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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요, 행 3:17-21, 사도행전 시리즈 설교(17)

by tat tvam asi 2024.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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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요

행 3:17-21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이, 생명의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리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도피성을 연상케 합니다.  도피성이란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제도입니다.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 도피성으로 피신하기만 하면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실수로 죄를 지었다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저지른 죄와 고의로 지의 죄를 구분해두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정죄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해 "너희가 예수를 죽인 것은 부지 중에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피성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께로 피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 3:17 /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행위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행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와 악행을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구약으로부터 예언되어 있듯이, 택하신 백성을 모두 불러 모아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는 길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해주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신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행 3:18 /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나 모르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죽이고 어찌 잘 살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행 3:19 /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오늘 베드로 설교에서 어떤 죄든지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른다는 것을 설교합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새 삶을 살기 원한다면 회개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회개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회개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할 때 회개는 원문에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의식의 변환'깨달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표층만이 아니라 심층적인 차원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비교종교학과 성해영교수의 저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를 읽다보면,  표층종교와 심층종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표층종교와 심층종교가 있는데, 사도 바울이 어린아이 신앙과 장성한 자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린아이의 신앙이 표층종교라 하면 장성한 자의 신앙은 심층종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전 13:11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먼저 표층종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문자주의적으로 문자의 표면적 뜻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둘째,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즉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내가 잘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기복적이라는 것이지요.

한편, 심층종교의 특징은 문자를 넘어서 더 깊은 뜻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즉 속내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심층종교는 지금의 나를 벗어나 '참나', '큰나'로 부활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참나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신성(神性)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창 1:27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점에 있어 종교적 발달 과정이 있다면 '작은 나'는 죽고 '더 큰 세계관을 지닌 나'로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달리 말하면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의 차원으로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헌금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헌금을 하는 목적이 복을 받기 위해 혹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기 위한 선행이라 생각하면 문자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헌금의 중요한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마 25:40 /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결국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분별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에 대한 예시를 성경에서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 11-24절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주려 죽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런 탕자인 둘째를 위하여 아버지는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자신도 회개하면 이런 일이 있을까 기대하지만, 돌아온 탕자가 정말 이런 잔치를 원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잔치 자리가 편하겠습니까? 소 잡고 풍유를 울려서 동네 잔치를 벌렸으니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오늘 무슨 날이냐? 회갑 날이냐? 혼인 잔칫날이냐?" 물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잔치에 모여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종일 "저 놈 아버지 재산 다 말아먹은 그 둘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받아주었어."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둘째 아들은 바늘 방석에 앉은 느낌일 것입니다. 우선 회개는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탕자가 잔치를 통하여 철저히 깨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부끄러워도 숨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탕자는 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 뒷방으로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잔치 자리에 앉아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얼굴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 잔치는 탕자의 자아가 죽는 잔치입니다

 

우리 역시 자아가 죽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온전하게 깨닫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습니다. 

먼저, 마음을 내면으로 조절하고 나의 주의력&집중력을 향상시켜서 내적인 음성,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내적인 성령님의 음성에 따라, 자신의 삶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야로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배워서, 말씀이 자신의 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함께 믿음의 길 & 깨달음의 길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며 서로 받은 영감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고 돌이킬 때, 죄사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많은 죄가 나를 자극하며 좌절하게 할지라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 6:2)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새롭게 되는 날이 임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는'이란 말은 회복, 재생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회개할 때, 정말로 새롭게 되는 날이 주님으로 부터 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행 3:20-21 /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러분과 제 안에 영으로 오신 예수님, 다시 오신 예수의 영, 바로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때,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날들은 경이롭고 기적 같은 날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성령께서 내 안에 함께하신다는 깨달음은 목표가 아니라 여정입니다.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함께하신다는인간 의식의 변화를 깨침과 깨달음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깨달음'은 단계적이고, '깨침'은 항아리가 깨어지듯, 팡! 하고 터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등산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산을 조금씩 오르다 보면 확 트인 경관을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깨침의 끝이 있는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열심히 "아하!"를 연발하며 오르다 보면 가끔씩 "와!" 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좀더 극적인 깨침의 순간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은혜일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비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깊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의 믿음과 해석, 행동과 반응, 생각과 감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린 모든 현실 경험은, 우리의 믿음과 해석 등의 결과로 우리의 현실이 창조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내 안에 계신 권능의 성령님과 함께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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