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보혜사
요 14:16-26
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사당중앙교회 성도님들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시간의 흐름이 너무도 빨라서 이제는 2022년도 절반이 남았습니다. 1년의 반을 지나고 맞이하는 6월은 지나온 상반기를 돌아보며 남은 하반기를 재정비하는 달이기도 하지요. 생각해보니 제가 전도사로 교회 사역을 시작한 지 2년 반 이 되었더라고요. 그동안에는 맡겨진 업무에 적응하기 바쁜 아마추어였다면 이제는 교회 일을 하기에 앞서 고민과 질문을 할 수 있는 단계로 한걸음 성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최근 들어 제 사역에 관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는데, 바로 '신앙이 인생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게 혹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게 된 것은 현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수는 급감하고 더 나아가 종교 자체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서두에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고 말했는데 그 시간의 흐름보다 더 빨리 변화하는 것이 있다면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유행, 트렌드, 기술들이 매순간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변화의 속도에 따라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모든 활동이 온라인에서 무대를 펼치게 되었고, 이 현상은 코로나가 잠잠해진 지금까지도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동안 온라인의 편리함에 깜짝 놀랄 정도로 빠져들게 되었는데요. 일단 씻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 몰골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어요. 왜냐면 어차피 집이니까. 그리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임이나 만남을 억지로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온라인은 사람들의 이러한 요구를 다 충족시키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편한 집 밖을 나와 자기를 절제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와야한다니 이 얼마나 하기 싫은 숙제인가요?
예전에는 습관적으로 교회에만 나오는 성도를 가르켜 선데이 크리스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믿음, 열정 없이 주일에만 교회에 나온다는 모욕적인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주일에 교회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열정 있는 성도입니다. 예전에는 성도를 말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 주일 성수였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독교인에게도 주일 성수가 힘들어진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도 이러할 진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얼마나 더 버겁게 느껴지겠습니까? 개인주의, 편의주의로 가는 시대와 헌신과 봉사를 말하는 교회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눈앞에 두고 처음 제 마음을 덮쳤던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교회 사역이 다음 세대에도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무엇을 제공해야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까? 등등의 해소되지 않는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어떤 기도가 먼저 나왔을까요? 그저 무작정 교회 부흥이죠. “하나님~~ 사당중앙교회 성도님들이 많이 오실 수 있게 해주세요~~” 이처럼 기도제목이 교회의 부흥이었을 당시에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그날의 출석인원이었습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 사람이 많이 없으면 속상하고, 많으면 기분 좋아했어요. 이러한 제 모습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 것처럼 보이시나요?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기도와 열심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그리고 저처럼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를 앞에 두고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의 말씀입니다.
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오늘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이 그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위로를 마지막 가르침으로 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장 마음 쓰고 계시는 것은 다름 아닌 3년 동안 동거동락한 제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제 곧 벌어질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들의 머리 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현 상황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승리하시고, 자기들과 함께 영광에 자리에 서기 전 잠시 있는 위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동상이몽의 꿈을 꾸는 제자들이 앞으로 겪을 수많은 일들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위로와 가르침의 말씀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움과 염려로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겪을 위기 상황들을 미리 해결해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헬라어 원어로 ‘옆에’라는 뜻의 ‘파라’와 ‘부름 받은 사람’이란 뜻의‘클레토스’가 합해진 이 단어는 직역을 하면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헬라사회에서는 이 ‘파라클레토스’는 보통 ‘변호사’를 가리키는 법률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파라클레토스’, 곧 ‘보혜사’라는 단어를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에 빗대어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이야기하신 걸까요? 또 다른 보혜사라면 첫 번째 보혜사는 누구신가요?
첫 번째 보혜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사실을 알게 하신 사랑의 전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에게 빵을, 마음이 상한 자에게 소망을, 병에 걸린 자에게 치유를,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주셨고, 아무에게도 변호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편이 되사 그들에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모든 십자가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사 몸소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별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영원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행하셨듯이 성령께서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 말을 듣긴 들었으나 체험하지는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게 되었고, 또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문을 듣고도 사람들이 무서워서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고향으로 돌아가 원래의 생활을 한 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뜨겁게 기도함으로 그들의 안에 계신 성령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성령님은 마음에 모든 두려움을 내어쫒고 새로운 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내어쫒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 자녀, 모태신앙, 전도사는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생활을 한만큼, 감정이나 생각을 제어하는 것에는 이제 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만만함이 다 깨진 날이 있는데, 어느 날 언젠가 부모님이 일이 생겨서 두 분 다 집을 비우시고, 친오빠와 둘이 집을 지켜야하는 날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오빠와 저 둘 다 집 밖을 안 나가는 집돌이, 집순이이기 때문에 외박은 물론 늦게 귀가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밤 10시를 넘어 11시가 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거에요. 부모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오빠마저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카톡을 남겼어요. "어디야...?" 그런데 1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10분 후에 카톡을 또 남깁니다. "왜 안 와?" 안 봐요. 그때부터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머릿 속에는 한 3가지 시나리오가 짜지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났나? 퍽치기를 당했나? 혹시 길을 잃었나? 부재중 2통을 남겼더니 문자가 한통 왔습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다음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문자를 받고 전화를 미친 듯이 하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문자가 너무 정중한거에요! 우리 오빠가 이렇게 착하게 나한테 문자를 할 리가 없다. 아마 다른 사람이 오빠를 때리고 핸드폰을 훔쳐서 알리바이를 만드려고 나에게 오빠인 척 연락을 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설 한 편이 머릿 속에 척척 짜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한 전화를 5번하니 문자가 또 오더라구요. "수업중이야 이 새꺄." 제 평생 욕을 먹고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은 다 아실 거에요. 처음 제가 받았던 정중한 문자는 전화를 거절할 때 보낼 수 있는 자동메세지였습니다. 그런데 불안한 마음인 상태로 그 문자를 받으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멀쩡히 수업을 열심히 듣는 오빠를 퍽치기 당해 쓰러진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신앙은 미쳐 날뛰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중단하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진정시키는 힘을 가지신 능력의 성령님은 밖에 혹은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수많은 어려움이 예견된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관계의 문제로 인해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 인생 가운데 성령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청소하길 원하십니다. 바람같은 형상으로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먼지 찌꺼기를 후 불어버리시고, 새로운 열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뜨겁게 타오르게 하십니다.
예전에는 안 될 상황만 보고 먼저 겁에 질려서 비통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저에게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이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때로는 내 삶의 문제가 너무 커서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고, 내 문제는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이 될 때 내 안의 성령님을 다시 발견하길 원합니다.
과거 사람의 머릿 수를 체크하던 제 눈에 이제는 인원이 아니라 성도님이 보이십니다. 교회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앙적 고민과 삶의 문제가 있었을지 생각되니 한 분 한 분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앞두고 가장 먼저 제자들을 살피시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성령님도 그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 마음의 소원과 기도의 제목에 귀 기울이십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 속에 안으로부터 충만하게 차오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리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언제나 우리 안에 약동하기를 소망합니다.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하나님,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지금도 내 안에서 나를 지키시는 성령님과 함께 하셔서 선데이 주일뿐만 아니라 투데이 오늘 매순간 기적을 체험하시는 사당중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보혜사 성령을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우리를 짓누르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를 제하여 주시고, 내 소망을 주님께 두어 기적을 맛보게 하소서. 믿음으로 무장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동행하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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