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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의 풍부하고 생생한 문체와 독특한 스타일을 배우고 싶다 -

by tat tvam asi 2024.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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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나탈리 골드버그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여 복잡한 감정과 경험을 정교하게 그려냄으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공감과 연결을 이끌어낸다.

 

저자의 문장은 화가의 브러시처럼 흘러가서, 아름다움과 상상력을 선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글의 흐름과 구성에도 신경을 쓴 흔적, 문장의 길이와 구조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글의 리듬과 조화를 조절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지루함 없이 흥미로운 여정을 안내 받은 느낌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감동과 사유에 잠기게 되어, 나와 글 사이에 특별한 연결이 형성되었다.

 

오늘은 216p. 부터...

 

 책 속으로 ☆

 

216p. 결혼, 히피 체험, 여행, 미네소타와 뉴욕에서의 생활, 교사직, 영적 훈련 등 모든 일을 다 해 보고 나서 자신에게 예정되어진 운명이 글쓰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도망 갈 곳이 없게 된다. 그동안 글쓰기를 회피하려 얼마나 애써왔는지 상관없다. 어느 순간 당신 앞에는 글쓰기만이 버티고 서 있다. 그 이후부터 당신은 하루하루의 기분에 의해 당신의 마음이 좌우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제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당신은 지금 글을 쓰는 방법 또는 글을 쓰게 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든지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기계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만약 글을 쓰기로 결심한 날인데 아이를 치과로 데려 가야 한다면, 치과 대기실에서 글을 쓰면 된다. 아니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꼭 해야 하는 일 밑에, 이 거칠고 가련하고 놀라운 글쓰기 훈련이 닿아 있다는 사실만 명심하라.

 

그리고 글쓰기를 항상 우호적으로 대해야 한다.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적이기보다는 다정한 친구인 것이 훨씬 위로가 되는 법이다. 13세기의 선승인 도겐은 이렇게 말했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침이 심한 인생에서 우리가 글쓰기를 향해 가져야 할 궁극적인 태도와 신념이다.  

 

글쓰기는 숨을 쉬는 것과 똑같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숨쉬기를 잊어버릴 순 없다. 정원을 손질해야 하고, 지하철을 타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소중한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다. ......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믿음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 동안 가야 할 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다시 또 다시 기억할 것이다. 

 

220p. '음식에 대해 써 보라'

 

다이안 디프리마의 시집 <저녁과 악몽Dinners and Nightmares>은 음식에 대한 글쓰기를 음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예다. 이 시집의 절반은 시인이 그동안 먹었던 음식과 직접 준비했던 정찬 모임, 그 정찬에 초대한 손님들의 이름 그리고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을 본 목록으로 채워져 있다. 또 그녀가 뉴욕 시에서 겨울 내내 오레오 쿠키만 먹고 지냈던 기가 막힌 이야기도 있다. 정말 잘 읽히는 글이다. 우리는 모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가장 좋아하는 움식에 대해 써 보라, 뭉뚱그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음식 하나를 골라야 한다. 거기에 살을 붙여 나가자. 어디에서 누구와 같이 먹었는지, 어느 계절에 그 음식을 먹었는지 등의 세부 사항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글은 무엇보다도 생생하며 구체적이다. 

 

음식을 소재로 삼아 당신은 추억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도 있으며, 아주 철학적인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로, 러시아로, 종교적인 장소로, 나무 사이로, 보도 위로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다.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음식에서 글을 시작해 보라. ......

 

이것이 인생이니, 인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의 고립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점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는 자신과 까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글쓰기는 지독하게 외로운 것이다. 누가 이 글을 읽어 줄까?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보일까?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세요? 아니면 독자를 위해 글을 쓰세요?"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이것은 지난 8월 네브라스카 주를 횡단할 때, 초저녁 푸른 자동차 속에서 혼자 앉아 있는 내 기분을 쓴 글이야" 라고 말해 주라.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결으로 이용하라. 

