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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당신이 우주다(YOU ARE THE UNIVERSE)'에서 말하는 '당신은 정말로 어디에서 왔는가?'

by tat tvam asi 2025.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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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경계는 시스템 자체적으로 우주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빛을 보고 솔리를 들을 운명을 타고났다. 이 능력들은 우리의 신경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음악이 고막을 진동시키고, 불꽃이 망막을 자극하면, 뇌의 특정 부분이 밝아질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마음은 뇌 속의 특정한 장소를 차지하지 않는다. 어떻게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이 실재한다거나,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한다는 걸 아는가? 

 

회의론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함, 가난, 폭력 속에서 살아간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회의론자는 질문할 것이다. 만약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완화시켜줄 수 없다면, 소위 우주와의 연결이 지구에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에 답하려면 개인의 마음과 우주의 마음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중세 기독교 유럽과 같은 운명론적 사회에서는 신이 너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개인은 삶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시대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가지 계발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이는 '의식하는 우주'라는 개념이 지금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 그런 우주는 개인의 의식 확장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변화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 변화를 이뤄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가족 · 친구 · 일· 정치 ·여가 등으로 이뤄진 세상)을 자체적으로 폐쇄된 시스템으로 생각해보라.  이 시스템 속 부품들이 잘 들어맞고 잘 돌아가서, 이 상자 바깥에 더  큰 현실이 있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이 더 큰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그 세상에서 허용된 것을 넘어서는 변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하는 우주는 우리의 일상행활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은 당신 삶의 매순간 우주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회의론적인 태도가 정상적이고 자연스로운 반응이 될 것이다. 

 

이제 반대 극단, 세상사에서 완전히 분리(초탈)된 존재를 생각해보자. 완전한 분리에 도달한 사람(말하자면 요가 수행자나 선불교 승려)은 사건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감정적으로 구속되지 않는다. 선과 악, 고통과 즐거움은 더는 더 많은 선과 적은 악, 더 많은 즐거움과 적은 고통을 바라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신경계는 무한히 유연하여, 그럴 마음이 있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그 순수하고 평화로운 정체 상태와 함께, 그런 존재를 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시스테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지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변화는 무의미하다(얻거나 잃는 게 마찬가지다). 따라서 일반인이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내려놓을 것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세상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세속적인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우주의 마음과 단절되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의 삶은 더 많은 알아차림을 추구하도록 그리고 사랑,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창조성을 통해 알아차림의 열매를 즐기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모든 존재 아래 놓여 있는 평화스러운, 치우치지 않는 무집착을 포용한다.  우주의 마음과의 연결을 충분히 활용하는 불변 속의 변화가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활력과 변화, 그리고 모든 창조가 일어나는 고요한 원천의 현실인 순수한 알아차림이 있다. 외적인 삶과 내면의 삶이 하나로 움직인다. 매일의 활동은 여전히 개인적이지만(잠에서 깨어 차룰 운전하고 일터로 가는 구체적인 행위), 현실을 만드는 의식은 우주적이다. 이것이 매우 흥미롭게 들리는 만큼, 우리는 우주적 마음과의 연결이 실제이고, 작동하며, 그런 연결 없이 사는 삶보다 낫다는 것을 여전히 증명한다. 당신이 단순히 어머니의 자궁이 아니라 순수한 알아차림의 영역에서 왔다면,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자 갈망하는 종류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주의 마음은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실재하거나 실용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원론자에게, '내' 마음은 우주의 마음과 다르다. 

 

우선 내 마음은 훨씬 작으며, 그나마도 내가 태어난 뒤 겪은 경험에만 국한된다. 하지만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포기하면,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마음은 개인적인 동시에 우주적이다. 당신이 양자진공에서 깜박거리며 들락날락거리는 한 개의 전자라고 상상해보자. 

 

하나의 입자로서 당신은 자신을 '나' 혹은 하나의 개별체인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 당신은 양자장의 활동이며, 입자가 아니라 파동의 모습을 취한 당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다른 차원, 즉 모든 사람이 우주의 활동이라는 것을 간과하는 동안, 우리는 개개인처럼 느끼는 데 익숙해 있다. 한 전자에게 옳은 것은 전자로 (그리고 다른 기본 입자들로 ) 만들어진 인간 몸 같은 구조들에게도 옳다.

 

구분되거나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현실을 직접 볼 수는 없을까? 이는 영적인 탐구처럼 들린다. 이전 시기에는 신과의 합일 또는 아트만(참나) 또는 사토리(깨달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분리 너머에 도달하는 것은 영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그 충동은 다르다. 더 높은 의식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성취하려 한다. 하지만,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이해하려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특정한 지식만이 우주의 마음이 우리의 원천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다. 우주의 마음이 우리의 근원임을 깨달으려면 확고한 지식이 필요하다. 

 

현실을 깔끔하게 다룰 수 있는 조각으로 잘게 자르는 습관은 포기하기가 힘들다. 대체로 전체론적 접근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매일의 경험은 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당신은 세포, 조직, 기관 대신에 전체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당신은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너머의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전인적 인간이 되는 어려움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일상을 살아갈 때 몸은 세포, 조직, 기관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여러 상태로 경험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꿈을 꾸거나 잠을 자는 것과는 다른 상태다. 아프다는 것은 기분이 좋은 것과는 다른 상태다. 양자역학도 비슷한 유형으로 작동한다. 파동은 입자와 다른 상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사고하는 버릇이 있어 마음과 물질이 서로 매우 다르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마음과 물질은 같은 것(의식의 장 the field of consciousness)의 다른 상태들이다. 정신적 사건들이 하나의 끊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서 화학물질을 만들어내는 뇌를 자세히 살펴보자. 

