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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9-10, 사순절 네 번째 주일 설교문

by tat tvam asi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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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9-10

 

오늘은 교회력에 의하여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간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감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순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해 보고 그를 닮아가고자 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양의 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앞서 양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양은 참으로 약한 동물입니다. 뿔도 없고, 강한 이빨도 없고, 사나운 발톱도 없고, 뱀 같은 독도 없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작은 동물에게도 잡아먹히는 약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가끔 양이 넘어져서 뒤집히기도 하는데, 뒤집힌 양은 자기 혼자 힘으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양은 죽게 됩니다.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1lMGnrzUytI&t=2s

 

게다가 양에게 부정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보수적 습관이 강한 동물이라 그냥 놔두면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길을 걸을 때 도랑이 생길 정도로 같은 길로만 갑니다. 그리고 풀을 뜯어 먹을 때도 한 자리에서만 계속 뜯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이 다니는 길에는 잡초도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리를 옮겨 다른 풀을 먹어야 하는데, 그냥 그 자리에 있기에 황폐한 땅에서 굶어 죽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그냥 싸고 먹기에 위생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마침내는 병이 들어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사람은 힘으로만 하면 정말 약한 존재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는데, 사람은 부모가 돌봐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양에게 목자가 있어야 하듯이 사람에게도 반드시 돌봐주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 속에서 사는 우리를 양에 비유했습니다.

 

사 53:6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조롱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우리는 목자가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양이 목자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듯이 '예수님이 나의 생명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 10: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셨을 때 이 문은 양들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깥쪽은 울타리를 세워 놓고, 안쪽으로는 낮은 건물에 아치형의 문을 만들어 도둑이나 맹수들로부터 양을 지키는 문입니다. 목자들은 매일 이 문을 통하여 아침에 양을 바깥으로 인도하여 내었다가 저녁이 되면 안전한 우리로 양을 모아 놓는 일을 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문이란 밖에서 안으로 들어 갈 때는 '쉼' '안전' 그리고 '보호'의 입구가 됩니다.

반대로,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새로운 출발' '위험'에 노출이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이라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I. 시작과 마무리로서의 문()

 

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삶을 시작하고 또 종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문을 통과함으로서 하루의 일을 시작합니다. 농사일을 하기 위하여 그들은 문을 나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도 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들어옴으로서 하루의 일이 비로소 종결됩니다. 이렇게 문은 삶의 시작과 종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양치는 목자에게도 문은 중요했습니다. 양들을 이른 아침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내보냅니다.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게 하고 맑은 물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시 양들을 인도하여 양의 문을 통하여 양들을 우리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때 목자는 문 옆에 서서 들어가는 양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게 됩니다. 숫자가 맞으면 비로소 목자의 일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양들과 목동에게 있어서 문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시작이며 마무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양과 목동의 삶에서 문을 통과하는 것 없이 하루의 삶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문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시작과 마무리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은 우리의 문이 되십니다그 분은 우리의 삶의 처음이며 마지막이 되십니다예수님이 우리 삶의 처음이며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척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또 예수님에 의해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목자들은 아침 일찍 문을 통하여 양들을 밖으로 내보냅니다그리고 하루 종일 들판에서 풀을 뜯게 합니다그리고 저녁이 되면 양들을 모아 문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모아들입니다저녁이 되어 양들이 문을 통과할 때 목자들은 양의 숫자를 하나씩 셉니다그렇게 함으로서 하루의 일을 평가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가치관, 그 분의 가르침으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이십니다. 그럼으로 문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시작하고 마무리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 닮기에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II. 삶의 중심으로서의 문()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문이라 하셨을 때 이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몸을 입으시고, 마굿간 말구유에 오셔서 우리에게 그의 삶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함이라 분영하게 선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로 모셔 드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구약성경 느헤미야 3장을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재건 작업을 시작하며 양문을 건축하고 성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느 3:1 /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그 문에 봉헌하고 성문을 성별하되 그 문에 봉헌하고 성문을 성별하되 그 문에 봉헌하고 성문을 성별하되

 

여기서 양문은 제사에 사용되는 양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양의 문으로 양들이 들어가면 비로서 하나님께 드릴 제사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길이 예비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 말씀하셨을 때, 양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과 섬김의 삶이 결국의 구원의 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위하여서 문이 되신 것은양들을 해하려고 하는 절도강도도둑과 같은 악한 존재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그들의 목적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그럼으로 양들이 살기 위해서는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과해서 그 안에 들어갈 때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해하려는 절도와 강도와 같은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10:8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세례 요한도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요, 구약의 참된 선지자도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에 속합니다. 그들을 절도요 강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구원의 길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은, 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담을 넘어가는 도둑이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문이 되셔서 우리 모두가 '예수'라는 문을 통하여 삶을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오늘 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하여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뛰어 넘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 교회 안에 있으면 그는 교인은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예수님의 양으로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문을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안에 들어 와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냥 도둑일 분입니다. 교인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문을 통하여 들어왔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에게 나아가면 구원을 얻는다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요 10: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백수를 누리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찾아와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요 10:10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사람들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였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서 사람들은 죄에 빠지게 되고, 그 죄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 전에 왔던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끊어 놓고, 죽음으로 멸망케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고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셔서 양들이 들어가고 나가며 꼴을 얻게 되는데 더 풍성한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에게 그 필요한 꼴을 주십니다. 꼴이라고 하는 것은 목자가 양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풀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꼴을 풍성하게 양들에게 주시면서 양들을 풍요케 하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많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함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풍성한지를 깨닫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

 

요 10:10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초장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선한 목자와 반대되는 사람이 있다면 삯군 목자입니다.

 

삯군 목자는 가짜 목자입니다그는 위기가 닥치고 이리 떼가 몰려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양들을 이용해 오직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약탈을 일삼습니다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합니다선한 목자는 양들의 수가 많고 적음을 생각지 않습니다그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남겨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섭니다.  

그러나 목자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밤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섭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목자는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이런 리더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요 10:10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즉 그 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문을 삶의 가장 중요한 위치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사순절 넷째주일을 지나가며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누리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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