 

226p. '스스로에게 넌덜머리가 났을 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쓰고 있는 작품에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지쳐버리는 시기도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런 때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환경을 바꾸어 보겠다고 카페로 달려가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무언가 다른 방법 - 머리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손톱에 자줏빛 매니큐어를 칠하고, 코걸이를 하고, 남자 옷을 입고 이상한 파마를 해야 하는 때이다. 

 

하나의 작은 자극이 때로는 위축된 창조력을 되살려 줄 때도 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종종 담배를 무는 습관이 있다. 나에게 이 담배는, 그러니까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일종의 버튼이다. ......

 

친구에게 검은 색 가죽 재킷을 빌려 입고 오토바이 폭주족처럼 커피숍 내부를 왔다갔다 하며 글을 써 보라. 새빨간 베레모를 쓰거나, 집에서 신는 실내화에 나이트 가운을 입고, 일터에서 신는 긴 부츠를 신고, 농부들이나 입을 법한 목이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성조기로 몸을 칭칭 감싸거나 아니면 머리에 플라스틱 컬을 감은 채로 돌아다녀 보라. 평상시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이다. 아니면 아주 커다란 도화지에 글을 써 보는 것도 좋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만 된다면 얼마든지 파격적인 변신을해도 좋다. 

 

228p. '자신의 뿌리를 이해하라'

 

만약 당신이 완전한 작품을 쓰고 싶다면, 당신이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근원은 명예롭게 여기고 그것을 껴안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가끔 다른 사람의 인생만이 재미있고 내 인생은 무의미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렇게 자기 중심을 놓쳐버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만 찾기 시작하면 우리는 균형을 잃어 한쪽으로 기울고 만다. 이 말은 오직 자신의 이야기만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 그렇듯 자신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시선을 가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즉 '그들도 부자고 나도 부자다.'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당신이 태어난 출생지는 글의 문체와 구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습작을 할 때 글의 리듬을 주시해 보라. 거기에는 교회의 예배에서나 들을 법한 가락이나 강렬한 로큰롤 리듬 또는 주정부관할 경매장에서 들을 수 있는 특이한 리듬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언어 습관이나 말투도 마찬가지다. 가족의 말투와 독특한 표현을 목록으로 작성해 두면 좋은 글쓰기 자료가 된다.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장 글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성(性)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직접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당신 글 속에는 성에 대한 반감이 분명히 나타나게 된다. 주인공이든 곤충이든 동물이든 당신이 창조해 낸 인물들은 모두 성적 불쾌감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거나 또는 이와는 정반대로 당신은 언제나 창녀를 등장시키거나 포르노 류의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여 더 큰 창조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명심하라.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뿌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뿌리 위에는 가지와 잎사귀와 꽃이 있다. 이것들은 무한한 하늘을 향해 뻗어간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나의 뿌리를 찾고자 이스라엘을 갔을 때 나가 유태인이면서 또한 미국인이며, 페미니스트이고, 작가이며, 불교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생산물이며, 이 사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자 한계다. 우리는 단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뿌리를 파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자신의 뿌리가 묻힌 곳에서 발견되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망'을 선택한다.우리가 자신을 만들어준 최초의 장소를 떠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처음 미네소타로 이사왔을 때, 아주 멋진 시인인 짐 화이트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제발 종교적 색채를 띠는 작가는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지역주의라는 편협한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를 다루는 것은 좋지만 그저 다루는 데서 멈추지 말라. 세상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로 만들라.

 

나를 만들어 준 뿌리를 들여다봄으로써 나는 같은 땅을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고뇌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니 집으로 가라. 당신 가족과 친척들 속으로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인생과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작가들은 독자들로부터 이해 받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니 당신의 글을 읽는 독자에게 당신 심장의 더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주라. 당신은 카톨릭 신자, 남자, 남부 사람, 흑인, 여자, 양성애자 그리고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독자에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당신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 글의 원천은 어디인가? 이것을 이해하고 다시 이것을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켜 줄 때, 당신이 전달한 것은 비단 당신의 뿌리에 대한 편협한 기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근원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238p. '벌거벗은 자만이 진실을 쓸 수 있다'

 

일주일에 하루 2시간씩 8주 동안 만나는 글쓰기 워크솝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우리는 4시간에 이르는 글쓰기 마라톤 시간을 가진다. 다른 사람들과 하루종일 글쓰기 훈련을 가져 보는 것이다. 

