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행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목적에 따라 우리 삶의 자세와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옛날 섬기던 교회에 집 안방에 현찰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잘 사는 분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파출소에서 잘 사는 집을 순찰하여 주었는데, 이 집은 늘 파출소에서 순찰을 돌아주는 집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담벼락은 3m 이상 되었고, 뾰족한 쇠창살이 빽빽하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문마다 경보 장치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열쇠로 모든 문마다 걸어 잠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감옥도 이런 감옥이 없을 정도였지요.
이 분은 돈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여 많은 돈을 모았는데, 문제는 오히려 돈이 이 분의 삶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도, 이 분에게는 오히려 그 돈이 자신의 삶을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분에게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자녀들이든, 친척들이든,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든,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재산을 언제든 가져갈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누구와도, 가족과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언제 사람이 행복할까요?
바깥 어디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뜬구름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행복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 상태이지요. 실제로 살아야 하는 무엇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로 행복을 움켜잡지 못합니다. 눈길을 밖으로만 돌리는 데서 오는 결과가 정신 불안입니다. 정신 불안 자체가 행복은 바깥에서 움켜잡을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합니다. 짐시 있다가 사라지는 권력이나 재물은 사람의 마음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 에너지를 이리저리 흐트러뜨릴수록 그만큼 특별한 어떤 일에 쏟을 힘이 줄어듭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이런 적이 있지 않나요?
우리의 잠재의식 깊은 바다로부터 매사에 신경을 공두세워 걱정하는 낙지발 버릇이 올라와서는 주변의 온갖 것들을 다 걱정거리로 잡아채서 우리의 내면의 평화를 박살내버린 경우 말입니다.
참 행복은 결코 우리의 영(靈, spirit), 우리의 참된 자아(Self) 바깥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진흙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마침내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생명력, 하나님의 가치관과 마음이 삶을 다스릴 때,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만일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없다면, 그 사람은 단지 진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영이 있어, 하나님의 가치관이 자신의 가치관이 될 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참 인간으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 신성한 기쁨, 시적 상상, 친절, 지혜, 평화 그리고 행복은 처음에 머리나 가슴으로 '내면'에서 느껴집니다. 그런 다음 신경계를 통해 거죽의 몸으로 전달됩니다. 내적 삶에서 오는 진정한 기쁨을 이해하고 느끼십시오! 그것을 바깥세상의 덧없는 즐거움보다 더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선택할 수 있는 두 길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복있는 사람의 길과 악인의 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으로 되어 있고, 그중에서 1편은 시편 전체를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150편은 시편을 닫는 자물쇠와도 같습니다.
시편 1편이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이 되는데, 시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복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아시고, 그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편 150편에는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 뜻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시편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행하지 않는 것,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 시 1:1 / 복 있는 사람은 ①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②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③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첫째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은 질이 낮은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탐욕이 흘러나와 다른 사람의 이익과 권리를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머무르실 공간이 없습니다.
둘째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은 인생의 목적과 종착점을 바르지 않게 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죄인들의 종착점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인생 전체가 굽을 수밖에 없습니다. 줄을 바르게 긋기 위해서는 멀리 움직이지 않는 지점을 보고서 그어야 끝까지 바르게 그을 수 있습니다. 만약 줄을 긋는데 땅을 보고 그으면 줄이 반듯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목표점을 바르게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굽어진 길을 걷게 됩니다.
'오만'이라는 의미는, 태도나 행동 따위가 방자하고 건방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자신 안에 거하고 계심을 인정하지 않기에, 함부로 행동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대하는 태도와 자기 스스로에 대한 태도조차도 어려워하거나 삼가는 것 없이 무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터를 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 있는 사람은 태도가 바르지 않는 사람과는 동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 있는 사람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은, 삶의 방향과 목적이 악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이 행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 시 1:2 / ①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②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첫째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서 즐거워하거나, 내게 익숙한 말씀만 즐거워해서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은 집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특정한 구절이나 내가 좋아하는 말씀에만 집중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성경 66권 전체를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구절을 통해서 내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체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대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성경구절을 통해서까지, 내 가치관이 더욱 성숙해지고 내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둘째로,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묵상하다'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입니다.
내가 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의 삶이 형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묵상할 때 내 에고(ego)의 편협한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참 자아(Self)의 생각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 수 1:8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열쇠는 곧 이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슴에 생각을 품으면, 그것은 이미 우리와 더불어 있습니다.
'생각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의식적' 창조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의지를 통해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인격이든, 새로운 환경이든, 새로운 세계이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력을 이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력은 바로 우리의 생각을 통해 현실 세계 속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생각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많이 주셨습니다.
❚ 잠 4:23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빌 4:6-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고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시 1:3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됩니다. 정확하게는 '시냇가들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시냇가에서 자생한, 스스로 자라난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심어준 나무입니다. 즉 심어준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 있는 사람,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의 삶입니다. 즉 '나'라는 나무를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시냇가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시냇가'가 원문에는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로 되어 있습니다. 중동지방에는 우리나라처럼 비가 많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냇가로 보인 곳이 이내 말라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가 심겨진 곳은 여러 개의 시냇가들이 겹쳐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쪽 시냇가가 마르면, 저쪽 시냇가에서 물이 흐르고, 저쪽이 마르면 또 다른 곳에서 물이 흘러 내려와서 심겨진 나무가 계속해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어주셨기 때문에 그 나무는 "철을 따라(문자적 의미는 '그것의 때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배나무는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나무인지는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열매, 어떤 품질의 열매를 맺느냐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크고 좋은 품질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매일매일 과정이 아름다웠다는 것이요, 좋지 못한 열매를 맺거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이라는 과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들과 다른 악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 시 1:4-5 /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바람에 난다'는 것은 곧 '심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흩날려 다니는 것입니다. 심겨지게 되면 한 곳에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흩날리게 되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얼핏 보면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것과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다 보면 열매가 많이 있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뿌리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 같았는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한 순간에 사라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 시 1:6 /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인정하다'의 의미는 '알다', '보호하다(watch over)'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는지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의 결과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시냇가의 나무가 때를 따라 과실을 맺음 같이 열매 맺는 기적의 축복이 함께 한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항상 들려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해,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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