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
갈 2:6-10
바울 사도에 의하여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반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며 바울의 가르침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 1장에서 그의 사도권과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왔음을 밝혔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바울과 함께 간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 받기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대로,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연속상에 있습니다.
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 2:6 /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력하다는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비해 바울은 무명한 자요, 보잘 것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유력한 이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어떠한 결론을 내렸습니까?
만일 거짓 선지자들이 말한 것처럼 바울의 사도권과 가르침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면 저 유력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바울 선생! 물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맞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율법을 무시하면 되겠소?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시키시오. 그리고 율법도 지키라고 말하시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더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더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전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셈입니다. 결국 바울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받은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에게라도 자기의 사도직이나 사역에 대해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할례와 같은 외적 요소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든 다 귀하게 쓰십니다.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귀하게 쓰시며,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귀하게 쓰시고, 요한은 요한대로 귀하게 쓰시며, 바울은 바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을 대할 때 외적 조건을 가지고 따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기가 쉽겠지요. 반대로 우리 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지기 쉽구요.
②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였음을 밝힙니다.
갈 2:7 /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사역을 하는 지역과 대상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전혀 다르지 않고 똑같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바울에게서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간증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사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택함을 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7절 끝에 보면 “보고”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같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180도로 완전히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본래 유대교에 열심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그토록 핍박하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여러 곳에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로 되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갈 2:8 /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바울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도 역사하신 것을 확신합니다.
갈 2:9 /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8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바울의 삶과 사역에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라는 하나님을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사역할 대상과 장소를 서로 간에 구별하기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효율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로, 지혜로운 형제로 높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쓴 편지들을 다른 성경들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 가운데의 대표자인 베드로가, 그의 서신 속에서 바울의 사도권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사도가 아니요, 그의 가르침은 잘못'이라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③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하였던 실천적인 삶의 부분입니다.
갈 2:10 /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도권을 인정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서로 간에 합의된 사항은 사역지를 서로 다르게 구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할례자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부탁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이 구제에 힘썼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형편이 되는대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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