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크냐- 꼭 안아주세요
막 9:33 /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막 9:34 /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5 /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6 /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 9:37 /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보통 제가 성경을 이런 표정으로 읽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 어떤 교훈이 이 안에 담겨있을까 생각하면서 성경을 묵상하는데 이 본문은 제가 읽다가 폭소를 했어요. 소제목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뭐냐면 '누가 크냐'에요. 굉장히 직설적인 제목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3년 동안 동거동락하셨습니다. 같이 밥먹고 잠자고, 이동하고 매 순간을 함께 지내는데 그 가운데서 제자들끼리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했나 봅니다. 집에 도착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까 길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으시니까 제자들이 가만히 있습니다.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말하지면 누가 짱이냐 서로 승패를 가르는 건데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좀 아닌데 싶었나 봐요.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핀트가 서로 어긋나 본의 아닌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주제로 제자들이 서로 논쟁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요, 그 시작은 그들이 예수님을 오해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바로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동문서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권력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에게는 '못해도 한 자리씩은 돌아오겠지'라는 기대와 계산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세베대 아들의 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제자들의 예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자신이 걸어갈 길을 분명히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이 허상임을 아시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모두가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던 것을 두 형제가 입 밖으로 드러냈기 때문이죠.
제자들 중 예수님이 마실 잔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으로 얻게 될 권력에 대한 야망을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누가 크냐'라는 논쟁은 필수적이고 더없이 진지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사실 우습지만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어요. 처음에는 제자들의 토론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서로 힘 자랑하는 것처럼 유치하게 여겨졌는데, 각자 서열을 따지는 이유를 알고 나니 저 같아도 그 토론 안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것 같습니다. 내가 목소리를 더 크게 내어 내 공로를 외칠수록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잠잠하게 있을까요?
자신의 공로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남을 꺽어 누르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두 팔에 어린 아이를 안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많은 사람의 끝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어린아이를 영접한 자는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이으시며 누가 크냐의 질문에 어린 아이를 보여주심으로 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훈계하시기보다 그들에게 누가 정말 크고 첫째 된 자인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크고 첫째되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릴 위해 죽으시고, 누가 크냐는 질문에 아이를 보여주십니다.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혁명적이십니다.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은 가장 약한 듯 보이지만 가장 강하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 내에서는 과거 모든 나라가 그랬듯이 어린아이는 지금과 같은 보호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수를 세는데 여자와 아이는 개수되지 못할 정도로 주류에서 벗어나있는 존재였습니다. 힘이 약해 노동과 생산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린아이를 안아 들어 새로운 표상을 보이셨습니다. 크고 첫째 되는 것은 이처럼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과 관련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공간이라는 개념 안에 속해 있지 않듯이, 크고 첫째 된 자 역시도 그 공로의 크기로 결정지어 지지 않습니다. 크기를 재는 것은 곧 남과 나를 비교하여 누가 더 우월한지 판가름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내 이웃이요,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이상하게 제 마음을 두드리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안으시며'라는 부분이었어요. 예수님은 역시 사랑학 마스터이십니다. 서로의 심장을 맞대는 따뜻한 포옹, 안정감과 평온함을 전해주는 손길.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이런 스킨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꼬옥 안을 때 그 사람의 심장 박동, 뇌파 진동이 점차 나와 비슷해지며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는 우리 모두 예수님의 팔에 안긴 어린아이 같은 존재입니다. 작고 연약하여 섬김이 필요한 존재.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서로가 예수님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 경쟁자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으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하게 보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크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 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존재가 되기 원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전무후무한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섬김의 왕,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일으키셨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크기에 대한 집착은 갈등과 시기, 열등감 밖에는 가져올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보이신 길 위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채워줌으로 서로를 온전하게 하며 두 팔 안에 그 사랑을 가득 담는 사당중앙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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