 

당신은 상태들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날 뻔해 매우 놀랐다면, 그 정신적 사건은 아드레날린 분자로 나타나고, 이는 다시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고, 근육이 긴장하는 것과 같은 물질적 변화로 나타난다. 이런 변화를 알아차릴 때, 우리는 마음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온갖 종류의 신호들이 물리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분명한 종점이 없는 탈바꿈의 여행을 한다. 생명은 탈바꿈 그 자체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또한 우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의식이 마음이나 물질  둘 중 하나로 변하는 끊임없는 탈바꿈에 속한다. 하지만 그런 언급은 우리가 의식이 무엇인지를 알 때가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내' 마음, '내' 몸, 우주 공간 속 수십억 개의 은하, 그리고 우주의 마음이 의식의 여러 상태로 모두 축소될 수 있다면, 의식이 실제로 무엇인지 단번에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명백히 다른데도 분필과 치즈가 같다고 우기는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먼저, 의식은 여러 상태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하나임에도 부구하고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자메이카의 바닷가를 꿈꾸고 있다면, 당신은 다섯 감각 모두가 관련된 소위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은 발 아래 따뜻한 모래를 느낄 수 있고 바람에 실려온 열대 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이 그저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일체wholeness에 이르는 열쇠다. 

 

두 명의 스포츠카 운전자를 상상해보자. 한 운전자의 차는 기어가 5단이고, 그는 기어를 바꾸는 데 능숙하다. 두 번째 운전자는 기어가 하나인 차를 다섯 대 가지고 있다. 그에게 차를 운전하는 것은 전체적이거나 통합적인 것이 아니다. 운전은 그가 선택한 차에 따라 달라지고 각각의 차는 하나의 기어에만 맞기 때문이다.

 

모든 기어(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전하,자기장 등과 같은 다른 물리적 특성들)가 서로 교체 가능한 우주를 뚫고 우리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모든 것을 고려하는 관점을 지닌 조직자가 있었다면, 모든 것이 양자 수프 속으로 녹아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우주의 마음이 바로 그런 조직자의 역할을 한다. 시간, 공간, 물질, 그리고 에너지는 같은 기어박스에서 관리되는데, 어떤 상태에 있을지는 운전자(의식)가 선택한다. 현실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는 여러 상호 교체 가능한 상태들로 이루어진다. 그 근원은 바로 의식이다. 

 

자신이 만들 환영(幻影)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멈추려면 제한된 마음 또한 퇴거 통지를 받아야 한다. 물론 스스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주의 마음이 대신 들어올 수 있다. 

 

본질상 마음은 활동이 아닌 다른 무언가다. 호수가 근본적으로 수면을 가로지르는 물결이 아닌 것처럼, 마음은 생각하기, 느끼기, 감지하기, 또는 상상하기라는 활동이 아니다. 호수는 잔잔한 물이고, 마음은 물결이 일지 않는 알아차림이다.  이것은 오고 가는 모든 것의 변하지 않는 배경이다. 더 이상 매달릴 어떤 정신적 사건도 없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결 같고 조용한 마음은 집처럼 된다. 당신이 진전으로 속해 있는 쉬는 장소처럼 된다.

 

그나마 정신적 사건이 없다고 마음이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어서 다행이다. 오히려, 줄곧 요구되었던 것을 정확하게 한다. 즉 상태를 바꾼다. 이 경우, 그 변화는 생각하기, 바라기, 두려워하기, 갈망하기, 그리고 기억하기(즉 분리이 경험)의 연속에서 우리가 그 속에서 단순히 의식하는, 알아차리는, 그리고 깨어 있는 (즉 전체의 경험) 상태로의 변화다. 이 변환으르 만드는 선택은 우리가 내린다. 무한하게 유연한 현실 덕에 우리는 분리의 경험을 전적으로 믿을 만한 것으로, 그리고 전체의 경험을 전적으로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두 상태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진다. 

 

분리는 어떤 느낌인가...

당신은 자신을 분리된 개인으로 본다.
당신은 에고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보다 '나, 나를, 나의 것'을 앞에 놓는다. 
당신은 강력한 자연의 힘 앞에서 무력하다.
생존의 기본은 일, 투쟁, 걱정을 요구한다.
당신은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를 애타게 바란다. 
즐거움과 고통의 계속되는 순환을 피할 수는 없다.
당신은 우울, 불안, 적대, 시기와 같은, 당신의 통제를 벗어난 정신 상태에 시달리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외부 세계는 내면의 세계를 지배한다(힘든 현실은 피할 수 없다).

 

 

진짜라는 것은 어던 느낌인가...

당신은 우주 안에 있지 않다. 우주가 당신 안에 있다.
'안에 여기'와 '바깥 저기'는 서로에 대한 거울상이다.
의식은 계속 이어지고 모든 것 속에 있다. 이것이 유일한 현실이다.
우주 속에 분리된 모든 활동은 사실 하나의 활동이다.
현실은 단지 섬세한 조정된 게 아니라 완벽하게 조정된 것이다.
당신의 목적은 당신을 우주의 창조성에 맞추는 것이다.
하고 싶은 다음 일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존재는 자유, 개방성, 그리고 장애 없음을 느낀다.
마음과 에고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아주 많은 시간 쉰다.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기에, 당신은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마음이 현실을 창조하며 지금까지도 계속 그렇게 해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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