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눅 15:24 /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부터 매주 첫 번째 금요 심야 기도회는 명화와 함께 기도하는 '명화 기도회'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주만 맛보기로 어떻게 명화와 말씀을 연결하는지를 영상으로 띄우겠습니다.
탕자의 이야기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자기에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가 전혀 타당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자신이 받은 유산을 정리해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받은 돈을 방탕하게 생활하며 모두 탕진해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파산하여,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게 됩니다. 그는 문뜩 생각하기를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은 ‘아들’ 자격이 없으니 ‘품꾼’으로 써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껴안고 기뻐하면서 그에게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신기고는 잔치를 베풉니다.
이 둘째 아들의 이야기는 탕자와 같은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품어준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렘브란트라는 유명한 화가가 돌아온 탕자를 그렸습니다. 자신의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탕자인 렘브란트’ 라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렘브란트는 탕자 같이 사치스러운 삶을 즐겼습니다. 렘브란트는 젊어서 그림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그는 곧이어 슬픔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렘브란트는 29세가 된 1635년에 어린 아들 룸바르투스를 잃습니다. 1638년에는 첫째 딸 코르넬리아를, 그리고 1640년에는 둘째 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냅니다. 그러다 렘브란트가 36세인 1642년에는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 마저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668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 마저 죽지요. 렘브란트는 홀로 남겨진 가운데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가 1년 뒤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후 홀로 남겨진 렘브란트는 자신이 죽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마치 유언처럼 ‘돌아온 탕자’를 그립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했듯이,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하나님 품에 안겨 평안과 위로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전체 그림을 보면 허름하다 못해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 속에서 아버지에게서 빛나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1) 아버지
하나는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어두운 배경에서 빛을 통해 중요한 것들을 배열하는데, 아버지의 얼굴은 그 빛의 진원지입니다. 아버지는 허름하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온 작은아들을 껴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작은아들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아픔과 좌절과 괴로움을 다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온 아들을 내려다봅니다.
다음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그림 속에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을 자세히 보면 손의 크기가 다릅니다.
왼손이 오른손보다 큰데, 왼손은 아버지의 손으로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보호(protection)’를 상징합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으로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다정한 ‘보살핌(care)’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을 두 손으로 보호하고 보살피면서, 마치 “괜찮다. 괜찮아, 아들아. 나는 네가 집에 돌아와서 너무 기쁘단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2) 탕자의 형
어디를 봐서 탕자의 형인 줄 알까요... 아버지의 빛에서 곧바로 반사되는 빛은 다른 엑스트라와는 달리, 그가 장자임을 지목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을 받고 있으며, 같은 색, 같은 스타일의 유대인 복장, 특히 이렇게 옷이 길다는 것은 상속자임을 의미합니다.
통상 일꾼의 옷은 소매와 옷자락이 짧습니다. 일을 해야 하니까요. 이를테면 창세기에서 요셉의 옷은 채색 옷이었다고 기록하는데, 그 채색 옷이란 말은 이렇게 긴 옷이란 뜻을 포함합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상속자였던 셈입니다. 그것이 형제로 하여금 모함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형이 그 긴 채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형의 말이 등장합니다.
눅 15:29-30 /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눅 15:31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런데 이 말은 모든 재산을 몽땅 큰 아들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라, ‘장자의 분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자의 분깃’이란 통상 두 배를 말합니다. 아버지가 재산 상속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성원들에게 분배를 하면서, ‘장자’에게는 두 배를 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두 배를 언제 받습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장자의 복잡한 심정이 탕자의 형의 손에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의 양손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형의 양손도 다르게 보입니다. 한 손은 어둡고, 한 손은 밝은 것이 보이시나요? 어두운 오른손이 왼쪽의 밝은 손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활짝 반기는 양손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은 받았지만, 자신의 그 빛나는 손을 짓누르는 어두운 손(그 이중의 손)을 통해, 내면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와 동거는 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한 형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 탕자
탕자의 그림을 보면 탕자의 왼쪽 발은 신이 벗겨져 있습니다. 발이 완전히 나와 있습니다. 정말로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발로서, 그의 비참했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른발은 신을 신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왼발만 신을 벗고 있는 것일까요? 우연일까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 그림의 주된 구조가 왼쪽과 오른쪽의 대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동생의 오른발에 신이 신겨져 있는 어색함은 다름 아닌 그의 오른편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작은 칼과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탕자는 왜 칼 차고 있을까요? 죽일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오랜 세월 험한 야생 생활 탓에 호신용일까요?
여러분! 이 칼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참한 환경 속에서, 집에서 가지고 나간 그 모든 것을 다 팔아먹었지만, 이 작은 칼만큼은 팔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남은 자신의 표지!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식이었던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기 신분을 표시하는 칼 하나만큼은 끝끝내 팔아먹지 않음으로써, 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식을 그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의 오른쪽 발의 신과 더불어 칼은 내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둘째 아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듯, 아버지는 크게 환대하였습니다.
눅 15:24 /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탕자의 귀향>에서 대다수 감상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무릎 꿇은 아들에게 투사합니다. 또한 자신이 큰아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그림은 감상자를 아버지의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입니다.
우리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웃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펼쳐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초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되기까지 우리의 영적 귀향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연약할지라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붙들고 승리하는 주님의 자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작가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해설 - 우리 모두가 탕자이며 돌아갈 집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인정과 칭찬을 받기위해 삶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의 모습 그것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진" 탕자이다. 세상의 헛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늘 아버지가 주신 것들로 허랑방탕하는 '영적인 가출자'이다.
그림 속 탕자가 비루한 순간에도 끝내 팔아치우지 않았던 '칼'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도 허리춤에 달린 '칼'을 움켜쥐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형의 해설 - 큰아들은 망나니 같은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못내 못마땅했다. 그는 늘 아버지 집에서 가사를 돌보아 왔으나 아버지와의 마음의 간격은 크고 깊었다. 동생의 귀향을 보고도 분노와 시기와 원망으로 가득했던 그 역시 '탈선한' 존재였다. 큰아들의 탈선은 동생의 경우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고 본질적이다.
큰아들은 집에 있으면서 집을 나간 자였다. 그가 귀향하기 위해서는 더 멀고 어려운 길을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 어둠이 깃들어 있다. 그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성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미 믿는다는 사람에게 믿음의 길이 더 멀리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큰아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아버지 해설 - 집을 나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말리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아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버지, 눈물로 나날을 견디며 고통에 찬 삶을 사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사죄할 틈도 주지 않고 용서하고 말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한 나머지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이 아버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탕자들을 아무 말없이 껴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름 아니다.
이 그림을 통하여 나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있는 탕자와 같으며,
나의 삶은 탕자의 형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은 아버지의 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두 손을 펼쳐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영적인 귀향을 계속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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