 

첫 번째 10분간 모두가 글을 쓴다. 이 10분이 지나면 각자가 썼던 글을 차례대로 읽는다. 글에 대해 비평하는 시간은 없다. 그냥 자신이 쓴 글을 읽은 다음 다른 사람에게 차례를 넘기면 된다. 이 수업의 특징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쓰고, 읽고, 다시 쓰고 읽기 때문에 의식이란 것을 챙길 여지가 없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며, 어떤 비평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유를 얻게 된다. 

 

다른 사람 작품에 평을 하지 않는 이 방식은 글로써 모든 것을 표현하겠다는 건강한 욕구를 만들어준다. 말하고 싶은 에너지를 다음 번 글쓰기에 쏟아 붓는 것이다. 쉬지 않고, 쓰고 읽고 쓰고 읽는 것을 반복하는 이 방법은 내부의 검열관을 잘라 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또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글로 나타내게 만드는 엄청난 자유를 허용해 준다. ......

 

마라톤 수업은 자신을 열어 보는 대단한 경험이다. 이 수업을 한 직후에는 벌거벗은 느낌, 제어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열어 보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자신을 벌거벗기고 해체시키는 기분, 이것도 괜찮으니 받아들이라. 벌거벗은 자만이 어느 것에도 왜곡되지 않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므로.

 

248p. '누구에게나 천재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뭔가 천재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바깥으로 발산시켜야만 한다. 내면에 있는 풍요로움을 외부에 있는 직품으로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 예술가들이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다가서기 힘든, 고요한 평화와 확신감을 얻는 열쇠다. 

 

"작품도 형편 없고 나도 형편 없다"라거나 "작품은 좋은데 나는 나쁘다" 또는 "작품은 나쁘지만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하지 말라. "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은 글을 막는벽을 뚫고 나가 그 글이 바로 나 자신임을 주장할 능력이 있다" 라고 말하라. 이것이 우리가 맨 먼저 떼어 놓아야 할 첫 걸음이다. 이것이 우리가 채워 나가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이고 더불어 우리의 작품도 훌륭할 때, 그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것과 함께 서 있어야 한다. 

 

253p.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는 후배 시인인 앨런 긴즈버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약 그 시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 버려도 좋다." 그 한 줄이 바로 시라는 뜻이다. 시는 생명력의 그릇이다. 한 줄 한 줄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작품을 쓸 때 이런 부분은 간직하고 나머지는 잘라내 버려라. 

 

솔직할 수 있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 이 시에는 좋은 재료가 들어 있는데도 잘 연결되지 않았어" 그렇게 계속 해보는 것이다. 앨런 긴즈버그는 콜롬비아 대학에 있을 때 주임 교수이자 문예 비평가인 마크 반 도렌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왜 선생님은 이제 비평해 주시지 않습니까?" 마크 반 도렌이 대답했다. "작품이 싫은데 무언가 말해줘야 한다는 그런 귀찮은 짓을 내가 왜 하겠나?"

 

글쓰기를 하다보면 안개에 싸여 있는 마음을 뚫고 무언가 선명한 것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글에 에너지가 생겼다고 해서 모두 가치 있는 작품을 써써다고 자신하지는 말라.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취중에 쓴 낙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일요일 아침 깨어나서 보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지 모른다. 

 

자신이 쓴 글에서 어느 부분이 살아 있고 깨어 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글이 계속 타 들어가 환한 빛을 내는 그 지점이 결국 하나의 시와 산문이 된다. 그리고 이 차이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완전히 태워버린 것, 첫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것만이 모든 사람을 깨우고 모든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다. 누군가 정말 뜨거운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듣는 모든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수업을 하면서 많이 보아왔다.

