시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초입에도 잘 드러나지요? 마태복음 기자는 사두개인들을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라 소개하였고 또 사두개인들의 성경이 이르되가 아닌 모세가 일렀으되라고 표현하는 질문에서도 그들의 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신 소문을 듣고 이번에는 자기들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찾아갔을 것입니다. 신명기 25장에 등장하는 계대 결혼에 관한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시험할 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결혼법을 주신 가장 큰 이유는 가문과 기업, 그리고 과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계대결혼’의 한 예가 룻과 보아스 관계입니다. 남편은 죽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믿음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에 온 며느리 룻은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 보아스와 계대 결혼을 하여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에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죠. 그런데 이러한 계대 결혼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제도였습니다. 그러니 사두개인들은 질문은 율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부활을 믿는 자들을 공격하려는 심산이었죠. 만일 이 모순에 대해 명쾌히 해답을 내리지 못하면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로 말입니다. 그런데 해결이 어려워보이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처하며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의 무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 곧 생명의 근원되심과 영적인 존재들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통치하시는 권세도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의 법칙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부활 이후의 삶을 알려주셨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결혼이나 출산이 필요치 않지요. 또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새 출발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 구원과 부활을 향한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예수님은 그들의 자존심을 박살낼만한 아주 결정적인 마지막 한방을 날리십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두고 말하면서,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며 높이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직접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은 출애굽기 3장 15절을 인용하신 것인데요,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출 3:15 /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입니다. 계약은 양자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통 일반적으로는 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죽으면 계약이 성립되기 어렵죠. 언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관계가 확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끊임없이 언약을 맺으시며 심지어는 더 나아가 그 언약을 믿음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계승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대대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된 모든 사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그들의 부활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역사하셔서 이 시대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아브라함의 자손된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영원히 살아 있는 관계가 되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였지만 그 교만으로 결국 그토록 중시하던 율법을 그저 공격의 도구로 삼는 사두개인들의 비열함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길 정도로 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기까지 아무 책임도지지 않았던 부자는 마침내 자신도 죽어 음부의 고통 중에 거하게 됩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위치한 가난한 이의 배고픔조차 도와주지 못한 부자의 삶은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죽어있는 삶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살며 아무 섬김도, 겸손도, 사랑도 베풀지 못한 부자의 삶에는 아주 작은 것조차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기적은 죽음 이후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먼 미래에 죽은 다음에나 생각해야 하는 피상적인 문제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현재의 능력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권세를 믿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예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살아있는 자들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 거룩하심에 함께 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믿음의 자녀 되길 원합니다. 항상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며 함께해주세요.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상(默想, Meditation) 기도란?, 시 19:14, 금요 심야 기도회 (0) | 2024.07.06 |
---|---|
믿음이란, 히 11:1-2, 설교문 (1) | 2024.07.04 |
2024. 7. 3. 수요 기도문 (0) | 2024.07.02 |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슥 1:1~6, 스가랴 시리즈 설교(1) (0) | 2024.07.02 |
한 문장, 요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은혜로운 전도사님의 설교 (1) | 2024.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