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호 14:1-9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껍데기들을 벗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감추기 위해 걸치고 있는 인간의 거짓된 위선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였지만 그들이 섬기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나님, 즉 우상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하되 죄로 인한 애통함이 없고,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고 감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부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음란한 고멜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음란한 자신들의 실체를 보게 하시기 위해 호세아 선지자를 세우고, 음란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종교적 행위라는 두터운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우리를 무너뜨리고 속 깊이 도사린 악의 모습을 끄집어내기 위해 하나님이 말씀을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있었음을 알게 하시고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인 본문도 그 결론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호 14:1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의함으로 인해 이미 엎드러진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선지자를 세워 책망하시고 고난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돌아오라는 말씀을 외면하며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고집하다가 결국 모두 패망하고 하나님에 의해 남은 자들만 겨우 돌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라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 14:2 /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2절을 보면, 믿는 자가 말씀을 가질 때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돌아갔을 때 하게 되는 말은,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있을 선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불의함을 알고 회개하는 심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침 받은 심령,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한 것입니다.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수송아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을 제물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물로 드리는 입술이란 자신의 죄를 두고 애통해 하고 회개하는 입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호 14:3 /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3절 말씀을 보면, 돌아온 자는 다시는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고 말을 타지 않겠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 고아 같은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은 앗수르와 같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있으면서도 긍휼의 고마움을 외면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힘을 얻기 위해 우상을 섬겼던 모든 것에 대해 애통해 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로서 자신의 불의함을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불의함을 바라볼 때 불의한 나에게 입혀진 긍휼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살고자 힘썼던 모든 것이 악이었음을 고백할 때 비로서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 돌아온 그는 주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불의함으로 엎드러진 자신을 일으키고 살리시고 생명에 있게 하신 능력은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알기에 주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 돌아온 신자(信者)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는 자이고, 자신의 불의함과 죽어야 함을 인정하기에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침 받아 주께 돌아온 성도가 누리는 복을 말씀합니다.
호 14:4 /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구체적으로 표현된 말씀을 보겠습니다.
호 14:5 /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호 14:6 /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호 14:7 /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이슬이 촉촉이 적셔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늘 임하여 성도의 심령을 적시므로, 그 심령이 항상 견고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며 열매를 얻게 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참된 생명의 기쁨이며 즐거움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는 성도는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호 14:8 /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의 말이" 우리의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말(불평과 원망, 감사와 찬송)로 드러닙니다. 믿음의 성숙, 신앙의 변화는 말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고침 받음으로써, "내가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주관자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알게 된 참된 지혜 있는 사람들은 삶의 열매, 해답과 만족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담대히 말하게 됩니다.
호 14:9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
호세아서는 음란한 고멜 같은 우리에게 주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그 심령이 고침 받은 자들은 이 말씀에 의해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이 불의한 자신을 살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소망했던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면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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