 

자신의 작품을 솔직하게 쳐다보라. 무언가 갈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된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죽은 말에 채찍질하는 짓은 멈추라. 다른 글을쓰라.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다. 

 

나쁜 글은 세상에 이미 너무 많다. 그래서 좋은 글을 단 한 줄만 써도 당신은 유명해질 것이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 

 

256p. '고쳐 쓰기'

 

자기가 쓴 글을 쓰자마자 다시 읽어 보지는 말라.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는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 작품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한 달 정도 걸려 노트 한 권 분량의 글을 썼다면, 이제느 ㄴ마치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읽을 때는 항상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이 사람이 하려는 말은 무엇인가?' 작품을 처음으로 대하듯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읽자. 건너뛰지 말고 한 페이지씩 차례대로 읽어라. 글을 쓰던 당시에는 아둔하게 느껴졌던 것들도 다시 읽을 때는 나름대로의 패턴과 리듬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내가 썼던 습작노트를 다시 읽을 때마다 나는 그 글들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다. 왜냐하면 당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글쓰기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자신의 소박한 인생에 매료되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된다. 평범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작품 전체를 다시 읽어보는 것에는 당신 마음의 움직임과 변화를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당신은 어느 시점에서 앞으로 계속 밀고 나갔어야 했는지, 언제 게으름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는지 한 눈에 알게 된다. 당신이 지루함을 느꼈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또 별 뾰족한 방법이 없는데도 무조건 자신이 쓴 글에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솔직하게 들여다 보라. 

 

때로는 글쓰기 훈련 동안에는 자신의 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그냥 쓸 때도 있다. 나 역시 노트를 읽다가 '내가 언제 이런 멋진 글을 썼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항상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느 날 아주 지쳐서 썼던 글이 한 달 후 다시 읽어보니 너무도 아름다운 시였음을 문득 발견하는 기쁨이란!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한 달 후 당신은 그 시절 당신이 썼던 노트를 읽으며 그 글의 훌륭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 서로를 깨닫게 하나가 되는 시점이다. 이것이 작품이다. 

 

다시 읽는 도중 좋은 글이 보이면 둥그라미 표시를 하라. 때로는 한 페이지 전체가 빛나는 글일 수도 있다. 이런 글은 다음 작품의 도입 부분으로 이용하거나 또는 그 자체를 하나의 시로 삼아도 좋다. 좋은 부분들을 타이핑해 놓으라. 흰 종이에 검운 활자로 만들어 놓으면 그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지 알아보기가 훨씬 쉬워진다. 오점이 있는 곳, 다시 말해 당신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은 부분은 떼어내라. 하지만 단어를 수정하지는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믿는 능력을 심웒화하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만약 글을 쓸 때 당신이 진정으로 글 속에 있었다면, 글로써 나타나게 마련이다. 

 

"난 행복하지 않아." 이런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지 말라. 그것이 그때의 감정이었다면 아무 판단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편집이나 수정을 해야 할 부분이 자연히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음의 태도는 곤란하다.

 

"그래요. 나는 내 안에 있는 창작자를 마음껏 풀어 놓아 주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적절하게, 관습에 맞게,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질서를 부여해야겠어요."

 

당신이 만약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함정을 파겠다는 것과 똑같다. 고급 순모 정장을 차려 입은 문학박사 출신의 비평가들을 스스로 불러 모아 모든 것 트집 잡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짓은 하지 말라. 순모 정장을 입고 있는 그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물을 근사하게 조정해 보려는 허영심의 추악한 변형일 뿐이다. 그 허영심 때문에 당신의 글이 조작되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작품을 다시돌아볼 때는,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즉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미련 없이 적을 잘라 내는 사무라이처럼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을 때는 기꺼이 감상을 버려야 한다. 깨끗하게 본질을 꿰뚫는 마음으로 자신의 글을 쳐다 보라. 하지만 글에 간섭하고 싶고 좀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에고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면 된다. 작품을 타이핑하고, 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에 침을 묻히는 일을 시키면 된다. 단지 작품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라.

