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저주의 갈림길
갈 3:7-14
오늘 본문의 주제는 복과 저주입니다.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먼저 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갈 3:7 /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 혈통에서 오는 자부심과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라는 특권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과 혈통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새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무엇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까? 혈통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는 국적이나 출신이나 신분이나 성별이나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입장을 좀 바꾸어서 생각하면 아프리카 사람을 ‘이제부터 이 사람은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다!’라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공유하기 위해서 김치도 먹고, 양반다리도 하고, 한국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쉽지 않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 3:8 /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창세기에 있는 말씀을 추가로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증거합니다.
유대인이 되어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오직 믿음 나아가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복을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획하셨습니다. 차별 없이 오직 믿음으로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갈 3:9 /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복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가 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와 반대로 복과 대조되는 저주는 어떠합니까?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다음으로 저주로 가는 길입니다.
갈 3:10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해서 모든 일을 항상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모든"과 "항상"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명령에 대해서 항상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서 600가지가 넘는 항목을 가지고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 모든 명령을 체크하면서 언제나 지키도록 잔소리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지키지 못할 때가 있으면 그 때마다 바로바로 처벌을 한다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겁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갈 3:11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를 붙들고 율법에 속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교만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준에 이르겠다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 3:12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과 믿음은 다른 길입니다. 믿음은 복으로 가는 길이지만 율법은 저주로 가는 길입니다. 모든 일을 항상 해야 하는 율법 아래에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갈 3: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게 된 것,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율법의 저주에게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직접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갈 3:14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믿음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믿음으로 우리가 성령의 약속을 받아 소망 가운데 살도록 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그 저주가 '나를 위한 거'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동안 잘못된 길, 저주의 길을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돌이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갈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죄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피 값으로 해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자유를 주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율법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저주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렇게 합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격하여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이제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그 은혜로 힘을 얻어서 끝까지 믿음으로 이 복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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