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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무덤 속에 있는 나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43-44, 2024. 11. 24. 주일 설교

by tat tvam asi 202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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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에 있는 나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43-44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며 대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시는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이 있음도 보여주십니다. 

또한 죄의 수렁에 깊이 빠져드는 사람에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며,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나사로의 사건은 무엇을 드러내시기 위함이겠습니까?

 

부활의 권능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여동생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개인적으로 굉장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을 어느 때나 찾아가도 평안히 쉴 수 있는 안식처로 생각하실 만큼, 그들 삼남매에게 각별한 정을 느끼며 가까이 지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사로의 가정에 짙은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여동생이 하늘처럼 믿고 있었던 오빠 나사로가 병석에 들어 눕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그 병은 점점 위독하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설만큼 숨가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11:3 /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주님,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지금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전갈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미지근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이틀 동안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셨습니다.

 

요 11:6 /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시간과 마리아 · 마르다가 원하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 시간에 주님께서 오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도 바로 지금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원하는 시간'입니다. 

 

시간에는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항상 '나의 시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나의 시간에 맞춰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하시길 주문합니다.

 

다행히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일치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요하지만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은, 우리의 것과 다르고 차이가 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이때 우리는 혼돈에 빠집니다지금 기도 응답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이를 가리켜 기다림의 영적인 원리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림의 영적인 원리란 무엇일까요?

 

기다림을 통해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치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려고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참된 구원, 사랑, 기쁨 등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두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요!

 

요 11:4 /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에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이 단지 실력 있는 안과 의사처럼 눈을 고쳐주시는 능력이 드러날 때가 아니라, 어둠 가운데 있었던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라고 말씀하신 것도,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에 영원한 생명이 되심을 온 천하에 선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 지 4일 째가 되었습니다.

 

 11:17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3일은 당시 유대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지났으니, '혹시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도 접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공식적인 장례 애도 기간은 7일이었고,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에는 나사로 죽음으로 인한 장례절차가 절정에 다다랐던 때입니다.

 

예수님의 도착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갑니다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주님이 곁에 계시지 않았음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합니다.

 11:21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씀에는, 마르다가 예수님이 며칠만 더 일찍 오셨다면 오라비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예수님이 늦게 오셨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만일 여러분 중에 과거를 지향하는 과거지향적인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현재에 누릴 기쁨과 감사를 다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요... 즉 마르다가 자꾸 과거를 돌이키며 후회를 하거나 원망을 하는 동안에는 '오늘'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오시지 않는 예수님이 야속했고, 그렇다고 늦게라도 찾아온 예수님을 향해 투정만을 부릴 수도 없었기에, 믿음과 상실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을 보며,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믿음과 불신, 혹은 야속함 가운데에서 갈등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메시아요 구원자 이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녹록치 않은 현실의 어려움과 무거움에 푸념을 늘어놓기만 하지는 않는지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다가도, 무언가 더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는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차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마르다의 신앙을 깨뜨리십니다.

 

 11:25-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는 현재형으로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묶여 살면, 오늘 바로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과거의 순간들이 떠오를 때마다 과감히 떠나보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현재를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 믿음대로 되리라!"

 

"최후 승리와 영광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네가 믿느냐?"

 

땅의 것에 일희일비하는 믿음의 상태였다면, 영생을 바라보고 부활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진일보하라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격려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한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실의와 슬픔에 빠져 있던 마리아에게, 마르다는 예수님이 이곳에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줍니다.

 11:28-29 /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슬픔에 빠진 마리아가 찾아간 곳은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도 삶의 문제로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위로로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손길만이 우리 마음속의 아픔과 슬픔의 근원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파도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입니다.

 

 11:38 /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비통히 여긴다'는 말은 마음이 무척이나 아픈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마음 아파하셨을까요? 먼저는 슬퍼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안타깝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야, 나는 생명이야."라고 예수님이 이미 주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하여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아직 죽지 않고 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3가지 명령을 통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도록 합시다!

 

첫째 명령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옮겨 놓아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무덤은 자연 동굴 혹은 바위를 파낸 무덤이었습니다. 무덤 안에 선반이 있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크고 둥근 바위로 문을 막아놓았습니다. 돌로 막아 놓았다는 것은, 장례가 모두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는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요 11:43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나사로의 얼굴에 감겨 있는 수건을 벗겨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요 11:44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조금 후에 수의를 걸친 나사로가 뚜벅뚜벅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수의를 풀어 주어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자유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서두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나사로의 부활이 서로 맞바꿔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 그리고 세상 한가운데서 흔들리는 나를 살리고자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르다와 같이 과거에 연연하는 삶이 아니라, 현재를 감사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같이 모든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주님이 내 안에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때로는 우리의 삶을 가로 막는 돌덩어리가 있다 할지라도 항상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내면의 돌덩어리를 굴려 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때 우리 마음속에 있던 모든 두려움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영으로 오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다시 오신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항상 내면에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입니다. 또한 내가 나 자신 속의 성령님을 보는 것 같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큰 특권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한,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먼저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일을 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곧바로 연결된다면 하나로 집중되어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일이 조화롭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조화롭게 하려면 인간 본래의 실재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맞추어 재조정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주고 있는 가르침 중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을 것입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는 내가 하는 일을 너도 할 것이고, 그보다 큰일도 할 수 있다.”(요 14:12)

 

예수님의 이 어마어마한 가르침 속에 날마다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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