 

원고 수정 작업은 '새롭게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쓴 글에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먼저 전체 그림을 다신 본 다음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부 묘사를 첨가하면 된다. 이때도 10분, 20분 식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수정에 들어간다. 원래 작품에서 나온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다시 써 보자.

 

예를 들어, 파스트라미(소의 홍두께살을 훈제한 햄의 일종)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하자. 맨 처음 글쓰기는 좋았지만, 같은 주제에 대해 할 말이 더 남았을 수도 있다. 하루고 이틀이고 일주일이고, 파스트라미에 대한 글을 몇 개 더 써보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지금껏 쓴 글들을 모두 읽어보고 좋은 부분들만을 골라 조합시켜 보라. 자신이 쓴 글 중에서 강하게 끌리는 내용만을 잘라서 이어 붙이는 것이다.

 

고쳐 쓰기를 할 때에도 처음 글을 쓸 때처럼 제한된 시간 안에서 훈련하는 규칙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방법이 전에 썼던 작품과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 속에 빠져서 첫 생각이 윙윙거리는 모기데에게 피를 빨아 먹히기 전에 재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 첫 생각과의 재접촉은 고쳐 쓰기를 위한 훨씬 효율적인 방법임과 동시에 에고의 참견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고쳐 쓰기 방법은 단편, 에세이, 장편의 어느 부분에든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자신이 쓴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은 표시를 해두라. 이것들을 글감 목록에 적어 놓으면 다음 번 다시 글을 쓸 때 그 중 하나를 잡아서 새롭게 시도해 볼 수 있다. 또 표시를 해둔 글은 그 문장에 대한 기억을 강화해 훗날 필요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문장이 떠오르도록 만든다.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던 별 개의 부분들이 뭉쳐져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놀라운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 

 

263p.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스즈키 선사는 샌프란시스코 선원의 설립자이자 <선심초심>을 쓴 작가다. 훌륭한 선승이었던 그는 197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흔히 유명한 승려들이 위대한 공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는 무언가 아주 근사하고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말, 예컨대 "오, 빛이!"나 "항상 깨어 있으라" 또는 "인생은 영원하다" 등의 명언을 남기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스즈키 선사가 열반하기 바로 직전, 오랜 도반이었던 카타기리 선사가 그를 방문해서 들은 말은 그와 달랐다. 스즈키 선사는 침상 옆에 서 있는 카타기리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죽고 싶지 않네."

 

간단하면서도 이처럼 진한 진실이 어디 있는가. 그는 그 순간의 느낌을아주 쉬운 말로 고백한 것이다. 카타기리는 그에게 절을 했다.

"스승님이 보여주신 위대한 노력이 고마울 뿐입니다."

 

카타기리는 위대한 작품 앞에 서게 되면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한다. 미술가가 명화를 보면 자신도 명화를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는다. 예술가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영적인 사람은 평화를 발산한다. 하지만 카타기리는 이 영적인 사람들이 평화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삶의 노력과 그 순간을 움직이는 우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예술가들이 생명력 있는 작품을 얻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요한 평화와 접촉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작품에 매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우리는 평화이 장소에서부터 나온 것으로 불타는 생명력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야기 중간에 흥분해서 날뛰다가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거나 영원히 책상을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즈키 선사가 죽음을 앞두고 내뱉은 "난 죽고 싶지 않네"라는 말 속에 씁쓸하지만 명료한 진실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분노가 자기 연민, 자기 비난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진실을 수용해야 한다.

 

만약 글쓰기를 통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계속 작가로 지켜 주는 골인 지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뉴욕이나 뉴저지의 책상 앞에 있지 않고 티베트의 고원에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인생이 눈앞에서 으르렁대고 죽음이 바로 등 뒤에서 쫓아오더라도, 그저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쓰기 위해 언제라도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읽었다. 이제 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를 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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