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위한 자유
벧전 2:11-17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할렐루야!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6월이 되었습니다. 매 월초마다 학생, 혹은 직장인들이 하는 월례행사가 있죠? 바로 이번 달 공휴일은 얼마나 되는지 따지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6월 6일 현충일이 있네요. 덕분에 6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는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물론 쉼을 얻는 것도 좋지만 현충일의 의미는 단순한 휴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죠. 현충일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을 기리는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내·외부적으로 상당한 전란을 거쳐 왔습니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정부가 수립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등 다양한 굴곡의 역사를 견뎌왔죠. 현충일을 비롯해 6.25 전쟁과 연평해전 발발까지. 대한민국을 지키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가운데 안타깝게 희생된 호국영령을 기리는 달이 바로 6월입니다.
그런데 자유와 독립이라는 이런 중요한 가치들을 기념하는 귀중한 6월에 함께 나누게 된 본문 말씀 중 약간 당황스러운 구절이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의 말씀인데요,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벧전 2: 13-14 /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오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받아서 읽는 성도들에게, 주님을 위해 사람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왕과 총독들에게도 그리 하라고 하지요. 베드로 사도가 서신을 전하게 된 이 시대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로마제국 시대로,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왕은 바로 로마의 황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교회를 파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황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종을 요구하며 그것도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압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에게도 무척이나 당황스럽기만 한 말씀입니다. 이 당혹감을 좀 가시기 위해서는 먼저 서신의 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야겠죠? 베드로전서 1장 1,2절 말씀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자신을 종이자 사도로 표현하며 소아시아 지역의 택함 받은 자들에게 편지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속제자 중 하나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 나라에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거주하며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적대 속에서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신을 보낼 때 한 가지 재미있는 호칭으로 편지를 시작하는데요, 바로 나그네라는 단어입니다. 나그네란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옮겨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정한 곳이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자이죠. 사실 그 단어가 지닌 내용으로만 따지자면 크게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닙니다. 오히려 좀 초라해 보이고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나그네라 말하고 또 지금 박해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제도에 순종하라고 이야기 하였을까요? 그것도 격려차 쓴 편지에서요! 베드로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지나온 역사와 예수님이 사신 삶에 대한 선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가장 나그네에 적합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여 주는데,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 먼 가나안으로 향하는 믿음의 여정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말이 여정이지 사실 쌩고생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고 살던 땅, 우르와 하난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번영하는 도시였고 그와 그의 가족은 그곳에서 재산과 종들을 소유하면서 큰 대상의 권세를 얻게 되었지만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믿음의 여정은 기다림과 인내의 순간들이었습니다. 나그네로서의 오랜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갔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지나온 나그네의 삶은 거칠고 척박하며 매일 간구하는 광야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믿음의 간구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길 원하셨습니다. 나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단단히 고정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들려주는 나그네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니 사도 베드로가 분명히 밝히고자 한 것은 우리의 소망이 이 땅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에 있고, 바로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약속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나그네의 정체성이 가진 것이 없어서 그저 떠돌 수밖에 없는 암울한 포로의 심정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믿음의 백성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하나님을 주라 고백하고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새 소망이 주어졌다는 선언은 상황과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외침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가르침을 이렇게만 끝내면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참고 견디는 삶이 순종인 것인가? 결코 아니죠! 하나님은 애굽에서, 그리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죄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아닌 것을 맞다하는 악의 세력 앞에서 침묵하고 굴복하는 굴욕적인 타협이 아닙니다.
앞서 나그네는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어 가장 좋은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해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이와 같은 나그네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제도에 순종하며 왕과 총독에게도 그리 하라는 말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에서 말하는 권위자를 향한 순종은 오히려 그 구절을 사이에 둔 위 아래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11절로 16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는 그의 생전에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모든 인생을 뒤집어 엎을만한 놀라운 경험을 한 차례 하였는데,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로마에 의해 처형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사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자신에게 다가온 위협 앞에서 칼을 빼들어 상대를 직접 공격하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식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신념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중 한 사람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시간을 벌어준 사이, 도망가지도 두려워 떨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피를 흘린 사람을 고쳐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었건만, 너희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이렇게 되게 하신 것은, 예언자들의 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새번역. 마태복음 26장 53-56절
예수님의 눈에는 자신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 찾아온 무장군사가 아니니라, 하나님이 언약이 성취되는 현장이 보였습니다. 제자들 및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끌려가셨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예수님은 사랑과 순종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도, 로마의 총독 앞에서도 자유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 누구보다 가장 강하셨음을, 그분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구원의 경륜을 지켜 본 후 깨닫게 된 베드로의 가르침, 곧 순종을 명하는 말씀은 약소국의 사람으로 기가 죽어서 거대한 제국인 로마를 옹호하는 발언도 아니고, 또 왕과 총독들, 및 지배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구절도 될 수 없겠죠.
순종은 하나님이 모든 질서를 세우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분과 감정, 생각에 앞서서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살피는 것이 순종이요, 선을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순종을 권력다툼으로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힘이 더 약하니까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지, 하나님한테 벌 받지 않으려면 더 잘해야 돼 등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가 아닌, 이상한 나만의 기준으로 말씀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생각 속에서 순종은 마치 자유를 억압하는 반대급부적인 무언가가 되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예언자, 선지자, 사도들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언약 백성이신 여러분께 말합니다. 순종은 침묵, 혹은 타협, 그저 견디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에 뜻에 내 발걸음을 향하겠다는 거룩한 선택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돌이켜 선을, 평화를,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그동안 순종은 자유의 반대로 안타까운 대접을 받으며 내 의견과 주장을 모두 묵살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취급되어 왔다면 반대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행동하며,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지나치게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 속에서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유를 사용하는 방식은 방종이었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며 그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부끄러운 상태이지요.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한 자유는 이기심과 뒤틀린 욕망 속에서 폭력과 억압의 행동으로 표출되어 왔습니다. 인간사 속의 수많은 전쟁과 침략, 이로 인해 고통 받고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를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이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였으나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왔으나, 로마 제국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침내 예수님을 보내사 이스라엘과 하신 언약을 성취하셨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을 놀라운 복음의 전파지로 높이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변에서 혹은 나의 삶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고난과 악의 소식에 분노하고, 애통합니다. 때로는 투쟁하거나 타협하며 상황을 넘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새 소망을 꿈꾸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역사에 참여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허락됩니다.
6월을 맞이하여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책을 읽다가 한국 감리교 역사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책 안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낭독된 3.1독립선언서의 일부가 담겨 있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성경적이라 한 부분을 발췌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개와 정신을 담아 낭독해보고자 합니다.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 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구나.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듯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새로운 소망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택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6월, 이 한 달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을, 복음을 전하시는 사당중앙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권능의 하나님,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순종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사당중앙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부드러운 얼굴과 따뜻한 말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세요. 그리하여 6월에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세요. 곧 있을 새생명전도축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서로 하나 되어 화합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도우실 것을 믿으며 항상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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