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호 8: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분노하게 하셨을까요?
호 8:1 /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을 덮친다는 것은,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을 덮치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여호와의 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여호와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집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서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되고 죄를 덮고 자신들을 용서하는 긍휼과 자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함으로써 긍휼과 자비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과 자비가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스스로 ‘우리는 여호와의 집이다’라고 아무리 우긴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을 망할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방인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으로 일컫는 이스라엘을 덮치게 함으로써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듯 교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는 교회이고 주님만 사랑한다고 소리쳐도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은 교회가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모이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우리는 교회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는 어떤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교회의 교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소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 후반에 보면,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하였음이라’ 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신 것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관계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문제였습니다.
호 8:1b /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맺은 인격적 약속을 깨뜨린 삶의 모습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하나님과의 부조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나니까 자신과의 조화도 깨어지게 되고 결국은 이웃과의 조화로운 삶도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환경문제는 바로 파괴자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되돌아온 하나님의 심판이요 자연의 항거인 셈입니다.
축복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저주하는 자가 되어 버렸고, 예배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어버렸으며, 감사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오히려 불평하며 육신의 정욕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부조화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삶으로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호 8:2-3 /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자, 이스라엘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우리가 주를 안다고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 삼아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런 고통이 있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호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선(善)’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은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받았으니 형제를 사랑하며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긍휼과 자비가 식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을 위한 신,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가 관심으로 다가올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싫어서 버려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하여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호 8:4-5 /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그들은 은과 금으로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고 자부심을 가졌지만 실상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국가적인 일이나 가정적인 일을 할 때,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존재는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호 6:6-7 /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그 우상들은 공장에서 만든 신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우상이 그들의 신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선지자 호세아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손으로 만든 물건들 앞에 스스로 엎드려 절하는 신세로 전락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절을 합니까?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마음의 소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말씀으로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남들보다 농사도 더 잘 지어야 되겠고, 인생도 남보다 더 멋지게 즐겨야겠기에 욕심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도록 이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우선 그들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 문제가 그것이었군요"...라고 인정하는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문제를 문제로 알지 못하니까 우상을 찾아가고, 바벨론에게 가고, 앗수르에게 가는 것 아니겠어요? 문제를 알고 나서 ‘이게 제 문제였습니다. 인정합니다’ 라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튕겨나가면 안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팔을 통해 잠자는 영혼들을 깨워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팔수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야할 네가 지금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와 애굽으로 가 있고, 우상한테 가서 엉뚱한 곳에 있지 말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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