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사랑으로, 몬 1:14-16, 빌레몬 시리즈 설교(3)

by tat tvam asi 2024. 6. 27.
반응형

 

사랑으로

 1:14-16

 

빌레몬은 바울 사도의 편지를 직접 들고 온 오네시모를 본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자기의 많은 돈을 훔쳐 도망친 종 오네시모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편지를 읽기 전, 그리고 읽고 난 후, 오네시모에 대한 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리고 바울이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왜 빌레몬에게 돌려 보냈을까요?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푸는 빌레몬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빌레몬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믿었기에, 그에게 오네시모를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1:14 /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빌레몬이 그의 돈을 가지고 도망친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의 선한 일이 자의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참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용서 그리고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강요로 인하여, 마지 못해,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준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빌레몬은 억지로 오네시모를 용서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를 품어 줄 것을 믿었기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그의 편지와 함께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서신을 보내어 감옥 생활 중에서 낳은 영적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종이었지만, 이제는 바울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동역자였습니다. 옆에 두고 싶은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1:15-16 /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난 후,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법과 제도 아래에서, 그는 분명히 빌레몬의 소유였습니다.

오네시모를 돌려보내 주인의 허락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네시모의 입장에서는 빌레몬에게 돌아가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주한 노예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도(正道)를 택했고 오네시모도 그를 따라 위험과 어색함을 무릅쓰고, 옛 주인에게 돌아가 정식으로 용서와 승인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빌레몬의 용서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발적인 선을 호소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강요가 아니라 빌레몬의 자발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일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오네시모는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마도 죄에 대한 벌을 호되게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행함이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억지로 용서하고, 그를 받아준다고 한다면, 그를 사랑하는 형제로 둘 수 없을 것입니다.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바울의 간구 때문에,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준다고 한다면, 곁에 있어도, 어색하고, 불편할 뿐일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도 잃고, 바울도 그리고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의 사랑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강요가 아닌 자의로,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의 빌레몬의 모든 행함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온 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말처럼 오네시모를 영원히 얻는 것이 됩니다.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잠시 동안 너를 떠난 것은, 아마 너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악이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8:28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과거에 매여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향하여 달려 나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너는 나의 동역자

 1:17-19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병들어 몸이 허약해지기도 하고, 진로가 막히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사업이 부도나기도 하고, 돈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아서 하고 싶은 일들을 중도에서 포기해야 하기도 하고, 갑작스런 천재지변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이와 비슷한 고난들이 다 있습니다.

고난은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이긴 뒤에는 큰 성장이 기다립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고난의 배경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잘 극복한 사람들은 그 고난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고난이 축복의 통로였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 인생의 밑바닥과 같은 고난의 현장에서 만났지만, 감옥을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고 동역자를 만난 하나님의 은혜의 터전이었다고 말하는 위대한 동역자 바울과 오네시모를 볼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나는 너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나 바울에게 하듯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동역자입니다. 그 동역자의 관계를 오네시모에게도 적용해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형제로 받아주고, 또한 동역자로 받아주기를 그를 받아 줄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란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절친한 동무를 말합니다.

동역자란 힘들고 지칠 때 같이 있고 싶은 사람입니다. 기대고 싶은 사람, 기대올 때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동역자입니다. 예전에는 종이었기 때문에 동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종이 아니라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동일한 꿈을 꾸어가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빌레몬서 1:24절을 보면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곁에는 그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단지 시종드는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요,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꿈꾸는 동역자 관계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빌레몬과 바울은 동역자였습니다. 몸은 멀리 떠나 있지만 빌레몬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보고 싶구나. 빌레몬. 나의 사랑, 나의 동무, 나의 형제, 나의 동역자”

 

바울은 빌레몬을 생각만 해도 기뻤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7)고 말했습니다.

 

바울과 오네시모도 동역자였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만났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고난의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인생 밑바닥에서도 여전히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의 이름을 붙들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동역자가 있었기에 고난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며, 주님이 주신 꿈들을 함께 이루어가자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오네시모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동일하게 동역자로서 오네시모를 영접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영접”이란 극진히 맞아 대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무익한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유익한”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값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빌레몬은 바울에게 유익한 존재였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도망 왔던 오네시모를 믿어주었습니다.

“저놈 왜 저러지? 전에는 자기의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더니 나에게 어떤 손해를 끼칠 것인가”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울은 오네시모를 끝까지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유익한 것처럼, 바울은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가 유익할 것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내 심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믿음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요, 동역자”로 영접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허물과 약점을 덮어주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끝까지 믿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1:18-19 /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불의한 일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손해를 갚아야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손해에 대하여,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동역자인 오네시모를 위해서, 그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친 모든 것들을 바울 자신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돈이 넉넉해서,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성도들의 헌금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돈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 한 사람의 영혼을 바로 세울 수 있다면, 기꺼이 자기의 재산이라도, 헌신하겠다는 열정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복음을 위하여 그들 받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있습니까

복음을 위하여 영접하라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