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목적
갈 3:19-22
오늘 본문은 앞에서 계속해서 믿음과 율법을 비교하면서 율법의 단점만 지적한 바울이 진정한 ‘율법의 순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한 부분입니다.
1. 율법은 무엇이냐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주어진 것이라 말씀합니다.
갈 3:19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지금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으려하자 그에 대하여 반박하기 위해 율법의 한계에 대하여 계속 강조하며 말씀했는데, 이 설명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말씀을 ‘율법을 완전히 버리라’는 것으로 오해할까 염려되어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보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구원의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의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미 갈라디아서 2장 17-21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1) 도덕폐기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과 용서의 삶을 붙들고 나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세상 한가운데서 날마다 믿음의 자리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을 지켜보신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와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한 일들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것이 곧 그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의롭게 살려고 결단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법을 모를 때에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그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법을 알고 난 후에는 자신의 행동이 산짐승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임을 알게 되었고 양심이 찔려서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 죄를 다시 짓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과 구원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게 될 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과 무능력을 깨닫게 하고,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좋은 가르침과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고 말씀하는데, 그런데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오시면 율법이 폐기 될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율법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라는 한시적 기능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폐기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5:17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 만이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롬 2:13).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다 지키셨고,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받으심으로 대속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이 되셨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하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새로운 법’을 선포하셨는데,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자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대강령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친히 실천하셨습니다. 먼저는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고, 또한 인류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루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율법이 없어지거나 우리와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들은 더욱 힘을 내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갈 3:20 /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것은 성자이신 예수님은 성부이신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모세를 거쳐 주어진 것’인 반면, ‘언약은 제 삼자의 중보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인간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복음은 서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다’는 것은 중보자는 한쪽 편에만 속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한쪽 편만 위한 중보자는 참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세는 온전한 중보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중보자로 서야 하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의 중보자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중재자로 세우시고 ‘대속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간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이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어떤 역할도 필요하지 않은 오직 하나님만의 공로이자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자격도 요구 받음이 없이 거저 받은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사람들 앞에서도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이어지는 21절 함께 읽습니다.
갈 3:21-22 /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구원의 도구로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한 삶의 규례로서, 삶의 지침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율법은 처음부터 구원의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으려고 했기에 율법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저주를 가져다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도구이자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의 양식(form)으로 주셨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로서 율법은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을 양식임을 가슴 깊이 새기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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