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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6-28, 시편 시리즈 설교(24)

by tat tvam asi 202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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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6-28

 

오늘 본문 시편 22편은 다윗이 인생 가운데 어려운 순간을 지나가며 기록한 것인데, 아마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아니면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피난을 다녀야 했던 서글픈 시절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의 처절함으로는 아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왕궁에서 쫒겨나 맨발로 감람산을 올랐던 때 든지, 아니면 장인인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며 그 참담함을 노래한 순간에 기록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 다윗은 자신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 있음을 호소합니다.

 

시 22:1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런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고백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해 호소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마 27:45-46 /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시에 못 박히셨으니 지금 시간으로 12시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난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십니다. 가장 강렬해야 할 정오의 햇살이 가리워지며 칠흑 같은 어둠이 덮친 것입니다. 그 무서운 어둠 속에서 3시간 동안을 묵묵히 고통 받으시던 예수님은 오후 3시 침묵을 깨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저렇게 말씀하였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외치시고 그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마 27:50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다윗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아무 것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 대표적인 것이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강하고 능하시는 분', '전능하신 분'을 나타낼 때에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다하실 수 있는 분인데, 지금 자신의 처지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외국에 홀로 있을 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고 자신만만하게 집에서 나왔지만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들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합니다그런데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돼지에게 먹이는 쥐엄 열매마저도 먹을 수 없는 힘든 상황을 맞이합니다.

둘째 아들은 빈 들에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니 그곳에는 형이나 가족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품꾼들까지도 풍족한 먹을거리가 있는데 자신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굶어죽을 것 같은 지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만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듯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합니다.

 

시 22:6-8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다윗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마치 벌레를 쳐다보는 것과 같다며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할 때에 짐승에 빗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서 '개 보다 못한 인간'이라, '개 같은 인간이라' 조롱의 말을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을 보고서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씩 말을 하고 갑니다. "저 녀석이 하나님을 믿는데?", "저 녀석이 하나님, 하나님 입에 달고 살더니 꼴 좋∼∼다."

 

그런데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도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조롱했던 말과 같습니다.

 

마 27:39-42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사람들의 조롱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던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시 22:11 /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 버림받은 사람의 실상(12-21)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기댈 데가 없었던 다윗은 외부적인 환경에 대하여 하소연합니다.

 

시 22:12-13 /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이 '바산의 힘센 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합니다. 소들이 순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을 보면 들소들은 정말 거칩니다. 들소와 사자가 11로 붙으면 사자도 쉽게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들소를 먹잇감으로 잡기 위해서는 몇마리의 사자가 한꺼번에 덤빕니다. ‘바산’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인데 거칠고 포악한 소들이 자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그 소들이 입을 벌리며, 마치 부르짖는 사자와 같이 자신을 헤치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의 내부적인 몸의 처지도 한숨 쉬며 고백합니다.

 

시 22:17-18 /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뼈를 셀 수 있다'는 것은 극심한 고통으로 살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는다'는 것은 겉옷과 속옷을 다 빼앗겼기에 극도의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실제로 이런 일을 겪는 모습이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유될 정도도 자신의 처지가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제비를 뽑아 전리품으로 빼앗아 갑니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 있었던 다윗에게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시 22:24 /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하소연하던 다윗이 불현듯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 고통의 과정을 겪고 있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했기 때문이거나 버렸기 때문이 아님을 말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라는 가사가 있지요. 그런데 다윗은 고통의 한가운데서 깨닫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2:26-28 /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여기서 겸손한 사람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힘과 권력 그리고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겸손히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다윗의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받음 것 같은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마침내 상황을 반전시켜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기도란 시편 말씀을 낭독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시편 말씀을 낭독하시며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이 고백은 단순히 자신의 상황이 힘들어서 절망하는 절규가 아닙니다. 이는 다윗이 '나는 오직 주님 만을 신뢰합니다' 라는 고백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최후 승리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악의 무리들이 이제 우리가 승리하였다고 예수님을 조롱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 위하여 담대히 선포하십니다. "아니다. 하나님만이 최후 승리하신다. 주님의 영광은 반드시 악의 무리를 무찌르신다" 비록 예수님은 새벽부터 고초를 받으셨기에 이미 기운이 다 소 되어 시편 22편 첫 구절을 읊조리는 소리를 사람들이 들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편 22편의 정신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에서도 '주의 길'을 가실 수 있으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여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 세상을 저주하며 자포자기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주의 길'로 걸어갈 수 있었음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환경과 상황이 녹녹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지금 나를 포기하게끔 만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계시고 있음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마다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어제 김희선 사모의 모친이 임종하였습니다저에게는 저의 작은 누님과 장모님이 연결되어서 아내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신 고마우신 분이기도 합니다.

장모님께서 올해 1 12일에 고구마를 드시다가 기도가 막혀 뇌사상태로 계시다가 어제 2 22일에 임종하셨습니다.

 

그런데 40일의 기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크게는 치료비가 만만치 안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었고, 또 한 가지는 갑자기 뇌사 상태로 들어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다는 상황이 아내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병원을 다니며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절망과 고통을 우리 마음에 넣어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아름다움을 넣어 두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마다 그 아름다움을 꺼내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장모님 임종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였는데, 제 입에서 처남 이름은 나오는데, 아내 김희선 이름이 나오지 않고 갑자기 딸 이름만 생각이 나는 것이에요. 버벅거리다 겨우 아내 이름이 생각나 기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있던 아내가 웃더라구요.

그리고 아내가 엄마에게 이야기 하더라구요.

엄마가 중매한 최목사가 자기 아내 이름도 몰라서 버벅댄다고

물론 어머니는 임종하셨지만, 엄마와 일상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으신 우리의 가정과 일터, 삶의 자리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아름다움'을 꺼내며 살아가는 자마다, 다윗을 향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함을 바라보는 영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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