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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기도', 2024. 9. 27. 금요 심야 기도회 설교

by tat tvam asi 202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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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기도'

사 40: 3-5

 

1. 진정한 부흥은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함과 정결함 없이 성도의 수만 늘어난다면 그것이 부흥일까요? 아니겠지요!

 

참된 부흥이란,

①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②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자라가며,

③ 교회 안에 돌이킴의 역사가 일어나서, 거룩함과 정결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시대는 참된 부흥의 역사가 필요한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부흥을 이루어 가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의 불을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2. 지금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사 40:3 /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 예언의 말씀은, 선포된 지 약 700년 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선포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입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는 광야에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는 말씀은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왜 하필 광야입니까? 푸른 초장이나 쉴 만한 물가나 아름다운 산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황량하고 메마르고 외로운 광야에 하나님의 길이 생긴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두운 시대를 뚫고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은 항상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선택받은 세례 요한은 당시 대제사장도 아니었고, 그가 말씀을 선포했던 곳 역시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광야에 있던 세례 요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례요한은 늘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나는 낮아져야 하겠고 예수님은 높아지셔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겸손히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한 것이지요.

 

3. 광야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만들어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게 합니다.

사 40:4 /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지형을 나타내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요? 골짜기, , 언덕, 평지와 같은 표현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주는 상징어 (語)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여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가다보면 광야를 지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때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우리 마음이 가장 열려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잘나갈 때는 자기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속에서 우리 마음에 길을 내십니다. 광야에서 우리 마음에 길이 열려야 왕이신 주님께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1)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이를 우리 마음에 적용해보면 마음의 골짜기가 깊은 상태, 즉 가난과 열등감으로 기가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열등감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제대로 헌신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오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열등감의 골짜기들을 하나님께서 다 메워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며 함께 크게 기도합시다. 자꾸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인생의 아름다운 에너지를 낭비할 뿐입니다. 나의 주도권은 내가 잡고 있어야하지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나의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이대로 충분합니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회복하는 이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개성을 가진 ‘나’는 얻고, 성취하고, 욕망하고, 축적하기에 너무나 바쁘게 살아갑니다. 반면, 우리의 참자아는 아무런 애씀 없이 주고, 나누고, 기부하고, 축복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이 참자아가 개인화 되어 인간 경험으로서 펼쳐지게 되면, 대부분은 제한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작은 나’는 주로 개인적인 문제와 일에 관심을 갖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범위를 넓혀나갑니다. 개인으로서 자선사업이나 공동체의 복지로 경계를 넓혀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 동기는 대개 자기 자신의 심리적인 만족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존재의 원형, 참자아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 이타적인 마음으로, 인정받으려는 바람을 품지 않고, 보상이나 자기 위상의 확립을 바라지도 않으며, 만나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온전하지 못한 자아의 교만을 깎는 것과도 연결되지요. 하나님을 거대한 바다에 비유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바다의 하나의 물방울이지요. 하나의 물방울로서,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어쩔 수가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면, 마치 파도가 부서지는 것처럼, 부서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그 과정이 무척 힘이 듭니다. 자아가 깨지는 것처럼 아픈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산과 언덕들을 깎아내십니다. 

3)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비례하여, 물질세계의 어둠, 곧 병, , 한계, 두려움, 불안, 무지와 같은 것들에 시달리면서 자유를 찾는 사람들이 우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개성의 탈을 벗고 영혼의 자질을 갖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개인적으로나 보편적으로 널리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됩니다.

 

영적인 깨달음으로 인해 병과 늙음실패 등 문제 많은 자아 관념을 초월하게 해줄 것입니다어디에도 매이지 않고한계 없고조화롭고 자유로운 스스로 있는’ 참자아를 드러내어 줄 것입니다이러한 참자아는 그날의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걱정하는 대신우리는 우리의 신성한 영혼으로 하여금 우리보다 앞서서 길을 예비하게 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살아가는 걸음걸음마다신성이 우리의 안전한 지킴이가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줄 것입니다.

 

4. 기도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사 40:5 /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우리는 내면의 따뜻함과 생생한 존재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신성한 확신을 느낍니다. 때로 우리는 강한 손길을 느끼거나 우리의 어깨 위에서 미소 짓고 있는 누군가를 느낍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 좋으신 영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면의 휴식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긴장에서 벗어나 평화의 기쁨 속에 잠기게 해주십니다. 사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모든 문제나 긴장에도 고요하게 존재하도록 해주는 평화 자체이십니다. 우리의 내면은 그로 인해 치유의 결과를 향유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이 내면의 존재 실상’(Truth) 자체이십니다.  우리에게 현존하는 이분은 신이시며, 파워로서, 동료로서, 빛으로서, 평화로서, 치유하는 힘으로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내적 현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 깨달음의 결과이고, 영적 의식을 배양한 결과입니다. 이 실상이 바로 우리의 병을 치유해 주는 신이고, ‘그것은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의 풍요로운 공급자로서 나타나는 부요함입니다. 큰 사랑이 현존하는 이 의식 안에서 살아갈 때,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우리의 수입이나 부를 덜어 낼 수 없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라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사야 시대에는 이것이 메시야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또 나중에 성령이 오셔서 지금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보게 될 ‘여호와의 영광’은 우리에게 몰려온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부흥의 불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은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흥의 결과로 그렇게 될 수는 있지만, 단지 숫자가 늘어났다고 부흥은 아닙니다. 부흥은 영어로 ‘revival’인데,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숨은 쉬고 있는데 생명력이 없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흥은 그러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잠자던 성도들의 영혼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주님을 처음 영접했던 때의 그 첫사랑의 감격이 회복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강렬하게 체험되고,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눈물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성령께서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시면서 우리 육신과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흥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을 체험한 개인이 변하면서, 그 가정이 변하고 교회 전체가 변하며, 지역사회가 변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도가 단순히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체질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지역 을 바꾸고, 이 도시를 바꾸고, 전 세례를 변화시키는 부흥의 물결이 흘러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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